메가트렌드 차이나
존 나이스비트, 도리스 나이스비트 지음 | 비즈니스북스
메가트렌드 차이나
존 나이스비트, 도리스 나이스비트 지음
비즈니스북스 / 2010년 4월 / 391쪽 / 18,800원
1. 정신의 해방1946~1976년 사이 중국에서 추진된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전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를 암울한 거대 집단으로 만들었다. 국민은 굶주리고 고립된 동시에 세뇌를 당했고, 모든 일이 국가구조 밖에서 불법으로 이루어졌다. 교육과 지식이 비난받았고, 대학은 폐쇄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작은 거인 덩샤오핑이 중국을 이끌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1978년 덩샤오핑은 국민들에게 사고방식에 혁명을 일으킬 것을 요구했다. "우리의 영혼을 구속하는 족쇄를 벗어 던지자." 그는 개인이 공헌할 여지가 없는 하향식 중앙집권화 사회는 시장경제를 꽃피우기에 적합한 토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탈집중화를 특징으로 하는 성공적인 경제개혁을 이루려면 정신의 해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발에 묻은 진흙을 보려면 밭에서 나와야 한다." 덩샤오핑의 이 선언은 이데올로기로 덧칠된 안경을 벗고 중국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는 말이다. 정신의 해방과 실사구시(사실에 입각해 진실을 찾는 것)는 중국인에게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이런 요구에 발맞추어 중국 정치 지도부의 균형감 있는 행동이 뒤따랐다. 지도부가 팽팽하게 당겨 온 세뇌의 끈을 느슨하게 풀고 국민을 신뢰하기 시작하자 엄청난 에너지가 발산되었다.
1977년 덩샤오핑이 교육 전도사를 자처하며 고등교육 기관의 문을 다시 열자 많은 중국 젊은이들은 각자의 재능을 최대한 살릴 기회를 얻었다. 지식에 대한 갈구가 중국 전역을 휩쓸었고 사회적·문화적 격차가 좁혀져 갔다. 하지만 정신의 해방에도 불구하고 중국인의 자아 개념은 여전히 서구인의 것과 다르다. 중국인은 자신을 개인보다는 집단의 일부로 생각한다. 또한 많은 이들에게 훌륭한 성과를 보장해 주는 강력하고 신중한 지도자를 원한다.
1992년 중국은 과학과 기술 분야를 빨리 발달시키지 않고서는 더 이상의 발전을 이룩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장쩌민 주석에게 과학기술 발달 전략을 제안한 이는 주룽지 총리와 쑹젠 박사였다. 쑹젠 박사는 미국 실리콘 밸리를 모델로 국가 차원의 첨단 기술 공업단지를 조성하자고 제안했다. 반면 주룽지는 국유기업에 활력을 불어넣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러자 쑹젠이 이렇게 응수했다. "연공서열에 근거한 국유기업의 위계질서에서 젊은 사람이 어떻게 독창적으로 일을 추진할 기회를 잡고, 관례적인 방식과 규범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장쩌민은 두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쑹젠 동지의 제안에 찬성합니다." 이 일화는 중국 정부에서 목격된 해방된 사고의 사례이자, 장쩌민의 상황지향적인 리더십의 한 예이다. 장쩌민은 공산주의 경제 신조에 위배된다고 여겨진 개념인 민영화를 중국에 도입한 장본인이다. 장쩌민은 결정을 내릴 때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개인의 자아보다는 목표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장쩌민이 소유한 리더십의 특징이자 중국 사회의 여러 계층과 역할에서 목격되는 중국만의 특징이다.
중국은 인권과 사법적, 환경적 책임, 언론의 자유 등 몇 가지 분야에서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중국은 중국만의 새로운 사회와 경제체제를 형성해 가고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비롯된 사상으로 행군을 시작했지만, 그렇게 빌려 온 신조를 신속하게 자국의 아이디어와 필요에 접목시켰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설정한 경제적 목표에 도달하는 유용한 도구로서 자본주의의 일부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치적 근본은 여전히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중국은 어찌 보면 두 인종이 섞인 혼혈처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양쪽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힘을 다 사용해서 독립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2. 하향식 지도와 상향식 참여의 균형
새로운 중국 사회를 지탱해 주는 중요하고 섬세하며 필수 불가결한 힘은 하향식과 상향식 세력의 균형이다. 이 균형의 유지가 중국의 독특한 정치 이념을 이해하는 통로이자, 중국의 존속 가능성을 결정하는 열쇠이다. 중국식 사고에서 자유는 사회질서와 조화라는 두 가지 요건을 바탕으로 한다. 사회질서와 조화는, 질서만이 진정한 자유를 줄 수 있다고 했던 공자의 가르침의 중심 개념이다.
중국식 사고방식에서 질서는 사람을 억압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이 움직일 수 있는 여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자유라는 것을 개인이 누리는 선택의 자유로 이해하는 서구의 개념은, 각 사회의 사회적, 법률적 상황을 제한하고 결국은 누가 옳고 그른지에 집착하게 만든다. 많은 서구인들은 경쟁과 부조화가 비약적인 발전과 혁신을 가져온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갈등과 부조화는 중국인의 정신과는 맞지 않는다.
서구가 생각하는 민주사회는 개인이 동등한 투표권을 행사하며 주기적으로 지도자를 선출하는 수평적 구조이다. 반면 중국은 민주주의를 수직적으로 해석한다. 중국에서는 개인적 책임보다 개인을 둘러싼 사람들과 맺는 관계가 더 중요하다. 중국 정치를 움직이는 요소는 경쟁 정당이나 정치가가 아니라 하향식과 상향식 과정의 조화이다. 탈집중화가 고도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중국 지도부는 상향식 아이디어와 주도권, 요구를 통합하는 전체로서의 폭 넓은 사회개념을 수립했다. 지도부가 설정한 포괄적인 공동 목표라는 맥락 속에서 하향식 주도권과 상향식 주도권이 확립되고, 각각의 주도권은 환경과 조건에 맞춰 유연하게 현실에 적용된다. 중국은 이런 구조 속에서 자국의 역사와 사고에 적합한 민주주의 모델을 형성하는 초기 단계를 밟고 있다.
2001년 장쩌민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대화를 명분으로 12억 인구를 결집시키는 강력한 지도력이 없었다면 중국이라는 국가는 허술한 모래 더미처럼 낱낱이 흩어졌을 것이다." 또한 그는 중국 국민에게 국가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나라마다 고유의 체제가 있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은 문화나 역사적 전통, 교육과 경제 발달 수준이 서로 다르다." 그는 중국이 일당 체제를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했다. "어째서 반대당이 필요한가? 미국은 미국인의 가치와 정치체제를 전 세계에 똑같이 적용하려 한다. 그것은 현명하지 못한 태도이다."
뒤돌아보면 중국처럼 광대한 국가를 가난에서 끌어올려 현대화로 인도하는 데는 수직적 민주주의만한 체제가 없었을 것 같다. 중국이 서구식 수평적 민주주의를 구축했다면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에만 에너지를 쏟았을 것이고, 엄청난 수의 후보자가 난립해서 중국의 문제를 해결할 프로그램을 끝도 없이 제시했을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개혁 초기에 일어난 현상이 바로 그랬다. 만약 중국에서 같은 일이 발생했다면 중국이 염원하는 질서와 조화를 거스르는 혼란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인들은 민주적 개혁이라는 명목으로 사회를 당과 파벌로 쪼개지 않고 일당 체제에 적응했다. 그러면서도 상향식 주도권에 관심을 기울이고 중앙의 의사 결정 기구를 권력의 최상층에 놓아둔 채 놀랄 만큼 평화롭게 거대한 변화를 일궈나갔다.
3. 성과를 내기 위한 전략적 틀
수세기 동안 중국 사회에서 진리였던 것들은 지금도 그 의미가 유효하다. 어떤 일정한 규칙(틀)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 개혁 초기 중국인들은 자유를 받아들이면서 자유에 부과되는 책임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국민들이 새롭게 나무를 심고 주도적으로 아이디어를 내며 생활할 수 있는 숲이 필요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숲을 만드는 데 연연하지 않고 규모가 더 큰 숲(사회주의)에 매달렸다. 사회주의는 새로운 경제적 틀을 포함하는 거대한 정치적 틀이었기 때문이다.
중국 지도부가 구상한 경제적인 틀은 2010년까지 국민들의 생활을 샤오캉 수준까지 올리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단계를 거쳐 그 부를 이룰지는 상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이후 경제적 자유가 증가하면서 정부는 국민들이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 개입했고, 이를 통해 국민들이 혜택을 입을 여지가 생겼다. 이로써 중국을 현대사회로 변화시킬 열정과 탄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 추진된 개혁은 소비에트 연방에서 일어났던 페레스트로이카와는 다르다. 페레스트로이카는 다루기 쉬운 큰 틀을 설정해서 그 안에서 개혁의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 나갈 수 있도록 국민들을 이끌지 못했다. 오히려 하향식에다 지배층이 지나치게 강조된 개혁을 시작했다가 개혁 과정이 무너지면서 연방은 붕괴되고 말았다. 이에 비해 덩샤오핑의 개혁관은 훨씬 현실적이다. 그는 개혁을 한꺼번에, 혼자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국민에게 '실용적인 경험이 진리를 판가름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명제를 제시하고, 급진적인 계급투쟁을 공동의 현대화 과정으로 전환시켰다.
덩샤오핑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1978년 주요 모순 개념을 도입했다. "현 단계에서 중국 사회의 주요 모순은 국민들의 물질적, 문화적 욕구는 증가하는데 비해 사회적 생산은 낙후되어 있다는 것이다." 주요 모순은 새로운 정치 틀로 등장했고, <공산당 헌장>에 삽입되어 현재까지도 효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 개념의 도입으로 중국은 사회주의 원칙과 현대화에 따른 물질적 요구간의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덩샤오핑은 주요 모순 개념을 도입하고 생산력을 해방시켜 시장경제를 지향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중국 경제는 중앙 계획 경제에서 벗어나 탈집중화된 시장경제로 바뀌었다. 탈집중화로 중앙의 통제가 완화되는 동안 새롭게 구축된 사회주의 틀이 새로운 공동의 목표 아래 중국을 결속시켰다.
중국 정부의 빈곤 및 낙후와의 투쟁 목표는 다음 3단계 전략으로 구현되었다. '1단계(1980~1990): 국내 총생산을 2배 증가시킨다. 2단계(1990~2000): 국내 총생산을 다시 2배 증가시킨다. 3단계(2000~2050): 조국의 근대화를 완성시킨다.' 실제로 중국의 국내 총생산은 1980년 3090억 달러에서 2000년 1조 2천억 달러로 증가했다. 목표를 초과 달성한 것이다. 한편 2007년 중국 공산당 헌장에는 "2012년까지 10억 명 이상의 국민이 물질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더 높은 수준의 샤오캉 사회를 건설한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것은 중국 공산당이 경제 발전의 지속적 향상이라는 목표에 집중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4. 실사구시가 이끄는 성장
덩샤오핑의 유명한 격언인 '돌다리를 두드리며 강을 건넌다.' 속에 숨은 개념을 살펴보자. 여기서 목표는 강 건너편에 도달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하지만 강을 가로질러 놓인 돌이 나아갈 방향을 가르쳐 주고 또 발을 디딜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줄 것이다. 건너편에 도달하려면 어떤 돌 위에서는 멈춰 서서 에너지를 모아야 한다. 어떤 돌 위에서는 경로를 바꿔야 한다. 때로는 길이 막혀 뒤로 돌아갔다가 다시 건너기도 해야 한다. 이처럼 중국은 새로운 사회체제와 경제체제, 조화로운 사회를 구축하면서 강 건너편에 도달하려고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때로는 비틀거리기도 하고 실패를 맛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건너편에 안전하게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초점을 맞춘 채 쉬지 않고 전진하고 있다.
지난 30년간 중국의 발전은 시행착오라는 전술을 밀어붙인 끝에 얻은 결실이다. 초기부터 중국은 시험을 거치면서 효과가 있는 방법을 찾아 왔다. 법률 기준, 보험, 관습, 교육 모델, 투자 모델, 심지어 문화적 이해까지도 전국적으로 시행하기 전에 반드시 시험을 거쳐 가치를 확인한 다음에 채택했다. 천촌공정(농촌에도 도시와 똑같은 쇼핑환경을 조성하는 정부 사업)을 예로 들어보자. 중국 상무부는 천촌공정에 착수하기로 하고, 우선 헤이룽장성에서 시범 사업을 실시하였다. 농촌 상점에 리모델링 자금을 지원하고 마을마다 시범 운영 상점을 선정하여 서비스 기준, 유통, 경영 훈련을 통일시켰다. 시범 사업이 성공하자 현재 상무부는 이 사업을 중국 전역으로 확대 실시하고 있다.
덩샤오핑은 효과가 있는 방법과 없는 방법을 시험하고자 일부 지역을 거대한 경제연구소로 바꾸는 전술을 사용하였다. 우선 그는 남중국해에 자그마한 어촌 3곳을 선정했다. 그 중 한 곳이 홍콩과 접해있는 선전이었다. 1979년 당시 선전 인구는 2만에 불과했다. 그런 도시가 오늘날 1천만 명 이상의 인구를 거느린 세계에서 가장 현대화 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일부 도시를 먼저 부유하게 만들자."는 덩샤오핑의 정책이 획기적인 돌파구가 된 것이다. 경제특구 설정과 성공은 강을 건너기 위해 디딘 첫 번째 돌다리였다. 이렇게 해서 경제특구는 중국 경제를 떠받치는 탄탄한 버팀목이 되었고, 개혁의 상징이 되었다. 덩샤오핑은 1990년 상하이 푸둥 개발 계획도 발표했다. 당시 푸둥은 공장 건물 몇 채와 주택이 들어선 농토 지역이었지만, 오늘날 푸둥은 상하이 현대화의 축소판이자 중국 개혁과 개방의 상징이 되었다.
중국의 경제 발전은 성과를 거두는 반면 정치 발달은 과소평가되고 있다. 모든 국가에 서구식 민주주의를 보급하겠다는 목표에 고무된 서구는 새로 태어난 중국호가 강을 건너 서구 해안에 도달하는 방식을 놓고 각본을 짰다. 하지만 중국이 그 각본을 거부하자 놀라고 분개했다. 그러나 자국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 서구의 해안이 있더라도 중국의 처지에서는 마차보다 말을 앞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서구의 해안이 목적지도 아니다. 중국이 나아갈 방향은 헌법에 기록되어 있고 <중국 공산당 헌장>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2012년까지 경제와 사회 발전과 관련된 전략적 목표는 샤오캉 사회의 초기 달성 목표를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서구의 관점에서는 서구식 민주주의 확립이 최고 목표이지만 중국은 나름대로 최고의 목표를 세웠고, 이를 달성할 자체적인 전략까지 갖추고 있다.
5. 미래의 문화를 선도할 예술과 학술의 힘
서구 세계에서는 시대가 달라지면 예술 양식도 달라진다. 그러나 중국 예술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연속성이 존재한다. 중국 예술은 중국 역사에 대한 존중에서 출발했다. 중국에서 예술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의 전통을 유지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1949년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은 뒤로 중국의 미적 가치에도 심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예술은 이용하기 쉽고 교훈적이어야 했으며, 대중에게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선전해야 했다. 그러다가 중국이 개방정책을 취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예술가들은 점차 예술적, 정신적, 지적 경험에 대한 대중의 갈증을 자극하고 새로운 거대한 도약을 시작했다.
오늘날 중국 예술은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다. 중국은 세계 최대의 화랑과 박물관, 수집가와 미술 투기자들을 끌어들이는 자석으로 떠오르고 있다. 작품 가격이 100만 달러 이상인 세계 일류급 중국 작가는 15명에 달한다. 현대 미술계는 중국이 새로운 개인주의 시대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는 분야이다. 예술가와 지식인은 누구보다 먼저 정신의 해방에 반응했고, 그 뒤를 사업가들이 바싹 따르는 형국이다. 개인적 자유가 예술적 표현의 폭발을 가져왔고, 이렇게 터져 나온 예술적 표현이 중국의 경제적 자신감과 더불어 전 세계에 흘러넘치고 있다. 중국은 20세기 미국이 그랬듯이 예술, 건축, 디자인 분야에서 세계 리더로 우뚝 서고자 전진하고 있다.
21세기 중국 디자인 문화는 문화 정체성의 발달 방식을 다른 국가에 과시하면서 중국 밖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디자인 분야에서 중국이 이룩한 인상적인 발전은 정신의 해방과 시장경제의 발달이 맞물려 일궈 낸 결과이다. 1990년대 초까지는 국유기업에서 일했던 디자이너들은 시장의 요구가 커지면서 개인 디자인 사무실을 개업했다. 이를 계기로 오늘날 상품, 건축, 패션 분야에서 활동하는 독립적인 디자인 사업체가 중국 전역에 퍼져 있다. 한편 시장분야에서 디자인 발달을 이끈 기업으로는 휴대전화 제조사 보다오, 전자제품 회사 하이얼, 컴퓨터 대기업 레노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