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디지로그

이어령 지음 | 생각의나무
정보를 먹어라



새해가 되면 떡국을 먹는다. 그리고 나이도 한 살 더 먹는다. 같은 동양문화권인데도 중국 사람들은 나이를 '첨(添)'한다고 하고 일본 사람들은 '도루(取)'한다고 하는데 유독 우리만이 먹는다고 한다. 이 지구상에는 3,000종 이상의 언어가 있다고 하지만 나이를 밥처럼 먹는다고 하는 민족은 아마 우리밖에 없을 것 같다. 그렇다. 음식이나 시간만이 아니다. 한국인은 마음도 먹는다.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무엇이든 먹을 수가 있다. 돈도 먹고 욕도 먹고 때로는 챔피언도 먹는다. 전 세계가 한 점 잃었다(로스트)고 하는 축구 경기에서도 우리 '붉은 악마'는 한 골 먹었다고 한다. 인터넷 공간에는 동서남북이 없지만 여전히 오늘도 해는 동쪽에서 아날로그 방식으로 뜬다. 무엇보다도 디지털로는 절대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 설날의 떡국 맛이다. 모든 감각을 양자화하여 빛의 속도로 보낼 수 있지만 컴퓨터와 인터넷이 천만 번 까무러쳐도 못하는 것이 어금니로 씹는 미각의 맛이다.



컴퓨터나 인터넷에는 이상하게도 먹는 것과 관계된 말이 많다. PC방을 인터넷 카페라고 하고 웹 사이트에서 회원들이 만나는 곳도 마찬가지다. 홈페이지를 꾸밀 때 사용하는 아이콘도 호빵이라고 한다. 인터넷에서 다운 받은 최신 정보를 "따끈따끈한 자료"라고 음식에 비유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어찌되었거나 이런 현상들을 뒤집어 보면 정보사회에서의 '미각'과 음식물은 디지털화 할 수 없는 마지막 아날로그의 영토를 대표하는 성벽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사람은 동물처럼 배를 채우기 위해서만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먹는 행위는 생리적인 욕구나 물질적인 경제가치로만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문화적 의미를 나타낸다. 음식물이 정보를 교환하는 미디어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겨울연가>에 이어 <대장금>이 아시아의 한류팬에게 결정타를 '먹인'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대장금>의 인기 뒤에는 아시아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의식동원(醫食同源)의 식문화 철학이 있었다.



먹는 것이 문명의 의미를 상징하는 것은 전 지구적인 현상이다. 현대의 전설을 만들어내는 인터넷 유머 사이트에는 참으로 한국적인 사과가 등장한다. 그것은 "세 개의 사과 가운데 세 개를 먹으면 몇 개가 남느냐"는 산수 문제이다. 역시 한국에서는 산수도 먹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세 개가 남았다고 대답한 아이다. "세 개를 먹었는데 어떻게 세 개가 남을 수가 있느냐"는 선생님의 추궁에 대해서 그 아이는 거침없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우리 엄마가 그러시는데요. 먹는 게 남는 거래요." 감각의 사과라고 해도,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는 사과는 모두 내 몸 밖에 존재하는 사과들이다. 그러나 "먹는 것이 남는 것"이라는 그 사과는 직접 어금니로 씹어먹는 미각으로서의 사과다. 이미 그것은 타자(他者)로서의 사과가 아니라, 내 몸속으로 들어와 나와 하나가 되어버린 사과이다.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이렇게 내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과이다.



한국의 음식이 우주와 소통하는 미디어로 작용한다는 것을 우리는 직접 차례를 지내는 제상(祭床)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한국인에게 음식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유물적 존재가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방식이요 영혼과 대화하는 슈퍼 미디어이다. 말년에 에디슨이 죽은 자와 통화할 수 있는 전화를 만들려고 했다가 망신을 당한 것을 생각하면, 비록 변변한 발명품 하나 남겨주지 않았어도 우리를 제상에서 만나게 해주신 조상님들의 천재성에 새삼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한국인이 먹는 것에 집착했던 이유는 어떤 미디어도 먹는 것만큼 강력한 소통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로맨틱한 사랑이라 해도 그 발단은 언제나 "차나 한잔!", "식사나 함께!"라는 말에서 시작되지 않는가. 우리는 배가 고프고 가슴이 고프고 머리가 고프고 온몸이 고픈 허기를 채우기 위해 울었다. 이 "울음"이 바로 문화를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분명 가난했지만 결코 그 가난이 우리를 지배하지는 못했다.



가족을 뜻하는 식구(食口)란 말, 나라 전체를 의미하는 인구(人口)란 말에도 입 '구'자가 들어 있다. 한 솥밥을 먹는다는 의식은 농업사회의 쌀이 산업사회의 강철이 되고 정보사회의 디지털로 바뀌게 된 오늘날에도 우리 무의식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문제는 아날로그의 솥 옆에 또 하나 무한대로 커지고 있는 네트워크 디지털 솥이 우리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공동체도, 정보도, 미디어도, 사고파는 물건과 살아가는 방식까지도 아날로그적인 것과 디지털적인 두 가마솥으로 분할되어 간다. 사람 자체도 아날로그 인간과 디지털 인간으로 분열되어 있다. 하지만 분단된 국토, 가진 자와 안 가진 자의 경제적 양극화를 말하는 사람은 많아도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분단과 양극화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도 걱정하는 사람도 드물다. 그러기 때문에 먹는 것으로 상징되는 아날로그의 문화 코드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문화 코드를 읽는 학습과 훈련이 절실히 요망된다.



"웬 떡이냐!"의 정보 모델



전화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한국인들은 시루떡을 돌리는 것으로 온 동네에 정보를 알렸다. 그러면 사람들은 으레 커다랗게 눈을 뜨고 이렇게 외친다. "이게 웬 떡이냐?" 시루떡 정보의 발신은 언제나 이렇게 놀라움과 궁금증을 동반한다. 시루떡이 비일상적 축제성을 띤 정보를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면, 스팸 메일은 일상적인 일을 되풀이하는 지겹고 신물 나는 판박이 정보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스팸은 우리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정보포식'의 상태와 그러한 정황 속에서 우리가 잃고 있는 디지털의 '정보현실감'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스팸 정보의 식상함에서 벗어나고 '정보현실감'의 입맛을 되찾으려면 스팸을 가지고 부대찌개를 만들 듯이 쓰레기의 디지털 정보에 "웬 떡이냐!"의 놀라움을 주는 의외성과 축제성, 그리고 배고플수록 더욱 강해지는 한국인의 시루떡 정신을 불어넣어야 한다.



"웬 떡이냐"라는 말은 의문형 감탄사다. 그 다음에는 "누구네의 생일떡이다", "아무개 집 고사떡이다"라는 대답과 설명이 뒤따른다. 그러나 굳이 그런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밤을 넣어 버무린 '밤 시루떡'이면 사내아이의 생일일 것이고 곶감을 넣고 빚은 '감 시루떡'이면 여자아이의 생일일 것이다.이미 떡 자체가 하나의 미디어로서 여러 가지 메시지를 담고 있다. 물론 그러한 메시지는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떡을 받는 수신자는 수동적인 정보의 소비자가 아닌 것이다. 감춰진 정보를 읽고 스스로 정보를 만들어내는 적극적인 정보 발신의 참여자가 된다. 그것은 꼭 정보시대의 특징인 소비자가 생산에 참여하는 프로슈머(Prosumer)와 같다. 시간과 공간은 서로 떨어져 있어 따로따로이지만 한 집 한 집 떡을 돌려 함께 떡을 나눠 먹는 것은 '따로 그러나 함께'라는 특이한 제 3의 원리를 만들어낸다. '함께'와 '따로'라는 반대어가 하나의 조화를 이룬 떡돌림 원리의 그레이존(gray zone)이야말로 철학자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해온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떡의 특성은 예외 없이 팥고물이든 콩가루든 고물을 많이 묻혀서 맛과 모양을 내는 데 있다. 정보이론으로 하자면 고물은 노이즈(잡음)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것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정보는 마찰이나 거부감 없이 수신자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어갈 수 있다. 만약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우리 애가 돌이 되었다고 자랑하고 다닌다면 오히려 사람들의 빈축을 사고 그 정보는 흉이 된다. 하지만 김이 무럭무럭 나는 맛있는 시루떡의 고물 속에 그 자랑을 묻어두면 모두의 축복을 받는다. 인터넷 시대의 디지털 정보가 차가우면 차가울수록 아파트의 생활이 사막처럼 황량하면 할수록 따뜻하고 행복한 시루떡 돌리기와 같은 아날로그 정보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래서 이따금 우리는 어린 시절에 듣던 "웬 떡이냐"라는 환청을 디지털의 사이버 공간 속에서 듣는 것이다.



젓가락의 정보 마인드 - RT



한때 쇠젓가락으로 콩알을 집어먹는 한국인의 손재주가 줄기세포를 만드는 원천기술이라고 자랑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내세워야 할 것은 젓가락질보다는 그 젓가락을 낳게 한 정신이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일이다. 그 해답은 의외로 단순하고 명확하다. 백 가지 천 가지 이유에 앞서 우리가 젓가락을 쓰게 된 것은 우리의 모든 음식이 한입에 들어갈 수 있도록 차려져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음식을 만든 사람이 서양의 비프스테이크처럼 커다란 고기 덩어리를 그냥 통째로 내놓았더라면 우린들 별수 있겠는가. 양식을 먹을 때처럼 칼이나 포크를 사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젓가락이 상호의존성과 관계를 중시하는 배려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면 포크와 나이프는 개체의 분리를 기본으로 하는 독립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문화는 상대적인 것이므로 절대적인 평가 기준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월성이 아니라 어느 것이 더 정보시대의 특성에 맞느냐 하는 '적합성' 면에서는 그 비교와 분석이 가능하다.



우선 정보시대의 특성은 '정(情)'이다.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정(情)을 알리는 것(報)이 정보(情報)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 혹은 일본에서만 통하는 이야기로서, 영어의 인포메이션이나 중국어의 신식(信息)에는 정이라는 뜻이 들어 있지 않다. 정보사회에는 무엇보다도 정(情)이 있어야 한다. 아이들이 전화를 걸어 몇 시간씩 수다를 떨다 끊을 때 하는 소리는 대개 "자세한 것은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자"이다. 그렇게 실컷 말하고도 직접 만나서 할 이야기가 또 있다는 말인가. "만나서 직접 말하겠다는 그 자세한 말"이란 다름 아닌 전화로는 나누기 힘든 '정'의 말인 것이다. 얼굴을 맞대고 직접 말과 마음을 주고받는 '페이스 투 페이스'가 정보통신 시대에는 어려워진다. 그래서 정보기술은 인간을 평화롭고 따뜻하게 하는 소통의 기술, 젓가락의 원형에 담긴 정과 믿음에 의해 그 운명이 판가름 난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과 음식을 먹는 사람이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느끼는 데서 젓가락이 나왔다. 그 젓가락 정신을 옛날 유학에서는 인(仁)과 서(恕)라고 불렀다. 한자의 인(仁)자는 사람을 뜻하는 人자에 二자를 합친 글자이다. 그리고 용서한다고 할 때의 서(恕) 자는 원래의 자원은 그렇지 않지만 현대의 자형 그대로 읽으면 서로 마음(心)이 같다(如)는 뜻으로 읽혀진다. 그러므로 인이나 서나 두 사람 사이의 상호 관계를 뜻하는 것으로 요즘 인터넷 용어로 하자면 인터랙션(interaction)과 같은 뜻이 된다.



지금까지 말한 한국의 젓가락 정신은 인간관계를 나타내는 정, 믿음, 상호성(인터랙션)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술은 '노이즈'를 배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시스템 자체를 변환시키는 관계기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젓가락 문화 속에서 살아온 한국인은 지금까지의 IT(정보기술)를 RT(Relation Technology, 관계기술)로 바꿔주는 주된 역할을 할 수 있다. 같은 무기를 만들더라도 생명을 죽이는 창 기술자보다 생명을 지켜주는 방패 기술자가 되는 것이 좋다는 유교의 오래된 교훈을 받아들인다면, IT는 군사정보와 금융정보를 넘어서 인정과 사랑, 그리고 감동과 행복을 나누는 RT의 따뜻한 디지털 환경을 만들게 될 것이다. RT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과 도구와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변화시키고 서로 조화를 이루게 하는 기술로서,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아트'에 가깝다.



미래의 동화



21세기 상황에서는 휴대전화처럼 여러 다른 기능을 한데 모으는 컨버전스 기술 자체가 이미 구식이다. 이제는 애플의 아이포드가 모토로라의 휴대전화와 연계하고, 아노토 펜(펜촉 옆에 달린 카메라 센서가 종이 위의 아날로그 글씨를 인식해 컴퓨터로 전송하는 특수 펜)이 노키아와 연동하여 사용하는 얼라이언스 제품이 등장한다. 디지털 카메라에 필름을 돌리고 셔터소리가 울리도록 하는 아날로그 감각을 살린 디지로그 상품이 개발되어 인기를 모은다. 그리고 하나의 상품에서 여러 가지 파생상품을 만들어내는 '원 소스 멀티 유즈'의 마케팅 기술까지 다양한 분야의 퓨전 기술은 끝이 없다. 동에서 먹고 서에서 자는 '동가식서가숙'처럼 모순적이고 대립하는 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기술의 종착점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하나로 융합하는 디지로그 기술이다. 그것은 어느 쪽이 선이고 어느 쪽이 악이고, 어느 것이 신이고 어느 것이 구인가를 따지는 선택적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양립 불가능한 대립적 갈등 관계도 아니다. 오히려 디지털 기술이 성숙해지고 정밀해질수록 디지로그 현상은 강력해진다.



불과 반세기 동안에 농경시대에서 산업시대로, 산업시대에서 정보시대로 고속 성장과 강도 높은 변화를 이룩해온 나라가 한국이다. 그것을 경제학의 대가인 조순 박사는 "압축 성장", "압축 개혁"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한다. 대한민국은 분명히 인류의 전 문명을 한꺼번에 고밀도로 압축해놓은 파일이다. 악도 있고 선도 있고 폭력도 있고 평화도 있고 저주도 있고 축복도 있다. 필터링되어 있지 않은 모든 자료들이, 눈물과 웃음과 절규와 낮은 목소리들이 공존한다. 외국 어디에 가도 8282번 전화번호를 돌리면 한국인이 나온다며, "빨리빨리"의 한국병을 비웃는 사람들이 많지만 모르는 소리이다. 그것은 빨리빨리가 아니라 축지법을 쓰지 않고서는 앞서가는 사람을 따라잡을 수 없는 긴박한 상황에서 나온 압축 기술이다. 이제 우리가 저장해놓은 압축파일을 서서히 풀 때가 되었다. 급히 풀어서는 안 된다. 압축은 빨리빨리와 혁명의 비상수단으로 하지만 그것을 풀 때는 혁명이나 개혁이 아니라 개선으로 서서히, 하나하나 복합적으로 풀어야 한다.



겨울이 되면 기러기는 V자 대형으로 남쪽으로 날아간다. 그들이 그런 대열로 날아가는 것은 앞에서 나는 새들이 날개를 저으면 뒤에서 따라오는 새를 위한 상승기류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체 기러기떼는 혼자 날아가는 것보다 71퍼센트를 더 멀리 날 수 있게 된다. V자 대형으로 날면 길도 잃지 않고 힘도 아낄 수 있어 기러기들에게 있어서 그 모양은 그야말로 빅토리 사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맨 앞에서 날아가는 기러기가 지치면 뒤쪽으로 물러나고 금방 뒤따르던 기러기가 앞장선다. 팀원들이 돌아가면서 팀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기러기의 대열에서는 앞장서려고 싸우는 법도 없고 꼴찌라고 하여 열등감을 갖는 일도 없다. 지도자를 뽑는 힘의 법칙이 아니라 순환하는 협력의 질서에 의해서 그들은 멀리 날 수 있는 것이다.



V자 대형으로 날아가는 기러기형 디지로그 사회의 공동체에는 더 이상 사농공상(士農工商)의 피라미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계층구조와 갈등은 순환구조에 의해 용해되고 말 것이다.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처럼 문명은 농업-산업-정보의 선형적 물결로 오는 것이 아니라 계절처럼 둥글게 순환하게 된다. 사농공상의 힘이 피드백 되어 순환하는 과정은 지극히 일상적인 상업 광고 카피에서도 읽을 수가 있다. "인간은 책을 만들고, 책은 인간을 만든다"는 교보문고 슬로건이 그렇다. 그리고 "인간은 로봇을 만들고, 로봇은 인간을 만든다"는 정보통신 관계의 슬로건도 마찬가지이다. 남쪽과 북쪽을 옮겨 다니는 철새 노마드가 생기면, 정착과 이동의 한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한민족의 문화는 이미 유목적 정주형 문화(nomadic sedentary)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나물과 골뱅이의 문화 유전자



골뱅이(@)만 달면 자기가 사는 나라와 도시, 자기 집 번지까지도 필요 없다. 자신의 ID와 사용하는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