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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를 지배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앤써니 샘슨 지음 | 책갈피
격심한 가격 인상이 있은 지 1년이 지난 1975년 초가 되자, 석유 공급은 다시금 수요를 훨씬 웃돌기 시작했다. 선진 공업국들은 석유 가격이 너무 비싸진데다, 때마침 그해 겨울 이상기후 현상으로 따뜻해진 날씨 덕분에 석유 소비량을 줄이기 시작했다. 더 본질적으로는 세계경기가 불황을 맞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유가격은 변동이 없었다. 산유국들은 각국의 생산조정 이외에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가끔 원유가격을 약간 할인하거나 지불연기를 인정하는 일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OPEC이 설정한 수준을 견지했다. OPEC의 카르텔은 여전히 끄떡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 이것이 가능했을까? 주요 생산국의 대부분은 잉여자금을 필요 없었고, 따라서 보통 카르텔에서 흔히 보듯이 경쟁 상대를 몰아내기 위한 가격인하 경쟁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생산 규모에서 단연 앞서 있던 사우디 아라비아가 높은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언제라도 생산을 줄일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도 큰 원인이었다.



서방 각국 정부는 산유국 카르텔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석유회사에 기댈 수 없다는 것을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런던의 BP는 에너지청에 자기들은 더 이상 OPEC에 강경 노선을 취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은밀히 통고했다. 메이저들은 이미 소비자를 대표해서 OPEC과 거래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석유가 지금까지 계속해서 독점 기업이나 카르텔의 수중에 있었던 역사를 살펴보면, 석유를 어떤 국제기관의 손으로 통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현재의 통제 방법은 최악의 상태라고 보아도 좋을 정도다. 두 개의 카르텔, 즉 석유회사의 카르텔과 산유국 카르텔 모두 똑같이 부분적이고, 바람직하지 못한 존재일 뿐이다. 둘은 기본적으로 영, 미계 소비국과 아랍 산유국이라는 양극단을 대표하고 있다.



석유의 세계에서는 절대적 공정이란 없다. 그러나 두 카르텔이 서로 충돌을 피하고 국제적 협의 기관이 확립된다면, 산유국, 서방측 소비국, 제3세계의 3대 세력의 각각의 희망을 종합할 수 있는 더욱 평등한 석유의 통제수단이 생겨날지도 모르겠다. 석유를 에워싸고 새로운 협정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세계 정부를 지향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며 세계 각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책임 분담제의 시초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세계 각지에서 분쟁의 도화선이 되어온 석유가 앞으로는 세계평화를 촉진시키는 윤활유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1975년 3월, 알제리에 위치한 '민족들의 전당(Palace of Nations)'에 잇달아 도착한 각국 대표단은 아프리카의 태양 빛을 받으며 보무도 당당하게 입장했다. 이날은 OPEC의 첫 정상회담이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이러한 회의가 종교나 군비 문제가 아닌 기름진 검은 액체를 둘러싼 이해관계 때문에 실현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회의에 석유회사 대표는 한 사람도 참가하지 못했고, 엑손이나 쉘 등의 회사명도 회의 중에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18개월 전까지만 해도 세계는 석유가 세븐 시스터즈로 알려진 7개의 거대한 석유회사의 수중에 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일곱 회사는 전세계 어느 나라의 길가에도 커다란 간판에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엑손, 쉘, BP, 걸프, 텍사코, 모빌 및 소칼이 바로 그들이다.

1970년대 들어, 서방측과 중동간의 긴장이 고조되어감에 따라 석유회사의 역할은 차츰 위축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양자의 충돌은 1970년 10월 빈(Vienna)에서 발생했다. 석유회사 대표들은 OPEC측과 석유가격을 교섭하기 위해서 빈에 모였다. 일행은 25% 이상 가격 인상을 용인하지 말라는 본사의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이란을 중심으로 한 아랍국가들은 석유 가격을 배럴당 3달러에서 5달러까지 인상할 것을 요구했고 결국 회담은 결렬되었다.



OPEC의 아랍국가 대표들은 쿠웨이트에서 자신들만의 회합을 열고 석유를 전쟁 무기로 사용할 것을 결정했다. OPEC 가맹국들은 석유 가격을 배럴당 3달러에서 5달러로 인상할 것을 독자적으로 결정했다. 이튿날 OPEC 가맹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나라에는 석유 수출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금수는 석유의 부족을 초래했고, 그에 따라서 석유 가격은 다시 두 배로 오르게 됐다. 석유회사측은 OPEC이 그들의 역할을 강탈했는데도 손을 빼고 사태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석유가 발견된 지 겨우 6년, 당시 26세였던 록펠러는 클리블랜드에서 석유 정제업을 시작했다. 경리사원으로 인생을 출발한 록펠러는 아주 대담하게 사업확장에 나섰으며, 이 사업을 지배하는 유일한 방법은 생산부문이 아닌 석유를 판매할 때 경쟁자를 싼값의 수송비로 따돌리는 데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철도회사를 설득, 석유를 철도로 운송함으로써 운송비를 절감하는 데 주력하였다.



철도에 착안한 것이 록펠러에게는 지극히 유리한 조건을 안겨 주었다. 록펠러의 판매고와 석유정제 능력은 급격히 신장되었으며 석유 사업을 시작한 지 불과 7년 만에 록펠러는 '스탠더드 오일 컴퍼니'라는 공동출자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미국 석유산업 전체의 10분의 1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후에도 록펠러는 라이벌 회사들을 잇달아 병합, 1883에는 전국적 규모인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를 결성했다.



완만한 움직임이기는 했지만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의 독점을 방지하고자, 여러 주에서 반트러스트 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록펠러는 뉴저지의 법률이 주 밖에서의 주식 소유를 인정하고 있다는 데 착안, 스탠더드 오일(뉴저지)이라고 일컫는 특수회사를 중심으로 재편성하여 그 지주회사가 모든 자회사 주식을 소유하게 함으로써 반트러스트 법의 법망을 피해 30년 동안 독점체제를 유지했다.



1911년 들어, 스탠더드는 정부의 강력한 반트러스트 제재조치에 따라 해체될 수밖에 없었으며, 트러스트의 각 자회사는 영업을 하던 각 주에 반환됐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각 회사의 지주회사 구실을 맡아 온 뉴저지에 있는 모회사였다. 이 회사는 현재 엑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60년간 세계 최대 석유회사의 지위를 지키고 있다. 록펠러 제국에서 태어난 또 다른 회사는 스탠더드 오일 컴퍼니 오브 뉴욕(후에 모빌(Mobil)로 이름을 바꿈)과 스텐더드 오일 오브 캘리포니아 또는 소칼(Socal)이다.



록펠러의 세 딸이라고 할 수 있는 엑손, 모빌, 소칼의 세 회사 모두 오랜 기간 스탠더드 오일 그룹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공동보조를 취한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이 세 자매회사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해외에서 많은 사업을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영국은 자국 내에 변변한 석유자원이 없었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세계 각지에서 석유를 구입하여 원거리 수송을 해야만 했다. 따라서 수송문제는 미국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였다. 영국인들은 영국에서 탄생한 시스터즈인 BP와 쉘에 대해서도 미국계 시스터즈와는 달리 일종의 존경심을 가지고 대했다. 반트러스트 법 위반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고 석유회사와 정부의 대결이라는 것도 없었다.



쉘의 창립자는 마커스 사무엘이었다. 록펠러가 스탠더드 오일을 창립하고 있을 무렵, 마커스 사무엘은 록펠러와 마찬가지로 '수송'하는 과정에서의 경제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최단거리 공급원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사무엘은 러시아에서 석유를 발견했다. 그는 록펠러와 싸워 나가기로 결심하고 무역업자들의 원조를 받아 신형 유조선을 건조하고 러시아 원유를 극동의 저장기지로 수송하면서 록펠러의 세계시장 독점에 맞서 나갔다.



록펠러는 세계시장의 독점을 위하여 유가를 더욱 인하해 나갔고 수백 명의 중소 석유업자가 도산했다. 그러나 사무엘과 그의 신디케이트는 유조선 선단을 확대하여 러시아산 원유를 장악하고 각지에 유통거점을 그물처럼 펴놓음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다. 드디어 마커스 사무엘은 1897년 쉘 트랜스포트 & 트레이딩 컴퍼니를 설립하여 록펠러에 대항하는 세계적 석유회사로 발돋움하였다.



영국정부는 당시 중동 지역에 무한히 널려 있는 유망한 유전을 소유하고 훗날 BP(브리티시 페트롤륨)로 알려진 새 회사, '앵글로 페르시안 오일'에 대해서 예사롭지 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앵글로 페르시안 오일의 주식 51%를 취득하였다. 처칠은 세계 석유시장을 분할하여 지배하고 있는 쉘과 스탠더드 오일에 맞서기 위해서는 앵글로 페르시안 오일을 활용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영국정부의 BP에 대한 자본 참가 문제는 결코 생각처럼 단순한 일은 아니었다. 해외에서 BP가 영국 정부의 앞잡이로 인식되면서 식민지 국가들로부터 심한 반감을 샀으며, 국내에서는 BP의 정책에 대해서 거의 왈가왈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군사적 측면에서의 이익이 의심스럽다는 점이었다. 전시 석유의 안전 공급은 석유 기업 소유보다는 오히려 해상 지배권 장악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1920년대에 접어들자 미국계 5사, 영국계 1사 그리고 영국-네덜란드 합작 1사인 일곱 개 석유회사가 석유업계의 거대세력으로 성장했다. 7사는 제각기 종합석유회사로 성장하여 석유 생산뿐 아니라 수송, 유통 그리고 판매상의 각 분야에서도 종합 경영체제를 확보해 나갔다. 또한 자기 회사의 유조선 선단을 거느리며 세계 무대로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그들은 유전개발 및 원유 생산에서부터 가솔린을 비롯한 석유제품의 도매와 소매 등 석유업계의 모든 분야를 장악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석유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모든 서방측 정부로 하여금 통감케 했고, 이것이 '석유 외교'라는 형태로 발전했다. 항공기나 자동차, 전차를 사용하는 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살아남기 위해서는 석유가 필수적이라는 것이 명백해졌고, 석유 유조선은 공급을 확보하기 위한 생명선이 됐다. 프랑스의 수상 클레망소는 "석유 한 방울은 피 한 방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나 서구 유럽은 새로운 석유획득 경쟁에 신속하게 돌입했다. 그와 동시에 석유를 보유한 나라와 보유하지 못한 나라 사이에 새로운 갈등이 생겼다. 영국과 프랑스는 자국의 석유 공급을 중동에서 확보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고 미국이 중동 지역에 한 발자국도 들이지 못하게 막았다. 이에 대해 미국은 "국외의 석유자원에 대한 접근이 완전봉쇄 당한 채 감소추세에 있는 자국의 석유자원을 세계에 공급한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며 반발했다. 그리하여 세계대전 후 석유회사나 정부가 모두 미국 대 영국이라는 형태로 날카로운 대립상태에 놓이게 됐다.1974년 중반, 석유 금수조치가 해제된 뒤에도 소비국이 직면한 현실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전세계의 석유가 세븐 시스터즈라는 석유회사에서 주권국가로 구성된 새로운 카르텔의 손으로 그 지배권이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제 소비국의 관심은 지금까지 무시되어 왔던 빈의 OPEC 본부에 쏠리게 되었다.



종전의 OPEC회합은 여타의 무역기구와 마찬가지로 거의 세상의 주목을 끌지 못했고, 몇몇 전문 저널리스트가 취재하러 오는 정도였다. 그런데 1973년에 있었던 일대전환 이후, 이 눈에 띄지 않던 OPEC 본부 건물은 돌연 전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가격 인상이 있은 지 1년이 지난 1974년 12월 연차총회가 열리면서 OPEC 본부 건물은 다시 한 번 가격을 결정하는 장소가 되었다.



산유국들 입장에서는 이 같은 승리가 찾아왔다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었다. 오히려 시기가 늦었다는 사실이 이상할 정도였다. 귀중한 석유자원을 보유한 이 주권국가들이 자신들의 부를 지킬 필요와 석유회사와의 대결을 위해서 일치 단결할 필요성을 절감하기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아라비아 반도에서 석유산출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이미 1923년에 조사가 진행되었다. 뉴질랜드인 프랭크 홈즈가 런던의 어느 신디케이트의 위탁을 받아서 바레인의 한 광구의 이권을 매입했는데 여기서 새로운 석유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바레인은 영국의 보호구로서 영국은 거기서 발견되는 어떤 석유라도 지배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으며, 영국의 승인 없이는 어느 누구와도 이권문제에 대해 상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BP는 이란과 이라크에서 막대한 석유를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바레인의 석유개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홈즈가 매입한 이권에도 출자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홈즈는 미국으로 건너가 바레인의 이권을 매입해 줄 회사를 물색했다. 홈즈는 5만 달러를 받고 걸프에 이권을 팔아 넘겼는데, 걸프는 그 이권을 다시 소칼에 1만 달러에 팔아 넘기는 우를 범했다.



소칼은 즉시 지질학자를 현지에 파견하여, 1931년 석유를 발굴하는 데 성공했다. 2년 후 바레인은 다른 석유회사가 깜짝 놀라는 가운데 석유를 국제시장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바레인에서 최초의 석유가 발견되고 나서부터는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석유를 발견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사우디 국왕은 까다로운 차관공여 조건을 모두 수락한 소칼에게 석유 탐사 및 채굴권을 맡기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소칼은 중동에서의 발판을 구축해나갔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미국계 석유회사가 설립되자 중동 전체의 세력관계는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바레인이 석유 생산에 들어가고 사우디 아라비아에서도 최초의 굴착에 희망을 갖게 되자, 소칼은 자금이 극도로 부족하고, 판로 역시 빈약함을 통감했다. 결국 소칼은 텍사코를 제휴상대로 택하여 손을 잡게 되었다.



그 무렵 사우디 아라비아의 오지에 있는 조그마한 독립국인 쿠웨이트에서 또 하나의 엄청나게 큰 유전이 발견됐다. 쿠웨이트의 석유이권에는 영, 미 양국 자본의 격돌이 벌어져 정부가 막후에서 자국회사를 지원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결국 영국의 BP와 미국의 걸프가 합자회사인 KOC를 설립하여 쿠웨이트 유전을 굴착하는 이권을 얻어냈다.



그러나 이들 두 거대한 신유전의 개발은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즉시 후퇴하고 말았다. 텍사코와 소칼은 미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영국이 이권개입에 끼여드는 것을 국가적 차원에서 막아달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결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아라비아 이권을 획득하기 위한 미국의 개입을 승인함으로써 미국은 이제 사우디의 이권에 정부 차원에서 깊숙이 개입하게 되었다.



세계대전이 끝나자 사우디 아라비아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미국이었다. 이리하여 상반되는 미국 외교 정책이 동시에 수행되었다. 명예와 득표를 위해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정책과 석유를 위해 사우디 아라비아를 지지하는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국무부가 택한 해결책은 산유국에 대해서는 되도록 석유회사에 외교권을 위임하여 석유회사를 마치 일종의 독립 정부와 같이 간주하도록 하였다. 소칼과 텍사코는 외교상의 독립성을 갖고, 세계 최대이자 최저가격의 석유자원을 갖게 되었다.1951년 석유 국유화를 주장하는 모사데크가 수상으로 선출되었고 이란 의회는 BP가 가진 석유를 즉시 접수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영국 노동당 정부는 위기감을 느끼고 영국의 투자를 지키기 위해 군사 개입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힘든 문제에 직면하였다. 외무부의 대세는 무력 개입을 반대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온갖 교섭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이란 정부는 아바단의 정유소를 국유화했다. 석유 수출은 중단되었고 마침내 1951년 10월, 최후까지 남았던 BP의 종업원과 그 가족들은 이란을 떠났다.



그러나 BP는 모사테크 정권이 전복되고 이란 측이 다시 교섭에 응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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