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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니체에게 물어라

시라토리 하루히코 지음 | 넥스웍


인생은 니체에게 물어라

시라토리 하루히코 지음

넥스웍 / 2025년 11월 / 224쪽 / 17,000원





1장 나 자신을 충분히 살려라



창조는 인생의 기쁨이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창조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간다. 그들의 인생은 끝없는 소비 활동에 가깝다. 물건을 사기 위해 돈이 중요하다 보니, 급여에도 민감해진다. 그들은 일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통해 얻는 돈을 갈구한다. 직업은 단지 수단일 뿐이다. 사실 수단도 생략하고 돈이나 결과만 얻고 싶어 한다. 만약 어린아이가 어른과 같다면, 직접 블록을 쌓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블록을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아이는 없다. 아이는 자기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욕구는 자신의 능력으로 얻고자 하는 의지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그 욕구는 실패를 겪더라도 성취하고자 하는 집념 속에서 단단해진다. 이것은 자신의 잠재력을 외부로 드러내는 행위, 곧 자기실현이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실현의 감각을 잊는다. 일상의 반복 속에서 그 욕구는 흐릿해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틈이 날 때면 무언가에 몰두한다. 무언가를 만들거나, 요리하고, 외국어를 공부한다. 그 몰입 속에는 단순한 취미를 넘는 만족감이 깃들어 있다. 잊고 지냈던 자기실현의 본능이 깨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창조의 기쁨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사실 이런 기쁨은 ‘일’ 속에 살아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일이 곧 삶의 기쁨이 된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그 과정에 쏟은 정성은 헛되지 않다. 왜냐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 본래의 욕구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기쁨이란 쾌락을 맛보는 것이나, 부를 통해 우월감을 느끼는 데서 오지 않는다. 진짜 기쁨은 스스로 온전히 살아갈 때 찾아온다. 그리고 그 기쁨을 깊이 체감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활기찬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천직은 ‘찾는’ 것이 아니다


천직을 찾으려 애쓰는 사람은 어리석다. 그 모습은 마치 안경을 쓰고 있으면서도 안경을 찾겠다며 두리번거리는 사람 같다. 그들은 각자에게 꼭 맞는 직업이 어딘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천직’이라는 단어는 원래 기독교에서 하느님이 인간에게 준 사명을 뜻했다. 하지만 오늘날 이 말은 자신의 성격과 능력에 가장 적합하거나, 타인을 능가할 정도로 해낼 수 있는 일을 가리킨다. 사실 이런 단어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 하는 일이 나의 천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을 방증한다. 모든 사람이 천직을 가진 것이 일반적이라면, 이런 단어는 무의미해져서 사라졌을 테니 말이다.

내가 하는 일이 단지 생계를 위한 고된 노동이라고 느껴질 때, 사람들은 고민한다. “도대체 내 천직은 뭘까?”, “어떤 일을 해야 할까?” 하지만 이러한 고민 방식 자체가 잘못된 출발이다. 왜냐하면 이미 존재하는 직업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전제 아래 사고하게 되기 때문이다. 기업에 들어가서 월급을 받는 것만 목표로 한다면 그것도 괜찮다. 하지만 천직을 원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천직은 자신의 성격, 능력, 감성, 속도 등을 살릴 수 있는 일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그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기업을 찾는 것보다, 내가 지금 하는 일 속에서 가능성을 키워가는 편이 더 현실적이다.

물론 천직을 갖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존재한다. 예술가들이 그렇다. 그들은 누군가를 따라 하지 않고, 자신이 하는 일을 작품으로 만들어 판매한다. 그들에게 일은 생계 수단이 아닌 자기 존재의 표현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일에 목숨을 걸고 있다. 반면 적당히 안정된 수입을 얻고자 한다면, 그런 직업은 수없이 많다. 다만 그걸 꾸준히 해서 천직이라고 불릴 정도의 수준까지 오를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다. 결국 천직인지 아닌지는 남이 판단할 수 없다. 그 일을 통해 얼마나 자유롭고, 살아 있음을 느끼며, 나다워질 수 있는지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즉, 천직이란 그 일을 통해 내가 나 자신을 더 깊이 살아낼 수 있는가, 즉 그 일이 내 삶 자체가 될 수 있는가를 묻는 문제다.

실제 행동이 나를 바꾼다


자기실현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저 지금까지의 안일한 태도나 익숙한 습관을 넘어 새로운 내가 되는 일이다. 분노를 억누르거나 용서를 선택하는 일 역시 더 높은 의미의 자기실현이다. 이런 내면의 변화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자신에게 깊은 의미를 지니며, 때로는 하나의 ‘구원’이 되기도 한다.

‘구원’이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개념을 떠올리지만 진짜 구원이란 내가 변화하고 그로 인해 내 상황도 긍정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실현은 가장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구원의 한 형태다. 자기실현은 나의 태도와 말투, 행동을 바꾸어 자신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내가 변하면 주변의 상황도 조금씩 변한다. 지금까지 삶을 힘들게 만든 요인 중 하나가 내 태도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적 자기실현의 기회는 일상에 널려 있다. 말투와 행동을 바꾸는 것, 책을 읽고 생각을 바꾸거나 공부를 시작하는 것도 자기실현이다. 그리고 집안일조차 진심으로 집중하면 나를 성장시키는 경험이 된다.

기독교 신학의 구원은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신약성서』를 읽어보면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난다. 예수는 어떤 사람이 지금까지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었을 때 ‘당신은 구원받았다.’라고 선언한다. 반대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은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 솔직하지 않은 사람, 의심과 경계심을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은 태도나 행동을 바꿀 생각조차 없다. 결국 어떤 구원이든 핵심은 같다. 누군가가 날 구해주는 것이 아닌, 나의 행동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

나의 내면에서 나오는 동기를 가져라


사람들은 생활비, 가족 부양, 출세를 위해 일한다. 무언가를 위해 일한다는 말은 어쩌면 자신의 욕망과 재능을 감추려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한다는 건 목적을 위해 나 자신을 도구 취급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도구처럼 쓰이고 있다면 그것만큼 비참한 일도 없다. 도구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되고 목적이 달성되면 버려진다. ‘쓰고 버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과 누군가를 도구로 여기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전자는 인간을 ‘의지하는 존재’로 인정하고, 후자는 인간을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내가 돈 버는 수단, 자식을 낳기 위한 수단, 이익을 창출하는 수단으로 여겨지거나 스스로 그렇게 여긴다면, 그건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다. 하지만 머리로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막상 눈앞에 보상이 주어지면 우리는 흔들린다. 그 순간 ‘왜 일을 하는가’보다는 ‘무엇을 받을 수 있는가’에 집중하게 되고, 스스로를 수단으로 취급하게 된다. 높은 보수가 예상되면 그 보수를 위해 나를 도구화하게 되고, 목표나 꿈을 좇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게 된다. 그래서 어떤 경영자나 상사는 비정해지기도 하고, 직원을 도구로만 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꼭 나를 도구로 삼고 남을 이용해야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동기의 방향이다. 외부의 보상과 인정이 아닌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솟는 동기에서 출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동기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저 ‘이건 내가 꼭 해내고 싶다’라는 강한 열망, 거의 사랑에 가까운 감정에서 비롯된 순수한 의지다. 그 안에는 체면도 계산도 없다. 심지어 ‘이걸 해내지 않으면 내 존재 의미가 사라지는 건 아닐까?’ 하는 절실함마저 담겨 있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이런 충동은 외적 보상보다 강력하다. 이처럼 진정한 동기를 가질 때, 내가 하는 노력은 힘들어도 감수할 수 있는 기쁨으로 변한다. 그렇게 되면 외적 보상이 중심이 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데서 오는 보람과 의미를 느낄 수 있다.

행복이란 능력 발휘를 의미한다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행복한 왕자』는 한 마을에 세워진 왕자의 동상에서 시작된다. 동상에는 왕자의 영혼이 깃들어 있었고, 그의 몸은 금으로 덮여 있었으며, 보석이 박혀 있었다. 날씨가 추워지던 어느 날, 이집트로 떠나려던 제비는 잠시 왕자의 동상에 머문다. 그때, 제비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을 보며 왕자가 울고 있었던 것이다. 왕자는 자신의 보석을 그들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고, 제비는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마을에는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제비가 왕자의 금박까지 그들에게 나눠줬고, 동상은 볼품없어졌다. 겨울이 찾아오고, 남쪽으로 떠나지 못한 제비는 숨을 거두었다. 그 순간 왕자의 납으로 된 심장은 둘로 갈라졌다. 신은 천사에게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두 가지를 가져오라고 명하고, 천사는 왕자의 심장과 제비를 가져온다. 그리고 둘은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아간다.

이 이야기를 곱씹어보면, 가장 깊은 행복을 경험한 것은 왕자와 제비였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과 마음을 아낌없이 나누었기 때문이다. 자기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사람들은 흔히 행복을 물질적 풍요, 좋은 인간관계, 자기만족으로 정의한다. 이 중 부유함은 행복의 첫 번째 조건으로 여겨진다. 나머지 두 가지 조건이 부에 기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배우자가 재산을 잃으면 이혼하게 되는 사례가 많다. 결혼은 애정으로 맺어지는 관계인데 본심은 물질을 사랑한 것이다.

행복이 물질의 양에 좌우되지 않는다면, 남는 건 결국 능력이다.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깊은 만족을 느낀다. 책상에서 단순한 일만 하는 관리직보다 현장에서 능력을 발휘해 일하는 사람은 그 사실을 온몸으로 체감한다. 능력을 발휘하고 상응하는 대가를 받는다면 행복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풍요로움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제적 관점에서도 우위를 가진다. 물질은 잃을 수도 있지만 능력은 타인의 것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며 경험을 통해 더 커진다. 반대로 능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면 무력감에 시달리게 된다. 운동하면 개운한 것도 몸이 실제로 능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대중 영화 속 주인공들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이유도 같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다. 중간에 좌절해도, 결국 극복하고 스스로의 무언가를 이루어낸다. 그래서 관객은 자신이 직접 체험이라도 한 것처럼 감동하는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관객도 성취감, 행복감을 맛본다. 그렇지만 그건 현실이 아니다. 원래 오락은 착각 위에 세워진 세계다. 판타지 속에서 한 발만 벗어나면, 곧 차가운 현실의 바람이 불어온다. 그러나 바로 그 현실 속에서야말로, 우리의 진짜 삶이 존재한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현실에서 자신의 능력을 실제로 발휘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붙잡을 수 있다.

지겨움이 찾아오는 이유는, 내 성장이 멈췄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한다. “일상이 지겹다.”, “사람이 지겹다.”, “도시가 지겹다.” 심지어 ‘삶 자체가 지겹다.’라고 느낄 때도 있다. 지겹다고 말하는 사람은 무엇인가가 늘 똑같고 변함이 없어서 그렇다는 이유를 갖다 붙인다. 그러나 그건 거짓말이다. 지겹다는 건 늘 똑같은 관점만 가지고 살았다는 증거다. 어떤 것, 누군가에 대해 같은 관점만 가지고 있으니 지겨울 수밖에 없다. 자신이 지겹다고 여기는 것의 여러 측면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던 것이다.

지겨운 것은 그 일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지겨움은 자기 성장이 멈춰 있다는 신호다.” 사람들은 어떤 것을 이미 다 안다고 느끼는 순간, 더 이상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우리는 그 무엇도 완전히 알고 있지 않다. 책을 읽어도 재미가 없는 이유는 다 아는 내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책에 나오는 지명의 장소를 지도에서 찾아낼 줄도 모르고, 단어 하나의 의미도 제대로 설명할 줄 모른다. 따라서 한 권의 책을 그냥 훑기만 했을 뿐이지, 이해한 것은 아니다.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겉만 보고 판단하고, 안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 사람은 재미없다.”라는 말이 쉽게 나온다. 하지만 ‘안다.’라는 것은 표면적인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어로 ‘야다.’는 ‘안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단순한 정보 습득부터 육체적 교감까지 포함하는 깊은 연결과 이해를 의미한다. 즉, 아는 것은 깊이 관여하고 연결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안다.’는 것은 내가 아직 아니었던 그것 자체가 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도 그 안의 인물과 상황에 감정적으로 깊게 몰입했기 때문이다. 즉, ‘안다.’라는 것은 마음을 담아 깊게 경험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표면적인 정보 습득을 앎으로 착각한다. 그 결과, 모든 것이 지겨워진다.

지쳤다면 잠시 쉬는 것도 좋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지겨움의 벽 앞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일이다. 지겨움을 느끼는 그 순간이야말로 시야를 넓히고, 관점을 전환할 수 있는 기회다. 그렇게 깊이 들어가다 보면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세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장 세간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세상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말라


“신은 죽었다.” 이 말을 자신의 저서에 남긴 니체는, 단숨에 그리스도교 지역의 수많은 사람을 적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신’은 종교적 신이 아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절대적 기준으로 여겨졌던 기존의 가치 체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19세기 서구는 산업혁명과 함께 경제 중심의 가치관이 확산되며, 종교적 윤리만으로는 사람들의 욕망을 제어할 수 없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신의 죽음’은 곧, 전통적인 절대 가치 체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선언이었다.

그렇다면 현대는 어떤가? 오늘날 ‘신’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법률과 제도, 경제력과 외모(성적 매력)로 대표되는 새로운 가치 기준이다. 이러한 가치 체계를 만들어낸 주체는 근대 국가다. 혁명을 통해 탄생한 국가는 법과 제도를 통해 특정한 가치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맞는 삶을 정상으로 규정하며 국민을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통제한다. 그런 가치 체계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외친 사람이 니체였고, 20세기 중반에 그 흐름을 이어간 인물이 철학자 미셸 푸코였다. 그리고 현대에는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가 이와 유사한 통찰을 제시했다. 그는 국가나 제도화된 시스템이 만들어낸 고정된 가치 체계에 의존하는 삶은, 그 기준이 무너지는 순간 삶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자율성과 회복탄력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외부 기준이 아닌 스스로 설정한 삶의 원칙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늘날 우리는 인터넷으로 연결된 네트워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안에서는 기존 가치 체계에서 파생된 새로운 기준이 SNS를 통해 퍼져나간다. 빠르게 퍼져나가는 기준들은 우리가 스스로의 가치관, 윤리관을 형성해갈 기회를 근본부터 뽑아버린다. 우리는 SNS 속 무책임한 가치 판단에 괴롭힘당하고 있다. 그 가치관에 동조하면 ‘좋아요’ 표시로 환영받고 집단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승인 욕구를 자극하는 동시에 각자의 고유한 가치관을 버리게 한다. 그 결과, 자기실현을 포기하게 되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힘을 잃게 된다. 이는 자신의 개성뿐만 아니라 인생까지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자신을 세간의 시선으로 보지 말라


자기 자신이 싫어지고 부정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 자신을 꾸짖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이때 우리의 시선은 이미 세간의 기준 위에 서 있다. 사회적 잣대와 자신을 비교하며 낮은 점수를 매기고, 결국 자기 자신을 매도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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