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비즈니스와 삶을 바꾸는 해석의 마법
황인선 지음 | 새빛
내 비즈니스와 삶을 바꾸는 해석의 마법
황인선 지음
새빛 / 2025년 9월 / 304쪽 / 20,000원
정체성 모든 개인은 자기 정체성이 있다. 인구 80억 명이 다 정체성이 다르니 세상이 그렇게 다양하고 복잡한 것이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정체성은 죽고, 민주화 정도가 높을수록 정체성은 산에 꽃처럼 꽃이 핀다. 개인 정체성을 해석하려면 사회와의 관계를 보아야 한다. 싫든 좋든 우리는 개인적 존재를 넘어 사회적 존재로 살기 때문이다. 개인의 정체성은 같은 사회라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내가 만일 조선 시대에 태어났다면 아마 우쭐거리는 시골 양반 꼰대로 살았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현대에 살다 보니 국문학을 전공하고 광고회사 다니고 마케팅에 축제 감독도 하다 보니 또래들보다는 힙하고 유연하게 변했다.
개인과 사회를 다룬 글은 꽤 많은데, 나는 그중에서 유대계 물리학자로 독일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간 아인슈타인이 썼던 편지나 기고문을 모은 책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중 ‘사회와 개인’ 장을 소환하고 싶다. 시대를 떠나 저 심오하고 광대한 우주와 같이 살았을 것 같은 현자는 이 주제를 어떻게 보았을까!
“공동체에서 한 사람이 가지는 가치는 무엇보다 그의 감정, 사고, 행동이 얼마나 이웃에 도움이 되느냐에 달려있다. 이 기준에 따라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평가하게 된다. 얼핏 보면, 오로지 사회적 자질로만 인간을 평가하는 듯하다. 그런데 그런 태도는 잘못된 것일 수 있다. 물질이나 정신 그리고 도덕에 걸쳐 우리가 사회로부터 얻는 모든 가치의 근원을 찾아 무수한 세대를 거슬러 오르면, 창조적인 한 개인에 이를 것이 분명하다. 불의 사용, 식용작물의 재배, 증기기관 등은 한 개인이 발견한 것이다. 오직 개인만이 사고할 수 있고, 그 결과 사회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이 내용의 다음 글에서는 당시 유럽 사회에 나타난 개인보다 사회를 중시하는 풍토로 인해 위대한 개인이 사라지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어 인권을 억압하는 징병제도, 이익 집단의 범죄, 대중을 선동하는 신문 등에 대해 비판한다. 4페이지 정도의 기고 글에서 개인을 수식하는 단어와 개인과 대립적인 단어의 사용을 보면 아인슈타인이 개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개인엔 ‘나름의’, ‘가치’, ‘위대한’, ‘창조적인’, ‘영적인’ 등의 수식어가 붙고 이런 개인에 대한 대립어로는 ‘공동체’, ‘사회적 동물’, ‘대중’, ‘선동’, ‘징병제도’, ‘생존 경쟁’, ‘타락 혹은 병적인 징후’ 등을 사용한다. 물론 이것은 물리학자면서 유대인이고 사회에 관심이 많았던 아인슈타인의 해석이다. 이것이 늘 항구적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미 100년 전의 것일 이 글들이 지금에도 꽤 잘 맞는다는 것이다.
지금 개인은 다시 위기에 빠져있다. 정체성이 강한 개인 사회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여러 분야에서 떼로 몰려다닌다. 20~30 젊은 세대가 입는 검은 색 옷 현상이 그를 일부 드러내며 팬덤(fandom)과 밈(meme) 문화도 확장일로 추세다. 팝, 스포츠, 영화, 브랜드, 패션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자기 대신 대리인을 추앙하는 사회! 창의적인 개인 정체성에는 위기이다. 그 요인에는 아인슈타인이 살던 당시와는 다른 것이 끼어들었다. 티라노사우루스처럼 너무나 거대해진 사회와 그 속에서 왜소해지는 개인,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양산되는 소셜 미디어, 슬랙티비즘, 압도적이고 교묘한 마케팅 그물에 걸린 소비 중독, 도전하거나 이타적인 성향보다는 나약하거나 이기적인 개인주의로의 전향 거기다가 AI 에이전트와 그 배후에 있는 초거대 기업의 공격, 가상 화폐로 삶의 가치를 전도하는 금융 자본, 고장 난 시계공 같은 테크놀로지가 있다. 이건 거의 쓰나미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존엄을 해체하고 다시 세우기 위해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말뚝 혹은 등대 같은 영역이 일단 정체성이다. 정확하게는 정체성의 회복.
해석의 마법: 정체성, Identity. 이 영어 용어는 라틴어 ‘idem’(동일한)에서 유래했다. 인간 개인의 정체성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 역사는 아무래도 천부인권 사상의 확립 사건부터일 것이다. 그전에는 무슨 집안의 누구 이런 식이었고, 가부장은 지금은 믿기지 않겠지만 식구의 생사여탈권을 가졌다. 영어 단어 family가 라틴어로 ‘한 주인 남자에 딸린 노예 혹은 밭과 가축’을 뜻하는 famulus에서 왔다는 것만 봐도 고대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천부인권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하늘이 부여한 자연권(natural rights)이다. 국가권력이라 할지라도 침해할 수 없으며 국가가 이를 침해한다면 저항권이 인정된다. 18세기 유럽에서 시민계급의 대두를 배경으로 등장했고 홉스나 로크 등 정치철학자와 루소 같은 계몽주의자들이 주도했다. 이 이후로 개인의 권리도 증대되었다. 이것은 좋은 역사이다. 그런데 우울한 것도 있다.
기술의 발달과 자아의 약화로 정체성의 과잉이나 포장술이 너무 발달해 타자를 향한 보여 주기 정체성을 자기 정체성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점점 심해지는 뽀샵기술과 소셜 미디어에 횡행하는 관종 현상이 이를 드러내며 대리인 사회, 팬덤 사회라는 말이 자주 거론될 정도로 나 아닌 누군가를 대리로 내세워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현상이 그것들이다. 이제 AI가 더 발달하면 딥 페이크로 인해 가짜 자아 경향은 더 심해질 것이며 자기 능력보다 과장된 ‘AI 자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처럼 약해진 자아는 베스트셀러를 살펴보면 더 자세히 드러난다. 베스트셀러는 그 시대 정체성의 거울이니까. 베스트셀러 중에 『아프니까 청춘이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하는 법』,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트렌드 리포트』, 『90년생이 온다』 등의 책들이 있다. 어느덧 약해져 위로받고 싶은 청춘, 열심히 사는 것이 조롱받는 트렌드, 사소함, 우울증, 단기 트렌드를 좇는 얄팍함과 가벼움, 내가 아니라 00년생 같은 집단성이 특이점이 된 세대.
“나는 소중하니까”를 말하지만, 사실은 자기 정체성이 꽤 나약하고 왜곡된 시대 자화상이다. 식당도 단골집보다는 셀카를 위한 맛집 1회 방문을 더 선호한다. 주인도 모르고 기계로 클릭 주문하는 것에 그다지 불만도 없다. 사람 간의 터치는 싫다. 잘 알지도 못하는 ‘친’들에게 과장해서 보여 주면 된다. 더 문제는 청년 주도의 이 현상에 중년도 끼어든다는 점이다. 이들 역시 자기 정체성이 많이 약해졌다는 증거다. 지금 과연 중년들에게 과거 같은 무게감이 있을까? 없으니 채현국 옹 어록, <어른 김장하> 다큐가 화제가 된다. 꿈을 잃은 시대는 정체성도 잃은 시대다.
애정 행동애정은 인류를 지탱해 온 동력이지만 요즘 시대엔 뭔가 이상하게 바뀌었다. ‘러블리(Lovely)’라는 말이 많이 도는데 그 러블리의 대상으로 인기 스타를 사랑하고 반려동물을 인간보다 사랑하는 이들이 확연히 늘었다. 반려동물이 천만 마리가 넘는 걸로 추산한다. 뿐만이 아니다. 애정이 향하는 대상이 이전의 사람, 자식 일변도와는 아주 다르다. 이런 동물 혹은 사물은 본인 정체성을 보여 주는 ‘반려’ 존재이다. 반려는 반쪽 짝, 즉 아주 중요한 동반자를 의미한다. 정체성은 이런 주변 대상과의 관계 맺기 행동으로 드러난다. 존 로크가 “나는 행동이 사람의 생각을 가장 훌륭하게 해석해 준다고 늘 생각해 왔다.”라고 말한 경구에 해당한다.
프랑스와 미국 합작 영화 ‘레옹’(1995)에서 고독한 킬러 레옹은 방에는 아무것도 두지 않고 화초(아글라오네마)만 하나 키운다. 뿌리가 얕은 그 화초가 자신과 처지가 같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자기 정체성 해석. 그에게 어느 날 이웃집 소녀 마틸다가 가녀린 새처럼 찾아온다. 그 소녀로 인해서 레옹의 삶은 확 바뀐다. 마틸다의 존재 정체성도 사실 화초와 같다. 집에서 도망쳤고 갈 곳 없는 소녀! 레옹, 마틸다, 아글라오네마 이 셋의 정체성은 해석하자면 다 뿌리 없는 화초다. 세상과 격리되어 파괴만 일삼으며 살던 레옹은 결국 자화상 같은 마틸다를 살리기 위해 죽음을 맞지만 마틸다를 “내 인생의 선물”로 받아들인다. 킬러들을 피해 도망친 마틸다는 품에 레옹의 분신 화초를 안고 햇볕이 잘 드는 땅에 옮겨 심는다. 마틸다에게 화초는 곧 레옹이며 그래서 레옹은 죽지 않는다.
오스트레일리아 판타지 영화 ‘3000년의 기다림’(2023)에서 알리테이아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에 통달한 서사학자이지만 중년의 고독한 여성이다. 이웃집 수다스러운 할머니들에게는 건성으로 좋은 이웃 역할을 한다. 그녀는 우연히 마법의 병 속에 갇혀 있던 지니를 만나 신비한 관계를 맺는다. 그녀는 그전에는 모든 관계에 절망하고 냉소적이었다. 그녀는 지니에게 빠져들며 인생을 바꾼다. 화초, 지니 등과의 이런 관계 맺기는 통상 애정을 동반한다. 애정을 가지면 마법처럼 그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
1) 어떤 아이가 도화지 전체를 시커멓게 칠했다. 친구들은 그를 이상한 아이라고 놀려댔지만 미술 선생님은 이를 보고도 그냥 두었다. 다음에도 아이는 다른 도화지를 그렇게 시커멓게 칠했다. 다음에도 또, 미술 선생님은 그 아이가 거대한 흑고래를 그리는 중이라고 해석했다. 그래서 그대로 두었다. - 영화 <빅 픽처> 중에서
2) GE의 전설적 CEO였던 잭 웰치는 어릴 때 말을 더듬었다. 선생님이 이 문제로 잭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는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우리 아이는 말을 더듬는 게 아니고 생각이 너무 빨라서 말이 못 따라가는 거랍니다.” - ‘잭 웰치 기사’ 중에서
이런 애정 어린 해석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점점 중요해지는 ‘가난의 해석’가난은 우리가 원치 않는 실제다. 나도 가난만은 피하려고 살았다. 어렸을 때 집안이 갑자기 몰락하면서 가난이 무엇인지 경험했기 때문이다. 가난은 꿈을 작게 만들었고 비겁하게 했고 세계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부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나는 대기업에 다니게 되고 30대 중반 나이에 주식을 하면서 꽤 벌었다고 생각했을 때 주식을 끊었다. 돈 좀 번 지인들이 데이 트레이더로 변신했지만 나는 그 길은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주식으로 돈을 번 지인들이 집을 계속 옮기며 집을 투자 대상으로 삼을 때도 나는 집은 내가 살 집 한 채면 된다고 믿었다. 땅도 사두지 않았다. 그런 투기 행위는 미래에 올 후배들에 대한 부정행위라고 믿었다. 믿었다는 건 나는 그렇게 돈을 해석했다는 뜻이다.
이제 미래 세대는 앞 세대보다 가난해질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가난을 바라보는 관점은 삶에 있어서 혹은 사회 운영에서 점점 중요해진다. 사회가 늘 성장하는 것은 아니고 역사를 보면 역성장도 얼마든지 발생한다. 한 인간으로만 보면 가난할 때도 있고 부를 얻을 때도 있고 다시 가난해질 수도 있다. 개인 탓, 운명 탓, 사회 탓 아니면 이 세 개를 더한 탓도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행동경제학에서 말하는 ‘손실 회피 이론’에 따라 말하자면 언제 올지 모르는 가난에 우선 대비해야 한다. 저축이 답인 것 같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가난에 대한 남다른 해석을 통해 마음의 재앙을 막는 것도 필요하다. 돈 1억을 어떤 사람은 많다고 즐거워하나 어떤 사람은 너무 적다고 불만을 품는 것이 바로 숫자의 주술이다. 지금 한국인 가처분소득은 프랑스 국민 가처분소득보다 많다. 그러나 한국인은 “그 나라는 복지가 잘 돼서 그 정도로도 노후가 가능하지만 한국은 아니다.” 혹은 “복지에 더해 생필품 물가가 한국보다 싸지 않냐?”라며 불만을 표출한다. 이런 사람이라면 늘 적다고 불만을 품게 된다. 선진국 중에서는 특히 한국인이 그렇다. 냄비문화에 소쩍새 이름처럼 늘 “솥 적다.” 한다. 그런 한국인인데 이제 실제 가난까지 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가난을 해석해야 할까?
“가난은 지혜의 어머니다.”라는 셰익스피어의 해석은 ‘지혜가 뭐라고 부가 중요하지.’라고 받아쳐버릴 테고, “가끔 우리는 가난이 굶주리고, 벌거벗고, 집을 잃은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원치 않고, 사랑받지 못하고,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가난이 가장 큰 빈곤이다.”라는 테레사 수녀의 이 말은 “사랑도 받고 보살핌도 받는 부가 낫다는 얘기네.”라고 반박할 것이다.
무슨 명언을 들어도 우리는 가난을 원치 않을 것이다. 피카소는 “가난한 사람처럼 사는 부자가 되고 싶다.”라는 역설의 말을 했는데 이건 피카소처럼 부자가 되고 나서나 할 말로 들린다. 어쨌든 가난은 싫다. 그러나 만일 운명의 장난으로 정말로 가난이 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생각을 해 둘 필요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지 돈이 없다.” 파울로 코엘료의 이 말은 나름 쿨하지 않은가? 혹은 “꿈이 아직 있다면 가난은 오를 만한 사다리다.” 이 해석은 어떤가?
거짓말 사회“사람들은 모두가 절망한 속에서 희망을 말하는 사람보다는, 모두가 희망을 말할 때 절망을 주장하는 사람을 현자로 보는 경향이 있음을 나는 마침내 알았다.”(존 스튜어트 밀)“역사는 언젠가 거짓으로 드러나고, 신화는 언젠가 진실로 드러난다.”(버나드 쇼)
위의 두 말은 모두 역설인데 여기에는 사회의 인지 능력이 어떤지를 보여 주는 뼈아픈 통찰이 있다. 한국의 젊은이 중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꽤 있다. 대만도 비슷하여 자국을 ‘귀도’(鬼島, 귀신 섬)라고 폄훼하기도 한다. 일본도 그런 청년들의 ‘엑소더스 일본’ 현상이 늘고 있다. 이렇게 주장하는 청년들은 그들만의 사회에서는 현자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착각이다. 그 나라들은 헬이 아니다. 최소한 남미나 아프리카 다수 국가 그리고 근세 이전 유럽에 비한다면 말이다. 오히려 천국에 가깝다. 이런 거짓말, 착각, 막말도 해석의 일종이다.
사회엔 수많은 사람이 살며 그들의 해석은 서로 다를 수 있다. 해석만 다르면 좋은데 이런! 사회에 속한 사람들은 거의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은 맑은 호수에 돌을 던지는 것과 같다. 물결이 흔들려 물속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해석이 어렵다. 이는 누군가를 의식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회심리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행위다.
미국에서 중산층 이상 여성을 대상으로 품격 잡지를 내려고 설문조사를 했던 적이 있다. 20년 전쯤이고 의식 조사에서는 유명한 사례다. 대상 여성들은 품격 있는 예술이나 글, 사회 이론 등을 선호한다고 답했다. 순진한 잡지 제작자들은 그에 충실하게 잡지를 만들었다가 1년 만에 판매 부진으로 파산했다. 아니 이 기획자들은 미국의 성 의식을 뒤흔들었던 <킨제이 보고서>도 안 읽었단 말인가! 이탈리아 옴니버스 영화 ‘수치심에 대한 상식’(1976, 코미디)은 이런 거짓을 잘 드러낸다. 포르노 잡지를 반대하는 엘리트층 부부들도 은밀히 다른 도시로 가서 포르노 잡지를 산다는 것을.
모두 거짓말을 한다: 단언한다. 이름부터 도박을 연상시키는 트럼프는 나쁜 사람(bad guy)이다. 그가 아무리 2024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더라도 그건 분명하다. 그간의 기업 경영이나 말하는 태도, 약한 사람을 대하는 비열함, 여자 문제, 상습적인 거짓말, 미국의 법 체제 무시 등 나쁜 짓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나쁜 자가 지금 미국에 필요한 악당인가 보다. 미국이 둘로 나눠지고 있다. 수백 년을 쌓아온 미국의 국제적 평판도 ‘너네도 결국 생존과 국가 이익 앞에선 별수 없군. 그동안 잘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소리를 들으며 추락 중이다.
2024년 미국 대선에서 일론 머스크가 트럼프 지지 유세장에 나타나 이런 미국을 또 한 번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일론 머스크도 “E.S.G의 S는 아마도 Satan의 약자일 것”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나쁜 자이긴 하지만 놀라운 비전과 재치, 엉뚱한 퍼포먼스로 안개를 쳐 왔는데 암살 시도 이후 트럼프 지지율이 상승하자 갑자기 트럼프 지지로 돌변하면서 천연덕스럽게 “만일 트럼프가 지면 저는 망한 거죠.” X드립치며 웃는다. 그게 오히려 사탄의 웃음 같구먼! 요즘 미국 사회가 바이든 노망처럼 뭔가 정신줄을 놓친 나라가 된 듯하다. 한국도 그런 점에서는 만만치 않다. 판사들, 검찰들, 대법관들, 목사들, 정치인들 다 대놓고 거짓을 연출한다. 일말의 반성도 없다. 미국, 한국의 탈진실 동조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