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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는 기쁨 다시 찾은 행복

마스노 슌묘 지음 | 지니의서재


버리는 기쁨 다시 찾은 행복

마스노 슌묘 지음

지니의서재 / 2024년 8월 / 208쪽 / 17,800원





1부 걱정하지 말고 ‘버린다’



자아를 버린다 _ ‘나’를 뛰어넘은 힘 덕분에 살고 있다


상대가 잘되어야 내가 잘된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를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자아’입니다. 자아란 ‘내가, 내가’, ‘나만, 나만’이라는 생각입니다. ‘선(禪)’의 수행은 자아 버리기를 향해 있습니다. 그런데 자아는 정말 골칫거리입니다. 자아를 버리는 것도 힘들지만, 완벽하게 버리는 것은 엄청난 수행을 통해 겨우 도달할까 말까 하는 그런 경지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여러분이 자아 버리기를 지향하며 살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자아로 똘똘 뭉쳤음을 알아채고, 자아와 대척점에 있는 ‘무아(無我)’를 향해 나아가고자 노력하는 나날을 보내길 기원합니다.

무아를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내가 없음’이지만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나는 다른 누구에게도 신세 지지 않고 내 힘만으로 산다’고 여기는 것이 자아입니다. 마치 독불장군 같지요. 반면 ‘나는 주변과의 관계성 안에 존재하며 그들 덕분에 살고 있다’고 깨닫는 것이 무아입니다.

무아를 불교에서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심장과 위장, 소장과 대장은 내 의지로 일하게 하거나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호흡도 스위치처럼 껐다가 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잠을 자고 있어도 심장은 스스로 자기 일을 합니다. 음식이 들어가면 누가 부탁하거나 명령하지 않아도 위와 장이 자기 일을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살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을 뛰어넘은 힘 덕분입니다. 나 자신을 뛰어넘는 또 다른 나를 불성(佛性)이라 하고, 부처라고도 하며, 본래의 자기라고도 합니다. 거기에는 ‘내가, 내가’라거나 ‘나만, 나만’이라는 자아가 전혀 없습니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도리에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나 혼자의 힘만으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엄청나게 성공한 대기업의 사장도, 막대한 부를 쌓은 대부호도, 꽃밭 사이를 살랑살랑 날아다니는 저 나비도, 나비에게 꿀을 주는 꽃도 모두 그러합니다. 혼자서는 생명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삶의 방식은 이처럼 지극히 단순한 사실을 깨달았는가 아닌가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과 진정으로 깨달은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거리가 있습니다. ‘선’에서는 머리로 안 것을 몸을 통해 하나씩 체득해야 한다고 보며, 행동을 갈고 닦는다 해서 ‘수행(修行)’, 불도를 닦는다 해서 ‘수행’이라 합니다. 지식으로만 아는 것은 학문입니다. 그러니 이 책에서 말씀드리는 것도 그저 지식으로 끝내지 말고 하나씩 실천해 몸으로 알아채고 깊이 깨달으면 좋겠습니다.

모서리를 버린다 _ 얼음이 녹으면 어떤 모양이든 될 수 있다


‘물은 네모와 동그라미를 따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릇이 어떤 모양이든 물은 그 형태를 받아들여 온전히 담긴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사람도 교우 관계와 환경에 따라 다른 모습이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물이 얼음이 되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각형 얼음을 둥근 그릇에 넣으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각의 모서리가 그릇 벽에 부딪혀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도 이와 같아 사물에 너무 집착하면 마음에 뾰족한 모서리가 생겨서 원래의 그릇을 따를 수 없게 됩니다. 이쪽에 부딪히고 저쪽에 부딪히고… 갈등과 불화가 생기면서 점점 소모되다가 결국 날카로운 모서리가 생기고 맙니다. 이 날카로운 모서리가 바로 ‘아(我)’입니다.

그런데 얼음이 녹으면 어떻게 되나요? 다시 물이 됩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물론 완전히 얼어 버리기 전에 나한테 모서리가 생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루하루를 돌아볼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내가 얼음이 되었고 모서리까지 생겼구나’라는 생각이 든다면 마음에 과도하게 들러붙은 체지방을 떼어 버리고 움켜쥐고 있던 자아를 내려놓으며 조금씩 모서리를 녹여 나가면 되는 겁니다. ‘얼어 버렸으니 이젠 망했어!’ 이런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요즘 세상은 얼음과 얼음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부딪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정치도,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저마다 모서리를 부딪치고 있기 때문에 갈등과 다툼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처럼 원래의 상태, 즉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한다면 어떤 상황에도 잘 대처할 수 있습니다. ‘나’라는 본분도 잊지 않을 수 있고요.

‘선’의 가르침에 ‘수(水)’나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는 ‘운(雲, 구름)’이 들어간 말이 많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것에 사로잡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 흘러가는 물이나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가만히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 보세요. 자연은 우리의 위대한 스승입니다.

가짜 나를 버린다 _ 꽉 쥔 손을 편다


버리려 해도 쉽게 버려지지 않는 것은 많습니다. 물건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은퇴를 한 사람이 ‘○○사의 상무였습니다’라며, 묻지도 않았는데 당장이라도 말하고 싶어서 입술이 달싹거리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여러분도 지위를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 있습니까?

그런데 직분이나 직위 같은 것은 한때의 모습, 그러니까 가짜에 불과합니다. 가짜 모습에 너무 취해 버리면 설령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더라도 평생 가짜 모습이 진짜 모습인 척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한마디로, 가짜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선종의 경전에는 ‘놓으면 손에 가득 찬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손을 꽉 쥐고 있을 때는 다른 것을 잡을 수 없지만 그 손을 펴면 그다음에 있는 다른 새로운 것을 붙잡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뭐 하나를 꽉 쥐고 있으면 다른 것을 쥘 수가 없습니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니 누구든 쉽게 수긍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어떤가요? 나 자신을 돌이켜 보세요. 어떻게 하고 있나요? 지금까지 내 것이었으니 절대 놓을 수 없다며 더 꽉 쥐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이걸 놓을까 봐? 절대 못 놓는다.’ 이런 생각이 작동하면 주변이 안 보이게 됩니다. 힘을 빼고 손을 펼쳐 보면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가 얼마든지 굴러들어 오는데도 지금까지 쌓아온 직분과 지위를 앞으로도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마음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짜의 모습으로 살면 점점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 가짜 모습을 본연의 모습이라 여길 테고, 본인은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려 하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 사이에서 지독하게 불편하고 괴로울 수밖에 없으니까요.

‘선’은 자신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기며 이것을 ‘로(露, 드러낼 로)’라는 말로 나타냅니다. 그러니 “나를 이렇게 봐 주세요!” 하고 외치는 갑옷을 벗어 버리고 본래의 자신을 찾아 돌아갑시다. 그 과정이 때로는 벌거벗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처럼 조마조마하고 창피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지금까지 조직과 회사에 속해서 역할과 책임이라는 간판까지 등에 지고 살아온 분들에게 은퇴는 큰 기회입니다. 꽉 쥐고 있던 손을 가볍게 풀고 무거운 간판일랑은 내려놓은 채 새로운 인생을 마음껏 즐기면 좋겠습니다.

삼독을 버린다 _ 분노의 감정은 단전에 머물게 한다


불교에는 ‘삼독(三毒)’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열반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근원적인 세 가지 악을 일컫는 말입니다. 바로 탐욕(貪慾), 진에(瞋?), 우치(愚癡) 이 세 가지가 삼독인데, ‘탐진치(貪瞋癡)’라고도 합니다. ‘탐’은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 ‘진’은 타인에 대한 시기와 질투, 미움을 포함한 분노, ‘치’는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올바르게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뜻합니다. 불교에서는 이 삼독을 가능한 마음에 품지 말고 거리를 두고 살라고 가르치지요.

이 삼독의 반대가 ‘무심(無心)’입니다. 무심이란 한 마디로 말하면 ‘빼앗기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를 머리로 이해했다 해도 몸으로 체득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생명이 있는 한 인간은 이런저런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 번뇌에 둘러싸여 살 수밖에 없고, 평범한 사람에게는 나를 얽어매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린다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그 대답은 부처님의 마지막 설교를 훗날 제자들이 정리한 《유교경(遺敎經)》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탐하는 마음이 강한 사람은 끊임없이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만큼 고뇌도 많고, 욕심이 적은 사람은 욕망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고통도 그만큼 적습니다.

만족을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마음이 부유하고, 만족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은혜로운 상황에 있더라도 마음이 가난합니다. 아무리 교양이 있고 사회·경제적으로 단단하게 자리를 잡은 사람이라도 도리를 잊게 되면 마음이 욕심에 휘둘려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고 맙니다. 어느 것에도 빼앗기지 않았던 마음이 참혹하게도 갉아 먹힙니다.

요즘은 특히 ‘진(瞋)’, 즉 분노의 감정이 여기저기에서 불을 맹렬히 뿜어 대고 있는 듯합니다. SNS도 현실 세계도 모두 비방천지입니다. 어떤 논쟁이 일어나면 그 일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우르르 몰려 분노의 감정을 쏟아냅니다. ‘진’은 뭔가에 거슬린 감정이 분노가 되어 분출하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험담이나 무례한 말, 내 존엄을 해치는 말을 들으면 반론하고 싶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난데없이 날아온 공에 얼굴을 맞고 그 충격에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내가 맞은 만큼 똑같이 최대한 세게 공을 던지고 싶은 마음 같은 것이지요.

‘선’에서는 분노의 감정을 머리까지 끌어 올리지 말고 배에 머물게 두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말하는 배는 ‘단전(丹田)’을 뜻합니다. 배꼽 중앙에서 아래로 손가락 네 개를 갖다 댄 만큼의 위치이지요. 분노를 단전에 잘 두는 방법을 한 가지 알려 드릴까요? 마음에 거슬리는 말을 들었을 때를 대비해 미리 어떤 주문 같은 말을 생각해 두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고마워’나 ‘잠깐만’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에게서 공이 세게 날아왔을 때 이 주문을 3회에서 5회 마음속으로 반복하는 겁니다.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이렇게 말입니다.

분노의 감정은 3초면 잠잠해진다고 합니다. 이 주문은 분노를 3초 동안 단전에 머물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거짓말 같겠지만 한번 해보십시오. 신기하게도 100만큼 올라가리라 생각했던 분노의 감정이 절반이나 절반 이하가 됩니다. 꼭 해보시길 바랍니다.

분노에 휩쓸려 나온 말은 겨우 3초를 기다리지 못해 입을 뚫고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번 입에서 나온 말은 도로 물릴 수 없습니다. 그 한순간의 실수 때문에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그 사람을 영원히 잃기도 합니다. 분노의 감정은 머리에 올리지 마십시오. 부디 불에 달궈질 대로 달궈진 주전자가 되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2부 두려워하지 말고 ‘멀어진다’



상대의 모래판에서 멀어진다 _ ‘왜?’라고 생각해 본다


1장에서 말씀드렸듯이 ‘화’는 삼독 중 ‘진’에 해당합니다. 화를 줄여나가는 게 최선이지만 감정의 동물인 우리 인간에게 쉽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만큼 힘들기에 삼독에 포함된 것이겠지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대일의 다툼에는 눈에 보이는 상대가 있습니다. 상대가 했던 말, 상대의 태도에 분노를 억누를 수 없게 되었을 때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요즘은 명확한 상대가 없는데도 가슴속에 화를 품고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사회에 대한 화, 정치에 대한 불만,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분개…. 이러한 것들은 보통 쉽게 해결되지 않는 데다가 다루기가 무척 까다롭습니다.

이처럼 내 안에서 화가 치솟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일단 ‘왜’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보세요. 인수분해를 하듯이 자신에게 일어난 화의 원인을 ‘왜’로 변환해서 세세하게 분해해 보는 겁니다. 그런 다음 지금 고민하거나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왜’의 배경을 하나씩 점검하다 보면 화는 차차 가라앉고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입니다.

한편, ‘모르는 상대에 대한 화’라고 하면 SNS의 비방 댓글이나 악플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SNS에서는 자신의 생활권 안에 있지도 않고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에 대해 과도하게 비난하는 분이 적지 않은 것 같아요. 혹시 내가 SNS에 올린 글이나 이미지를 두고 생판 모르는 사람이 싸움을 걸어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화가 바짝바짝 오르고 분통이 터져 똑같이 합니까?

이럴 때 가장 현명한 방법은 상대의 모래판에 올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전통 씨름인 스모는 양쪽이 같은 모래판에 올라야만 비로소 경기가 성립합니다. 내가 다른 모래판에 있으면 상대는 아무리 겨루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자기 모래판에 서서 이제나저제나 상대가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다 보면 그 사람도 결국 진력이 나고 김이 새서 싸우려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어떤 것에 대한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은, 100명이 있다면 100개의 모래판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굳이 같은 모래판에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SNS는 내 생활을 즐겁거나 편리하게 해 주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여러분, 저는 이렇게 살아요!’라고 전 세계를 향해 내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에 들러붙어 있는 ‘자아’가 노출되기 십상이어서, 불특정 다수를 향해 자신이 아욕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뻔히 드러내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점을 깊이 마음에 새겨서 SNS를 지혜롭게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괴로움에서 멀어진다 _ ‘좋아해’, ‘재미있어’를 원동력으로


나이가 들면 지금의 일이나 지위를, 취미 등을 계속 유지해도 될지 고민할 때가 많아집니다. 그럴 때는 ‘좋아해’라는 마음을 하나의 지표로 삼아 보세요. 그러면 종종 길이 보입니다. 일에서, 취미에서, 인간관계에서 괴로움을 느낀다면 일단은 그 일을 멈추고 잠시 생각해 봐야 할 때가 와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괴롭고 고통스럽다고 당장 그만둘 생각부터 하지 말고, 어떤 식으로 바라보아야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지나갈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손으로 정교한 물건을 만드는 어떤 장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뒤를 이어 그 일을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좋다는 감정이 전혀 없이 ‘가업이니까 어쩔 수 없어. 그냥 해야지 뭐’라는 마음이었답니다. 젊었을 때는 좀 화려한 세계로 나가 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는데 하루하루 눈앞에 있는 일, 해야 할 일에 열중해서 하던 중 어느 날 문득 ‘이 일이 내 천직’이라는 생각이 들더래요. 생각이 완전히 바뀐 것이지요.

꾸준하고 성실하게 눈앞의 작업에 매진해야 장인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기술은 단번에 체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쏟아야 합니다. 그 지난한 과정을 매일 끈기 있게 마주했고, 실제로 점점 잘하게 되면서 즐거움과 재미를 느끼고 좋아하다 보니 장인이 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정성을 기울일수록 ‘싫다’는 마음을 잊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제까지고 부정적인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한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라고 ‘나’를 주어로 하면 ‘싫다’는 마음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끝난 겁니다. ‘싫어, 싫어’에서 ‘좋아, 좋아’로 바뀌는 건 시간문제일 테고, 그렇게 되면 멈추지 말고 계속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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