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능력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비하라
이영균 지음 | 새빛
공감능력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비하라
이영균 지음
새빛 / 2024년 12월 / 288쪽 / 19,000원
내 편 만들기
공감이 내 편을 만든다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가 이뤄진 지 벌써 일 년여가 지나갔다. 다행히 아직은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 오염수 방류 결정이 이뤄졌던 당시 정말 시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일본 정부와 우리나라 정부, 여권, 야권, 시민단체, 과학계 등 어느 한 집단도 같은 소리를 내는 곳이 없었다. 심지어 한 집단 내에서도 다른 목소리들이 들리니, 그야말로 ‘아사리판’이었다.
그렇게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던 이유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론적으로 ‘서로에 대한 공감이 없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축약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한쪽에서는 ‘과학적 결론’인데 왜 믿지 못하느냐고 말했던 반면, 다른 쪽에서는 ‘100% 확실한 과학이 어디 있나?’, ‘과학이고 뭐고 쟤네는 못 믿겠다.’ 등 믿지 못하는 이유도 각양각색이었다. 아무리 근거를 들어서 상대를 설득하려 해도 믿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이들의 대화에 무엇이 부족했길래 서로의 이야기를 믿지 못했을까?
애미: 이번 주말에 뭐 할까?
동일: 글쎄, 특별히 생각나는 건 없네?
애미: 아울렛 가서 쇼핑할까?
동일: 쇼핑은 무슨…. PC방 가서 맛있는 거나 먹으면서 게임 어때?
애미: 맨날 PC방이냐? 지겹지도 않아? 그럼,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나 한 편 보자.
동일: 요즘 볼만한 영화가 없어. 차라리 술이나 마시자.
애미: 또 술이야? 됐어. 난 동은이나 만날래.
동일: 참나, 그러면 난 상인이랑 술 한잔하고 있을 테니 이따 연락해.
애미: 몰라.
오래된 연인이 주말 데이트 일정을 짜는 대화 상황이다. 서로 본인이 하고 싶은 일만 서로 권하고 있으니, 이게 무슨 대화인가 싶다. 얼핏 혼잣말 같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우리 생활에 이런 식의 대화가 절대 드물지 않다. 오래된 연인, 늘 만나는 친구, 가족 간의 대화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커플, 대화가 항상 이런 식이라면 관계가 지속될 수 있는 걸까? 그런데, 이들의 대화가 초창기부터 이랬을까? 그들이 처음 만나기 시작했던 2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애미: 이번 주말에 뭐 하세요?
동일: 특별한 계획은 없어요. 우리 만날까요?
애미: 좋아요. 만나서 뭐 할까요?
동일: 글쎄요, 애미씨랑 함께라면 뭐든지 좋아요. ^^
애미: 그럼, 스타필드에서 영화도 보고 쇼핑도 하면 어떨까요?
동일: 좋네요. 끝나고 술도 한잔하고요.
애미: 좋아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2년 전과 현재의 대화 모두 두 사람이 만나서 하자고 하는 활동에는 별 차이가 없다. 여자는 동일하게 쇼핑과 영화를 원하고, 남자는 술 마시는 것을 선호한다. 그런데 두 사람의 반응은 정반대이다. 2년 전 대화에서는 뭘 해도 좋다는 식이고, 지금 대화는 뭘 해도 싫다는 식이다. 2년 전과 지금, 이들 사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서로에 대한 익숙함? 서로 존중하지 않게 된 것? 두 대화에 근거해서 그 결정적 차이를 지적한다면 ‘상대에게 맞추고자 하는 의지의 유무’라고 하겠다. 연애 초창기에는 상대를 배려하고 뭐든 맞추겠다는 의지가 있었고 지금은 서로 자신에게 맞추라고 강요한다. 상대를 배려하고 맞추겠다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는 이렇게 완전히 다른 대화의 양상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공감’이라는 대화의 포인트가 언급됐다. 앞의 대화를 살펴보면 서로 공감이 이뤄진 대화들은 성공적이었지만 공감 형성이 되지 않은 대화들은 절망적이었다. 그렇다면 공감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좀 더 풀어서 표현한다면 ‘같은 생각을 하는 것’ 혹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정도가 될 것이다. 즉, 대화에서 공감을 얻는다는 것은 남으로 하여금 ‘상대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라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끼면 대화는 자연스럽고 순조롭게 이뤄진다. 반대로 상대가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끼면 대화가 이어지기 어렵다. 즉, 대화에 있어서 공감이라는 것은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대화에 있어 공감이라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또 공감이 없는 대화는 왜 실패하게 되는 것일까? 인간이 남에게 공감을 얻고자 하는 것은 인류의 DNA에 새겨져 있는 ‘갈등의 역사’에 기원을 둔다. 인류는 수천 년, 수만 년 전부터 집단 갈등의 역사를 반복해 왔다. 그런 역사적 학습의 결과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생존 본능이 인간의 DNA에 새겨지게 됐다고 한다. 이는 많은 인류학자, 생물학자들에게 공통으로 인정받고 있는 내용이다.
이에 같은 편임을 확인하고 강화하기 위해 인류가 고안한 방법은 같은 상징 체계와 언어를 공유하고 같은 신화와 철학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즉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다. 생각을 공유하거나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공감이다. 이에 공감은 고대부터 인류에게 새겨져 있는 생존 본능과 연결되어 있다. 공감을 얻어야 생존할 수 있는 셈이니, 그 중요성을 더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대화는 바로 그 공감을 얻기 위한 도구라고 볼 수 있다. 의사소통이라는 것 자체가 갈등을 피하고 서로 협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공감은 결국 대화의 목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즉, 공감을 얻은 대화라면 성공한 대화가 되고 공감을 못 얻었다면 실패한 대화가 되고 만다.
공감을 얻기 위해 생각을 공유하고 그러한 행위를 중요시하는 것은 근대를 지나 현대 세계에 와서도 조금도 퇴색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가치가 더욱 크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이에 문명이 발전할수록 생각을 공유하는 기회와 방법을 어떻게 하면 더 간단하게, 동시에 더 광범위하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인류의 고민은 계속해서 진화해 왔다. 산업혁명 이후 개발되고 확산하여 온 인쇄술이며 20세기 매스 미디어 진화의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후 21세기 인터넷의 발전에 이어 최근 10여 년에 걸친 스마트폰과 소셜네트워킹망(SNS), 유튜브 등의 태동과 확산은 역시 ‘생각을 공유하기 위한 인류의 몸부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한편, 이렇게 진화된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공감이라는 놈에게 기존의 집단 강화의 기능을 넘어 역으로 집단을 잘게 쪼개고 그렇게 형성된 소집단을 강화하는 기능까지 부여하게 되었다. 즉, 단순히 같은 언어권, 문화권으로 같은 집단을 구성하던 과거와 달리 상대적으로 지엽적인 부분에서의 공감 척도에 의해 집단의 경계를 구분 짓기 시작한 것이다. 젠더 집단, 세대 집단은 물론이고 정치적 성향의 차이나 비건 등 식습관 차이까지 수많은 공감 척도가 내 편, 남의 편을 가르는 기준이 되어 버렸다.
거기에 이른바 ‘에코 챔버 효과’로 인해 집단 내에서의 커뮤니케이션과 자기 확신 강화가 점점 더 심화함에 따라 ‘집단 내 공감’이 ‘집단 외 갈등’으로 이어지는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21세기에 공감이라는 것은 집단 내 소속감을 만드는 것은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개인의 생존 요건으로까지 기능하게 돼버렸다.
그런데 공감은 최근에 와서는 또 다른 면에서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AI가 절대 따라하기 어려운 것이 공감이기 때문이다. 공감하려면 경험으로 축적된 독립된 자아를 인식해야 하고 다시 타자를 하나의 존재로 인식해서 그의 말이나 행동, 생각을 자신의 것과 비교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즉 독립된 육체와 정신을 가진 자신의 존재는 물론, 완전체로서의 타인을 인식하지 못하는 AI로서는 경험과 느낌까지 거쳐야 하는 ‘공감’을 따라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AI 시대에 사람의 몸값은 그가 가진 공감능력과 비례하게 될 것이다. 이에 공감이라는 것은 새로운 의미를 지니며 그 중요성이 몇 배나 배가 될 것이다.
자, 이렇게 공감이라는 것이 중요하다면, 그 공감을 얻는 방법, 즉, 남들에게 ‘상대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라고 느끼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냥 맞장구를 치고 동의한다는 표현을 하면 되는 것일까? 혹은 무작정 대화를 많이 하면 공감을 얻을 수 있게 될까?
다시 앞에서 봤던 대화들을 분석해 보자. 남녀의 대화에서는 서로에게 맞추려는 노력이나 의지가 있느냐의 여부가 공감 형성의 핵심 요건이었다. 공감을 형성하는 데 상대의 상황, 혹은 욕구에 맞추려는 의지와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반드시 갖춰야 하는 필요조건이다. 즉, 공감을 얻어 내려면 우선은 상대의 기준에 맞추고 상대의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공감을 얻는 대화는 그렇게 ‘상대에 맞추려는 노력’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같은 상황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자주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다고 본다. 각 국가의 철학과 정치 경제적 여건이 다르고 각 국가 내에서의 정치, 경제, 사회적 집단들의 입장과 상황 역시 다양할 터이니,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상대 국가 혹은 집단의 공감을 얻고 대화에 임하는 것은 중요해 보인다. 그래야 무언가 실리도 얻고 불필요한 갈등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의도적으로 갈등의 상황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이야기를 해보자. 저 논쟁에 참여했던 집단, 내지 사람들에게 서로에게 맞추려는 의지나 노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을까? 그보다는 서로의 이익, 혹은 갈등 관계, 믿고 싶은 근거 등에만 의지해서 대화했다고 본다. 그러니 당연히 공감이 형성될 수가 없었을 것이고 공감이 없는데 서로를 믿게 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서로 맞춰가려는 의지가 없는데 무작정 대화만 많이 한다고 공감이 생길 수는 없다.“공감을 얻는 대화는 내 편을 만들어 내고 공감 없는 대화는 적을 만들어 낸다.”
가화만사성, 갈등 줄이기
사랑을 지키려면 ‘왜’냐고 묻지 마세요얼마 전, 나이 차이가 조금 나는 처사촌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요즘 결혼식’답게 주례도 없고 신부 아버지가 성혼선언문을 낭독하고 신랑 어머니가 덕담 형식의 축사를 하는 등 지루할 틈이 없는 결혼식이었다. 그런데 신랑 어머니의 덕담 중에 이 커플에 대한 특이한 이력을 하나 듣게 됐다. 8년을 사귀면서 단 한 차례도 싸운 적이 없다는 것이다. 연애부터 30여 년을 지내면서 셀 수 없을 만큼의 크고 작은 다툼을 겪어온 나로서는 그야말로 경이로운 이야기였다. 순간 저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지만, 동글동글 사랑스러운 신랑 신부의 밝은 표정을 보면서 이들이 정말 성격도 서로 잘 맞고 서로를 잘 이해해 줘서 갈등도 없었나 보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저 커플을 부러워하는 것은 일단 뒤로 하고 한발 더 나아가 보자. 부부나 연인 간 항상 평화롭게만 지낼 수는 없다 치고 대화 중의 갈등이라도 줄일 방법은 없을까? 한 가지 나름의 비책이 있다. 여기서는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소연: 아니, 쓰레기 좀 버리라 했더니 ‘왜’ 안 버린 거야?
순욱: 아! 깜빡했네.
소연: 양말은 ‘왜’ 또 뒤집어서 벗어놨어?
순욱: 어… 알았다고 잔소리 좀 그만해.
소연: 잔소리? 당신은 집안일 하나도 안 도와주면서….
순욱: 아니, 밖에서 힘들게 일하고 들어왔는데 집안일도 해야 해?
소연: 지금 돈 벌어 온다고 유세 떠는 거야?
순욱: 뭐라고?
이후 대화는 굳이 들어보지 않아도 짐작이 갈 듯하다. 한바탕 시끄러운 전쟁이 벌어지거나 조용한 냉전이 펼쳐지겠지.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아차렸을 듯하다. 연인이나 부부의 상당 부분 말다툼이 ‘왜’에서 시작된다. 편안한 사이일수록 자주 쓰게 되는 ‘왜’가 왜 갈등을 일으킨다는 걸까? ‘왜’라는 표현은 일면 단순히 이유를 묻는 의문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일상생활에서 대부분의 경우 ‘왜’라는 표현은 상대를 질책할 때 쓰는 표현이다. 생각해 보라. “왜 그런 말을 했냐?”, “오늘 왜 그러냐?”, “왜 안 사 왔냐?” 등등 상대 행위나 표현에 대한 반문, 내지 질책의 의미이다. 평소 무심코 사용했던 ‘왜’라는 표현이 갈등의 씨앗이라니….
위 대화에서 소연은 순욱이 집안일을 거들거나 두 번 일하게 하는 것을 삼갔으면 하는 의미에서 저런 표현을 썼을 것이다. 그렇다면 목적은 순욱의 행동이나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저 대화를 통해서는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반발심만 불러일으켜서 오히려 일을 더 안 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말을 꺼내기 전에 ‘말의 목적’을 생각해 봐야 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저 경우 아내는 어떻게 얘기했으면 좋았을까? 아내가 ‘말의 목적’을 먼저 생각하고 대화를 꺼낸 경우이다.
소연: 쓰레기 좀 버려 주지. 너무해.
순욱: 아! 깜빡했네. 미안해.
소연: 양말도 뒤집어서 벗어놓았네.
순욱: 아 참! 그것도 미안….
소연: 담엔 잘 해주리라 믿어.
순욱: 그래, 쏘리쏘리. (갑자기 재활용 쓰레기 분리 작업에 나선다.)
‘왜’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말하면 상대적으로 표현이 부드러워진다. ‘왜’를 쓰지 않으려 하다 보면 대체 표현을 찾는 과정에서 가능하면 긍정적인 표현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위 대화를 보면 ‘왜’라는 표현으로 상대를 질책하기보다는 본인의 서운한 감정을 드러냄으로써 남편으로 하여금 미안한 감정을 갖게 만든다. 인간은 미안한 상황을 해소해야 할 상황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아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을 수정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결국, 소연은 그저 ‘왜’라는 단어를 쓰지 않음으로써 원하는 ‘말의 목적’을 이루게 된 셈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어떤 말이든 나름의 목적을 갖는다. 상대를 설득하거나 변화시키고자 하는 목적, 남에게 뭔가를 알려주려는 목적, 다른 사람을 웃겨 보려는 목적, 나를 보호하고자 하는 목적, 적을 도발하거나 기분을 나쁘게 만들려는 목적 등등. 그런데 우리는 종종 그 목적과 상관없이 심지어는 목적에 반하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대화하면서 그 대화의 목적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야 차라리 말을 건네지 않는 것이 낫지 않을까? 괜히 말을 꺼내서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일을 그르쳐 버릴 바에야 말이다. 말을 꺼내기 전에 1, 2초 정도는 반드시 그 ‘목적’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나저나 설마 ‘왜’라는 말 하나 삼간다고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며 반문하는 독자도 있을 듯하다. 믿지 못하겠다면 한번 해보시길 권한다. 특히나 평소에 말다툼이 잦은 커플이라면 이 하나의 변화를 통해 다툼이 부쩍 줄어드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사랑을 지키고 싶다면 ‘왜’냐고 묻지 말라. 연인이나 부부처럼 가까운 관계라면 굳이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아도 하고자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서로 잘 알 것이므로.
‘왜’의 사슬을 끊는 방법은 ‘왜’를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다. ‘왜’를 남에게 돌리면 원망이 되지만 자신에게 돌리면 성찰 내지 반성이 된다. 물론, ‘왜’를 자신에게 돌리는 행위를 왜 해야 하냐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겠다. 왜 내가 사슬을 끊어야 하냐고…. 그렇다면 묻고 싶다. 화를 분출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가? 나의 경우 남에게 화를 내고 나서 기분이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대부분 화내고 난 후에는 후회가 됐다. 가능하다면 화를 내지 않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한 것이다. 남에게 ‘왜’는 갈등을 부르고 나에게 ‘왜’는 평화를 부른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