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쇼(The Show)
탁현민 지음 | 메디치미디어
더 쇼(The Show)
탁현민 지음
메디치미디어 / 2024년 9월 / 272쪽 / 21,000원
Part1_발상에서 기획까지
이야기를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건 무엇일까? 군대? 황금? 깃발? 아니, 이야기다. 훌륭한 이야기만큼 강력한 건 세상에 없다.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고 어떤 적보다도 강하다.”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 시즌 8 마지막 에피소드에 나오는 난쟁이 ‘티리온 라니스터’의 대사다. 한마디로 ‘이야기를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 서사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어떤 문장보다 간결하고 설득력 있는 구절이다.
서사는 크든 작든 힘을 갖는다. 사진, 그림, 노래, 영화, 공연 등 그럴듯한 작품에는 반드시 그럴듯한 서사가 있다. 서사가 있다면 한 장의 사진. 한 폭의 그림에서 대하소설이나 10부작 드라마, 장편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서사의 힘은 이상을 현실로 느끼게 해주고 현실을 이상 세계로 인도한다. 설화가 만들어지고 전설이 된다. 서사는 이야기인 동시에 흐름이다. 사건과 사건의 연쇄, 사람과 사람의 만남,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과 같은 구조도 서사의 부분이다.
서사에 능숙해지려면 모든 생각을 이야기로 만드는 연습이 필요하다. 어려서부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면 연습이 꼭 필요하지는 않다. 평소 이야기를 제대로 기억만 하고 흐름을 따라가는 집중력만 벼리면 된다. 그러면 서사에 능숙해질 수 있다. 이야기를 많이 들을수록 이야기를 잘 만들게 된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만들려고 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사실’에 주목한다. 사실이 가진 힘 때문이다. ‘엄연한 사실’이라는 전제는 이야기의 힘을 끌어올린다. 하지만 서사가 꼭 사실로만 만들어질 필요는 없다. 허구일지언정 그것을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사실로 만든 이야기보다 더 몰입하게 하고 공감하게 된다. 무엇보다 ‘진실’에는 사실로는 채울 수 없는 의지와 바람이 담기기 마련이다. 창조와 상상의 힘이 더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과 다른 드라마에서 울고 웃고 절망하고 분노하고 화해한다.
내가 만든 최고의 서사는 ‘판문점 도보다리 회담(2018)’이다. 소소한 장치들은 차치하고서라도 남과 북 두 정상의 첫 만남에서 마지막 이별까지 모든 시퀀스는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오전 9시 39분에 시작된 한나절 일정이 마무리된 시간은 저녁 9시 38분. 모든 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것도 의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남북 두 정상이 분계선에서 처음 만나 악수를 하고 남쪽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한 뒤, 다시 북쪽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했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이 정전 65년 긴 세월을 넘어 북측 땅을 밟았다. 이어 김정은 위원장이 남측 땅을 밟고 내려왔다. 5천 년을 함께 살았던 우리 민족의 노래 <아리랑>이 연주되는 가운데 두 정상은 판문점을 한 바퀴 돌며 이동해 의장대 사열을 받았다.
남북 정상회담은 시차를 없애는 일부터 시작했다. 이전까지 북측은 표준 시간을 우리보다 30분 빠르게 설정해놓았지만 이날 회담에서는 이 시차를 동일하게 하겠다고 선언했다. 공식 회담 이후 일정은 도보다리 산책이었다. 이 일정은 결국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카메라 한 대가 원테이크로 길게 뽑았고 오디오는 이름 모를 산새 소리뿐이었지만, 이 장면에 전 세계가 주목했다. 회담이 마무리된 후에는 평화의집을 배경으로 서서 공동선언을 했다. 되돌릴 수 없는 평화를 약속하는 자리였다.
만찬장에서는 남한 어린이가 <고향의 봄>을 불렀고 모든 참석자가 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리고 마지막 환송 행사가 이어졌다. 서태지의 <발해를 꿈꾸며>를 배경으로 착석한 남북 정상은 <아리랑>, <고향의 봄>, <새야새야 파랑새야>를 함께 들었다. 그날 하루는 통일이었다. 하나의 봄이었다. 너무 완벽해서 비현실적이었다. 나는 이 서사에서 우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끝까지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남북의 시련, 갈등, 반목, 전쟁, 상처….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뛰어넘는 동질감을 찾아내 일정을 만들고 상징을 만들고 감정을 만들었다. 이것이 4월 27일 판문점 회담의 핵심 서사였다.
남북 정상회담 행사의 주제가 ‘민족 동질감 찾기’였다는 것은 언뜻 당연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숨 가쁘게 돌아가는 회담 일정에 맞춰 프로그램을 준비하다 보면 핵심 주제가 생각나기는커녕 당장 처리해야 할 일에 치여 그저 사고나 없길 바라는 마음이 된다. 작은 소품과 만찬 메뉴, 꽃다발 속 꽃말까지도 의미가 부여되고 해석되는 모든 일정이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주제를 놓치지 않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정에서 핵심 주제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은 동질의 서사가 내게 오랫동안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외가는 평양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었다. 매해 여름방학을 할머니 댁에서 보냈던 내게 외할머니는 평양 풍경과 동네 이야기와 피난 내려올 때의 영화 같은 일들을 내가 잠들 때까지 이야기해주셨다. 할아버지가 만주로 일하러 간 사이에 전쟁이 터져 남으로 내려오던 할머니는 혼자 엄마를 업고 다섯 살 난 삼촌의 종아리를 때려가며 걸어가다가, 마침 정차된 기차 지붕 위로 힘들게 올라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고 한다. 남편 없이, 일가 없이 아이 둘을 안고 찬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니 뼈가 시리고 얼음이 몸에 배기는 느낌이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하염없이 출발을 기다리는데 삼촌이 두르고 있던 이불을 기차 아래로 떨어뜨렸고, 마침 아래 객차에 있던 누군가가 떨어지는 이불을 받아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위로 올려주었는데, 그게 만주에 갔던 남편, 내 할아버지였다는….
할머니의 평양 이야기와 피난 이야기는 너무나 영화 같아서 자기 전에 항상 이야기해달라고 조르다가 잠이 들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점점 새로운 에피소드들이 추가되어 단막극에서 미니시리즈, 미니시리즈에서 시즌제 드라마로까지 확장되었다. 하지만 전편 모두에 담겨 있는 메시지는 하나였다. “전쟁 전에는 사람들이 모두 좋았어. 서로 위해주고 아껴주고, 왜정 때만 해도 전쟁 때 같지는 않았어. 모두 한집 사람 같았어.” 2018년 판문점 회담과 선언을 준비했던 내 심연에는 돌아가신 외할머니 이향옥 여사의 서사가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보고 싶다. 그 끝나지 않던 이야기를 한 번 더 듣고 싶다.
새로움을 베다고정관념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꽤나 합리적이다. 여러 차례 반복을 통해 경험한 경우나, 기존에 신뢰하고 있던 사람에게서 나온 믿을 만한 조언 등이 반복해서 쌓이게 되면 어느 순간 고정관념이 형성된다. 이는 어떤 조건에서도 바뀌지 않는 신념과도 같다. 고정관념은 안전하다. 고정관념에 따라 일하면 대부분 앞선 결과와 같은 결과를 내거나 비슷하게 될 확률이 높다. 크게 망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고정관념을 가장 신뢰하는 집단은 공무원이다. 공무원은 전례와 관례를 확신의 근거로 삼는다. 공직 사회는 이 두 가지를 가장 신뢰한다. 전례는 해왔던 대로 되풀이하는 것이다. 가장 안전하고 검증되었으며 대단치는 않지만 크게 문제 될 것 없는 결과를 보장한다. 관례는 전례와 비슷한 의미를 갖지만 좀 더 관습적이며 본질에 가깝다. 이번 사례는 다음번의 전례가 되지만, 이번 사례가 무조건 관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어공(어찌다 공무원)’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정식 명칭은 별정직 공무원. ‘늘공(늘상 공무원)’이 아닌 어공이었지만 다른 공무원들과 마찬가지로 전례와 관례를 요구받았고 언제부턴가 그 안에 갇혔다.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쳤지만 대부분 실패했고 아주 가끔 성공했다. 매번 참신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모든 기획자는 항상 참신함을 요구받는다. 국가 기념식이나 대규모 국제 행사, 신인 가수의 첫 데뷔 무대, 신제품 설명회 등 전부 마찬가지다. 기획자는 언제나 새로움을 요구받는다.
새로움, 즉 ‘참신(斬新)’에서 ‘참(斬)’은 목을 베거나 끊어낸다는 의미로 쓰인다. 무엇을 끊어내는 것일까. 당연히 과거 사례, 전례, 관례를 끊어내는 게 참신함 아닐까. 하지만 ‘신(新)’은 새로움을 뜻한다. 그렇다면 참신은 놀랍게도 ‘새로운 것을 끊어내는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참신’에서 ‘신’을 갑골문자로 풀어 ‘고목(古木)’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새로움을 행한다는 동사가 아니라 ‘오래된 나무’라는 명사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때는 ‘나무를 패다, 쪼갠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오래된 고사목을 잘라내면 그 속은 겉껍질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 질감, 용도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참신’은 ‘새로움을 베어내는 것’이라고 해석할 때 훨씬 풍부한 해석이 가능하다. 새로움이란 언제나 과거의 유산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새롭다고 할 때 그것은 과거의 무엇으로부터 새롭다는 것이다. 참신한 기획이란 언제나 전례와 관례에 빚을 진 채 만들어진다. 이전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참신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천지 만물의 창조와 진화 등 모든 역사가 그렇다. 기획자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그 무엇 역시 이미 있던 것들에 크게 신세 질 수밖에 없다. 발상의 새로움을 이야기할 때 늘 꺼내는 말이 있다. “달걀프라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달걀을 깨야 한다.” 이 말을 ‘달걀 껍데기를 깨부수자!’는 말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프라이는 껍질 안에 있는 달걀에서 시작된다. 세상에 껍질 없는 달걀은 없다. 껍질이 없으면 생명도 없다. 달걀의 껍질이란 결국은 깨고 나와야 하는 벽이고 열고 나와야 하는 문이지만, 껍질은 달걀의 새로운 변모를 막아서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다른 세계로 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새로운 발상을 가두는 관례를 면밀히 분석하다 보면 오히려 본질을 탐구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일례로 대통령이 임명장이나 훈장을 수여할 때를 살펴보면 비서실장부터 청와대 주요 수석들과 비서관들이 대통령을 중심으로 도열해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좀 과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지나치게 권위적이었다. 대통령의 권위가 이렇게 과한 모습으로 국민에게 비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먼저 대통령을 중심에 놓고 도열하는 전례를 찾아보았다. 한국의 대통령 의전 대부분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요 인사 임명장이나 포상 수여 시 열 맞춰 배석하는 전례가 그때부터 있었다. 대통령의 권위를 낮추고 대상자를 예우하는 형식을 고민했다. 모두 기립해 있던 공간에 의자를 놓고, 대상자 가족을 초청하고, 그 자리에 배석하는 관계자들은 의전 서열이 아니라 업무와 관계있는 사람들로 우선순위를 정해 자리에 앉도록 형식을 만들었다. 새로운 형식을 만들고, 그 형식을 승인받기 위해 보고했더니 당장 나오는 말이 전례는 어떠했는지와 관례는 무엇인지였다.
“군사독재 시절인 박정희 대통령 시기에 전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관례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임명장과 포상은 대상자의 공적을 치하하는 자리인 만큼 대상자가 가장 빛나고 예우받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관례가 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경우 최고 훈장인 명예 훈장 수여자에게는 대통령이라도 먼저 경례하도록 규정되어 있다는 점도 참고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형식은 승인되었다. 이전 정부의 전례를 살펴보고, 다른 나라의 사례도 참고해 본질에 충실한 관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결과였다. 모든 변화는 기존의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니 기존 형식과 내용을 얼마나 이해하는지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데 크게 기여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자.
관찰의 힘, 상상의 힘많은 예술가가 관찰의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전에 따르면 관찰은 사물이나 현상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색이 전부다. 색이 맞으면 형태도 맞다. 색이 모든 것이고, 색은 음악처럼 떨림이 있다”라고 말했던 마르크 샤갈의 탁견도 오랜 관찰에서 나온 것이고, “사물이나 현상은 두 가지 방식으로 볼 수 있다. 발견할 때와 작별할 때”라고 말한 산도르 마라이도 관찰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예술가들만이 아니다. 오랜 세월 한 가지를 주시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들을 보고, 읽고, 생각할 줄 안다. 평생을 바다에서 낚시만 해왔던 제주 한림 쥐치 전문점 사장 ‘만수 형님’은 파도 모양과 저녁노을의 붉기만 가지고도 다음 날 날씨를 기가 막히게 맞춘다. 만수 형님의 절친 ‘관준 형님’은 아직 여물지 않은 옥수숫대만 봐도 옥수수가 몇 개나 달릴지 알고, 제주 하귀에서 치킨집을 하는 ‘제창이 형님’은 생닭 한 마리에 몇 조각이 나올지 훤하다.
신기한 것은 오랫동안 한 대상을 관찰하다 보면 그 대상과 비슷해지는 모습을 볼 때가 종종 있다. 물론 만수 형님이 쥐치를 닮고, 관준 형님이 옥수수를 닮고, 제창이 형님이 치킨을 닮아간다는 뜻은 아니다. 소설가 한창훈 선생은 “사람은 오랫동안 바라본 것을 닮는다”고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 문장에서 한참 머뭇거렸다. 나는 무엇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살았을까. 잘 떠오르지는 않지만 모쪼록 그게 아름다운 것들이었으면 좋겠다 싶다.
관찰은 오랫동안 단순히 쳐다보는 것이 아니다. 저마다 관찰법이 다르겠지만 훌륭한 관찰가(?)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애정을 가지고 본다는 것이다. 그냥, 어쩔 수 없이, 뭔가 발견해내야 해서 바라본다면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발견한 것과 나와의 연관성을 생각해봐야 한다. 자신과 무관하지 않아야 관찰의 심도가 더해진다. 지금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야 한다.
작은 것, 사소한 문제 속에 담겨 있는 엄청난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상상력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다만 작게 나타났을 뿐입니다. 빙산의 몸체를 볼 수 있는 상상력을 키워야 합니다. 세상에 사소한 것이란 없습니다. 다만 사소하게 나타났을 뿐입니다. - 신영복, 《담론》 중에서
관찰이 깊으면 ‘통찰’이 된다. 소중한 깨달음을 관찰자에게 선물한다. 절대 발견하지 못할 형태와 색을 알려주고 의미를 찾게 해주고 해석할 수 있도록 단서를 제공해준다. 그저 오랫동안 보아왔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수준을 넘게 된다. 여기서부터가 관찰의 놀라운 힘이다. 한 마리 제비를 보면 이제 완연한 봄이 왔다는 것을 알게 되듯 관찰의 결과는 우리 생각을 곧장 상상력으로 밀어붙인다. 그리고 이때 상상력은 허황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분명한, 다부진 근육을 가진 상상력이다.
■ 바람이 분다
문재인 대통령 임기 말에 친환경 대체에너지가 화두였다. RE100(기업이 사용하는 전력 100퍼센트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캠페인), 탄소중립 비전 등이 선언되었고, 대통령이 직접 기후목표 정상회의와 P4G 국제 정상회의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하지만 닥쳐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구체적인 일정을 짜고 행사를 연출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관찰하고 살펴볼 대상을 찾기조차 어려웠다. 그나마 연설 중심의 국제회의 준비는 해왔던 대로 할 수 있었지만, ‘친환경 대체에너지’를 머나먼 미래에 남의 나라 일처럼 받아들이는 국민에게 설득력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난망한 일이었다. 소위 ‘그림’이 안 그려졌다.
그러던 중 신안에 해상풍력발전소를 만들고 친환경에너지 사업을 공표하는 기획을 해야 했다. 거대한 풍력 발전기가 힘차게 돌아가면서 생산한 깨끗한 전기가 공급되는 아름다운 미래를 구현하면 되겠지 싶었는데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그 당시(2020년)는 모든 사업이 아직 계획으로만 있었던 때라 보여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대통령 연설만 전달되면 아무 반향도 없을 것이 자명했다. 몇 번이고 실무자를 현장에 보냈지만 보고받은 내용에는 장소도, 프로그램도, 이미지도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나라도 현장에 가서 다시 확인해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지자체나 관계 기관이 추천하는 장소를 돌아보고, 현지에 가기 전 생각했던 장소까지를 답사했지만 전부 그저 그랬다. 친환경 미래 에너지의 영감을 주기는커녕 황량하기만 했고 실체가 없으니 뜬구름 같은 설명뿐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다 가고 어두워질 무렵, 해상풍력단지가 건설될 예정 지역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임자대교로 향했다. 아직 개통 전이라 일반인 통행이 차단되어 있었다. 거기서 관계자가 설명하는 저 멀리 바다를 한참 응시했다. 어서 그럴듯한 생각을 해내야 한다는 조바심에 초집중하여 바라보았지만 그럴듯한 생각은 나지 않았고 결국 어둑해져 귀경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