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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예찬

코스티카 브라다탄 지음 | 시옷책방


실패 예찬

코스티카 브라다탄 지음

시옷책방 / 2024년 6월 / 400쪽 / 22,000원





타락한 세상에서



서투름 예찬


시몬 베유는 어려서부터 신기한 역설을 체화했다. 그는 비범한 가능성을 지닌 아이인 동시에 가망 없는 약골이었고, 영재인 동시에 위험할 정도로 병약한 아이였다. 즉, 강철이자 먼지였다. 베유가 어린아이였을 때 그녀를 치료했던 어느 통찰력 있는 의사는 ‘베유가 너무 특별해서 계속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예상과는 달리 베유는 계속 살아갔지만, 위태로운 존재를 이어가며 불안한 삶을 살았다. 전기 작가가 관찰하기로 베유는 “유아기부터 앓았던 만성 질병이 그의 생명을 위태롭게 했고, 이런 나쁜 건강 패턴에서 결코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성인이 된 베유는 이런 불안정성을 원시적인 실패와 연관 짓는다. 유아기에 겪은 건강 문제를 떠올리며 베유는 특유의 자기 비하를 담아 이렇게 말한다. “C’est pourquoi je suis tellement ratee.”-그래서 내가 실패한 거야.

베유는 그 말을 농담으로 했을지 모르나 실패는 결코 웃을 일이 아니다. 실패는 그 이름을 내뱉자마자 자체적으로 생명을 얻는다-부지불식간에 당신 집에 들어와 함께 사는 것이다. 베유의 신체적 불안전성은 나이가 들수록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점점 더 큰 고통을 야기하며 베유 곁에 머물게 될 터였다. 하지만 고통스러울수록 통찰력은 더 커졌고, 베유는 엄청난 고통을 겪었기에 그 통찰력은 엄청난 경지에 이르렀다. 그 좋은 의사가 어린 베유에게서 알아본 것이기도 했던 극도의 취약성과 비범한 통찰력의 조합은 결국 베유를 규정하게 된다. 베유는 그 연관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베유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편두통에 대해 모친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제가 두통을 겪어온 일을 속상해 하시면 안 됩니다. 두통이 없었으면 하지 못했을 일이 많았으니까요.”

일평생 시몬 베유는 서툴렀고 물리적인 세상에 대처하며 상당한 노력을 해야 했다. 귀스타브 티봉은 베유의 서투름이 ‘그녀의 선의와 동등할 뿐이었다-결국에는 후자가 전자를 이겼다’라고 회상했다. 지능과 도덕성은 남들보다 뛰어났으나 몸을 써야 하는 기술에선 대개의 사람에 못 미쳤으니 분명 이보다 잔인한 아이러니는 없을 것이었다. 베유는 글 쓰는 데도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으며 동급생보다 뒤처질 때도 많았다. 탁월한 지능을 지녔어도 베유의 어린 시절은 쓰기와 그리기에서 스포츠, 거리를 걸어가는 일까지 모든 실용적인 일에서 동급생을 따라잡으려는 절박한 노력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물질(Corps Etranger)


당신이 서투르면 물리적 세계와의 모든 접촉은 당신이 불완전한 상태, 즉 당신의 일부가 없거나 잘못 만들어졌거나 부적절하게 설계된 상태로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비슷해 보이고 대부분의 측면에서 당신을 차별화하는 누락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그들과 같다. 당신은 당신의 몸을 사용하여 무언가를 성취하려고 할 때마다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야기되는 불편과 항상 따라다니는 수치심은 속세에서 당신 존재의 거의 모든 측면을 형성한다.

서툴다는 건 살에 가시가 박힌 채 태어나는 것이고, 그 가시는 빼낼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도 그 가시를 가지고 살아갈 길을 힘들게 찾거나 심지어 그 가시와 친구가 된다면, 그로써 받는 보답이 고통을 보상해준다. 사물의 흐름 속에 무리 없이 끼어들지 못할 때, 세상에 대처하는 방식이 죄다 불편을 가져올 때, 당신은 세상의 경로를 관찰하고 작동을 점검하는 고유한 입장에 놓이는데, 그 통찰력은 상당한 것이다. 당신의 서투름은 당신과 세상 사이에 거리를 만들고, 통찰력의 깊이는 그 거리에 정비례한다. 고통이 크면 클수록 안목이 더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한계에 이르러 가시와 살이 하나가 되면 통찰력은 묘한 경지에 다다를 것이다. 가시가 당신을 망치지 않았다면 대개의 사람보다 현명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은 좀 자세히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그 과정은 자신이 무능하다는 불편한 느낌으로 시작하고, 어떤 신체적인 과제를 해나가려 애쓰는 동안 자신의 신체가 그 과제를 달성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의 육체는 세상의 필수적인 부분이며 그 안에서 원활하게 작동하게끔 되어 있다-물속의 물고기처럼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보아하니 당신 몸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어떤 중요한 점에서 당신 몸은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상태이다. 어떤 치명적인 불일치가 당신 몸을 영구적으로 잘못된 각도에 놓아 당신은 손을 놓아야 하는 곳에서 손을 놓을 수 없거나, 손과 눈이 협응하지 않거나, 눈과 뇌가 협응하지 않거나, 적절한 양의 힘을 가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너무 많은 힘을 가하거나, 꽉 잡고 있어야 할 때 놓치거나, 너무 꽉 잡아서 부러뜨리거나, 그 밖에도 다른 창피한 방식으로 실패한다.

이 비극적인 불일치의 전개를 경험하며 당신은 자신의 몸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되는데, 당신 신체와 당신을 둘러싼 물리적인 세상의 조화와 당신 신체의 각 부분 간 조화가 필요하나 부족해 보이고-사지가 제각기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의 몸이-또는 당신 몸 일부가-말을 듣지 않고 반항하며 자주권을 선언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렇게 당신 안에서 당신의 통제가 거의 미치지 않는 영역, 진정한 당신이 아닌 당신의 일부분을 발견하는 것이다. 분명히 그 반항적인 파벌을 어떻게든 진압하겠다는 희망으로 당신 몸을 훈련하기 위해 애쓸 수도 있겠지만, 그걸 완전히 성공하는 법은 결코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래서 종국에는 내부의 적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서투름은 실패의 기이한 형태이고, 이 실패는 당신의 것인 동시에 당신 것이 아니다. 이 실패가 당신의 것인 이유는 실패하는 사람이 당신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아무 어려움 없이 달성하는 일을 당신은 운동 협응이 부족하여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실패는 당신이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당신의 일부분 탓이므로-물론 당신이 아닌 반항하는 부분 말이다-엄밀히 말하면 당신의 실패가 아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 결과로-부끄러움, 창피함, 모욕이나 그보다 더한-고통을 받는다. 시몬 베유가 평생 그랬듯이 자신의 잘못은 그다지 없는데도 말이다.

점차적으로 서투른 사람들을 식민지화하고 그들 삶의 윤곽을 결정하는 이 실패는 인간의 실패라고 하기엔 적절하지 않으며 외부 세계의 사물에 속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인정사정없는 사물성이 인간에게서 보일 때 아주 불안해지는 것이다. 당신도 인간이지만, 인간은 사고나 판단의 오류, 기억이나 애정의 오류, 도덕적 결점 등 ‘인간적인’ 실패만 해야 한다. 하지만 통상 물리적 세상에 속하는 기술적 오작동 같은 실패를 당신이 드러내면 당신은 타인을 불안하게 만드는 독특한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것이다. 당신은 소름 끼치는 존재일 게 분명하다. 남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을 멀리할 것이고 결국에 당신을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존재’로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은 그들의 세상을 벗어나 있다.

베유는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베유는 “나는 생사를 함께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자신의 친구 뻬트르망에게 털어놓았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인간은 이를 어느 정도 감지해왔다.” 뻬트르망은 베유의 신체적 서투름과 세속성 간 연결고리를 직관했다. 베유의 서투름은 ‘우리와 같은 조악한 재료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라고 썼다.

적나라한 상태


여타의 인간 경험과는 달리 실패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지 이해하고,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이해할 고유한 입장에 처하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패의 경험은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적나라한 상태로 볼 기회를 준다. 우리의 생존 본능은 보통 우리가 이 세상 속 우리 존재를 견고하고 마음 놓을 수 있으며 파괴되지 않는 것으로까지 보도록 이끈다. 생물학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상태인지, 우리가 무(無)와 얼마나 가까운지 잊게 만드는 내재적인 자기기만 메커니즘을 갖춘 채 세상에 들어온다. 실패가 늘 실존적 위협을 가하는 건 아닐지 몰라도 실패와의 어떤 조우는 우리의 근본적인 위태로움을 예리하게 상기시킨다.

우리는 고매하고 영혼이 있는 피조물이며 물질성과는 크게 무관한 존재라는 것에 종종 자부심을 느낀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허세를 비웃기라도 하듯, 모든 ‘죽을 고비’에는 터무니없이 물질적인 무언가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장비의 고장 난 부분은-닳은 부품, 결함 있는 아이템, 느슨해진 나사, 뭐든 간에-모든 것에 종말을 가져오기 충분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우리를 조롱하며 존재의 가장자리로 밀어낸다 해도, 실패는 우리에게 모든 걸 새로운 눈으로 볼 기회를 준다. 사물의 실패는 삶의 루틴을, 정형화된 우리 존재를 훼방하여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기계(비행기 엔진, 자동차, 건물, 컴퓨터)가 실패하면 안 될 때 실패하는 것은 디자이너, 건축가, 엔지니어 또는 제조자에게 있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우리가 사물의 실패를 경험할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이다. 나는 사물이 왜 실패하는지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고, 그 실패를 목격한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에 더 신경을 쓴다. 실패 속에서 세상의 불안전성은 우리 자신의 불안전성과 만나고 이 만남 중에 발생하는 것보다 더 우리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거의 없다.

전통 형이상학에서의 좀 더 어려운 질문은 소위 ‘존재의 의문’으로 이렇게 묻는 것이다. “왜 세상만사는 무가 아니라 유인가?” 이 심문을 실존주의자의 언어로 번역하면 좀 더 개인적인 형태가 된다. “왜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우리를 압도한다. 첫째, 이 질문이 숨이 막힐 정도로 너무나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이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으며 그 사람은 나다. 내가 그 질문을 하지 못하면 그 질문은 영원히 제기되지 않은 채 남을 것이고 그건 그 질문이 끝까지 답해지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쁠 수 있다.

둘째, 이 질문이 본질적으로 답이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분명 그 질문으로 장난삼아 뭔가를 만들어볼 시도는 할 수 있다. 철학과 문학, 종교와 과학이 이미 주어진 편리한 답 몇 가지를 줄 수 있다. 하지만 최종 분석 단계에서는 “왜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이 질문이 어느 쪽으로도 확고하게 정해질 수 없다는 고통스러운 깨달음을 얻은 채 남는다. 이반 카라마조프-존재하지 말아야 했을 가장 예리한 철학자 중 한 사람-는 그 질문을 ‘저주받은 질문’이라 부르곤 했다. 동시에 나는 그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왜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해야 하는가?”의 의문을 던지는 바로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 질문을 하지 않으면 내 존재로부터 필수적인 어떤 것을, 내 존재를 구성하고 풍요롭게 하는 결국 내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어떤 것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이 질문을 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소설을 쓰거나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를 위해 희생하거나 타인에게 연민을 보이거나 등등. 마지막으로 그 질문이 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은 결정적이지는 않다는 것, 답은 그런 질문을 하는 바로 그 행동과 그 결과 우리가 하기로 맘먹는 일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실패가 들어오는 것이다. 확실히 해두겠는데 실패는 답을 제공하기 위해 들어오는 게 아니다. 실패가 답을 제공하는 일에 종사한 일은 절대 없었다.

그 대신 실패가 제공하는 건 그 질문을 하기에 더 유리한 입장이다. 이게 답을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실패는 존재의 한복판으로 갑자기 무(無)가 끼어드는 것이다. 우리가 실패를 경험할 때 우리 눈에 존재의 구조에 난 빈틈, 반대편에서 우리를 응시하는 무(無)가 보이기 시작한다. 실패는 인간 조건에 대한 근본적인 무언가를 드러내는데, 즉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건 안전망 없이 외줄을 타는 일이라는 것이다. 발을 조금만 잘못 디뎌도 균형을 잃고 무(無)로 되돌아갈 수 있다. 우리는 대체로 뭘 하는 건지 깨닫지도 못한 채 기분 좋게 몽유병 환자처럼 외줄 타기를 수행한다. 실패를 경험하는 것은 갑자기 깨어나는 것이다-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이다. 실패가 전화위복이 되는 순간이 그 순간이다. 실패는 이렇게 우리 존재의 비정상성, 즉 존재할 명백한 이유가 없음에도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자각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잠복 상태의 끝없는 위협-발아래의 심연-이기 때문이다.

불안정한 자의 손에서


생명은 정착하여 패턴에 빠지는 나쁜 습관이 있다. 우리가 하는 가장 자발적인 행동조차 결국에는 판에 박힌 것이 되고 만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괜찮다. 습관과 일상을 개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을 것이고, 이는 우리가 들이는 노력이 나아갈 길을 더 잘 뚫어 주고 세상을 거쳐 가는 동안 우리가 스트레스를 좀 덜 받게 해준다. 그래도 우리 삶에 너무 많은 루틴이 있고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게 너무 적으면 결국 우리의 내면은 죽고 만다. 그리고 살아 있는 채로 맞는 죽음은 그 흉물스러움 탓에 최악의 죽음,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죽음이다. 지나치게 통제되고 일상화된 인간의 삶은 가난할 뿐 아니라 오히려 나쁜 삶이다. 그런 삶은 자신을 아무 데도 이끌지 못한다. 우리에게 시몬 베유 같은 사람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베유가 존재를 탈피하는 법에 대해서는 가르쳐 줄 게 많지 않아도 잘 사는 법, 영적으로 잘 사는 법에 대해서는 가르쳐 줄 게 많다. 즉, 우리를 둔화시키는 패턴, 삶이 우리를 계속해서 얽매이게 만드는 그 패턴을 무시하는 법 말이다. 베유는 좀 더 쉬운 삶을 사는 대신 좀 더 어려운 삶을 사는 것으로 경각심을 계속 유지하는 법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베유를 필요로 한다-편안한 일상에 안주하는 대신 믿음을 가지고 아주 위험한 도약을 하도록 말이다. 누구나 영적인 진보를 이루려면 마땅히 그래야 하지만 베유도 자신에게 엄격했다. 그러한 가혹함은 더 우수한 형태의 친절함에 지나지 않는다.

베유의 이야기는 우리가 잊은 것처럼 이는 고대의 지혜를 하나 보여준다. 목숨을 구하려면 언제든 목숨을 버릴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는 것. 그 심연을 마주하여 똑바로 바라보고 그 심연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인 양 행동하라. 정확히 그런 순간에, 그렇게 준비된 상태일 때, 그 순간이 불러오는 지극한 겸손함 덕분에 당신은 삶의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르는 것이다.



정치적 실패의 폐허 속에서



완벽에 대한 값비싼 대가


정치적 실패는 그 작용 방식이 물건의 실패보다 더 교묘하며-폴리스가 곧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더 치명적이다. 우리가 정치적 재앙을 목격할 때마다 그와 함께 우리의 일부분도 죽는다. 물리적 세계와 맺는 관계에서 겪는 실패에는 이상하게 활기를 북돋는 부분이 일부 있을 수 있지만, 정치적 실패는 종종 그 뒤에 시체 더미가 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지적으로 무력화시키고 타락시킨다.

무엇보다도 수치스러운 것은 모든 게 말해지고 행해지고 나서도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파괴적인 전쟁, 인종 청소, 대량 강간, 대량 학살 등 우리가 아는 최악의 잔학 행위를 생각해 보라. 이런 잔혹 행위가 다시 일어날 거라는 건 거의 확실하다. 인간은 모두 필멸하는 존재지만 이 세상의 히틀러와 스탈린은 결코 진정으로 죽지 않고 이름만 달라졌을 뿐이다. 우리는 그들의 잔학 행위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일이 다시 자행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그 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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