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포기하라
오영철 지음 | 새빛
행복을 포기하라
오영철 지음
새빛 / 2024년 8월 / 220쪽 / 19,000원
제1장 행복증후군의 희생자들
산전수전 J의 죽었다고 복창사업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J의 처세술은 “죽었다고 복창”입니다. 돈 놓고 돈 먹기, 피 터지는 사업판에선 존심이니 뭐니, 고상을 떨면 한 방에 날아가기 때문입니다.“나는 이미 죽었어. 죽은 넘이 존심이 어딨어.”
J는 택도 아닌 상대와 비즈니스 거래를 할 때면 자신에게 먼저 이렇게 최면을 겁니다. 출근할 때 오장육부를 집에 떼어놓고 간다는 직장인들보다 서너 수 윗길입니다. 물론 그 효과는 기대 이상입니다. 상대가 도를 넘는 조건을 요구해도 일단은 들어줍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대부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힙니다.
그런 J는 성공했을까요? 당연히 성공했습니다. 초창기엔 치명적인 실패도 했지만, 그 고비를 넘어선 이후엔 손대는 사업마다 성공했습니다. 주식방송에, 교육사업에, 전문언론사 운영에, 출판사 경영까지… 돈도 잘 벌었습니다. 또 피를 나눈 형제자매들도 힘껏 지원했기에 다들 자기 분야에서 이른바 상위 10%에 들었습니다. 남들이 보면 부러운 성공이고, 탐이 나는 가족애입니다.
그럼, J는 이제 아주 행복하겠네요? 하지만 여기에서 뜻밖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전혀 행복하지 않아요.”
아니 왜요? 그렇게 많은 걸 이루고 가진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니? 하지만 J는 진지합니다. 출판사 대표 입장에서 행복론을 출간했던 저자들에게도 조심스레 물어봅니다.“이렇게 행복에 관한 책도 내셨는데, 선생님은 정말 행복하십니까?”
그러면 저자들도 머쓱해하며 속내를 털어놓습니다.
“그냥 행복한 척하는 거지요. 뭐.”
이건 뭔가 불가의 고사 하나를 연상시키는 시추에이션입니다. 말을 타고 전력 질주하는 기수에게 이웃이 물었습니다. “이보게. 어디를 그리 급하게 가시나?”“몰라. 그런 건 내 말에게나 물어보라고!”
이런 장면들을 많이 겪으면서 J는 마침내 처세술의 진수를 터득했습니다. 행복을 포기하라, 바로 이것입니다. 쓸데없이 행복을 찾아 달리면 인생의 짐만 더 무거워진다는 것입니다. J는 속세에서 돈을 다투는 사업을 하면서 뜻하지 않게 득도까지 하게 됐습니다.
행복을 포기한 사람에겐 더 이상 불행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짜 출가는 속세로 하는 것이라 했나 봅니다. 삭신이 쑤시도록 1천 배를 올리고, 본성을 논하거나 묵상하는 것보다 피 터지는 사업판에서 진짜 깨달음이 이뤄지나 봅니다.
다들 행복에 속고 산다“우리는 도대체 언제쯤 행복해지는 거예요?”
집집마다 아내들은 이렇게 바가지를 긁는 모양입니다.
그러면 남편들은 괜히 주눅이 들어 버벅거립니다. “글쎄.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
가장의 체면상 말은 이렇게 하지만 별로 자신은 없습니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도 버거운데 어느 세월에… 그저 막막한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다들 행복해질 것으로 기대하며 결혼을 하지만 결혼 이후에 정말 행복하다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숙제하듯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근데, 너나없이 그렇게 집착하는 행복의 실체는 도대체 뭘까요? 많은 돈, 높은 벼슬, 사회적 존경… 이런 걸 얻고 누리는 게 행복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재벌급 자산가나 권력의 정점까지 올랐던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천석꾼 천 가지 걱정, 만석꾼 만 가지 걱정이라고 합니다. 남들 보기에 부럽기 짝이 없는 사람들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정말 행복할까요?
“속았다.” 각고의 수련 끝에 마침내 득도하면 선승들은 이렇게 탄식했다고 합니다. 진리는 산 넘고 물 건너 아득히 저 먼 곳에 존재할 것으로 생각했건만, 막상 깨치고 보니 우리네 일상이 전부 진리 그 자체였다는 것입니다. 그 허탈감은 선문답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진리가 무엇입니까?”
“차나 드시게.”
일상다반사가 진리라는 얘깁니다. 매 순간 진리를 행하면서 진리가 무어냐고 묻다니… 그냥 눈앞에 차려진 차나 마시라는 것입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
이건 색즉시공의 다른 버전입니다. 삼라만상은 물론 불성마저도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다는 얘깁니다. 우리가 갈구하는 행복 역시 있는 것 같지만 없고, 없는 것 같지만 있는 것 아닐까요? 그렇기에 잡으려고 해도 결코 잡을 수 없는 무지개 같은 것 아닐까요? 양자역학에선 이걸 상호배타성의 공존이라고 불렀습니다. 물질은 파동과 입자의 속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데, 사람이 보지 않으면 파동으로 머물지만, 사람이 보면 입자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사극 버전으로 해석하면 성춘향 같고 황진이 같습니다. 미색에 탐이 난 변 사또가 춘향에게 수청을 들라고 요구하면 춘향은 죽기로 저항합니다. 반면에 서화담 선생처럼 물러가라 내치면 황진이처럼 살포시 제 발로 침소에 들어옵니다.
성공 따로 행복 따로사회적으로 성공하고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이게 산전수전 J만의 심리일까요? 그처럼 성공한 다른 사람들 역시 비슷합니다. 가수로 대성했던 이효리 부부도 특별히 다를 바 없습니다.“오빠는 결혼만 하면 행복할 줄 알았지?” 유튜브 쇼츠에서 가수 이효리가 남편 이상순에게 묻습니다. 남편의 대답은 뭐였을까요?
“아니. 난 제대만 하면 모든 게 행복할 줄 알았어.”
이효리도 그 말에 숟가락 하나를 더 얹습니다.
“난 가수로 성공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부부는 잠시 처연해집니다. 그러다가 이효리가 먼저 토를 답니다.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만 버리면 행복한데, 그치?”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남편 이상순이 결론처럼 한마디 합니다.
“그냥 사는 거지.”
이들 부부의 짧은 대화 속엔 인생사의 진수가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마음은 언제나 지금 없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제대만 하면, 결혼만 하면, 가수로 성공만 하면… 하지만 막상 그걸 갖게 되면 다시 부족감으로 돌아갑니다. 여전히 뭔가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냥 살자, 이것이 그들의 결론 아닌 결론입니다. 다만 이효리의 진단엔 약간의 수정 여지가 있습니다.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만 버리면 행복한데? 맞는 말이지만 그 생각 하나가 생각처럼 쉽게 버려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왜 세상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서도 행복감을 느끼지 못할까요? 자신의 감정 파동에 사로잡혀 자신의 포지션 이동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공을 했건 못했건 사람의 감정은 여전히 희로애락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 파동을 칩니다. 그것이 감정의 속성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성공만 하면 그 파동의 굴곡이 사라지고 오르가슴 상태만 지속될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렇기에 성공 이후에 도리어 이게 뭐야? 내심 실망하거나 당황하게 됩니다. 섹스 이후의 묘한 허탈감과 비슷합니다.
도대체 행복이 뭐길래 이렇게 사람을 농락할까요? 어쩌면 행복은 등에 업고 있는 아기일지도 모릅니다. 아기를 등에 업고 있으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애를 잃어버렸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런 착각에 빠지면 “우리 아기 어디 갔지?” 여기저기 애태우며 찾게 됩니다.
제2장 무지개 소년2의 허망한 착각
무지개를 잡겠다는 개꿈“난 꼭 저 무지개를 잡을 거야.”
무지개를 보고 감탄한 소년은 굳게 결심합니다. 어머니가 무지개는 잡을 수 없다며 말려도, 주변 사람들이 조곤조곤 타일러도 소년은 막무가내였습니다. 필을 너무 세게 받았기 때문입니다. 무지개만 잡으면 가슴이 터질 듯이 행복할 것으로 소년은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 결말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습니다. 무지개는 결코 잡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한 순간 소년은 하룻밤 사이에 폭삭 늙어 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무지개를 잡기 위해 산 넘고 물 건너며 온갖 고생을 다 했던 세월은 그저 허망할 뿐이었습니다.
김동인의 단편소설 ‘무지개’는 초딩이 읽기엔 너무 잔인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초딩 국어책에 실렸습니다. 다들 그 단편을 읽으며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독서 따로 실천 따로였습니다. 저 소년처럼 방황하지 말라고 가르쳤건만 너나없이 경쟁적으로 소년2가 되어 우르르 무지개 잡기에 나섰습니다. 남들보다 발이 빠르고, 힘이 세고, 머리가 좋고, 사교성도 뛰어난 사람들이 먼저 산 정상에 올라 그것을 덥석 잡습니다. 무지개를 잡았다! 기뻐하며 환호했지만, 다시 보니 어라? 무지개는 어느새 내 손에서 빠져나가고 없습니다. 환희가 컸던 만큼 실망도 대단합니다.
“전혀 행복하지 않아요.”
소년2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습니다. 텅 빈 가슴엔 찬바람만 휑하니 붑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소년2가 무지개 잡기를 그만둘까요? 십중팔구 정반대로 움직입니다. 이 산이 아닌 가벼? 그럼, 저 산으로 가볼까나? 소년2는 다시 숨을 헉헉대며 저 산의 정상을 향해 오릅니다. 하지만 저 산의 정상에 올라서 본들 실망하긴 마찬가집니다. 돈이라는 이름의 산, 권력이라는 이름의 산, 명예라는 이름의 산, 산이란 산은 모조리 정상까지 올라도 무지개는 언제나 저만큼 먼 곳에서 비치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왜 죽으라고 무지개를 잡으려고 할까요? 한번 가슴에 세게 꽂힌 필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요? 작가 김동인은 그것까지 알려주진 않았습니다. 무지개를 잡으려고 하면 끝내 그걸 잡지 못하고 자신만 폭삭 늙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을 뿐입니다. 문제는 가슴에 꽂힌 필입니다. 그 필을 바꾸지 않는 한 무지개 잡기는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이라는 이름의 그 무지개는 중독성이 너무나 강합니다.
불행의 원흉은 행복추구권이른바 행복추구권, 이 추상적인 권리를 헌법에 규정한 나라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뿐입니다. 마음의 관점에서 보면 행복추구권 규정은 어처구니없는 실책입니다. 최고규범인 헌법에 행복추구권을 규정한 것은 나라 전체에 행복이 없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1980년에 헌법을 저렇게 개정한 이후 국민이 과연 더 행복해졌을까요? 도리어 자살률이 OECD 1위를 차지하고, 교육현장에서는 학폭이 난무하며, 공동체 전체가 자기중심적인 금쪽이들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툭하면 생떼를 부리고 수틀리면 드러눕는다? 이런 행위들의 법적인 근거는 다름 아닌 행복추구권입니다. 그 결과 공동체는 정글로 변하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중년남 L은 행복이 넘쳤던 시기에 종종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부부는 서로 사랑했고 딸자식은 재롱을 부리며 귀엽게 자랐습니다. 연구를 하면서 후학을 가르치는 일상도 만족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드리웠던 그 불안감은 드라이한 현실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소녀로 성장한 딸은 난폭한 자폐아로 변했습니다. 그 폭력성은 부모가 감당하기 버거운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가 과도한 양심을 가진 게 화근이었을까요? 지금의 행복이 감사하다. 이렇게만 받아들였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불우한 이웃들을 생각하며 자신의 행복에 일종의 죄책감을 느끼는 건 도덕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인생 실전에선 적절하지 않습니다. 양심도 과유불급입니다. 만약 세상에 행복이란 개념이 없었다면,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하는 불안이나 죄책감도 없었을 것입니다.
언젠가 헌법 개정이 이뤄진다면 우선적으로 삭제해야 할 조항이 행복추구권입니다. 또 법 이외의 영역에서도 가급적 사용을 삼가해야 할 단어가 행복입니다.
제3장 문제를 기회로 바꾸는 기술
1타3피 맨발걷기행복을 포기하는 것은 비중 있는 집착 하나를 탁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그 무게감에 짓눌렸던 마음이 홀가분해집니다.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아, 마음을 이렇게 바꾸면 내면은 물론 일상의 무게도 많이 가벼워집니다. 날마다 맨발걷기를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도 저렇게 변해갑니다.
나도 맨발걷기 한번 해볼까? 동아일보에서 말기 전립선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던 72세 남성이 맨발걷기 2달 만에 완치가 됐다는 사연을 읽고 동기가 유발됐습니다. 그렇게 시작했던 맨발걷기가 벌써 1년 8개월이 넘었습니다.
날마다 블로그에 간략한 일지를 기록하며 했더니 이제는 습관이 되었습니다. 하루에 보통 2시간, 많게는 3시간에서 5시간 정도를 걷습니다. 장소는 여의도 한강변과 샛강공원, 물기를 머금은 강변의 땅에서 맨발로 걸으면 심신이 쾌적해집니다. 맨발걷기를 하고 나면 무엇보다 밤에 단잠을 자게 됩니다. 당연한 결과지만 아침에도 개운하게 일어납니다.
맨발걷기를 하면 뭐가 좋을까요? 직접 해보니, 맨발걷기는 단순한 치유를 넘어 운동에 마음공부까지 되는 1타3피였습니다. 우선 치유 효과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었습니다. 병원에서 포기한 난치병 환자가 기적처럼 치유되거나 건강이 호전된 사례들도 많았지만, 별로 효과가 없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비율은 대략 8 대 2 정도입니다. 맨발걷기 국민운동본부의 설문조사 결과입니다.
똑같이 맨발걷기를 하는데, 왜 누구는 낫고 누구는 낫지 않을까요?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 똑같이 열심히 사는데 왜 누구는 행복하고 누구는 행복하지 않을까요? 맨발걷기 모임에 참여해 완치자들의 증언을 직접 듣고, 유튜브에 소개된 인터뷰나 강연을 다각도로 비교해 보니 양자 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완치된 사람들은 그냥 맨발걷기만을 한 게 아니라 삼위일체 맨발걷기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1. 맨발걷기 2. 명상 3. 식이요법
맨발걷기의 접지효과는 이미 널리 알려졌습니다. 몸에서 각종 염증을 일으키는 활성산소는 맨발로 땅과 접지를 해주면 중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걸으면서 명상을 하면 마음도 평온한 상태로 변합니다. 여기에 채식 위주의 식이요법까지 더해주면 몸속에 더 이상 독소들이 유입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맨발걷기를 하면서 수시로 이게 효과가 있을까? 의심을 하면 마음만 더 피곤해집니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로 찌든 마음에 또 하나의 스트레스를 추가하는 셈입니다. 그러면서 식사는 정크푸드를 먹거나 폭식에 과식을 일삼으면 효과가 좋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이루어진 삼중의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삼위일체 3박자를 맞추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행복에 대한 집착을 놓는 것도 마음 하나만으로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몸과 영혼도 함께 해주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기상과 취침 전후의 15분 명상해는 오늘도 어김없이 뜨고 집니다. 그에 순응해 낮과 밤이 오가고 사계가 순환합니다. 신비롭고 신기한 섭리입니다. 하늘의 행성들은 어쩌면 저렇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저절로 잘 돌아갈까요?
다행히 인간의 내면에도 자연의 섭리처럼 작동하는 초지능이 내장돼 있습니다. 그걸 작동하면 인간들의 삶도 자연처럼 완벽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그렇게 해주는 도구가 기상 직후의 15분 명상과 취침 직전의 15분 명상입니다.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15분 명상을 하면 나의 내면을 초지능에 맞추게 됩니다. 자기 직전의 15분 명상도 마찬가집니다. 그것만 하더라도 나의 내면은 그 태연함, 그 고요함, 그 평온함으로 무장됩니다. 평소엔 잘 작동하지 않던 영감이 깨어나 재난이나 불운 등의 탁기들이 나를 비껴가게 해줍니다.
인생사를 꼬이게 만드는 건 크게 두 가집니다.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불안이 그것입니다. 이 두 가지에 휘둘려 당면한 현실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치명적인 실책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머리로는 다들 과거나 미래가 허구라는 걸 압니다. 과거는 후회해도 바꿀 수 없고, 미래는 걱정할수록 더 망가진다는 걸 다들 압니다. 행복에 집착하면 도리어 불행만 당긴다는 것도 인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