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기보다 끊기
유영만 지음 | 문예춘추사
끈기보다 끊기
유영만 지음
문예춘추사 / 2023년 6월 / 318쪽 / 16,800원
1부 지금은 경제 빙하기 시대
봄은 안 올지도 모른다“조금만 지나면 좋아질 거야.” 은행원 이 씨는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위기는 언젠가 진정될 것이고, 모든 게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사람들이 자가용 출근을 포기하면서 교통량이 줄었을 때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한산해진 거리와 파란 하늘을 만끽하면서 출근하는 여유를 부렸다. 물가가 오른 것 역시 참을 만했다. 금융시장이 요동을 칠 때도 낙관론을 폈다. 미국이 가닥을 잡으면 주가도 다시 오르고 환율도 제자리를 찾을 텐데. 부동산 시장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지역 아파트값은 너무 많이 올랐으니까 적당히 빠진다 한들 이상할 것이 없었다. 어쨌든 남의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살아 움직이던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이제 바닥’이라는 말도 있고,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말도 있다. 하루가 천년 같다. 한쪽에선 투자 손실을 본 고객들이 아우성이다. 펀드에 가입했다가 전 재산을 날렸다는 노인. 은행더러 책임지라는 아줌마. 속이 바짝 탄다. 전화 받기가 겁이 난다. 다른 쪽은 아쉬운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다. 밀린 신용카드 대금을 내려고 어디선가 돈을 마련해온 젊은 여성. 대출계 앞에 앉아 하소연하다가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 공장 문을 닫게 됐다는 거래처 사장. ‘압류만 해지해주시면…’ 하는 소리엔 고리대금업자가 된 기분이다.
왜 이런 일이 또 생기는 것인가. 파산, 압류, 경매, 그리고 벼랑 끝으로 몰린 사람들. 은행은 종일 북새통이다. 신문과 뉴스는 매일 난리법석이다. 노숙자 수가 사상 최대에 이르렀다고 한다. 눈을 감으면 시커멓게 입을 벌린 터널이 보인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인가.
그동안의 몇 번의 금융 위기도 잘 버텨냈다. 그런데 이번 경기침체 위기의 메시지는 느낌이 매우 안 좋다. 그는 몇 번의 위기가 몰아쳤을 때도 낙관론자였다.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 씨는 은행과 대기업들이 줄줄이 망하는 틈바구니에서도 살아남았다. 일시적인 현상들이니까, 꿋꿋하게 버티면 원상 복귀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또한 쉽게 지나가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는 게 더 힘들어졌다. 은행은 걸핏하면 명예퇴직을 접수한다면서 행원들을 공포 분위기로 몰고 갔다. 기업체에 다니는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구조조정당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면서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매달려 오늘까지 버텨왔다. 이제 혹한의 추위가 밀려오면서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도 그 어느 때보다도 춥게 느껴진다.
이 씨뿐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필사적으로 살아왔다. 열심히 살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이 꽁꽁 얼어붙었다. 그런데 이게 정말 겨울일까. 때 이른 겨울로 보기에는 석연치가 않다.
지금까지의 위기들은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빠져나가곤 했다. 최근 우리가 직면한 경제 위기 역시 그랬다. 그런데 이번은 예전과 확연히 다르다. 지구가 한 바퀴 돌 때마다 각국에서 난리가 터진다. 혹한의 바람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태평양을 거쳐 아시아로 오는 동안 거대한 세력으로 탈바꿈한다. 한파는 사람들의 돈과 희망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며 덩치를 키운다.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혹한과 눈보라가 다가온다. 이런 상황이 매일 반복되고, 국경을 초월한 공포에는 휴일도 없다.
이것은 단순한 ‘경제 위기’가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무엇인가의 시작이다. 지금의 공포는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변화의 시작’이다. 더욱 두려운 것은 앞으로 닥쳐올 변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어떻게 귀결될지 전혀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확실한 것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것뿐이다. 겨울이 지나면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다. 전에는 그랬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확신할 수 없다. 과연 이 추위가 물러갈 것인지, 그래서 우리가 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지.
봄을 포기해야 살아갈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위기의 ‘현상’만이 아니다. 그 위기 이면에 있는 본질적 변화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른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기업들이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제조업 공동화가 심해진다. 기업들은 웬만한 업무를 아웃소싱으로 돌린다. 중산층이 사라지고 양극화가 심화된다. 대기업은 더욱 강해지고 작은 기업들은 없어진다. 재래시장은 이미 사라졌다. 상인들은 대형 마트의 일용직 노동자로 전락했다. 상류층과 하류층의 수입 구조는 심화된 양극화에 따라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다. 이 같은 현상들은 이미 구조화되어 단순한 경기지표 개선만으로 이런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누구나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관점을 바꿔야 한다. 빙하기는 지금 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었다. 다만 몇 차례의 거품과 간빙기를 겪으며 우리가 착각했을 뿐이다. 다시 냉정하게 세상을 둘러보자. 빙하기 패러다임은 지금 어떤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지. 아침에 일어나면 TV 뉴스를 보는 것이 두려운 오늘, 세상에 몰아치는 혹한의 공포가 경제와 삶의 메커니즘을 어떻게 바꾸어가고 있는지. 차분하게 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추위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시장 상인과 자영업자들이 몰락했다. 우리 이웃들이다. 모두가 ‘대기업 탓’이라고 했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대기업 탓이 아니다. 우리들 때문이다. 대형 마트와 값비싼 커피 전문점을 선택한 것은 우리들이다. 자영업과 중산층이 낙엽처럼 떨어져 내린다. 세련된 취향을 가진 우리들 때문이다.
우리는 위로 오르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다. 그것도 남들보다 앞서 빠르게 오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어릴 때부터 주입받은 경쟁의식 때문이다. 오로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안전장구까지 팽개치면서 무게를 줄인다. 빠르게 오르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으니 속도가 조금만 느려져도 조급증에 빠진다. 기대 수준이 워낙 높아서 차근차근 오르는 것을 굼뜨다고 여긴다.
모든 산에는 꼭대기가 있는 것처럼, 고도성장 역시 언젠가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일정 규모에 이르면 성장(양)이 아닌, 성숙(질)으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패러다임 바꾸기를 거부한 채 오로지 위로, 빠르게, 남들보다 앞서서 달려왔다. 앞만 보고 달렸다. 그것이 최선인 줄 알았다. 우리가 틀렸다. 성공에는 오르막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공한 사람들 이면에는 무수한 내리막길과 교훈이 깔려 있었다. 생각해보면, 한동안 우리는 전성기의 로마인들만큼이나 잘난 척하면서 살았다. 선진국이 된 것으로 착각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빙하기, 지금 가장 큰 위협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어쩌면 봄은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의 따뜻했던 추억들을 가슴속에 묻어두어야 한다. 차라리 봄을 포기하자. 역설적이게도 희망은 포기로부터 시작한다. ‘조금 지나면 좋아질 것’이란 헛된 기대부터 버리자. 그리고 길을 찾아 나서자. 빙하기에도 살아갈 방법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지구상 생물의 90퍼센트 이상이 멸종하는 와중에도 의연하게 살아남아 오늘의 문명을 일구어냈다. 우리는 살아남는 데서만큼은 지구상 최고의 생명체다.
울타리를 믿지 마라
세계의 인재들과 국내에서 경쟁해야 하는 당신: 얼마 전 미국 <비즈니스위크>지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젊은 당신이 경쟁해야 할 상대는 주변 친구들이 아니라,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의 인재들이다.’ 이 기사는 생산기지 이전에 이어 사무직 분야의 각종 업무마저 매우 빠른 속도로 중국과 인도 같은 저임금 국가로 넘어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해외 아웃소싱 희생자가 되지 않으려면 끊임없는 자기계발이 필요하며, 직업을 선택하는 데 신중해야 한다고 전했다. 미국의 상당수 대기업들은 데이터센터와 콜센터를 인도로 옮긴 데 이어 재무, 회계, 인사 업무까지 아웃소싱으로 돌리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 각 대학에는 유학생들이 넘쳐난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 온 학생들이 대부분이지만 동유럽과 남미에서 오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이들이 한국에서 공부를 마친 뒤 자기들 나라로 반드시 돌아간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국내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 이들과 경쟁을 벌일 날이 머지않았다.또한 국내 기업들도 일자리 상당 부분을 비정규직으로 돌리고 있다. 아웃소싱의 일종인 파견 형태 근무도 늘고 있다. 여기에 해외 아웃소싱까지 늘어난다고 생각해보자. 재무, 회계, 인사 업무가 모두 해외 아웃소싱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선진국 사례를 보면 소름이 오싹 돋지 않는가.
이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 한다. 더 이상 안전지대는 없다고. 직장이 튼튼한 요새라고 생각해왔다면, 그래서 그동안 다소 안일하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면, 지금 바로 스스로에게 사과하자. 그것이 빙하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위대한 첫걸음이니까. 빙하기는 위기와 난국이 상존하고, 시련과 역경이 앞을 가리는 시기다. 빙하기를 건너는 가장 기본적인 지혜는 방향 감각을 잃지 않는 것이다. 당황하지 말자.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두 눈을 들어볼 수만 있다면 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변수와 복병을 즐거운 여행 동반자로 만들 수 있다.
남이 걸어간 길에서는 나를 위한 기회를 만날 수 없다. 그것은 쉬운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가는 길에서는 도전의 즐거움도 야망의 꿈도 만날 수 없다. 우리는 모순을 발견할 것이다. 나 혼자라는 위태로움과, 나 혼자만의 길을 간다는 즐거움. 하지만 상상해보라. 이런 역설의 여정에서 인생 역전의 감동이 탄생하는 것이다.
2부 당신에게 절실한 ‘끊는 연습’
바로 지금 항복을 선언하라어니스트 섀클턴은 지난 1000년간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탐험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영국인이다. 1914년 8월, 섀클턴과 대원 27명은 세계 최초로 남극대륙 횡단에 나섰다. 그러나 6개월 후인 1915년 1월, 목적지를 불과 150킬로미터 앞두고 탐험은 실패로 돌아간다. 탐험선은 얼음덩이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게 되고, 탐험대는 숨통을 조이는 추위, 그리고 그보다 더욱 소름 끼치는 절망에 몸부림친다. 극지역의 겨울은 해가 뜨지 않는다. 그들은 칠흑 같은 겨울이 계속되는 기간, 얼음에 갇힌 배에서 열 달이나 버텼다.
11월, 여름이 오자 얼음이 녹으며 부서진 배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었다. 탐험대는 살아남기 위해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섀클턴이 대원들에게 외쳤다. “살아남는 데 필요한 것만 빼고 모든 물건을 버려라! 각자 소지품은 일인당 2파운드(907그램)로 제한한다.” 대원들은 섀클턴의 명령에도 우왕좌왕했다.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포기하고 또 포기해도 2파운드 이내로 맞출 수 없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섀클턴이 품속에서 금으로 만든 담배 케이스를 꺼내 바닥으로 던졌다. 평소 섀클턴이 정말로 아끼던 것이었다.
욕심에 졌음을 인정하라사실 섀클턴이 가장 먼저 포기한 것은 금 담배 케이스가 아니라 탐험선 ‘인듀어런스 호(endurance; 인내)’였다. 탐험선 포기는 곧 항복 선언이었다. 자연의 강력한 저항에 완전히 패배했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만일 섀클턴이 항복을 선언하지 않고 좌초한 배를 구하려고 매달렸다면, 그와 탐험대원 27명은 모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섀클턴 역시 갈등을 했을 것이다. 항복 선언은 자칫 희망을 포기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기 위해 항복하기로 결심했고, 대원들에게 명령했다. 섀클턴의 항복은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되새겨지는 위대한 결정으로 전해진다.
재난의 성격에 대해 우리는 빨리 정의를 내려야 한다. 지금 상태에서 극복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인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면, 우리는 속히 백기를 들어야 한다. 빨리 포기하지 않고 머뭇거리면 강력한 유혹이 다가온다. ‘버텨보지 그래? 조금만 버티면 끝날 것 같은데.’
그러나 우리는 위기가 금방 끝나지 않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욕심 때문에 머뭇거리다가 악순환의 고리에 말려든다.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이 바보라서 눈 뜨고 당하는 것이 아니다. 욕심과 집착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다. 사기인 줄 뻔히 알면서도 덫에 걸려 발을 빼지 못한다. 사람들은 위만 바라보고, 위를 향해 오르는 데 익숙해져 있다. 빨리 오르는 것이 성공이라고 믿는다. 어쩔 수 없이 내려가야 할 때가 있다고는, 상상도 하기 싫어한다.
오랫동안 성공을 지속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이 언제나 꼭대기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르는 데도 익숙했지만, 내려가는데도 탁월했다. 내려가야 할 시기가 오면 두말없이 받아들이고 기꺼이 내려갔다. 남들보다 일찍 내려갔기 때문에 충분히 쉬고 다시 오를 수 있었다. 그래서 남들보다 빨리 올라 정상에 도달했다.
맞설 수 없을 때는 빨리 포기해야 한다. 성공은, 역설적이게도 포기로부터 시작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좋아하지만 잘할 수 없는 일을 붙잡고,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절대적으로 믿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과거부터 버려라: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섀클턴의 탐험선만큼이나 버리기 힘든 것이 있다.바로 과거다. 과거가 발목을 잡는다. 그러나 추억은 마취제일 뿐이다. ‘왕년에’는 현실에 대한 관점을 왜곡시킨다. 마음속에 이상화시킨 과거를 현실과 비교한다. 그래서 언제나 과거는 선이고, 현실은 악이다. 하지만 과거를 찬양하며 현실에 불만을 토로해 봐야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더욱 멀어질 뿐이다.
우리는 과거부터 버려야 한다. 섀클턴이 배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정상을 향해 희망의 발걸음을 옮기던 기억을 놓아둔 채 내려가야 한다. 과거의 희망은 지금의 족쇄가 될 수도 있다. 목표가 바뀌었다. 과거에는 산꼭대기에 오르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안전하고 빠르게 산 밑에 도착하는 것이다. 행복한 생활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우선 생존 자체를 확보해야 한다. 생존 없는 생활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절망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처절하면서도 간절한 노력이 지금 여기서 바로 이루어질 때다.
고성장 시절에 대한 미련을 버려라: 80~90년대 한국은 마치 지금의 중국 같았다.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한 해가 네 차례나 있었다. 일부 정치적, 경제적 위기를 제외하고는 대개 6~9퍼센트대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한국은행은 최근 2023년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2.1퍼센트에서 1.7퍼센트로 낮췄다.
고성장 시절은 당연히 지금 같지 않았다. 주식 시장이 활황을 보였고, 건설 경기가 좋을 때면 돈이 많이 풀려 영세 상인들에게까지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옛날을 예찬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개 이 시기와 현재를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과거는 되풀이되는 일이 없다. 따라서 고도성장 시절의 추억은 역사에 넘겨주고, 우리는 눈앞의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 경제 빙하기에 접어든 지금, 고도성장 시절의 영광에 젖는 것은 히말라야 산등성이에서 선 채로 잠이 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꿈속에서 옛 기억을 더듬는 사이, 저체온증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우리들을 위협으로 내몬다. 그러니 미련을 버리고 깨어 있자.
프로처럼 단순하고 부드럽게
업(業)의 시대, 프로페셔널의 시대: 현재 펼쳐지고 있는 직업세계의 변화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직(職)’의 시대가 가고, ‘업(業)’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직의 시대였다. ‘무엇’이 되느냐가 가장 중요했다. 전문직이 되면 고소득과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았다. 회사원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직은 한마디로 자리에 목숨을 거는 성공의 척도였다. 이른바 명함이다. 좋은 직을 가지고 나면 특별한 잘못이 없는 한,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직의 시대에는 전문가가 최고 대우를 받았다. ‘전문가와 비전문가’로 대별되던 시기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