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뿐인 네 인생, 네 뜻대로 살아라
정운현 지음 | 새빛
한 번뿐인 네 인생, 네 뜻대로 살아라
정운현 지음
새빛 / 2022년 12월 / 256쪽 / 16,000원
‘세 차례 유배, 여섯 차례의 파직’ 허균허균은 1569년 11월 3일 강원도 강릉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어느 점술가는 그가 태어난 사주를 보고 “액이 많고 가난하며, 병이 잦고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나 재주가 뛰어나 후세에 전해질 것”이라고 풀었다고 한다.
당대의 책벌레, 26세 때 출사: 허균의 집안은 문장으로 유명했다. 대사성을 지낸 부친 허엽을 비롯해 허성, 허봉 두 형과 누이 허난설헌 등이 모두 시문에 능했다. 막내인 허균 역시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해 당대에 둘도 없는 책벌레였다. 그 스스로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보지 못했던 책을 읽을 때는 마치 좋은 친구를 얻은 것 같고, 이미 읽은 책을 볼 때는 마치 옛 친구를 만난 것 같다. 나의 천성은 손님을 접대하는 것을 즐거워하나 언행에 허물이 있을까 저어되니 이 책들이나 의지해 문을 걸고 늙으리라.”
허균은 5세 때 글을 배우고 9세 때부터 시를 지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아이는 뒷날 마땅히 문장을 잘 하는 선비가 될 것이다.”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그의 매형 우성전은 “훗날 문장을 하는 선비가 되기는 하겠지만, 허씨 집안을 뒤엎을 자도 필경 이 아이일 것이다”라는 불길한 예언을 한 바 있다. 그 무렵 허균이 부지런히 글을 읽은 것은 학문 연마보다는 과거 시험 급제가 목적이었다.
18세가 되던 해부터 봉은사 아래에서 작은형 허봉의 친구인 사명당에게 불교와 문학을 배웠다. 또 서애 류성룡의 문하에서 문장을 배우고, 손곡 이달에게는 당나라 시를 배웠다. 서자 출신의 이달은 둘째 형 허봉의 친구로서 훗날 허균의 삶과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과거 시험만 준비하던 그에게 제대로 된 스승이 나타나 인생의 길잡이가 돼 주었다.
1585년 초시에 합격한 허균은 그해 김대섭의 딸과 혼례를 치렀다. 21세 때인 1589년에는 이이첨과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592년 임진년 왜구가 침입하여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열심히 공부하여 2년 뒤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97년에는 문과 중시에 장원을 하여 비로소 벼슬길에 나섰다. 그의 나이 26세 때였으니 천재로 불린 그로서는 늦은 출사였다.
그 무렵 그의 뛰어난 시재가 빛을 발할 기회를 얻게 됐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명나라의 도움이 절실했다. 이를 위해 조정에서는 명나라 사신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들을 잘 접대하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명나라 사신들은 조선의 문인들과 시를 나누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시를 많이 외우고 문장을 잘 짓는 허균의 능력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허균은 명나라 사신 접대 업무를 맡아 탁월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처럼 시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나누고 외교적인 성과를 거두는 것을 수창 외교, 시문 외교라고 부른다.
당시 명나라 역시 시문 외교에 큰 관심을 보였다. 허균은 선조 대에서부터 광해군 대에 이르기까지 수창 외교의 최전선에서 큰 공로를 세웠다. 그런 허균을 두고 『광해군일기』에서 “글 쓰는 재주가 매우 뛰어나 수천 마디의 말을 붓만 들면 써 내려갔다.”고 칭송할 정도였다. 허균은 수시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였고, 세 차례나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벼슬길은 순탄치 않았다. 1598년 황해도 도사에 부임한 지 6개월 만에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황해 도사로 부임하면서 한양에서 기생을 데리고 간 것이 말썽이 되었다. 허균은 솔직하고 꾸밈이 없는 사람이어서 기생들의 연애담이나 잠자리 얘기들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 특히 강릉 시절에는 기생들과 어울리느라 모친상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 양반들에게는 체면을 깎는 모습으로 비쳤고, 또 패륜아로 비난을 샀다.
당시 성리학에 기반한 지식인 계층은 인간의 욕망을 극복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허균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이러한 비난에 대해 그 사실을 숨기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허균은 식욕과 성욕을 중시하면서 본능에 충실하고자 했다. 안정복은 그를 두고 “인륜과 명분을 가르치는 유학의 죄인”이라며 배척했다. 허균은 이런 주장을 펴기도 했다. “남녀 간의 정욕은 하늘이 주신 것이다. 유교의 성인은 남녀가 다르다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성인은 하늘보다 한 등급 아래의 존재가 아닌가. 성인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하늘의 뜻을 어길 수는 없다.”
1604년, 그는 수안 군수로 부임했으나 얼마 뒤 파직되었다.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1607년 3월 삼척 부사가 돼서는 불과 13일 만에 다시 파직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불교 때문이었다.
세상과 잘 화합하지 못한 이단아: 그러나 그의 탁월한 재능과 공훈으로 얼마 안 돼 다시 공주 목사로 발탁되었다. 다시 1609년(광해군 1)에 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 이상의의 종사관을 지냈다. 그해에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형조 참의에 올랐다. 이처럼 여러 차례 공직에도 기용됐으나 허균은 자신을 ‘불여세합(不與世合)’이라고 표현했다. 세상과 잘 화합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나는 성격이 소탈하고 호탕하여 세상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나를 꾸짖고 배척하니, 집에 찾아오는 벗이 없고 밖에 나가도 뜻에 맞는 곳이 전혀 없다.”
당시 조선 사회는 유교 체제에서 체면과 허례허식을 중시하였다. 그런 형식의 얽매임이 자유인의 면모를 갖고 있던 허균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옷과도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자신의 마음을 의탁했던 곳은 불교였다. 허균은 세 차례의 유배, 여섯 차례의 파직을 겪으면서도 불경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심지어 관아에 불상을 모시고 불경을 외며 제를 올리는 등 승려와 다름없이 행동하였다.
합천 해인사 홍제암의 부도밭에는 사명대사의 석장비가 서 있다. 이 비석의 비문을 쓴 사람이 허균이다. 허균은 사명대사를 형님처럼 모셨다. 그러니 허균이 사명대사의 비문을 쓴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수안 군수, 삼척 부사에서 파직된 것도 다 불교 때문이었다. 허균은 자신을 파직시킨 양반들을 향해 “하찮은 일을 가지고 소인배들이 모략을 일삼는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을 따르라. 나는 내 인생을 나대로 살겠노라.”고 응수했다.
허균은 사신으로 세 차례 연경(북경)을 다녀왔다. 당시 명나라는 서양 문물의 집산지였다. 실록에 따르면, 허균은 접대비로 가지고 갔던 만 오천 냥의 은으로 4천여 권의 책을 사서 가지고 왔다고 기록돼 있다. 그 속에는 천주교 기도문도 포함돼 있었는데 당시로선 금서였다. 그는 새로운 문물과 서학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특히 성리학으로 획일화된 조선 사회에 반발하면서 사상과 행동의 자유를 추구했다. 이런 태도 때문에 그는 후세 사가로부터 ‘유교 반도’라는 비판을 사기도 했다.
허균은 관리로서도 출중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한 해 세 차례 관리들끼리 겨루는 시험에서 허균은 세 번 연속으로 1등을 차지했다. 이런 경우는 조선조 역사상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 덕분에 공주 목사 자리를 얻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부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파직되었다. 이유는 그가 자신의 월급으로 친구 이재영과 그의 어머니를 먹여 살렸다는 것이었다. 당시 허균은 이재영 모자 말고도 자신의 처외삼촌 되는 서자 출신의 심우영과 윤계영을 불러 함께 살았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허균이 공주 관아에 삼영을 설치했다.”고 비난했다. 세 사람의 이름이 ‘영’으로 끝나 이렇게 부른 것이었다.
이 일로 그는 전라도 함열(익산)로 유배를 갔다. 그곳에는 친구가 없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지기도 했지만 그를 가까이 하려는 사람도 없었다. 요즘 사람 가운데 친구가 없다 보니 그는 옛사람을 친구로 삼았다. 중국 진나라 시인 도연명, 당나라 시인 이태백, 그리고 송나라 문장가 소동파 등이 그의 벗이었다. 자신을 포함해 네 친구가 함께 사는 집이라는 뜻으로 ‘사우재(四友齋)’라는 편액을 내걸었다. 그는 평소 가깝게 지내던 화가 이정에게 위 세 벗의 초상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항상 이 그림을 휴대하여 머무는 곳 방 한쪽에 걸어 두고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허균은 “어디에 있든 이 그림만 있으면 내 처지가 외롭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라고 할 정도였다.
“내가 사는 집은 한적하고 외져서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으며, 오동나무가 뜰에 드리우고 대나무와 들매화가 집 뒤에 총총히 줄지어 심어져 있다. 나는 그 그윽하고 고요함을 즐기면서 북쪽 창에다 세 벗의 초상화를 펼쳐 놓고 분향하면서 읍을 한다. 그래서 편액을 사우재라 하고, 인하여 그 연유를 위와 같이 기록해 둔다. 신해년(1911) 2월 사일에 쓰다.”
그 무렵 허균은 자신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홍길동전』을 집필하였다. 당시는 적서 차별이 엄하여 서자는 평생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었다. 이는 세조가 서자 출신의 정도전을 죽인 후부터 서자 출신의 관직 진출을 막는 ‘서얼 금고법’이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홍길동전』은 적서 차별 문제를 정면으로 비판한 작품이다. 허균은 명문 사대부 가문의 적자 출신이다. 그런 그가 하필 왜 서자 문제를 다룬 소설을 쓰게 됐을까.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린다. 요즘 말로 하자면 재벌 2세랄 수 있는 그가 서민 자제들과 어울려 지낸 꼴이다.
‘유재론(遺才論)’에서 신분 차별 비판: 허균이 서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스승 손곡 이달의 영향이 컸다. 이달은 ‘조선의 이태백’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시인이었으나 서자라는 이유로 평생 불우한 삶을 보냈다. 그런 스승을 보면서 허균은 가슴 아파했다. 허균은 서자 외에도 화가, 무사, 승려, 기생 등 당시 조선 사회의 소외 계층과 주로 어울렸다. 허균의 이런 모습은 당시 사대부나 양갓집 자제들에겐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다. 혹자는 이런 허균에게서 ‘평균의 씨앗’을 발견했다고 썼다.
허균이 추구했던 정치 개혁 사상의 핵심은 ‘유재론(遺才論)’과 ‘호민론(豪民論)’이다. 유재론은 ‘버려진 인재’라는 뜻인데, 서자와 같은 신분 차별로 인해 제대로 쓰임을 받지 못한 인재를 말한다. 허균은 당시 조선의 인재 등용 모순과 역기능을 비판하면서 ‘유재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 귀한 집 자식이라고 해서 재주를 넉넉하게 주고, 천한 집 자식이라고 인색하게 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옛날 어진 임금들은 이를 알고 인재를 더러는 초야에서 구했으며, 낮은 병졸 가운데서도 뽑았다. 더러는 싸움에 패하여 항복해 온 오랑캐 장수 가운데서도 발탁했으며, 도둑 가운데서 끌어올리거나 창고지기를 등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도리어 이들의 벼슬길을 막고서 ‘인재가 없다’고 탄식하니, 이는 남쪽 월나라로 가고자 하면서 북쪽으로 수레를 모는 것과 어찌 다르리오.”
허균은 백성을 세 부류로 나누었다.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항민(恒民), 불평불만 속에 세상을 원망만 하는 원민(怨民),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행동으로 나서는 호민(豪民). 허균은 이 세 부류 중에서 항민과 원민은 두렵지 않다고 했다. 반면 호민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며, 호민이 앞장서면 항민과 원민도 따라나선다고 했다. 호민은 요즘으로 치면 ‘깨어 있는 시민’, ‘행동하는 양심’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허균의 혁명 사상은 이 호민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서열 차별 극복을 통해 사회 변혁을 꿈꿨던 허균의 계획은 아쉽게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광해군 4년(1612년) 발생한 소위 ‘칠서 사건’ 때문이었다. 서양갑을 비롯한 일곱 명의 서자들이 거사를 도모했다. 광해군 실록에 따르면 이들은 무력으로 궁궐을 장악해서 광해군을 제거하고 스스로 벼슬자리에 오르려 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반역 사건이었다. 허균은 칠서 중의 한 명인 심우영과 절친하다는 이유로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다.
급한 김에 허균은 당시 실세였던 대북파 1인자 이이첨에게 부탁하여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이후 허균은 대북파와 정치적 동거를 하며 한동안 승승장구하였다. 특히 허균은 당시 광해군이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인목 대비 폐출에 앞장서면서 광해군의 총애를 받게 됐다. 당시 광해군은 설득력 있는 폐비 상소문을 써 줄 허균 같은 문장가가 필요했다. 이 일로 그는 재상 반열인 정2품 좌참찬에 올랐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터지고 말았다. 정평으로 유배를 가 있던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이 허균의 반역 모의를 밀고했다. 기준격은 허균의 제자이기도 했다. 기준격은 허균이 궁궐을 치기 위해 승군을 조직했고, 처음에는 조카사위인 의창군을 추대하려고 했으나 나중에는 허균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허균을 두텁게 신임했던 광해군은 기준격의 고변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허균을 역적으로 몰며 처벌을 요구하자 이이첨도 이에 가세하였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광해군은 “허균의 일은 알아서 잘 처리하겠노라.”며 처리를 뒤로 미뤘다.
이이첨의 꾀에 빠져 변명도 못 해: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허균은 거사를 서둘렀다. 그 와중에 허균의 심복인 하인준이 남대문 앞에 격서를 써 붙이다가 체포되었다. 하인준은 배후를 불지 않았다. 이이첨은 이번 기회에 허균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사간원에서 허균과 기준격의 대질 심문을 요구하자 광해군이 마지못해 허락하였다. 8월 17일, 허균은 기준격과 함께 옥에 갇혔다. 22일 광해군이 친히 심문에 나섰다. 이때 하인준이 남대문 앞 격서는 허균이 만들었고, 현웅민이 글씨를 썼다고 자백했다. 그러자 현웅민은 격서는 자신이 도모한 것이라며 모든 죄를 자기가 뒤집어썼다.
그러나 현웅민의 자백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이첨 일파는 광해군에게 허균을 죽이라고 압박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허균의 죄상에 대해서는 격서 말고는 별다른 물증이 없었고, 특히 허균의 자백도 받지 않은 상태였다. 이이첨은 그때까지도 허균에게 “조금만 참으면 곧 풀려날 것”이라며 안심시켰다. 그래서 허균으로서는 미처 변명할 기회도 갖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왕은 이이첨 일파의 압박에 결국 처형을 허락했다. 그제야 허균은 자신이 이이첨에게 속은 것을 알고 “할 말이 있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끝나 버렸다. 그는 끌려 나갔고, 왕도 이이첨도 모두 못 들은 체했다.
8월 26일, 허균은 하인준, 현웅민, 우경방, 김윤형 등과 함께 반역죄로 능지처참형에 처해졌다. 당시에도 사형은 3심을 거치도록 돼 있었으나 허균에겐 이마저도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허균은 최종 판결문인 결안도 없었다. 기준격의 상소 내용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고 김윤황의 투서와 하인준의 남대문 격서를 물증으로 삼아 유죄로 판결했다. 그가 역적으로 죽자 연좌적몰에 따라 그의 집은 헐려서 연못이 되었다. 조카사위 의창군은 귀양을 갔고, 조카들도 벼슬에서 쫓겨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
처형 당시 허균의 나이 50세였다. 그는 저잣거리에서 사지가 찢겨 비참하게 죽었다. 그러나 누구도 역적으로 죽은 그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경기도 용인에는 그의 부친 허엽을 비롯해 두 형과 누이 허난설헌 등의 가족묘가 있다. 맨 오른쪽 끝에 있는 그의 묘는 시신이 없는 가묘다. 인조반정 후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모두 누명을 벗었으나 허균만은 예외였다. 정파를 떠나 기득권 세력은 사회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그를 끝내 용서하지 않았다. 그가 꿈꿨던 차별 없는 세상은 그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 역사학자 한영우는 『허균 평전』에서 그의 반역 음모를 아래와 같이 썼다.
“허균은 권력을 잡아 무엇을 하려고 했던가? 일신의 부귀영화를 꿈꾸었는가? 아니면 자신이 꿈꾸어 왔던 이상 국가를 세우려고 했던가? 그가 정도전을 마음속으로 흠모한 것, 서경덕이나 율곡 같은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의 학자들을 숭앙한 것, 평생 불우한 서얼들을 친구로 삼고 심복으로 키워 왔던 것, 그리고 ‘홍길동전’을 쓴 것을 본다면, 서얼이나 소외된 백성들이 좀 더 어깨를 펴고 살 수 있는 평등한 이상 국가에 대한 청사진을 실현하려 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