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이 조조에게 말하다 1
천위안 지음 | 리드리드출판
심리학이 조조에게 말하다 1
천위안 지음
리드리드출판 / 2022년 11월 / 288쪽 / 17,800원
PART 1 조조의 승리의 기술
베푼 만큼 되돌아오기를 기대한다지금 죽여야 하나? 아니면 살려 둘까? 동탁이 등을 보인 채 모로 누워 있다. 절호의 기회다. 조조는 이제 판단을 내려야 했다. 이토록 숨 막히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사도 왕윤과의 약속 때문이다. 조조 자신의 젊은 혈기와 왕윤의 치밀한 계산이 뒤엉켜 빚어낸 결과였다.
전날 저녁, 생일을 맞은 왕윤이 집으로 대신들을 불러 모아 연회를 열었다. 사실 오늘의 연회는 한나라 조정의 오랜 대신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동탁을 제거할 방법을 의논할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했다. 한나라 조정의 충신들은 동탁의 만행에 분개하며 동탁을 몰아낼 방법을 찾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사태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사도 왕윤이 생일을 핑계로 믿을 만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대사를 도모하려 한 것이다.
왕윤은 한나라 황실을 오랫동안 섬겨 온 사람들만 가려 뽑아 초대장을 보냈다. 조상 대대로 한나라에 충성해 온 그들 역시 동탁의 편에 서지 않았다. 왕윤의 행동을 통해 우리는 인지 메커니즘에 어떤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는지 알 수 있다. 바로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려는 욕구다.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다른 그룹으로 구분 짓고 ‘우리’와 ‘그들’이 당연히 다르다고 믿는다. 또 우리가 속한 그룹을 감싸고 그 외의 그룹은 배척하기도 한다. 가치관이나 행동 방식, 사물에 대한 기호 등에서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은 다른 그룹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왕윤이 사용한 판단 기준은 ‘오랜 신하’였다. ‘오래된’이라는 단어는 ‘새로운’과 반대된다. ‘오래된’ 사람들은 동탁이 조정을 장악하기 이전부터 한나라 조정을 위해 일하던 이들이고, 그 충성심은 여러 대에 걸쳐 이어져 왔다. 반대로 ‘새로운’ 사람들은 동탁의 출현 이후에 나타난 이들로 동탁의 세력에 봉사하는 그룹이다.
왕윤이 ‘오랜 신하는 충성스러운 신하’라는 기준을 적용한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마터면 주인공 조조가 초대받지 못할 뻔했기 때문이다. 동탁이 득세한 이후 조조는 동탁과 급격히 가까워졌을 뿐 아니라 유능한 일 처리로 동탁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 신하’라는 기준에서 본다면 조조는 한나라 개국 공신인 조삼의 후손이자 400여 년간 한나라의 녹을 먹어 온 조씨 집안 출신이기도 했다. 왕윤의 기준에서 볼 때 조조는 당연히 충신이었다. 한바탕 울음으로 시선을 집중시킨 왕윤이 본론을 꺼냈다.
“오늘은 이 늙은이의 생일이 아니오. 역적 동탁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생일이라는 핑계를 댄 것입니다. 내가 우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400년간 이어져 온 한나라를 위한 것이오. 동탁이 저리도 날뛰고 있는데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어찌 내일을 장담할 수 있겠소.” 왕윤의 말은 장내에 있던 한나라 신하들의 가슴을 후볐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 가진 것이라곤 충성심 하나뿐 동탁과 맞설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술을 마시며 울분을 삼키거나 왕윤처럼 얼굴을 가리고 우는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울고 있는 와중에 돌연 커다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순간 울음을 멈추고 웃음의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호탕하게 웃는 사람은 다름 아닌 조조였다. 한바탕 웃고 난 조조가 입을 열었다. “대신들께서 그렇게 밤을 꼬박 새워 운들 동탁이 죽겠습니까?” 장내는 순식간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러자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왕윤이 크게 화를 냈다. “네 이놈! 네 조상이 400년 넘게 한나라의 녹을 먹었거늘 참으로 배은망덕하구나!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함부로 입을 놀린단 말이야? 동탁에게 가서 밀고를 하려느냐? 우리는 죽어도 한나라의 귀신이 될 것이다!”
화를 내고는 있지만 사실 왕윤은 깜짝 놀라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자칫하면 이 젊은 녀석 때문에 대사를 그르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퍼뜩 뇌리를 스친 것이다. 왕윤은 그제야 ‘오랜 신하’라는 기준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조조는 충신의 조건을 갖추었지만 현재 동탁 정권에서 가장 빠르게 부상하는 스타였기 때문이다. 왕윤은 속으로 조조를 부른 걸 후회하기 시작했다. 잘못하다간 이 자리에 모인 대신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기였다.
그러나 조조는 동탁에게 밀고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조조의 마음은 아직 한나라에 있었다. 그 또한 동탁이 조정을 장악하고 안하무인으로 날뛰는 것을 마땅찮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원대한 포부를 품고도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한 조조는 자신의 꿈을 위해 동탁을 도우면서 성공의 발판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조조가 동탁과 가까이한 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서였다.
사실 조조는 굳이 대신들이 ‘충심’을 비웃으며 도발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한 것은 나약하고 무능한 그들의 울음소리가 조조의 영웅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조조의 눈에 비친 대신들은 늙고 힘이 없을 뿐 아니라 의지를 행동으로 옮길 열정도 없어 보였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이 문제를 거뜬히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조조 자신밖에 없었다. 이러한 심리를 바탕으로 조조는 모두가 깜짝 놀랄 만한 발언을 한다. “저는 다만 여러 대신 누구도 동탁을 죽일 방법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우스웠던 것뿐입니다. 제가 대단한 재주는 없으나 머리는 좀 쓸 줄 압니다. 곧 동탁의 목을 치고 그 머리를 성문에 걸어 천하에 내보이겠습니다!”
이 말은 과도한 자신감을 보여 주는 전형적인 예다. 물론 조조는 동탁과 가깝게 접촉할 수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동탁을 암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탁의 주변에는 무장한 군사가 둘러싸고 있었다. 특히, 천하제일의 명장 여포가 동탁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동탁을 죽이더라도 조조 또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동탁의 목을 성문에 걸겠다는 조조의 말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허풍에 불과했다.
하지만 왕윤은 조조의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의 원래 목적이 바로 조조 같은 인물을 찾는 것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아직 조조에 대한 의심이 남아 있어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왕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조에게 다가가 공손히 물었다. “맹덕 공, 한나라 왕실을 구해 낼 방법이 있으신가?” 그러자 조조가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대꾸했다. “제가 동탁과 가까이 있으니 기회를 엿보아 해치우면 됩니다. 동탁은 저를 신임하여 무슨 일이든 저와 상의하려 합니다. 사도께서 갖고 있는 보검을 제게 빌려주십시오. 그 검으로 역적 동탁을 죽이겠습니다.”
조조는 어째서 왕윤의 보검을 언급한 것일까? 보통 검으로도 충분히 동탁을 죽일 수 있었는데 말이다. 조조가 굳이 보검을 빌려 달라고 한 까닭은 왕윤의 신임을 얻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었다. 만약 왕윤이 자신을 완전히 신임하지 않는다면 동탁을 죽이겠다는 조조의 용기는 명분을 잃게 되고 목숨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만약 왕윤 등이 조조가 밀고하리라 확신한다면 아무리 힘없는 늙은이들이라 해도 한꺼번에 달려들어 조조의 입을 막고자 할 게 뻔했다. 그래서 조조가 생각해 낸 방법이 바로 보검이었다. 이 아이디어의 원조는 사실 전국 시대 진나라의 노장 왕전이다.
당시 왕전은 진나라의 60만 대군을 이끌고 출전하게 되었다. 천하 통일을 눈앞에 둔 최후의 일전이었던 만큼 나라의 모든 병력이 왕전의 손아귀에 있었다. 의심이 많은 진시황은 이것을 불안해했다. 장수 한 사람이 온 나라의 군대를 이끌게 되었으니 왕으로서 걱정되는 것이 당연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왕전은 출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행군을 멈추게 하고 말을 돌려 궁으로 돌아갔다. 진시황이 깜짝 놀라 연유를 묻자 왕전이 대답했다. “저는 이미 늙어 앞으로 전하를 보필할 기회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자손들을 위해 전답을 마련해 두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들은 진시황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대장군이 천하를 평정한다면 그까짓 전답이 문제겠는가?” “아닙니다. 부디 지금 제게 비옥한 전답을 내려 주십시오.” 진시황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도 함양 서쪽의 기름진 땅 200만 평을 하사했다. 그 후 왕전은 행군 도중 두 번 더 왕에게 저택과 땅을 요구했고, 왕은 매번 그의 뜻대로 해 주었다. 노장군 왕전은 어째서 출정을 대가로 미리 상 줄 것을 요구했을까? 그가 여러 차례에 걸쳐 지나칠 정도로 많은 땅과 재물을 요구한 것은 왕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준 것만큼 받으면 서로 빚진 것이 없는 상호 교환 관계가 된다. 상호 교환은 오랜 역사를 거치며 형성된 인간의 대표적인 행동 양식 가운데 하나다. 쉽게 말해 은혜는 은혜로 갚고 원수는 원수로 갚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신세를 지게 되면 어떤 형식으로라도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분이 영 찜찜하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나라의 모든 병력을 손에 넣게 된 왕전이 엉뚱한 마음을 먹지 않을까 매우 걱정했다. 예로부터 많은 군주가 바로 이 점을 우려하여 공을 세우고 돌아온 장수를 죽여 후환을 없앴다. ‘토사구팽’이라는 말도 바로 여기서 나왔다. 그런데 왕전은 자진해서 왕에게 재물을 요구함으로써 앞으로 세울 공에 대한 대가를 미리 받아 두었다. 진시황의 입장에서는 이미 가장 좋은 땅과 저택을 주었으니 그가 받은 만큼 공을 세우고 돌아올 일만 기다리면 되었다. 게다가 많은 재물을 얻은 왕전이 자리에서 물러난 후 편안히 여생을 보내게 되었으니 딴마음을 품을 가능성도 적었다. 이것이 바로 왕전이 왕에게 먼저 상을 요구한 이유였다. 설사 그가 결코 배신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한들 의심 많은 진시황으로부터 진정한 믿음을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보검을 요구한 조조 역시 이와 비슷한 목적에서였다. 보검이 암살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해도 암살에 따르는 여러 가지 다른 위험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보검은 왕윤이 조조의 용기를 격려하고 지지한다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양측이 ‘등가 교환’을 하면서 상호 간의 신뢰 관계도 탄탄하게 맺어진다.
PART 2 조조의 마음 다스리기
진실은 언제나 가면을 쓰고 있다유비는 굉장히 운이 좋았다. 조조가 유비의 손발을 묶어 놓을 작전을 궁리하고 있을 때 갑자기 여포가 군사를 몰아 연주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서주를 공격하느라 본거지인 연주를 잃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조조는 서둘러 군사를 돌리기로 했다. 하지만 조조는 상황을 활용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이왕 군사를 물리게 된 마당에 생색이라도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유비에게 편지를 썼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유비를 괘씸해하며 분통을 터트렸던 것과 달리 백팔십도 돌변한 모습이었다.
내 아버지가 변을 당하셨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소? 나는 군사를 일으켜 도겸의 집안을 몰살하고 그 죄를 물으려 했소. 그러나 황실의 종친이요, 재덕을 겸비한 현덕 공께서 특별히 편지를 보내 내게 천하를 생각하라 하니 즉시 군사를 물리겠소.”조조는 편지에서 자신의 원래 의도를 부풀린 동시에 모든 것이 유비의 덕인 것처럼 한껏 치켜세웠다. 철군이 불가피했던 조조였지만 모든 공을 유비에게 돌려서 체면을 살려 준 것은 그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였다. 호혜의 원칙에 따라 나중에 어떤 형식으로라도 되돌려 받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 했던 원래의 의도는 물거품이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는 비보를 듣자마자 군대를 일으켰던 불타는 복수심도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그리고 그는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 이 일을 구실 삼아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렇다면 조조는 ‘배알도 없는’ 불효자인 것일까? 아니면 ‘안 되면 할 수 없고’ 식의 흐리멍덩한 마음을 먹은 것일까?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좌절을 겪는다. 한 번 넘어졌다고 해서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면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 인류는 수천 년간 진화하면서 정신적인 충격을 받더라도 무의식중에 그 영향력을 제한하고 망각하는 일종의 ‘심리 면역력’을 갖추게 되었다. 우리가 각종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심리 면역력 덕분이다. 다만 이는 매우 신속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대부분 인식하지 못한다. 미국 심리학자 티머시 윌슨과 대니얼 길버트는 이 같은 현상을 ‘심리 면역 망각’이라고 정의했다. 좌절을 겪었을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빨리 적응하고 잘 극복해 내는 것은 이 현상 때문이다. 나쁜 기억을 잊는 것은 배알이 없거나 성격이 흐리멍덩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선천적인 특성 때문이다.
심리 면역 망각은 사건의 종류나 그것을 겪는 개개인의 특질에 따라 차이가 난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은 감옥에서도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감상하지만, 어떤 사람은 호화 저택에 누워 있어도 인생의 무미건조함을 불평할 수 있다. 또 같은 사람도 불의의 사고로 얻은 신체적 장애는 받아들이면서도 첫사랑의 상처는 평생 잊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조조는 매우 강한 심리 면역력을 타고났다. 이 같은 선천적인 특질 덕분에 그는 모든 종류의 충격에서 쉽게 벗어났고 아무리 나쁜 일이 벌어져도 오랫동안 끙끙 앓지 않았다. 조조는 일생을 통틀어 수많은 실패를 겪었다. 죽을 고비에서 살아난 경우도 부지기수지만 단 한 번도 의기소침하거나 용기를 잃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은 어느새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조조는 다시 천하를 도모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한편 조조의 답장을 받은 서주는 모든 공을 유비에게 돌렸다. 편지 한 장으로 100만 대군을 물리쳤으니 여간 큰 공이 아니었다. 도겸은 크게 기뻐했다. 서주를 유비에게 넘겨줄 기회가 다시 온 것이다. 저번에는 유비가 아무런 공도 세우지 않아 거절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서주 백성들을 전쟁으로부터 구해 냈으니 유비가 서주를 다스릴 이유는 충분했다.
도겸은 확신에 찬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이제 늙었고 두 자식은 능력이 모자라 큰일을 해낼 수 없소. 현덕 공은 황실의 종친으로 덕과 재주가 뛰어나니 서주를 맡아 주시오. 이제 나도 관직에서 물러나 조용히 살고 싶구려.”
그러나 유비는 또다시 사양했다. “저는 공융의 부탁으로 서주를 돕기 위해 온 것입니다. 모두 의를 위한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 서주를 차지하게 되면 천하가 저를 불의한 자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자 미축이 말을 받았다. “지금 한나라는 무너지고 있습니다. 큰 뜻을 세우려면 지금만 한 때가 없지요. 서주는 땅이 기름지고 백성의 수가 100만이 넘으니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힘을 키우시지요.” 미축은 실리를 내세워 유비를 설득하려 했지만 의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유비가 실리의 유혹에 넘어갈 리 없었다. 유비는 고개를 힘껏 가로저었다.
이번에는 진등이 나섰다. “태수께서는 몸이 편찮아 더 이상 공무를 수행하기가 어렵습니다. 공께서는 거절하지 마십시오.” 진등은 도겸의 건강을 이유로 유비를 설득하려 들었지만 아쉽게도 거기에 그쳤다. 지금 유비는 ‘의’라는 글자에 손발이 묶여 있었다. 그를 풀어 주려면 더 큰 의를 가져다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국가적인 대의였다.
진등은 서주 태수가 되는 것이 나라를 위한 일이라는 데 초점을 맞춰야 했다. 백성들에 대한 책임을 들어 유비에게 용기가 없어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며 ‘질책’했다면 유비는 내적 갈등이 풀리면서 요구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진등의 말은 도겸 개인의 건강 상태에 머물러 있었으니 유비가 겪고 있는 인지 부조화를 극복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유비라고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이가 결코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리에 맞는 명분 없이 결코 손댈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유비가 끝까지 고개를 젓자 도겸이 급기야 눈물을 흘리며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도겸의 눈물은 관우와 장비를 움직였다. 떠돌이 생활로 잔뼈가 굵은 유비, 관우, 장비는 이 풍족한 서주를 그냥 넘겨주겠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겸이 처음 말을 꺼냈을 때 유비뿐만 아니라 관우와 장비도 믿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