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삼성의 시대가 온다
박광수 지음 | 미래북
뉴 삼성의 시대가 온다
박광수 지음
미래북 / 2022년 10월 / 284쪽 / 16,000원
세계를 움직이는 삼성의 시작
삼성상회에서 삼성바이오로직스까지한국 경제의 거목 삼성그룹 창업자인 호암 이병철 회장은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1910년 2월 12일, 아버지 이찬우와 어머니 권재린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리고 1929년에 일본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는데, 유학 시절에 틈만 나면 일본 지역 소재 공장을 방문하고 일본 공업의 실상을 파악한 것이 차후 그가 거대 기업 삼성그룹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건강이 악화되어 1931년 와세다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한다.
유학에서 돌아온 이병철은 건강이 회복되자마자 신 공부의 영향을 받아 자기 집안의 머슴들을 해방시키고 전별금까지 주면서 자생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그 후 1936년 고향 친구인 정현용, 박정원과 동업으로 마산에 도정 공장과 협동 정미소를 차려서 운영했으나 중일 전쟁 여파로 파산한 것으로 전해진다. 첫 번째 사업의 실패를 경험한 이병철은 다시 실패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사업을 구상하다가 드디어 삼성그룹의 시발점이 된 삼성상회를 1938년 3월 부친의 도움으로 받은 3만 원의 자본금으로 대구 수동에 간판을 내걸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6ㆍ25 전쟁이 발생하자 부산으로 피난해 삼성물산(주)을 설립하고 설탕, 비료 등을 수입, 판매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수익을 창출하게 되어 이후 삼성그룹을 키워 나가는 데 커다란 보탬이 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1953년 8월 제일제당을 설립, 국산 설탕을 제조해 판매했고, 1954년 9월 제일모직을 설립하고 인재를 발굴ㆍ선발해 영국, 독일, 이태리 등에 기술 연수를 시켜 생산 원가는 내리고 품질은 좋은 국산 양복지인 골덴텍스를 출시했다. 이를 계기로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사업 영역을 본격적으로 확대해 나간다. 또 한편으로 1957년 한국 재계 최초로 신입 사원 공개 채용 제도를 시행해 유능한 인재를 채용하는 기반을 구축해 아마도 이때부터 ‘인재 제일’이라는 기업 문화가 만들어졌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1969년 1월 사돈 기업인 LG그룹의 적극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병철 회장은 가정생활의 주요 제품인 전자 사업에 관심을 갖고 수원시에 삼성전자공업(주)을 설립했고, 1969년 12월 일본 기업인 산요와 합착해 삼성산요(주)를 설립해 본격적인 흑백 TV를 생산했다. 그리고 1984년에 사명을 삼성전자(주)로 변경해 그룹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 오늘날의 세계 1위 기업인 전자업체로 성장시킨다.
그리고 1974년 삼성석유화학(주)과 삼성중공업을 설립해 당시 수출 위주 경제 성장에 맞춘 정책을 빈틈없이 시행하는 선두적 역할자로 중화학 공업 시대를 이끌어 가는 견인차 노릇도 한다. 한편 오늘날 아파트 브랜드 1위인 삼성건설 분야의 시작은 원래 1957년 자동차 회사인 신진공업(주)이 모태이며, 1979년 삼성그룹에서 인수해, 삼성건설(주)로 사명을 변경해 경영하다가 삼성물산건설 부문으로 흡수되어 현대건설을 제치고 국내 1위 회사로 성장한다. 한편 1995년 이건희 회장의 지시로 삼성자동차(주)를 설립하고 1998년 일본 닛산자동차의 기술 제휴로 SM5 중형 자동차를 출시했으나, 때마침 불어온 외환 위기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대량 적자를 내다가 1999년 법정 관리를 신청했고, 프랑스 르노사가 2000년 삼성자동차를 인수한 후 사명을 르노삼성(주)으로 변경해 삼성이 지분 일부를 가졌으나, 이후 삼성은 지분을 완전히 르노사에 매각해 2022년부터 르노삼성 상호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편 이병철 회장의 뒤를 이은 이건희 회장은 특명으로 “삼성의 새로운 동력을 찾으라. 무엇을 찾아도 좋다.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돈은 얼마든지 써도 상관없다. 3년 안에 제2의 삼성전자가 될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으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에 따라 김태한 전무는 12명으로 사업 팀을 만들고, 삼성 미래의 먹거리는 ‘IT와 접목한 헬스케어’라는 판단하에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설립하게 된다.
참고로 최근 발표된 삼성의 투자 계획 240조 원을 살펴보면, 바이오산업을 제2 반도체 산업으로 육성한다는 의욕적인 계획으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아 이에 대한 장기적인 대비를 하고 있다. 이에 발맞추어 현재 건설 중인 삼성바이오로직스 4공장을 조기에 완공시켜 바이오 의약품 분야에서 생산 능력 세계 1위 회사로 성장시킬 것으로 보이며, 이에 만족하지 않고 제5, 6공장도 추가로 건설해 코로나 백신, 세포 유전자 치료제 시장에서 어느 기업도 추월할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로 올라가 삼성의 이미지를 전 세계에 확고하게 구축할 것으로 믿는다.
삼성의 경영 정신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1990년대 초반 이건희 회장은 전 세계 전자 시장을 직접 돌아보면서 현실을 눈으로 확인한다. 삼성전자가 수출한 제품이 판매가 안 되고 불량품이 쌓여서 창고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쓰레기 취급을 받는 것을 목격하고 울분을 표하면서 이러다가는 수출로 이익을 본 것보다 불량으로 인해서 리턴하고 재출고해 주는 비용이 더 커서 삼성전자는 적자가 누적되어 망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1993년 6월 7일 삼성전자의 핵심 경영진과 현지 주재원 200여 명을 프랑크푸르트의 호텔로 불러 그 유명한 신경영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그는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 회사가 될 것이다. 지금부터 혁신해도 잘해야 1.5류 회사가 된다. 따라서 바꾸려면 철저하게 바꾸어야 1류가 된다.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는 명언을 남긴다.
그리고 “놀아도 좋으니 변화하려고 뛰는 사람 뒷다리는 잡지 말라. 회장인 나부터 솔선수범해서 바꿀 것이니 여러분들도 바꿔라. 바뀌지 않을 사람은 그냥 앉아 있어라.”라고 강조하며 “변화한 한 사람의 탁월한 인재가 향후 10만 명의 삼성인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또 “변화와 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미래의 승자와 패자는 누가 먼저 고정 관념을 깨고 변화를 정확히 알고 받아들이냐에 달려 있다.”며 재차 임직원들에게 변화할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많이 양산해서 소량의 이익을 보며 수출하는 ‘양 경영’보다, 성능이 탁월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통하는 우수한 제품을 연구 개발하고 품질 좋고 튼튼한 제품을 생산해, 국내 시장이 아닌 해외 시장 수출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질 경영’을 강조했다. 또 불량 제품은 ‘암 덩어리’라고 표현하며 철저하게 개선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세상에서 디자인이 제일 중요하다. 모든 제품은 개성화로 갈 것이다. 향후는 개성을 어떻게 표현하는지가 중요해서 디자인에 대한 혁신이 필요하다.”라고 하며, 디자인 인력을 확대하고 글로벌 디자인단의 자문을 받아들이면서 일본 소니 제품을 이긴 것은 디자인 혁명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이는 훗날 삼성 휴대폰 제품 개발 및 디자인 시 이건희 회장 의견이 반영되어, 2002년 단기간에 천만 대를 판매하는 ‘이건희 휴대폰’이 탄생되기도 한다. 이런 경영 혁신 회의는 스위스 로잔과 영국 런던으로 이어졌으며, 비슷한 시기인 7월에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일본 오사카와 후쿠오카로 삼성전자 부장급 이상 중요 간부들을 불러서 밤샘 회의를 하면서 신경영에 대한 의미를 강조했다고 한다.
이런 경영 철학을 바탕으로 이건희 회장은 취임 30년간 삼성전자의 매출을 400조 원으로 무려 40배 성장시켰고, 향후 백 년 내 한국 경제계에 이런 정신을 강조한 훌륭한 경영자가 다시는 나올 수 없을 거라는 말도 있다. 20년 전 삼성의 미래를 예측하고 변화를 강조한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한 번 삼성인은 영원한 삼성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져 본다.
삼성의 발전
반도체 전쟁의 승리반도체는 흔히 ‘산업의 쌀’로 비유되며 TV, 스마트폰, 자동차, 컴퓨터 등 일반적인 생활에 필수적인 전자 통신 기기 대부분에 중요 부품으로 사용되고 있다. 참고로 한국에서의 반도체 탄생은 미국 모토로라와 벨 연구소에서 근무한 강기동 박사와 강대원 박사가 창업한 한국반도체에 의해서이다. 하지만 당시 한국의 열악한 경제 상황이 맞물리면서 적자를 거듭하다가 도산 위기에 몰린다.
이에 ‘삼성의 미래는 반도체 사업에 있다.’고 판단한 이건희 회장이 부친인 이병철 회장에게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경영하자고 수차례 건의했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TV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데 반도체 개발 및 제조가 가능하냐?”고 반대하였고, 이건희 회장은 본인 보유의 삼성전자 주식을 매각한 자금으로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해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에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한다.
그 뒤 1982년 이병철 회장이 미국 보스턴 대학 명예박사 수여식 현장에 참석했을 때 이건희 회장이 동행해 그 당시 미국 첨단 반도체 현장인 IBM, HP를 함께 방문해 재차 반도체 사업 진출을 권유했고, 이병철 회장은 생각을 바꾼다. 그리고 1983년 일본에서 이병철 회장은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기며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한다. “세계 각국의 장기적인 불황과 보호 무역의 강화로 대량 수출에 의한 국력 신장도 이제는 한계에 이르렀다. 삼성은 자원도 거의 없는 우리의 자연조건에 적합하면서 부가 가치가 높고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제품 개발에 부응해야 한다. 그런데 반도체 산업은 그 자체로서도 상징성이 클 뿐 아니라 타 산업으로의 파급 효과도 지대하고 기술 및 두뇌 집약적인 고부가 가치 산업이다.” 이 말 한마디가 삼성의 반도체 산업의 커다란 불씨가 되어서 본격적인 반도체 개발이 시작되었다.
한편 당시 반도체 시장을 장악한 일본 기업(도시바, 히타치, 미쓰비시 등)은 한국의 삼성전자를 하류로 보고 만약 삼성전자가 64K DRAM 반도체 개발에 성공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며 코웃음을 쳤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고 삼성전자는 기존 보유 반도체 개발 인력에다가 국내의 우수한 전자 인력을 보강해 64K DRAM 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반도체는 타이밍 싸움이라는 경영 판단으로 경기도 용인시 기흥에 부지를 매입해 공장 건설을 병행하면서 개발도 진행했다.
그리고 1983년 9월 기흥 공장 건설에 돌입한 후 6개월여 만인 1984년 3월 기흥공장 1차 라인이 완공되어서 가동에 들어간다. 일본 기업들은 최소 18개월 이상 걸리는 공장 건설을 삼성인들이 주야 24시간 일하면서 6개월 만에 공장을 완공시킨 저력에 일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특히 개발 팀 인력은 개인 생활은 포기한다는 불굴의 의지로 개발팀 내부에 야전 침대를 설치하고 개발 업무에 박차를 가해 개발 6개월 만(1983년 12월 1일)에 64K DRAM을 세계 3번째로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삼성전자는 이병철 회장 지시대로 1983년 말에 착수해 1984년 10월 8일 7개월여 만에 256K DRAM 개발에 성공해 전 세계 반도체 기업들을 놀라게 하고, 이것이 삼성전자 매출의 첫 효자 상품으로 등극한다. 그리고 미국 반도체 회사에서 국비 유학생 1기로 근무 중이던 진대제 박사(후일 삼성전자 대표 이사, 정보통신부 장관 역임)를 삼고초려 끝에 영입해 1986년 10월에 1M DRAM 개발에 성공한다. 그 후 삼성은 4M DRAM, 16M DRAM을 병행 개발하면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빠르게 장악해 나간다.
한편 그 당시 반도체 설계 기술은 공정이 복잡하고 원가가 많이 들어가는 트랜치(tranch) 방식(도시바, 히타치, IBM, TI 기술)과 위험 부담은 크지만 원가가 싼 스택(stack) 방식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건희 회장은 과감하게 스택 방식으로 개발하라고 지시했고, 세계 최초로 성공하게 된다. 또한 웨이퍼(wafer)가 6인치인 당시 대량 생산 방식을 탈피해 삼성은 세계 최초로 8인치 웨이퍼로 16M DRAM(1990년 7월 출시)과 64M DRAM(1992년 출시) 대량 생산에 성공하게 된다. 그 결과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에 진출하고 10년 만인 1993년 DRAM 시장에서 전 세계 1위에 올라서게 된다.
이후에도 삼성전자는 메모리 사업에 더 집중 투자를 해 256M DRAM도 1994년 8월 29일 출시하면서 진정한 메모리 반도체 1위 기업으로 등극해 현재도 메모리 반도체 시장 1위를 수성하고 있다. 이에 만족하지 않은 삼성전자는 비메모리 사업 분야에서도 세계 1위가 되겠다는 야심 찬 계획으로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목표 달성을 위해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 2030년까지 133조(R&D 분야에 73조, 최첨단 생산 인프라에 60조 투자)를 투자한다는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한편 최근 삼성전자는 평택 1공장에 파운드리와 메모리 반도체를 포함한 생산 라인을 증설하면서 평택 2공장에는 43,000장 규모의 5mm 라인을 계획 중이며, 미국 오스틴 공장에도 파운드리 증설과 19조 규모를 투자해 파운드리 시장 분야에서도 세계 1위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참고로 파운드리(Foundry)란, CDMA칩을 개발한 미국 퀄컴과 컴퓨터 CPU칩을 설계한 인텔 같은 설계 전문 회사가 주문한 반도체를 자사의 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로 생산해 주문 회사로 납품하는 회사를 말하며, 소품종 대량 생산을 하는 메모리 반도체와 달리 다품종 소량 생산이 특징이다. 참고로 현재 파운드리 1위 기업은 대만의 TSMC이며 매출액은 2020년 기준 479억 5,000만 달러이다.
한계를 뛰어넘는 삼성
일본 전자 시장에 삼성 제품을 판매하라1990년대 초반 이건희 회장은 해외사업부장을 회장실로 호출한다. 이제는 삼성도 품질과 기술 수준이 어느 정도는 올라왔고, 미국, 유럽 시장에 삼성전자 제품이 팔리고 있으니, 일본 지역에도 삼성 제품을 판매하라는 지시였다. 해외사업부장은 고민을 하다가 일본통인 담당 부장을 호출하여, 일본 시장에 전자 제품을 판매해 보라고 지시한다. 그러자 담당 부장은 “그건 불가능합니다. 아직은 시기상조입니다.”라고 말하고 부연 설명을 한다. “일본 기업들은 거의 다 자국 제품을 선호하고 구매합니다. 그리고 일본 국민들은 가격이 아무리 비싸도 자국의 도요타, 닛산, 혼다 자동차를 구매하고 타고 다닙니다.”
그러자 사업부장은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는 사항이네. 하지만 어쩌겠나. 회장님 의견이 나왔으니 자네가 힘이 들겠지만 한번 맡아서 멋지게 성공을 해 보게.”라고 지시했다. 자리로 복귀한 담당 부장은 고민을 하면서 ‘이왕 이렇게 된 거 한번 후회 없이 업무를 해 보자.’고 결심을 하고, 과거 일본 근무 시 구매를 했던 경험으로 일본 회사 영업 담당자 리스트를 정리해 판매 가능한 회사를 추려 보고 하청 생산 회사도 조사해서 리스트를 만들었다. 또 이건희 회장 지시로 일본 기업에서 근무하다가 퇴직 후 삼성전자 고문으로 근무 중인 일본인 고문 리스트를 만들고 한 분 한 분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다.
이후 담당 부장은 리스트 된 일본 기업을 대상으로 미팅 약속을 잡고서 1차 일본 출장을 갈 계획을 한다. 그리고 판매 가능성이 있는 제품도 골랐다. TV는 소니 제품이 월등해서 불가능, VTR도 일본 제품들이 꽉 잡고 있고, 냉장고와 세탁기도 안 되고 무엇을 판매할지 고민 끝에 소형 제품인 HDD, CD-ROM DRIVER, 14인치 모니터 정도로 정하고 판매 전략을 구성한다. 1차 리스트 회사는 대개 큰 기업은 아니고 중견, 중소기업인 하청 기업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반응은 예상대로 싸늘했다. “일단은 테스트해 보고 검토하겠으나 큰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일본 상술상 거의 거부 의사를 간접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담당 부장은 인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