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리더십
김태광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박정희 리더십
김태광 지음
매일경제신문사 / 2022년 6월 / 280쪽 / 16,000원
학교 꼴찌에서 최고의 리더가 된 박정희
박정희는 가난했다, 아니 행복했다1970년대 ‘한강의 기적’을 창조한 대통령 박정희는 지구상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단기간에 눈부신 초고속 경제 성장을 실현했다. 남다른 패기와 추진력 및 강력한 리더십으로 한국의 근대화를 이끈 주인공이지만 어린 시절의 박정희는 열등했다. 그의 열등감의 근원은 지독한 가난과 작은 키에서 비롯되었다. 1917년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동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자주 체증을 앓았는가 하면 발육 부진을 겪었다. 그의 초등학교 학적부 기록을 살펴보면, 초등학교 6년 동안 129.9cm에서 135.8cm로 겨우 5.9cm만 자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난은 박정희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머니의 극진한 모성애로 누구보다 행복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정희와 같은 처지였다면 기가 죽어 존재감 없는 인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특유의 강한 리더십으로 자신보다 체구가 좋고 나이가 있는 학우들까지 통솔했다. 어쩌면 그는 작은 체구와 가난으로 인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스스로를 강하게 무장한 것은 아닐까?
부모 탓, 사회 탓하는 사람들에게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최악의 환경에서도 자신의 꿈을 향해 노력하고 도전하는 사람들과 부모 탓 또는 사회 탓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은 하나같이 전자들이었으며, 박정희도 언제나 지금보다 더 나은 자신, 미래, 나라를 꿈꾸며 헌신했다.
한편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근무하던 박정희는 어느 날 군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만주군관학교(4년제인 일본 육군사관학교와는 달리 만주군관학교는 2년제였음)의 시험을 보기 위해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가 만주군관학교 시험을 본다는 말에 가족들은 일제히 뜯어말렸지만 고집이 세고 민족 성향이 강했던 그는 만주행을 택했다. 그리고 1940년 4월, 박정희는 240명 합격자 가운데 15등으로 만주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했다. 그가 속한 2기생은 만주계 240명, 일계 24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박정희와 같은 조선인 11명은 만주계에 속했다.
참고로 박정희를 연구한 학자들 중에 그가 조국 근대화와 경제 개발 계획을 추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만주군관학교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왜냐하면 당시 만주국은 일본 관동군이 독립적으로 만든 신개척지로 붉은 노을에 물든 수수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는가 하면, 폭이 100m나 되는 대로를 중심으로 신경시가 건설되고 있었다. 또한 만주 철도와 거대한 산업 시설이 속속 들어서고 있던 터여서 박정희에게 이런 눈부신 발전의 이미지들은 충격이었다. 그런 이미지들의 영향으로 훗날 경제 개발 계획을 통해 대한민국 역시 만주국처럼 눈부신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을지 모른다.
한편 오늘날의 육군사관학교 생활도 혹독하지만 과거 만주군관학교 생활은 처참할 정도로 혹독했다. 무엇보다 박정희를 힘들게 한 것은 민족적 차별이었다. 공식적인 식사에서도 일본인 생도들에게는 쌀밥, 중국과 조선인 생도들에게는 수수밥을 주었다. 게다가 조선인 생도들은 중국인 생도들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여서 민족적 차별이 심했다. 박정희는 혹독한 훈련 가운데서도 만주군관학교 2년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는데, 우등상을 받은 5명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그 후 박정희는 1942년 10월, 일본의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유학생으로 편입했다. 일본 육사 시절 그는 자주 동기생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우리는 독립해야 한다. 독립이란 혼자 사는 것이다.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사는 것이다.” 그는 만주군관학교 때와는 달리 일본 생도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교육을 받았고, 그는 생도들 가운데 3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박정희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해인 1944년 7월 1일, 관동군 636부대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다시 만주군 보병 제8단에서 소대장을 마쳤다. 그 후 단장 부관으로 근무하다 해방이 되자 1946년 5월 6일 중국 청진항에서 미국 상륙용 함정을 타고 귀국했다. 군복을 벗고 민간인 신분으로 귀국한 박정희는 잠시 고향에 머물다 다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1946년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한 것이다. 만군, 일군에 이은 세 번째로 입는 군복이었다.
박정희의 사관 학교 시절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치기로 하자. 박정희뿐 아니라 성공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통해 세상의 모든 성공은 도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쉬운 길을 갈 수도 있었지만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쉽고 편한 길은 죽은 길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역시 정해진 운명대로 걸어가지 않았다. 가족들의 강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만주행을 택했고, 처절하리만치 혹독했던 과정 속에서 내면에 잠들어 있던 잠재력을 조금씩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동안 많은 성공자들을 인터뷰하면서 나는 상대가 성공할 사람인지, 아닌지 어느 정도 판별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게 되었다. 판별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지금 처지에 대해 남 탓을 하며 쳇바퀴 도는 생활을 하는지, 아니면 자기 탓을 하며 부단히 자기 계발을 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자,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시작하라
최고가 되면 결국 세상은 나를 찾는다어떤 국가 지도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한 나라의 미래가 달라진다. 과거와 현재의 처지가 바뀐 대표 사례로 필리핀, 브라질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나라는 과거에는 잘살았지만 지도자를 잘못 선택한 바람에 현재 국가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반면 한국과 같이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훌륭한 지도자로 대표되는 리콴유 수상의 탁월한 리더십 덕분에 아시아의 금융과 무역 중심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지금 한국은 1인당 국내 총생산(GDP)이 3만 달러를 훌쩍 넘기는 등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냈다. 그런데 불과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은 1인당 국내 총생산 수준이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인 아프리카보다도 낮았다. 그때 대부분 정치가들의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는 가운데 박정희가 등장해 ‘잘살아 보세’라는 기치를 내걸고, 1인당 소득 100달러, 수출 1억 달러에 불과한 한국에 가슴 뛰는 비전을 심어 주었다. 그는 10년 후 국민들에게 한국의 경제를 100배 성장시키겠다는 비전을 선포했다. 그때 아무도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만큼 우리 국민들은 패배 의식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국민과 나라를 생각하는 그의 헌신적인 모습에서 국민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급기야 온 국민이 박정희가 선포한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허리띠를 조여 매고 분투했다. 그 결과 1977년 12월, 수출액 100억 달러를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외국은 기적이라고 일컬었지만 절대 기적이 아니었다. 목숨을 내건 치열한 노력의 결과였다. 무명 시절에는 배고프고 알아주는 이 하나 없지만, 자신의 일에서 성과를 발휘하거나 직업 세계에서 최고가 되면 세상이 나를 찾게 마련이다. 박정희 역시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군사 혁명을 일으킨 그를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 반대 시위 또한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그가 모든 의사 결정의 최우선 순위를 국가와 국민들에 둔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지지하고 존경했다. 물론 정치적으로 대립한 사람들 가운데 끝까지 비난하고 그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정치적인 문제여서 배제해 놓기로 한다.
한국이라는 작은 회사를 잘나가는 중소기업으로 키운 박정희를 본받으려는 열기는 해외, 특히 공산국가에서도 높았다. 과거 중국의 지도자 덩샤오핑이 개혁과 개방의 물꼬를 트는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의 저서와 전기가 중국에서 출간되었는데, 그때 고위 간부들의 연수용 교재로 사용되었는가 하면, 덩샤오핑마저 박정희를 벤치마킹했다. 자원과 자본이 없었던 대륙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한국이 눈부시게 변모하는 모습을 보면서 박정희식 개발 전략을 중국화했다는 후문도 있다.
세계적 석학인 피터 드러커는 “2차 대전 후 인류가 이룩한 성과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대한민국”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처럼 세계적인 위인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높이 사는데, 유독 우리나라 정치가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사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지금의 눈부신 한국 경제의 초석을 다졌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가 이룩한 업적 가운데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계승할 것은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론 조사 기관 리얼미터는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역대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를 조사한 결과, 우리 국민 절반 이상이 역대 대통령 중 국가 발전에 가장 기여한 인물로 ‘고 박정희 대통령’을 꼽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꼽은 응답자는 53.4%로 가장 많았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은 25.4%로 뒤를 이었다. 3위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차지했으며, 전두환, 윤보선, 이승만, 노태우, 김영삼, 최규하 대통령 순으로 나타났다. 흥미로운 사실은 성별과 연령을 불문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1위로 꼽혔다는 점이다. 특히 연령대가 높을수록 지지도가 증가해 50대 이상이 65.5%로 가장 높았고, 40대(59.4%), 30대(44.8%), 20대(36.7%) 순이었다.
지금 모두가 죽겠다고 아우성인데, 먹고살기가 힘들수록 과거 세계의 최빈민국에서 아시아의 떠오르는 용으로 성장시킨, 경제적 과업을 이수해 낸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떠올리며 그 시절의 향수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많다. ‘박정희 향수’는 꼭 그가 무조건 좋아서라기보다 뚜렷한 비전도, 대안도 없는 현재의 좌절감 속에서 나오는 별 의미 없는 넋두리이기도 하다. 그만큼 과거 박정희 대통령이 절망에 빠져 있던 국민들에게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함과 동시에 성과를 발휘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절박하다는 것은 답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박정희가 군사 혁명을 일으킨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선 먼저 당시의 정세를 살펴봐야 한다. 일제 치하 36년, 갑자기 다가온 8ㆍ15 해방, 곧이어 3년에 걸친 6ㆍ25 동족상잔으로 한반도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전쟁의 후유증은 좌우의 격렬한 대립으로 이어졌는가 하면 이미 부정과 부패와 혼란은 정권의 심장부까지 갉아먹었다. 그 결과 이승만 정권은 점점 유약해지고 무능해져 갔다. 급기야 3ㆍ15 부정 선거로 인해 4ㆍ19 학생 혁명이 일어나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내려놓고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그리고 허정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과도 정부는 6월 15일 헌법을 개정해 권력 구조를 대통령제에서 내각제로 바꾸고 양원제를 도입하지만, 이는 또다시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분란의 원인을 제공하는 꼴이 되고 만다. 한편 갈수록 이념 논쟁은 사회 혼란을 가중시켰다. 일각에서는 먹고살기 위해서는 통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학생들은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선 북한과 통일밖에 없다며 연일 거리에서 시위를 했다. 심지어 북한의 경제력이 남한보다 월등히 앞서기 때문에 통일이 되면 경제적 분배 면에서 유리하다는 황당한 논리도 제기되었다.
남한이 이념의 소용돌이에 휩싸일수록 김일성은 더욱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그해 8ㆍ15 경축사에서 “자유로운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고, 공산화가 두렵다면 남북 연방제를 실시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또한 “연방제 통일안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경제교류부터 실시한 후 미군을 철수시키고 남북한 군대를 10만 명 아래로 감축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뒤로는 간첩들을 침투시켜 테러와 암살을 일삼았다. 게다가 좌익 단체들은 분단의 원인은 외세와 사대주의자들 때문이라는 억지를 쓰며 반공법과 국가 보안법 철폐, 정권 퇴진을 주장하며 혼란을 부채질했다.
박정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생각에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개혁에 착수했다. 그리고 부정부패와 부조리가 만연한 데다 무능까지 더한 장면 정권에 철퇴를 가했다. 한마디로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을 혁명으로 심판한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 후 산적해 있는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중에서 가장 절박한 것이 돈이었다. 돈이 있어야 경제를 발전시켜 가난으로 신음하는 국민들을 먹여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절박한 만큼 탁상공론하지 않았다.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그리고 할 수 있는 모든 문을 두드렸다. 박정희는 특별 담화문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국제 사회의 경쟁 속에서 지난날의 감정에만 집착할 수 없다. 아무리 어제의 원수라 하더라도 우리의 어제와 내일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그들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가 아니겠는가!”
한편 숱한 정치적 반대가 있었고, 또 전후 세계사에서 가장 길었던 외교 협상 중 하나로 한일 협정을 들 수 있는데, 한국과 일본의 기본 관계를 규정한 조약인 한일 협정은 한일 재산과 청구권 문제 해결,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 한일 문화재 및 문화 협력에 관한 협정, 재일 교포 법적 지위 대우에 관한 협정, 한일 어업 협정 등 4개 부속 협정과 25개 문서를 포함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은 한일 협정으로 인해 경제 발전에 발목을 잡히고 있었지만, 10년 동안 자유당과 민주당 정권은 어떤 해결점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시간만 질질 끌고 있었다. 그때 박정희는 과감한 추진력으로 한일 협정의 종지부를 찍었다.
한일 협정을 통해 당시 박정희 정권의 탁월한 외교 능력을 엿볼 수 있다. 당시 한국은 청구권 액수를 놓고 일본에 7억 달러를 요구했지만, 일본은 7천만 달러가 상한선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양국의 의견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이때 김종필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무장관은 청구권 금액을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 차관 1억 달러 이상’으로 합의를 보게 된다. 이로써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을 이룬 청구권 문제를 타결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협정하는 과정에서 상업 차관 부문만 3억 달러로 최종 조정했다. 훗날 한일 협정에서 합의한 청구권은 큰 힘이 된다.
그 무렵 박정희는 철강 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포항 종합 제철 공업 단지를 건설하겠다고 결심했고, 마침내 1967년 10월 3일, 포항시 영일군 대송면에서 포항 종합 제철 공업 단지 기공식을 했다. 하지만 공사는 진행되는데 외자가 확보되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다급해진 정부는 미국 수출입 은행이 책정해 놓은 1969년도 대한 차관의 일부를 우선적으로 종합 제철 사업 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세계은행 측에 차관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얼마 후 기대와는 달리 세계은행 측은 사실상의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그리고 시일이 지나면서 종합 제철 공사는 고착 상태에 빠졌다. 그때 공사 책임자였던 박태준 사장의 아이디어로 공사 진행에 활기를 띠게 된다. 일본이 한국에 주기로 한 대일 청구권 자금을 미리 당겨쓰자는 것이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103만 톤의 철강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상 초유의 포항 종합 제철 공업 단지를 완공할 수 있었다.
한편 당시 대다수 국민이 유엔의 원조로 근근이 버티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박정희는 뜬눈으로 지새는 날이 많았다. 그러다 그는 또 한 가지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고, 젊은이들을 베트남 전쟁에 파병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는 그런 결단이 자신에게 어떤 정치적 불행을 초래할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무보다 숲을 보는 사람이었다. 그런 긴 안목으로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고, 베트남 파병을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 해서라도 외자를 확보해 경제를 발전시키고 싶었던 것이었다. 물론 비록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낳았다. 그러나 그로 인해 경제 원조, 외국으로부터의 차관 등 많은 외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외자 확보는 다시 경제 발전으로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대미 수출 증가와 주한 미군의 계속 주둔 등등의 성과도 상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