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을 다독이는 관계 심리학
우즈훙 지음 | 리드리드출판
내 영혼을 다독이는 관계 심리학
우즈훙 지음
리드리드출판 / 2022년 1월 / 238쪽 / 15,800원
PART 1 내 안의 나르시시즘
나르시시즘 VS 사랑
건강한 나르시시즘에서 배려가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너의 도움은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하므로 네 도움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는 “나는 도움이 필요치 않고 누가 나를 도와주고 싶다면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해야 한다.”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물고기를 잡아주기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줘야 하는 것처럼 전능한 나르시시즘에 가장 좋은 도움은 ‘건강한 나르시시즘’을 증강시켜 주는 것이다. 만약 물질적 도움이 불가피한 경우라면 그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그 결과를 얻었다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노력이 필요 없는 증여는 도움을 주는 사람의 자기애는 높이고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자기애는 낮출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움을 제공하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잘 살펴 증진된 자기애를 자각해야 한다.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었다고 느낄 때는 도움을 즉시 멈춰야 한다. 상대방이 부담스러워하거나 원하지 않는 도움을 주는 것은 자기만족을 위해 감행되는 행위일 뿐이다.
건강한 나르시시즘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애의 손상을 견딜 수 있다. 그들은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배려하고 존중하며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건강하지 못한 나르시시즘을 가진 이들은 자기애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로부터 입은 은덕을 저버리기도 하고 배신하기도 한다.
도덕적 나르시시즘은 좋을까?: 우리는 자신의 적대심은 잘 깨닫지 못하면서 타인의 적대심은 과장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자신의 결점은 묵과한 채 다른 사람의 결점은 우리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긴다. 자신은 도덕적이라고 단언하면서 타인의 비도덕적인 면에 시선을 고정한다.
이처럼 자신은 스스로 이기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타인과 잘 지내기 어렵다. 그 이유는 단순하면서 명쾌하다. 첫째, 자신은 이기적이기 않다고 믿으며 ‘이기심’과 같은 ‘나쁜’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투사한다. 둘째, 자신은 이기적이지 않다는 믿음으로 도덕적 우월감을 스스로 부여해 어떠한 행동을 하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여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는다. 셋째, 자신을 이기적이라고 여기지 않으므로 발언권을 포함해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것을 매우 강하게 주장한다. 넷째, 분명 이기적인 구석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확증으로 주변 사람들이 거북해할 수밖에 없다.
이기적이지 않다고 자처해온 사람이 오히려 이기적일 수 있다. 가끔은 스스로 이기심을 허락하고 상황에 따라 강하게 발휘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큰 성장이다. 자기 내면에 이기심이 존재하고 자아도취에 빠지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한다면 자신과 주변 사람의 관계가 훨씬 편해질 수 있다.
‘도덕적 나르시시즘’은 관계를 거절하고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하려 한다. 그 결과 도덕적 나르시시즘을 가진 사람은 항상 외로움에 묶여 있고 다채로운 생활을 즐기기 어렵다. 자신의 도덕 수준이 높다고 인식하는 사람일수록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의 도덕 수준은 낮다고 평가하여 사람 간 어울림에서 멀어진다.
도덕적 자기애를 가진 자는 너무 외로워서 외로움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 일상에서 그들은 감정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폐해를 주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모든 일과 판단, 문제 상황을 혼자 해결하고 견디면서 고독함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 사랑, 보살핌을 청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도덕적 나르시시즘에 손상을 주는 일이다. 그래서 도덕적 나르시시즘을 지닌 사람과 함께 있으면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도덕적 나르시시즘을 지닌 사람의 에너지는 내향적이다. 적의도 없고 열정도 없다. 이들이 젊다면 그나마 열정과 인간미를 띠지만, 중년이 되면 점차 빈껍데기가 되어 행동만 남을 뿐 에너지의 흐름이 약해진다. 노년에 이르면 남의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고독한 세계에 빠져든다. 사교에 소극적이며 심지어 집안일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내적 안정을 얻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활기를 잃은 고요함일 뿐이다.
도덕적 나르시시즘의 형성은 진정한 자아를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해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다른 유형의 자아를 발전시킨 결과로서 이타적인 행동에 다른 사람들이 칭찬한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칭찬은 인정받은 사람으로 내면이 자극된다. 스스로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부여하기에 충분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심각한 도덕적 나르시시즘은 자아를 상실하게 만든다. 타인에게 드러내는 자신의 자아는 본래 지닌 도덕성보다 강한 도덕성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히 선해야 하고 탁월하게 바른 생활을 해야 한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 자아의 도덕성을 닦달한다. 없는 도덕성까지 긁어모아야 할 판이다. 그로 인해 외적 도덕적 모습은 완성되겠지만 내적 자아는 피폐해진다.
도덕적 자기애를 가진 사람이 하는 좋고 착한 일에는 따듯한 온도가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주변엔 항상 ‘나쁜 사람’이 출몰하는데 ‘나쁜 사람’이 도덕적 자아도취자의 위대함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도덕적 나르시시즘이라는 말은 좋게 들리지만, 진정한 자아를 부정하는 연약함이 숨어 있다. 비판이 두려워 착하고 선함으로 위장한다. 여기에 더해 자신을 실수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다른 사람으로부터 트집 잡히지 않으려 한다. 심각한 도덕적 자아도취는 관심이나 주목을 받지 못한 사람이 형성한 자아상이다. 강박증 마냥 무조건 다른 사람에게 잘해주면서 자기 위안을 얻는다. 그렇지 않으면 죄책감이나 불안감에 휩쓸린다.
도덕적 나르시시즘을 추구하지 마라. 도덕적 위대함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을 괴롭게 만들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을 올바른 위치에 두기 위해 주변 사람을 나쁜 놈의 위치로 밀어붙이게 된다.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나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적당히 나빠지는 법을 배워라. 타인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기감정이 해소되어야 한다.
분노가 밖으로 표출되지 않고 내부에서도 소화되지 않으면 분노의 화살은 자신을 표적으로 삼아 공격한다.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잘 알기에 어디를 공격해야 타격을 크게 입는지도 안다. 회복 불가능의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때로는 공격의 위험성을 아는 사람은 스스로를 통제해 자신을 억누르기도 한다. 자기 통제는 사고와 행동이 느려지고 불편해진다. 따라서 분노를 표현하는 법을 배워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을 때 자기 억압이 사라지고 자유로움과 여유가 생긴다.
도덕성이 높은 사람은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는다. 화가 나는 상황에서 화를 내면 ‘좋은 사람’이라는 자기 정체성이 무너지기에 분노를 억누르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고 ‘상대방이 절대적으로 틀리다’는 위치에 놓여야 반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대립감은 그들의 도덕적 주장을 더욱 강화시켜 파괴적인 공격성을 드러내게 만든다. 이때의 반격에는 관계의 파괴가 수반된다.
‘좋은 사람’은 도덕적 자기애가 관건이다. 좋은 사람도 감정의 통제력을 잃고 격한 분노를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 분노의 에너지를 자연스럽게 표출할 때 상대방과 상호작용도 상대적으로 단순해진다.
나르시시즘 VS 관계
통제보다 포용의 위력이 강하다: 높은 통제욕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관계에서 감제고지(瞰制高地, 적의 활동을 살피기에 적합하도록 주변이 두루 내려다보이는 고지)를 차지하려는 것이다. 특히 나르시시즘, 권력, 역량의 가로축에서 우위를 점령하려 한다. 둘째, 관계의 깨짐을 두려워한다. 그로 인해 관계, 애착, 감정의 차원에서 매우 민감한데 이는 높은 통제욕과 불안감이 공존하는 상태이다.
애착 관계에 있어 나르시시즘 수준이 높은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을 찾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아주 순수해서 속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람이나, 단순해서 다음 행동이나 말의 예측이 가능한 사람을 찾는다. 하지만 그들의 솔직한 심리는 상대방의 이런 점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런 사람을 선택하는 것은 자신이 통제하기 쉽고 자신에게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통제가 쉬운 사람은 관계의 우위를 차지하려 애쓰지 않으며 높은 수준의 안정성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그로 인해 통제욕 높은 사람의 요구에 빠르게 부응하며 사소한 시비나 갈등의 요소를 제거한다. 초안정 상태의 사람은 습관적으로 복종하고 역량 차원의 하단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이런 순종은 일방적 양보이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인정이 아니다. 따라서 복종적인 사람이 참지 못했을 경우 언젠간 '반란'을 일으킨다. 이를 나르시시즘에 대입해보면 역량 차원에서 우위를 점령하고 싶은 사람이 역량 차원의 열세에 놓여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은 일시적인 해결법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관계에서 자신이 참고 양보하는 것이 대부분이라면 차라리 그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더 좋다.
진정한 해결법은 관계 차원의 수준 변화가 자유로운 사람을 찾는 것이다. 관계 차원에서 자유도 의지가 높은 사람은 자신의 변화 폭이 넓기에 통제 욕구가 강한 사람까지 포용할 수 있다. 양보와 철회, 물러서며 자기 의지를 꺾는 것이 참는 것이라면, 포용은 수용하며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참는 것은 반발이나 반감이 작용하지만, 포용은 감정의 부작용이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통제욕이 강한 사람은 포용의 실천이 어렵다. 첫째, 그들은 관계 차원의 폭이 넓은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그 자체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통제욕이 강한 사람은 이런 사람과의 관계 맺음을 다소 부담스러워한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을까 봐 피하는 것이다. 대신 순종하는 사람을 찾는다. 둘째, 그들은 자신이 까닭 없이 트집을 잡아도 상대가 자신을 포용하기를 원한다. 그로 인한 관계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통제욕이 강한 사람의 악한 행동 또는 관계를 강력하게 파괴하는 행동은 포용하는 사람과 관계 공간을 파괴하고 관계를 무너뜨린다. 비록 관계가 계속 유지되더라도 진정한 관계는 이미 죽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죽은 관계는 그냥 죽게 버려두는 것이 낫다. 10년 혹은 20년 전부터 죽은 관계지만 여러 원인으로 여전히 관계가 유지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에는 ‘어두움’뿐이다.
사람의 일생은 길다. 하나의 관계가 틀어져도 다른 관계를 찾으면 된다. 세상은 넓고 문제를 지닌 사람은 각양각색이다. 노력에 따라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찾을 수 있다. 시간은 우리의 수많은 잘못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그릇이다. 세상도 거대한 그릇이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어리석은 잘못을 반복해도 다양한 선택이 여전히 우리에게 주어진다.
자신의 잘못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지적을 용납하지 않으며 진심으로 잘못을 반성하지도 않는다. 반면 주변 사람이 실수를 유발하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더구나 잘못이 없는 경우에도 잘못을 인정하도록 강요하기도 한다. 그로 인해 갈등이 유발되고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는 개인, 가정, 회사, 권력 체제 등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개개인은 심리적으로 자기 체면 문제를 중요시한다. ‘누구든지 내 잘못을 지적해서 나의 체면을 잃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심각한 나르시시즘의 문제이다. 이는 너와 내가 하나의 자아로 합병된 공생 심리이다. 틀린 부분은 소멸되고 옳은 부분으로만 합병되기 때문에 옳고 그름의 문제가 생사의 문제가 된다. 반대로 나와 네가 분리되어 있다면 옮고 그름을 가리는 것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어떤 사람은 매우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다. 말다툼에도 욕설을 내뱉지 않고 이기적인 면도 드러내지 않으며 아무 욕망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이들이 사용하는 이성적인 언어에는 ‘내 말이 맞고 나와 의견이 다른 것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라는 편집스러운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잘못된 것은 존재해선 안 되고 상대방에게도 존재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편집스러운 생각은 원한 또는 파멸의 욕구로부터 비롯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사람들은 대개 자기에게 깃든 증오와 원한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식이 되는 이들도 이를 강하게 부정하며 회피하고자 애쓴다. ‘나의 의식’을 곧 ‘나’라고 간주하기에 나쁘다고 판단되는 일을 자신이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들은 그 원한이 얼마나 강하고 파괴력을 가지는지 잘 안다. 그래서 ‘나’의 원한에 자신이 독살될까 봐 이런 감정을 멀리하려 한다. 대신 이성적 언어 표현으로 원한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킨다. 그들 대다수는 언어를 가지고 노는 데 대가이기에 그들의 말과 글에서도 결점을 찾기 힘들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잘못은 반복된다. 이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마찬가지다. 잘못을 인정하려면 잘못이 허용될 심리적 공간이 필요하다.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것은 타협적이고 관용적인 모습의 표현이다. 반대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과도한 나르시시즘과 편집증과 연결된다. 이제껏 항상 당신이 옳았다면 당신은 실속 있게 살아본 적이 없다는 진실의 반증이다.
관계 사이에는 에너지가 흐른다: 빅토르 프랑클(Viktor Emil Frankl)은 저명한 임상심리학자로 오스트리아 정신요법 제3학파인 로고테라피 학파의 창시자이다. 그는 “누군가를 몰입해서 사랑하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행복이 찾아온다.”라고 말했다.
가장 피곤한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해야 할 일도 거의 없고 교제할 친구도 적지만 언제나 피곤한 상태다. 주변 사람들도 그들이 왜 피곤한지를 이해하지 못하며 그들 또한 자신이 피곤한 이유에 대해 잘 모른다. 깊숙이 들여다보면 이들의 피로는 ‘내면의 갈등’에서 비롯된다. 사람이나 일, 사물과의 연계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두려움이 자신을 지배하고 엄습하면 관계에 대한 열망을 내면에서 억누른다. 하지만 관계를 맺는 것은 인류의 기본적이고 중요한 갈망이다. 따라서 내적 갈등은 과하게 에너지 소모만 불러오며 피로를 안길 뿐이다.
반면 의미 있는 바쁨은 오히려 일종의 자아 치유 방법이다. 자신이 좋아하고 흥미를 느끼는 일을 하면 피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활기찬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과 같다. 사람과 관계가 맺어지면 기분이 더 즐거워지며 새로운 에너지가 생성된다. 의미 있고 좋은 관계는 삶의 통로로 흘러 연계가 이루어지면 활력의 최고 자양분이 된다.
명상과 정좌도 정신적 영양을 공급해주는 좋은 방식이다. 마음과 생각, 번뇌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자양분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깊은 수면도 사람에게 에너지를 준다. 머릿속 생각이 들끓으면 숙면이 어렵다. 어떤 이들은 차분해지면 이성과 의식이 마음속 깊은 고통을 깨우기 때문에 생각 비우기를 두려워하기도 하지만 수면은 몸의 휴식을 추구함이 아니라 끊임없는 생각들로부터 잠시 벗어나 심신의 안정을 취하는 단계이다. 짧은 시간이라도 수면을 유도하면 생각의 정리가 쉽고 차분하게 이루어진다.
우리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쉽게 지치지 않지만 사람들과 교제할 때 쉽게 피곤함을 느낀다면 인간관계에 있어 긴장하고 있다는 의미다. 더 깊게 살펴보면 내면에서 관계를 갈망하는 동시에 관계에 저항하는 갈등이 아귀다툼하듯 대립하기에 외적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마음과 느낌이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지나간 상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