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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에서 내 삶을 받쳐 주는 것들

장재형 지음 | 미디어숲


장재형 지음

미디어숲 / 2021년 9월 / 256쪽 / 15,800원



나 자신에게 이르는 길



자아 - 나만의 정원을 만들고 가꾸어라 - 헤르만 헤세 『데미안』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헤르만 헤세는 그의 대표작 『데미안』 서문에서 우리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라고 말한다. 모든 인간의 삶은 그 자체가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고, 그 길을 가려는 시도이며, 각자 최선을 다해 자신의 본모습을 찾으려는 노력 그 자체라는 것이다.

즉, 『데미안』은 인간이 자신의 삶 속에서 온전한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자기의 온전한 모습, 다시 말해 본모습을 찾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돈, 건강, 가족, 사랑, 자유 그리고 삶 자체마저도 잃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살면서 가장 힘겨운 상황에 부딪힐 때, 자신의 내면으로 뛰어들어야 강력한 내면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내 곁에서 내 삶을 안정적으로 받쳐주던 것들이 흔들릴 때, 비로소 우리는 더욱 성장한다.

한 해가 지나 다시 봄이 오고 여름이 돌아오면, 갖가지 화려한 꽃과 식물들이 피어나는 나만의 정원을 가꾸어 보자. 그곳에서 슬픔의 위안을 받을 수 있고, 힘든 내 영혼이 쉴 수 있는 은신처가 될 것이다. 그들은 내 안에 함께 살고 있으며, 그들은 나를 지탱해 주는 믿을 만한 존재이다.

거짓된 자기 자신을 극복하라: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철학자 니체의 유명한 아포리즘이다. 하지만 영원성을 상징하는 신이 죽었다는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그렇게 충격적이지만은 않다. 영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신’이 아니라 ‘물질’이기 때문이다.

사실 목표도 없이 방황하던 시절에는 막연히 돈 좀 벌고 성공 좀 하면 삶이 나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남부럽지 않은 성공을 이뤘고 돈도 벌었지만, 누군가 왜 사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하기 힘들다. 또한 젊은 시절 내게 주어진 행운과 성공의 기회를 놓쳐버린 후 끊임없이 추락의 길을 걷기도 했다. 돈으로 다 되는 물질만능주의 속에서 우리의 삶은 왠지 공허하다.

빠르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삶 속에서 자신의 삶과 야망, 그리고 영혼조차도 송두리째 타들어 가, 남은 것은 타다 남은 슬픔과 고뇌의 재뿐이다. 가끔은 자신의 꿈을 잃어버려서, 꿈 자체가 없어서 삶이 허무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무언가 이루려고 꿈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허무주의의 늪에 빠져 버린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이 시대의 허무주의를 예견했던 니체는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사람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 위버멘쉬가 대지의 뜻이다. 너희 의지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라. 위버멘쉬가 대지의 뜻이 되어야 한다고!”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말하면서 ‘위버멘쉬’, 즉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니체가 말한 초인은 신이 죽은 세상에서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인간상이다. 니체는 극복하려는 의지에 따라 인간을 초인과 ‘인간말종’ 두 부류로 나눈다. 즉, 초인은 ‘힘에의 의지’를 바탕으로 자기 극복을 위해 기존의 모든 관습과 굴레를 벗어나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게 된 존재이다. 반면에 인간말종은 대지 위에 있는 벼룩과 같아서 자신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는 경멸스러운 존재인 최후의 인간을 말한다. 따라서 그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진정한 의미의 자기 자신이 되려면 거짓된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신의 약점이나 자신이 겪은 고통과 시련까지도 자기발전의 계기로 승화시킬 줄 아는 초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인이 되는 것이 바로 헤세가 말한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 아닐까? 우리는 자신의 온전한 모습에 이르는 길을 초인을 닮아가는 과정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또한 데미안은 니체가 말한 자기 자신을 극복한 본연의 모습을 한 자기를 의미하는 ‘초인’이 아닐까?

내면의 성장을 위한 여정: 『데미안』은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가 열 살 때부터 스무 살 정도가 될 때까지 대략 10여 년간 겪었던 내적인 변화와 성장을 다룬 자전적 소설이다. 싱클레어는 작은 도시에서 라틴어 학교를 다닌다. 그는 이 세상이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로 나뉘어 있다고 생각한다. 밝은 세계에는 의무와 책임, 양심의 가책과 고해, 용서와 선한 원칙들, 사랑과 존경, 성경 말씀과 지혜가 있다. 반면에 어두운 세계에는 도살장과 감옥, 술 취한 사람들과 악을 쓰는 여자들, 새끼 낳는 암소와 쓰러진 말들, 강도의 침입, 살인, 자살 같은 일들이 있다.

싱클레어는 공립학교 학생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어느 날 프란츠 크로머와도 어울리게 된다. 싱클레어는 그들에게 자랑삼아 자신이 과수원에서 사과를 훔쳤다는 거짓말을 하고 맹세까지 한다. 크로머는 과수원 주인에게 이 사실을 알리겠다며 돈을 가져오라고 한다. 싱클레어는 자신의 저금통을 깨 그에게 가져다준다. 이제 싱클레어는 새 삶에 대한 두려움으로 죽음과 같은 쓴맛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싱클레어는 전학생 막스 데미안의 도움으로 크로머의 괴롭힘에서 벗어나게 된다. 하지만 데미안은 크로머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악하고 나쁜 세계로 이끄는 또 하나의 유혹자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싱클레어에게 우리가 진실이고 옳다고 배우는 대부분에 대해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싱클레어는 악당 크로머와 데미안을 통해 처음으로 밝은 세계에서 떨어져 나가 바깥 어둠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이제 싱클레어는 어린애처럼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와의 사이에서 삶의 모든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즉, 싱클레어는 내면의 성장을 위한 여정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정신의 세 번째 변화’에 대해서 말한다. 그는 낙타, 사자, 아이의 비유를 들어 자기 자신을 찾아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을 극복한 초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 극복해야 할 첫 번째 변화의 과정은 ‘낙타’의 단계이다. 무거운 짐을 버티는 삶의 태도가 바로 낙타 정신이다. 낙타가 무릎을 꿇고 짐이 가득 실리기를 기다리듯이 우리를 억누르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그 무거운 짐은 전통적인 종교와 철학이 요구하는 진리, 도덕, 관습과 규율 등을 말한다. 즉, 아무런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짐만 지거나, 그것이 무엇인지 의문을 갖지 않는 낙타는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는 인간말종에 대한 메타포인 것이다.

두 번째 변화의 과정은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사자’의 단계이다. 하지만 니체는 “사자의 정신은 기존의 가치를 파괴할 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즉, 기존의 가치를 부정함으로써 더욱 허무주의에 빠진다는 것이다.

마지막 변화의 과정은 ‘아이’의 단계이다. 여기서 아이의 정신이란 어린아이가 춤을 추듯, 놀이에 흠뻑 빠지듯, 자신의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즉, 아이의 정신은 우리의 삶이 고난과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아이처럼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창조적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정신의 세 가지 변화의 과정이 바로 본래 자신의 모습에 이르는 길이다.

독서 - 그 사람의 인생을 드러내는 것 - 장 폴 사르트르 『말』


프랑스의 유명한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은 무엇을 먹는 지가 그 사람을 규정한다고 했다. 만약 책을 음식에 비유한다면, 이 말은 책을 읽는 우리의 삶에도 적용된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그가 읽고 싶은 책을 살펴보면 된다. 독서는 그 사람의 인생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독서는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삶의 진리와 의미를 발견하게 해 줄 책들을 위해 책장에서 구태여 읽을 필요가 없는 무의미한 책들은 정리해서 버리고, 빈자리를 마련해 두자. 좋은 책 속에 나오는 수많은 아포리즘과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고통스럽고 고독한 우리의 삶에 작은 위안이 되어 다가옴을 느낄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책을 사랑한 사르트르: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의 거장인 장 폴 사르트르의 대표작 『말』은 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읜 사르트르가 외할아버지의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보낸 유년 시절을 기록한 그의 자서전이다. 1부 ‘읽기’, 2부 ‘쓰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르트르가 대문호가 될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 환경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할아버지의 서재를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게 되면서 인류의 지혜와 씨름하기 시작했으며, “그것이 나의 오늘날을 만들어 놓았다”고 말한다. 그가 어릴 적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느꼈던 심정을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독서와 글쓰기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책에 둘러싸여서 인생의 첫걸음을 내디뎠으며, 죽을 때도 필경 그렇게 죽게 되리라. 할아버지의 서재는 도처에 책이었다. 그는 일 년 한 번, 즉 10월에 신학년이 시작되기 직전이 아니면 서재의 먼지도 털지 못하게 했다. (……) 나는 이 책들이 우리 집의 번영을 좌우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그것은 모두 비슷한 모양이었다. 나는 작달막한 고대의 유물들에 둘러싸인 이 작은 신전 속에서 뛰놀았다. 내가 태어나는 것을 보았고 또 나의 죽음을 지켜볼 유물들, 과거와 똑같이 평온한 미래를 내게 보장해 줄 영원한 유물들. 나는 그것들을 몰래 만져보았다. 먼지가 손에 묻는 것이 자랑스러웠기 때문이다.

나도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책에 파묻혀 살고 있다. 책은 나만의 은둔 장소이자 보금자리였다. 책은 어린 시절 내내 고독했던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마치 태양과 같은 존재였다. 책 한 권 한 권은 나름대로 하나의 세계였고 우주였다.

처음 읽은 책 한 권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어떤 존재로 와닿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책 구석구석에서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명력과 운동력을 느낄 수 있었다. 철학자가 생각의 씨앗을 뿌리듯, 작가는 독자에게 감정의 씨앗을 뿌려서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도 어릴 적 책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당장에 그 책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두 권으로 된 작은 책을 손에 들어 냄새를 맡고 쓰다듬어 보고, 종잇장을 바스락거리면서 마음에 드는 페이지부터 읽어 나갔다.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세 가지 이유: 우리는 왜 책을 읽어야 할까? 내게 맞는 책은 어떻게 골라야 할까? 어릴 때부터 책과 함께 성장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대부분은 이런 질문에 확실한 답변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떤 의무감이나 호기심으로 책을 한 번 읽은 것만으로는 결코 독서가 주는 진정한 기쁨과 깊은 만족을 맛볼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첫째, 좋은 책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게 한다. 만 권의 책을 읽었어도 자신의 삶에 적용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좋은 책은 작가의 정신이 담겨 있다. 그래서 사르트르도 작가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책으로 변신해서 그들의 영혼이 작품에 늘 붙어 다닌다고 말한다. 닥치는 대로 마구잡이로 책을 읽다가는 깨달음을 위한 독서는 불가능하다. ‘양서’를 읽어야 한다. 좋은 책을 선택할 수 있는 독서력을 소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둘째, 고전은 혼란스럽고 답답한 정신을 위한 청량제이다. 이탈로 칼비노는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고전이란 특별한 영향을 미치는 책’이라고 정의한다. 어릴 시절부터 고전을 읽는다면 삶을 살아가면서 앞으로 경험하게 될 세상을 미리 볼 수 있다. 고전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삶의 거울이자 나침반이다. 셋째, 책은 그 사람의 인생을 드러낸다

우리는 사랑으로 산다



사랑 -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면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사랑에 빠진 주인공 베르테르가 로테와의 사랑을 이룰 수 없자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소설이다.

평탄하지 않은 사랑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고단한 삶이 이마에 주름을 만들 듯,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다는 생각은 마음속에 깊이 사랑의 주름살을 만든다. 조용한 자연에 묻혀 살고 싶었던 베르테르라는 청년이 무도회에서 로테의 검은 눈동자를 본 후 운명적인 사랑을 예감한다. 이 우연한 사랑이라는 사건이 베르테르를 사로잡았고, 운명의 여신이 음모라도 꾸민 듯 잔인하게 베르테르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베르테르는 왜 로테에게 약혼자 알베르트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마음 깊은 곳에 묻어 둔 것일까? 베르테르가 사랑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혹시 로테를 알기 전부터 미지의 여인에 대한 사랑이 그녀에게 옮겨 간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다, 나는 결코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로테의 그 검은 눈동자 속에서, 나 자신과 나의 운명에 대한, 감출 수 없는 공감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 나는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 점에서만은 나의 마음을 믿어도 좋다. 즉, 그녀는-아아, 천국을 이런 말로 표현해도 좋을까?-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때때로 우리는 사랑 때문에 행복감 또는 절망감으로 깊은 수령에 빠지는 경험을 한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사랑에 빠져드는 것을 ‘절망 또는 충족감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사라짐의 충동’이라고 말한다. 즉, 이처럼 수렁에 빠지고 싶은 생각이 떠오를 때, 그것은 어느 곳에도 내가 설 땅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르테르가 로테에게 사랑에 빠지고 또 절망하여 죽음을 선택한 것은 사랑한 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베르테르가 마지막으로 떠나면서 흘렸던 눈물은 로테와의 이별보다는 자신의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힘든 사랑, 버림받은 사랑이라는 절망 속에서 베르테르는 결코 헤어 나올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서 있었다.

격렬한 사랑의 위기는 그를 완전히 파멸 상태로 몰고 갔다.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베르테르가 극한 상황으로 자신을 몰고 가 결국 사랑의 파국으로 끝나게 되는 이 작품은 짝사랑이나 거절당한 경험을 해 본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이 될 것이다.

사랑할수록 그 사람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베르테르도 마찬가지였다. 베르테르의 절절한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기에 비극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살하려는 순간 그의 사랑 로테를 소유하는 것을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죽음을 선택했다.

사랑할 때 겪는 심리적 변화: 프랑스 근대 소설의 시초라고 일컬어지는 스탕달은 『연애론』에서 사랑이 발생하는 과정을 7단계로 분류했다. ‘감탄, 접근, 희망, 사랑의 탄생, 제1의 결정작용, 의혹의 발생, 제2의 결정작용’ 순으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의 ‘결정화’란 연애 초기에 일어나는 상대방을 이상화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결정작용은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행동과 말, 모습 등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정신작용이다. 우리는 이를 쉽게 말해 콩깍지가 씌인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대상은 늘 사람마다 다양하고 특별하며 유일무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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