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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셔스

문성림 지음 | 미디어숲


컨셔스

문성림 지음

미디어숲 / 2020년 7월 / 224쪽 / 14,800원



‘감각’에서 ‘의식’으로



점점 더 감각을 좇는 사람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잠들 때까지 우리의 감각은 늘 깨어 있다. 감각이 깨어 있다는 것은, 무언가 느낀다는 것이다. 우리 몸이 감각을 통해 무언가를 느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기분에 영향을 미친다. 기분은 위로 아래로 혹은 방향을 알 수 없는 형태를 만들며 움직인다. 기분이 움직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감정’이다. 기분이 좋아지면 기쁨, 뿌듯함, 상쾌함, 따뜻함, 짜릿함, 황홀감, 통쾌함 같은 감정이 생긴다. 반대로 기분이 나빠지면 슬픔, 우울함, 좌절감, 죄책감, 비통함, 분노, 무기력함 같은 감정이 생겨난다. 그런데 이런 감정들은 모두 본능이다.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저절로 생겨나는 현상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보통 이 감각과 느낌이 ‘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느낌에 쉽게 빠지고 더 깊이 들어간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 각자의 인생을 만들고 있다.

감각 소비에 열을 올리다: 우리는 커피와 꽃, 과일, 베이커리, 캠핑, 화장품 등 상상만 해도 좋은 느낌을 매일 소비하고 있다. 미각 만족을 위해 커피콩뿐 아니라 컵을 사고 텀블러를 사고 드립 커피 세트를 산다. 왠지 더 맛있는 느낌이다. 피부의 부들부들 보송보송 촉각 만족을 위해 화장품을 산다. 시각도 함께 덩달아 만족을 느낀다. 이렇게 특정 혹은 복합적 감각을 위해 소비하는 것은, 좋은 기분을 소비하고 긍정적인 감정을 소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오늘을 살며 나의 감각에 최대한의 만족을 안겨주는 경험을 소비한다. 그러나 이 느낌이라는 것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너무 강렬해서 깊이깊이 빠지기만 하는, 좀처럼 헤어 나오기 어려운 늪과 같다. 이런 감각을 의지로 제어하긴 무척 힘든 일이다. 앞서 말한 대로 감각을 통한 느낌은 억제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수동적 메커니즘으로 일어나는 자동 현상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감정은 모두 본능이다. 본능적으로 발생하도록 짜여 있다.

감각의 쾌락을 추구하는 데는 날개가 없다: 감각은 즉각적이다. 그래서 우리 같은 빨리빨리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소비를 통해 감각을 만족시키려 한다. 감각은 쓰면 쓸수록 더 키울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다. 그 이유는 감각 쾌락에 한 번 빠지면 우리의 뇌는 그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어떤 감각이든 한 번 좋음을 감지하면 뇌는 도파민을 분비시킨다. 그리고 다음번 동일 감각이 들어왔을 때 뇌는 이를 미리 알아채고 도파민을 미리부터 분비시킨다. 그래서 한 번 맛본 이후부터는 미각이든 촉각이든 시각이든 어떤 감각이든 그 감각을 맛보기 전부터 우리의 기분을 한껏 끌어올린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마르게리타 피자를 좋아한다고 치자. 마르게리타 피자가 테이블에 올라오면 뜨거움을 무릅쓰고 얼른 한 조각을 들어 입으로 밀어 넣는다. 그럼 그 순간 부드러운 치즈의 질감이 혀를 감싸고 상큼한 토마토와 바질 향이 치즈의 고소함과 어우러져 순간 새로운 세계로 인도된다. 피자의 맛은 뇌의 기대에 부응한다. 다음번엔 그 피자를 먹을 생각만으로도 뇌가 도파민을 좀 더 많이 분출한다. 조금 더 강도 높은 맛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뇌는 다시 또 빨리 맛보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래서 피자 먹기는 끊을 수 없는 습관으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피자를 실제로 맛보는 순간에는 정작 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일이 갈수록 늘어난다. 그럼 다음에는 반드시 더 큰 만족을 느끼리라 더 강하게 마음먹는다. 말하자면 이런 흐름의 반복이다. 순간의 만족은 이내 사라지고, 우린 다음을 꿈꾼다. 더 빨리 오기를, 그 사이의 시간은 불만족이 차지한다.

우리의 감각은 이대로 괜찮은가?


감각 소비의 짜릿함은 쉽게 극으로 치달을 수 있는 위험을 수반한다. 지나침은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탄수화물, 니코틴, 카페인, 환각, 알코올 등 각종 중독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본능에 이끌려 사는 것이 패턴이 되면 내가 그곳으로 이끌려 가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좋은 자극은 기분을 즐겁게 하지만, 지나친 자극은 기분을 마비시킬 뿐 아니라 인생을 마비시킨다. 우리의 기분을 움직이는, 그러나 통제가 어려우며 누군가는 동물적이라고 얘기하는 이 감각 소비, 이대로 흘러가도 좋을까?

나의 일상, 내 의식이 끌고 가는 걸까?


이제 우리가 본능에 충실한 채 감각을 소비하며 살아가도 괜찮은지, 나의 일상이 감각에 의지해 굴러가도 좋은지 멈춰서 생각해볼 때다. 중요한 점은 나의 본능이 시켜서 하는 일인지, 내가 정말 원해서 하는 일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내가 정말 원해서 지금의 삶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그냥 본능에 의지한 삶이라면, 이것을 지금 시대에 맞게 변화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그 유일한 방법이 ‘의식’에 있다고 본다. 뒤에서 더 정확하게 말하겠지만, ‘2차 의식’을 작동시켜야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의식적으로 나의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를 쓰는 것이다.

무의식으로 굴러가는 일상: 어른이 된 내 생활이 습관적으로 굴러가는 건 무의식 때문이다. 제대로 눈치 챈 적 없는 이 무의식은 그동안 생리적 현상뿐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곳을 지배하고 있었다. 반복되는 우리의 일상은 대부분 감각-운동 신경활동에 의해 우리 뇌에 자동 프로그래밍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딱히 의식하지 않고도 움직이고 생각하며 살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자동화 프로그래밍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 뇌의 깊숙한 곳에 자리한 기저핵 때문이다.

노먼 도이지의 『스스로 치유하는 뇌』를 보면 기저핵은 뇌 깊숙한 곳에 위치한 신경세포 다발로, 사람이 동작과 생각의 복잡한 연속을 만드는 법을 학습할 때 활성화된다고 적혀 있다. 기저핵은 일상의 복잡한 활동들을 위해 자동화된 프로그램을 만들고, 이런 활동들을 선택하고 시작하도록 돕는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일들, 가령 침대에서 일어나고 씻고 옷 입고 밥 먹고 요리하는 등의 일이 그런 것이다. 참고로 우리는 하루 종일 생활하며 깨어 있다. 그러나 그건 그냥 말 그대로 깨어 있는 거지, 일상의 대부분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이라는 바다 위를 하염없이 떠다니는 떠돌이 돛단배처럼 그냥 바람 따라 파도 따라 저절로 흘러가는 거다.

의식(意識)이란 무엇인가?


의식의 의미: 의식의 사전적 의미는 첫째,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나 사물에 대하여 인식하는 작용이다. 둘째, 사회적ㆍ역사적으로 형성되는 사물이나 일에 대한 개인적ㆍ집단적 감정이나 견해, 사상을 말한다. 철학적 관점에서 의식은 현재 직접 경험하는 심적 현상의 총체를 말한다. 인간의 지식, 감정, 의지라는 일체의 활동을 포함한다. 한편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힌 크리스토프 코흐와 프랜시스 크릭은 인간의 의식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신경과학적 접근을 해온 학자다. 코흐는 의식의 통일성을 매개하는 신경세포 집단을 찾기 위해 노력했는데, 크릭과 코흐의 마지막 논문에서 저자들은 대뇌피질 밑에 위치한 뇌 조직의 층인 전장(대뇌 핵)을 경험의 통일성을 매개하는 부위로 보고 거기에 집중했다. 크릭과 코흐는 전장을 교향악단의 지휘자에 비유한다. 뇌를 신경세포 단위에서부터 연구한 학자들도 많다. 에릭 캔델도 세포 하나하나의 연구부터 시작한 사람이다. 뇌과학의 선구자 중 하나인 로돌포 이나스는 ‘우리의 의식은 생명체가 시작한 때로부터 진화된 산물’이라고 했다. 신경세포 하나하나가 가진 본성이 인간 마음의 본성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삶을 바꾸는 힘, 의식



습관처럼 살아가는 삶


나는 내 인생을 통째로 혁명적으로 바꾸고 싶은데 그 방법이 무엇일지 수년간 고민했다. 마침내 내 삶의 꼭대기에서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 다름 아닌 ‘의식’이라고 판단했다. 내 뜻대로 움직여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내 생각이 바뀐 줄, 내 행동이 달라진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그동안 내 인생이 거대한 무의식의 힘에 지배받았기 때문이고, 그 힘이 너무 강력해서다. 더 따지고 들어가 보면, ‘나의 의식’이 아닌 채로 살았기 때문이다. 이는 아주 먼 과거 조상들로부터 끝없이 진화되어 온 내 뼛속까지 새겨진 유전의 결과물이다. 이것이 곧 본능이고 본성이다. 바로 이 의식이 내가 첫 번째로 정의하고자 하는 ‘1차 의식’이다.

1차 의식에 지배당하다: 본질적으로 생물학적 구조에 의해 일생을 살며 나도 모르게 내 것인 줄 알고 갖게 되는 의식이 ‘1차 의식’이다. 1차 의식은 유전적이다. 자동적이다. 무의식적이다. 그러니 진정한 ‘나’가 개입되지 않는다. 이것이 이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명쾌한 이유다. 내가 이 책에서 정의하는 1차 의식은 에델만의 동물 생존 반응성에 기초한 1차적 의식을 포함하여 무의식적으로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모든 의식을 통칭한다. 참고로 ‘1차 의식’은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환경-가정환경, 사회환경 전반-에 의해 인공적으로 학습당한 의식마저 흡수한다.

내 안으로 시선을 옮기다


2차 의식은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보통 내 앞에 보이는 사물, 대상, 현상 등을 ‘인식’할 때 의식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대부분의 사전에 나오는 의미다. 그러나 이것은 그냥 인식하는 것이다. 내 앞의 대상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인식 혹은 지각이다. 나는 이 책에서 인식이나 지각과 같은 표층적 차원이나 초현실적인 영적 차원에서의 의식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2차 의식의로의 접근: 내 진짜 의식은 내가 스스로 ‘나의 의지’를 가지고, 진정 ‘내가’, ‘의도적으로’ 결단해야만 작동된다. 진짜 의식은 한마디로 정신 똑바로 차리는 일이다. 그래야만 내 진짜 의식을 ‘1차 의식’으로부터 분간할 수 있다. 이성과 감정, 이 둘을 모두 쳐다보고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최상위 존재가 진정한 ‘내 의식’이다. 이것이 바로 ‘2차 의식’이다. 지금까지 내 인생이 ‘1차 의식’에 의해 무방비로 지배당한 채 살아왔다면, 앞으로 내 인생의 방향키를 ‘진짜 의식’이 쥐어야 한다.

2차 의식은 가끔씩 나타나 내 인생의 여러 측면을 예리하게 콕콕 짚어 판단하고 분석하고 잘못된 부분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다시 제대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한편 2차 의식을 불러오는 첫걸음은 나를 제대로 바라보는 데서 출발한다. 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바깥쪽을 향하던 내 시선을 안쪽으로 향하게 해야 한다. 남이 아닌 나를 의식하게 해야 한다. 한편 나의 ‘진짜 의식’인 2차 의식은 관찰의 조각, 성찰의 조각, 상상의 조각, 계획의 조각, 학습의 조각, 창조의 조각으로 내게 다가온다. 이제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2차 의식의 여섯 조각


관찰의 조각: 의식은 관찰의 조각이다. 관찰은 멈춤이다. 앞만 보고 달려가던, 1차 의식으로 살아가던 길에서 잠시 멈춰 고요히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관찰은 멈추어 집중해서 응시하고 면밀히 살펴보는 일이다. 나 자신을, 나의 말을, 내 생각을, 내 행동을, 나는 스스로 관찰자가 되어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데, 처음으로 관찰해야 할 대상은 나의 하루를 온통 뒤덮고 있는 나의 ‘생각’이다.

성찰의 조각: 의식은 ‘성찰’의 조각이다. 성찰은 관찰의 연장선상에 있다. 지금까지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관찰했다면, 그중 부정적인 면에 대해 더 깊은 곳에 있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관찰’이 그냥 바라보는 것이었다면, ‘성찰’은 잘못된 점을 찾아 반성하는 행위로 이어지는 일이고, 다시금 잘못된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다짐으로 이어져야 한다. 성찰은 사색과 자유가 결합한 행동이다. 자신의 마음을 점검하고 파악하는 일은 사색하고 사유하는 과정을 통해 일어난다.

상상의 조각: 의식은 ‘상상’의 조각이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에는 없는, 상상하는 능력을 지니고 태어나는데, 태어남과 동시에 자연환경, 가정환경, 사회환경이 저절로 주어진다. 그런데 자연은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 가정환경과 사회환경은 주어진 대로 살아가되, 살면서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상상해야 한다. 한편 DNA가 만들어 놓은 그리고 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삶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 꿈꾸는 건 내 마음이고 내 자유다. 지금 꿈꾸는 것은 미래의 현실로 반드시 어느 순간 다가올 것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 이 자유로움을 폭발시켜야 한다. 그래야 내 삶을 살 수 있다.

계획의 조각: 의식은 ‘계획’의 조각이다. 계획할 때 우리의 의식은 마치 건축가처럼 의식의 집을 짓는다. 그런데 계획하는 능력은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의 연장선상에 있다. 계획은 꿈을 향한 행동의 설계도다. 꿈을 단계별 프로세스로 계획하고 그 계획을 끊임없이 그 상상의 이미지 범주 속에 넣어야만 이것이 진짜 현실로 나타난다. 한편 계획은 상세할수록 구체적일수록 생생할수록 효과적이다. 아무튼 ‘상상하는 의식의 조각’과 ‘계획하는 의식의 조각’은 상호 작용하며 의식을 쓰게 한다.

학습의 조각: 의식은 ‘학습’의 조각이다. 우리의 2차 의식은 새로운 것을 학습할 때 작동하며, 학습하는 만큼 확장된다. 우리의 2차 의식은 이전에 접해 보지 못한 새로운 정보와 지식, 새로운 경험, 새로운 생각, 새로운 자극과 영감의 재료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만큼, 딱 그만큼 강해진다. 그런데 그것의 핵심적 실체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학습의 의식이다.

인간은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못하는 아기로 태어나 오래 보살핌을 받으며 유아기를 보내고, 초중고 총 12년의 학교생활까지 오랜 시간 의무교육을 받는다. 학습의 기간이 인간에게 이토록 긴 건 그만큼 학습이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해서다. 다른 어떤 것보다 특히 중요해서다. 그럼에도 성인이 되고 나면 더는 학습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학습이 중요한 이유는, 학습하는 것에 의해 우리가 ‘2차 의식’을 작동하여 진정한 의식을 찾고 내 인생을 바꿀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부터 말하고자 하는 학습은 학창 시절에 받는 의무교육이 아닌 ‘새로운 것을 습득하는 모든 경험’이라는 것을 뜻한다. 에릭 캔델은 저서 『기억을 찾아서』에서 학습의 두 번째 신경회로 메커니즘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새로운 경험이나 지식, 정보 등을 획득할 때에, 원래의 매개 회로가 아닌, 전혀 다른 신경회로가 먼저 움직인다. 먼저 작동하는 이 새로운 신경회로에는 감각뉴런과 중간뉴런이 있다. 감각뉴런이 정보를 중간뉴런에 전달하면, 그 중간뉴런은 첫 번째 신경회로, 즉 ‘매개 회로’에 지시를 내린다.” 이래라 저래라 가르친다는 말이다. 기존에 아무리 강력하게 학습되어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습관의 행동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의 강약을 조절해 주는, 멈출 수도 있게 하는 새로운 회로가 나타나 기존의 학습된 습관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얘기다. 캔델은 학습의 이 두 번째 신경회로를 ‘조절회로’라고 명명했다. 캔델은 이 조절회로가 매개 회로에 ‘선생 노릇을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내가 오디션을 보러 갈 때마다 극도로 긴장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 좀 더 도전적이고 대범한 태도를 지닌 것을 끊임없이 상상으로 학습하거나 강력하게 다짐한다면 기존의 긴장을 만들어 낸 신경회로는 점점 기능을 잃고, 실제 똑같은 오디션 상황에서 도전적 신경회로가 뇌에 새롭게 만들어져 덜 긴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신경회로가 기존 회로에 지시를 내릴 때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을 방출하는데, 이 물질은 행복을 느끼게 하는 데 관여하는 물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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