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때문에 마음이 시끄러운 나에게
김연희 지음 | 메이트북스
감정 때문에 마음이 시끄러운 나에게
김연희 지음
메이트북스 / 2019년 12월 / 228쪽 / 15,000원
1부 감정에 대해 제대로 알자: 첫걸음 떼기
마음 건강을 위해 감정을 평생학습하자
공감과 평정심: “언니,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맞아?”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던 동생이 기가 차다는 듯 나를 나무랐다. 갑자기 일격을 당한 나는 당황스러웠다. “내가 지금 의사가 아닌 네 언니지, 진료실도 아닌데 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타령이야?” “아니, 내가 언니한테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는 건 언니가 내 편이 되어서 같이 욕해주었으면 좋겠고 힘들었겠다는 위로도 받고 싶어서 그런 거야. 그런데 왜 이래라저래라 해결책만 제시하는 거야? 그건 나도 알아!”
그제야 나는 아차 싶었다. 결국 동생의 볼멘소리에 사과를 했다. 위로를 기대했다가 잔소리만 잔뜩 듣고 실망해서 화가 난 동생은 나에게 환자들에게도 그러는 것 아니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사실 상담을 할 때는 동생에게 하듯이 일방적으로 설교하지는 않는다. 상대의 말을 들으면서 공감하고 섣불리 조언을 제시하기보다는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고 방향을 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서 주로 내가 하는 역할이다. 그런데 동생에게는 왜 그랬을까?
부드럽고 친밀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능력은 상대의 감정을 파악하고 수용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동생이 나에게 기대했던 공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상대의 감정에 조율하려면 먼
저 자신의 마음을 잘 인식하고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 우울하거나 화가 나 있거나 불안하고 걱정이 많은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이 들어올 여유가 없다. 내가 한 실수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평정심을 잃었던 것이다.
동생과 나는 나이 차가 고작 한 살이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후로 동생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 비슷한 게 생겨서 미혼인 동생에게 늘 엄마가 잔소리하듯 대했던 것 같다. 게다가 퇴근 후 두 딸들과 놀아주느라 에너지를 다 뺏기고 녹초가 되어 있을 때 걸려온 동생의 전화는 타이밍이 아주 나빴다. 당시 내 심리 상태는 자녀의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려 깊은 엄마’보다는 ‘지쳐 쉬고 싶은 엄마’였기에 동생의 하소연에 조급하게 해결책만 제시했던 것이다.
거울신경과 전두엽: 공감능력과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다스리는 능력은 감성지능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다. 뇌과학의 발달로 뇌의 어떤 부위에서 감성지능을 이루는 이러한 능력들을 관장하는지 밝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마치 내 것처럼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공감능력은 거울신경체계와 관련이 있다.
거울신경은 1990년대 이탈리아 파르마 대학의 자코모 리촐라티 연구팀이 짧은꼬리원숭이의 운동신경을 연구하다가 발견되었다. 원숭이가 음식에 손을 뻗어 집을 때 반응하는 뇌 특정 부위의 세포가 연구원이 원숭이에게 똑같은 동작을 보일 때도 같은 반응이 나타났고, 뇌세포가 마치 거울과 같이 반응한다는 의미에서 거울신경세포라고 이름 지었다.
인간의 경우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을 활용한 뇌 이미지 연구를 통해 거울신경세포가 전두엽과 두정엽에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고 하나의 세포보다는 여러 세포들 사이가 연결되어 작용한다는 점에서 거울신경체계라고 한다. 거울신경은 모방과 언어 습득, 공감 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감정을 잘 조절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이러한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나아가 스스로 위로하기도 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 버릴 수 있는 힘을 내기도 한다. 편도체가 위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빠르게 감정을 느끼고 처리하는 곳이라면, 전두엽은 조금 느리지만 상황을 좀더 분석하고 파악해 적절하게 감정의 깊이를 조절할 수 있도록 해준다. 전두엽은 상상, 판단, 계획, 문제 해결, 추론과 반성 등 고등한 정신능력과 관련된 부위로 포유류 중에서 고등한 생물일수록 잘 발달되어 있다. 자기 인식은 발달된 전두엽의 활동이며 복내측 부위가 특히 감정 경험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과학적 발견들은 감성지능이 혈액형처럼 타고나서 변화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향상시킬 수 있다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출생 시에 뇌는 발달이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신생아부터 성인기까지 계속 발달을 하기 때문이다.
회복 탄력성: 2018년 방송되었던 MBC 수목드라마 <이리와 안아줘>의 남자 주인공 캐릭터는 앞으로 설명할 회복 탄력성을 입증해주는 훌륭한 예이다. 주인공은 폭력적이고 죄책감을 모르는 싸이코패스 아버지 밑에서 역시나 폭력적인 배다른 형과 함께 살아오면서 나이답지 않게 성숙해진 소년이다.
주인공은 8살에 엄마가 돌아가신 뒤 새엄마가 수차례 바뀌는 혼란스러운 삶을 견디는 중에 결국 10여 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마로 밝혀진 아버지에 의해 자신의 첫사랑의 부모까지 살해당한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결국 경찰에 그 악행의 목격자로 진술해야 하는 참혹한 일을 겪은 이 소년은 아버지나 형과는 달리 책임 있고 듬직한 청년으로 자라난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 드라마의 주인공을 뇌 과학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자. 드라마 상에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을 보이는 측면이 있지만 깊은 상처에서 회복된 후에는 아마도 전두엽이 잘 발달되어 있어 일을 할 때는 좌뇌 지배적인 특성을 보이는 한편 개인적인 생활에서는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등 감성뇌도 잘 발달된 건강하고 통합된 뇌를 가질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드라마가 아닌 실제 성장과정에서 주된 양육자가 자주 바뀌고 아동기, 청소년기를 거치며 지속적으로 폭력과 학대를 받아온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성격은 어떨까? 아마도 그의 뇌는 만성적으로 높은 코티솔에 노출되면서 모든 구조와 화학체계가 폭력적인 세상에 적응하는 쪽으로 변화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과잉 경계, 두려움, 과잉 방어와 공격으로 늘 긴장하면서 수시로 격한 감정에 휩싸일 수 있다. 스트레스 상황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뇌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능력이나 자신의 감정을 돌아보는 능력이 떨어지고, 사회성도 결여된다. 아마 학업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학교 폭력의 가해자로 퇴학을 당해 마약이나 술에 중독된 갱스터가 되기 쉬울 것이다.
1950년대에 가난과 질병, 범죄율이 높은 미국 하와이 카우아이 섬에서 833명의 신생아를 대상으로 성인이 될 때까지 종단 연구를 시행했다. 이 연구는 결손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학교나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고 성격이나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의 경우 자존감이 떨어지는 등 나쁜 영향을 준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연구를 분석하던 심리학자 에미 워너 교수는 연구대상자 833명 중에서도 가정환경이 가장 열악해 고위험군으로 분류된 201명 중 1/3인 72명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성장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자기 삶을 더 잘 꾸려갈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에서 시작된 연구는 회복탄력성이라는 개념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회복탄력성이란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는 긍정적인 힘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높은 사람일수록 질병, 사고, 실직, 가족의 죽음, 이혼 등 인생의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오히려 이를 통해 한 단계 성장한다고 한다. 워너 교수는 연구를 통해 드러난 높은 회복탄력성의 배경으로 인간관계를 지목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잘 자라난 아이들의 경우 예외 없이 그 아이를 무조건적으로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누군가가 옆에 있었다는 것이다.
회복 탄력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앞서 얘기한 드라마 주인공의 인생에서 사랑과 배려와 따뜻함을 가르쳐준 존재들이 그에게 주어진 가혹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드라마에는 첫사랑 여주인공뿐만 아니라 그의 부모, 새어머니와 여동생, 친구와 직장 상사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주인공이 자신을 건강하게 잘 지킬 수 있는 힘을 주는 대상들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결국 주인공은 상처를 넘어서고 성장한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 사이에 농담으로 “성격장애 환자들은 배우자를 잘 만나면 낫는다.”는 얘기가 있다.
평생학습에서 희망을: 환경적인 요인을 압도할 만큼의 타고난 유전적 우월성이 부족하고 이상적인 부모 밑에서 자상한 보살핌을 완벽하게 받으며 자라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다행히 우리의 감성 뇌가 평생 해결할 수 없는 영구적인 손상을 받은 채로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뇌가 가장 왕성하게 발달하는 생후 5년간 따뜻하고 세심한 양육경험을 하면 가장 좋겠지만 그 이후에도 기회는 있다. 아동기와 청소년기뿐만 아니라 성인기에도 우리의 뇌는 매우 유연하고 탄력적이어서 다양한 상담과 심리치료를 통해 감정을 잘 조절하고 스트레스에 대해 건강하게 대처할 수 있는 조절체계를 배우는 제2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개인적으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되기 위한 수련은 나에게 간접적으로 상담이나 심리치료의 역할을 해서 감성지능이나 회복탄력성이 발달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은 것 같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은 수련 과정에서 정신분석에 대해 배우고 실제 환자를 보면서 배운 것을 적용해 상담을 한다. 보통 자신이 경험한 환자 사례를 지도 교수에게 보고해 개인지도를 받고 여러 의사들과 토론하고 조언을 듣는다. 이때 흔히 듣는 말이 “환자의 감정을 따라가라.”는 말이다. 환자가 언어적ㆍ비언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감정을 잘 파악해서 알아차리고 그것을 따라가야만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방법으로 자신이 알게 된 것을 환자에게 돌려줄 수 있다. 그러면 환자는 이해받았다고 느낀다. 또 환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쉽지 않은 과정이기에 전문의 자격증을 따고서도 많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이 학회에서 경험을 나누고 공부를 한다. 이 과정이 바로 전두엽과 그와 연결된 감정회로를 훈련시키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종종 타고난 ‘공감 능력자’를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 중에 볼 수 있다. 그럴 때는 마치 피겨 여왕 김연아를 보듯 타고난 능력에 감탄을 하게 된다. 하지만 김연아도 타고난 능력 위에 오랜 시간 각고의 노력과 훈련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모든 사람이 김연아처럼 훌륭한 운동선수가 될 수 없어도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될 수 없겠지만 우리의 마음 건강을 위해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고 향상시킬 필요가 있다. 『EQ 감성지능』의 저자 대니얼 골먼은 그래서 감성지능 학습이 평생학습이라고 주장한다. 학교폭력, 군대 내 폭력, 묻지마 살인 등의 기사가 심심치 않게 올라오는 요즘 더욱 대니얼 골먼의 주장에 수긍하게 된다. 학교와 직장 내에서 상시 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만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문화가 우리나라에도 정착되기를 기대해본다.
2부 부정적 감정을 다시 보자: 양파껍질 벗기기
분노, 나를 지키기 위한 건강한 자기주장
“열 받아.” vs. “Steamed up.”: “열 받는다.” “뚜껑이 열린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머리꼭지가 돈다.” 등은 분노가 느껴질 때 표현하는 우리나라 말이다. 영어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다. “I got steamed up.” “I did a slow burn.” “I'm getting mad.” 등 영어권 문화에서나 우리나라 문화에서 분노를 표현하는 말에 공통적으로 열과 화가 들어간다는 것이 재미있다. 동서양의 문화가 다른데도 분노를 표현하는 데 공통점이 있다는 것은 그 감정의 보편성을 시사한다.
실제로 심리학자이자 비언어 의사소통의 전문가인 폴 에크만의 연구에 따르면, 분노는 파푸아뉴기니에서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는 원주민이나 미국 뉴욕에서 최첨단 IT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인류의 보편적인 감정이다. 물론 분노를 일으키는 상황이 문화적으로 다를 수는 있지만, 파푸아뉴기니 원주민이나 뉴욕 시민이나 구분 없이 상대방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보고 분노의 감정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5개 대륙의 21개 문화권에 걸친 광범위한 연구에서 보여진 공통된 분노 표현은 화가 났을 때 관찰되는 신체기관의 변화와 일치하는 경향이 있었다. 화가 날 때 보통 신체는 근육이 긴장되고 말초혈관이 팽창하며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박동 수가 증가해 혈압이 올라가는 등의 증상을 보인다. 특히 말초혈관이 팽창될 때 열기를 지각하게 된다고 한다. 분노와 관련해서 나타나는 이러한 공통적인 신체 반응 때문에 아마도 열과 화가 들어가는 공통된 언어 표현이 나온 것 같다.
분노를 느끼는 뇌: 분노라는 것이 보편적이고 수천 세대에 걸쳐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 자연선택에서 살아남은 감정이라면 그것은 인류의 생존과 번식에 유용했기 때문이라고 진화심리학자들은 이야기한다. 이 감정은 상대를 위협할 때 쓰이면서 동시에 반대로 자신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 동물연구에서 밝혀졌다.
인류와 동물에게 보편적인 감정인 분노는 일차적으로 원시뇌(파충류뇌)에서 관장한다고 한다. 한창 밥을 먹고 있는 개를 건드리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개가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대서 혼이 날 것이다. 화가 난 개에서 활성화되는 뇌의 신경 경로가 바로 분노를 관장하는 원시뇌다. 사람의 경우는 이런 분노를 느끼는 과정이 조금 더 복잡하다. 원시뇌뿐만 아니라 우리의 뇌에서 가장 진화된 부분인 대뇌피질에서 분노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상사의 일방적인 업무 지시가 계속되면서 은근히 화가 쌓이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상사의 요구 자체가 화를 일으킬 정도로 부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전에 비슷한 상사에게 당했던 경험이 있거나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반항심을 품었던 경우라면 화가 더 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바로 전전두피질의 중복측 부위가 관여한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는 화가 나지만 상사에게 개처럼 즉각적으로 화를 내지는 못할 것이다. 이렇게 상황에 따라 분노의 감정을 조절할 때 개입하는 부분도 역시 이 부위다.
화를 다스리는 다양한 방법: 욕구가 좌절되어 분노, 갈등, 불안 등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하면서 마음의 평정을 잃는 경우, 사람은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기 위해 특징적인 방법들을 사용한다. 정신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처음 제기했던 이 심리적인 기제에 대한 개념을 프로이트의 딸인 안나 프로이트가 정리ㆍ완성했고, 이를 방어기제라고 부른다. 화가 나는 상황뿐만 아니라 화가 났을 때 그것을 다스리는 방법이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은 바로 주로 사용하는 방어기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한 사례로, 지난 결혼생활을 돌이켜보면 남편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지만 L부인은 존경스러울 정도로 화를 잘 억제하며 치매에 걸린 남편을 돌보고 있었다. 남편의 규칙적인 생활과 균형잡힌 영양식단을 지극정성으로 꾸린 것은 반동형성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고 싶은 것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것이다. 간병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푸는 L부인의 유일한 취미가 골프와 십자수 뜨기라는 것이 흥미롭다. 공을 때리고 바늘로 찌르며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형식으로 화를 풀었다고 보면 바로 승화인 것이다.
진료실에서 보았던 또 다른 예를 보자. 지나치게 꼼꼼하고 융통성 없는 남편 때문에 가계부며 냉장고 정리까지 일일이 지적당하는 어떤 부인은 놀다 들어온 아들에게 냅다 소리를 지르며 공부를 안 한다고 심하게 야단치곤 했다. 이것은 전치의 방어기제다. 즉, 남편에게 화가 나는 것을 만만한 아들에게 푼 것이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라는 속담이 여기에 들어맞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던 한 중년 남성은 믿었던 부인의 외도로 이혼을 하게 된 뒤 불면증이 심해져 진료를 받게 되었다. 이 남성은 이혼 과정에서 느꼈던 심한 분노와 아내에 대한 배신감, 슬픔 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덤덤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떠올리기 고통스러운 감정인 분노를 의식에서 격리시킨 채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