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언제는 답이 있었나요
표영호 지음 | 힘찬북스
인생이 언제는 답이 있었나요
표영호 지음
힘찬북스 / 2019년 12월 / 232쪽 / 13,800원
1부 당신의 페르소나는 무엇인가요?
우리는 누구나 인정받고 싶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내가 보는 내가 진정한 나일까? 남들 눈에 보이는 내가 진정한 나일까? 예를 들면 스스로는 남에게 피해 안 주고 도덕적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데, 남들이 그 사람을 볼 때는 이기적이고 깍쟁이에 고집불통일 수도 있다. 남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내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아마도 더 많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남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남들 눈에 내가 이기적이라면, 어쩌면 나는 나도 모르는 “이기적인 나”일 수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태도를 보면, 주변 사람들이 인정하는 대로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내 동창 중에 술 매너가 상당히 안 좋은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는 술에 조금 취하면 술집의 종업원을 함부로 대한다거나 욕을 한다거나 또는 행패를 부린다. 이른바 주폭이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는 진정한 친구가 없었다.
어느 날 동창회에서 그 친구가 안 보여 다른 친구에게 물었더니, 술만 마시면 행패를 부리고 시비를 걸고 싸움을 하니 동창회 사람들이 연락하지 말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 후로 몇 년 동안 그 친구는 동창회에 나오지 못했다. 연락을 못 받아서 못 나온 것도 있지만 술 마시고 실수한 것 때문에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몇 년 후 내가 또 물었다. “OOO는 왜 동창회를 안 나오니?” “술만 마시면 주정을 부르는데 누가 좋아하겠어? 연락 안 했어. 본인도 그걸 아니까 못 오는 거지.”
이렇게 음주 매너가 안 좋은 동창은 다른 친구들에게 이미 이런 식으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거짓말을 했다. “얼마 전에 그 친구를 만났는데 술 매너 좋아졌더라. 술 먹고 주정 부리지 않는 거야. 오히려 술 취해서 집에 가는 사람들을 챙겨 보내더라니까. 정말 달라졌어.”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정말? 그럴 리가 없는데, 진짜야?” 그러자 다음 동창회에는 그 친구를 불렀다. 그 친구가 옆에 있을 때 나는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다. “얘는 최근 몇 년 동안 술주정을 부린 적이 없어. 어쩌다 한 번 실수한 것을 우리가 잘 못 본 거야.”
주변에 있는 친구들은 반신반의했고, 나도 내심 불안하기는 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그날 정말 매너 있게 술 마시고 기분 좋게 집에 갔다. 당연히 다음 모임에도 친구들의 연락을 받고 나왔으며 매너 좋고 기분 좋게 어울리다가 갔다. 친구들이 궁금해서 그 친구에게 물었다고 한다. “너 술만 마시면 시비 걸고 물건 던지고 하더니, 그 습관을 어떻게 고쳤니?” 이 친구가 하는 말이 “영호가 나를 술 마시면 겸손해지고 매너 좋은 친구라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인정하는데, 내가 어떻게 술 실수를 또 해. 나를 인정해 주는데 그렇게 따라줘야지” 하더라는 것이다. 남들에게 보이는 나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사람은 남들이 인정하는 대로 되려고 자연스럽게 노력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로 절뚝이 남편 이야기가 있다. 다리를 저는 남편이 있었는데, 그 아내가 남편을 ‘절뚝이’라고 불렀다. 그랬더니 동네 사람들이 전부 그를 절뚝이라고 부르고 무시했다. 어느 날 아내는 다른 동네로 이사 가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절름발이 남편을 ‘교수님’이라고 불렀더니, 그 동네 사람들도 전부 남편을 교수님이라고 불렀다. 술주정뱅이였던 남편은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교수님이라고 부르니까 실제로 교수님처럼 점잖게 행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변하기를 바란다면 먼저 상대를 원하는 상태대로 인정해 주자. 상대방이 ‘내 맘에 쏙 드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라면 내 맘에 쏙 드는 사람으로 포장을 해주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정말 내 맘에 드는 사람으로 행동하게 된다. 인정하는 대로 살아지게 되는 것이다.
『심리학의 원리』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심리학의 거장 윌리엄 제임스는 “인간이 가진 본성 중에 가장 강한 것은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갈망하는 마음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한다. 어쩌면 사랑받고 싶어하는 마음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인정받으면 행복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인정이 나를 인정받은 대로 나 자신을 운전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힘겨운 사회생활과 인생을 살아가는 데 심리학적으로 커다란 안정감을 주기에, 우리는 고단함을 뒤로한 채 사람들과 소통하며 남들에게 나를 좋게 보이도록 애쓰면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란 사람을 타인에게 긍정적으로 인정받으려고 해도, 너무 많은 관계 속에서 지친 사람들에게는 관계의 권태기가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내가 그에게서 얻고자 하는 대로 그를 인정하라. 사람은 상대의 기대에 부응하고 그것을 칭찬받는 것에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2부 살아가며 배우는 것들
코뿔소가 그림을 그린다 커다란 뿔을 가지고 있는 코뿔소가 그림을 그리면 어떻게 그릴까? 코뿔소는 풍경화를 그리건 인물화를 그리건, 일단 커다란 코부터 그려놓고 나머지를 그릴 것이다. 인물화든 풍경화든 정물화든 눈으로 보고 그리는 것인데, 코뿔소는 자기 눈앞에 있는 코가 항상 가장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사람들을 대할 때는 대부분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 상대의 행동을 자신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을 대할 때는 자신의 관점에서 너무 세게 주장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봐야 한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유부녀임에도 불구하고 늘 서너 명의 애인을 두고 있는 전문직 여성이 있다. 그런데 그녀는 주변의 다른 여자가 남자랑 만나서 커피만 마셔도 나쁜 여자라고 욕을 한다. 그녀의 개인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볼 때 남녀관계에서만큼은 그녀가 제일 비도덕적이다. 그런데도 자신만의 기준으로 스스로는 합리화시키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번번이 엄격하게 보수적인 잣대로 평가한다. 자신이 편법을 써서 수강생을 모집하는 것은 영업 전략이고, 다른 강사가 편법을 쓰면 저질 영업행위라고 비난하는 식이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평가할 때는 자신이 마음대로 그려놓은 프레임 안에 들어오느냐 아니냐를 가지고 나쁜 사람,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이라고 판단한다. 이것은 코뿔소가 그림을 그리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물론 어느 시선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관점이 생기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양파 같은 사람’이라고 평가할 때, 이 말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우리가 아는 양파는 지극히 객관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에 따라 이 말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양파 같다’라는 말을 ‘벗기고 벗겨도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신선한 사람’으로 사용할 수 있고, ‘까고 또 까도 똑같은 것만 나오는 지루한 사람’으로 사용할 수도 있으며, ‘아무리 벗겨도 실체를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의 사람’이나 ‘껍질도 사용하고 내용물도 영양가 높은 버릴 것 없는 훌륭한 사람’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똑같은 말이지만 어느 관점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칭찬이 될 수도 있고 악담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주먹 크기에 동그랗고 겹겹의 껍질로 쌓인 단순한 양파도 이럴진대, 사람이나 어떤 현상, 사건 등을 바라보는 시각은 얼마나 더 다양하겠는가?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눈에 보이는 다양한 시선대로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평가하고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코뿔소가 그린 그림처럼 모든 그림에 코부터 그려놓고 다른 것을 그리면 그 그림이 과연 온전한 그림일까?
시어머니를 보는 며느리의 시선과 며느리를 보는 시어머니의 시선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내가 상대방을 바라보는 시선도 객관적인 것이 아니고, 상대방도 나를 주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자는 것이다. 상대방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려는 노력,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기의 잣대로만 상대를 평가한다면 객관적일 수 없고, 상대방을 주관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본다면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다.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은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검은 선글라스나 파란 선글라스를 쓰고 세상을 바라보면, 사물을 알아볼 수는 있지만 제 색깔로 볼 수 없다.
서양 동화 중 『핑크 대왕 퍼시』라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핑크색을 너무 좋아하는 봉건영주 퍼시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왕국이 핑크색이 아닌 것이 슬퍼서 백성들이 모두 핑크색 옷을 입어야 한다는 법을 만든다. 모든 건물도 핑크색으로, 왕국 안의 동물들도 핑크색으로 칠하라는 법도 만든다. 백성들은 너무 힘들었지만 하는 수 없이 옷과 건물과 동물들을 핑크색으로 만들었다. 마침내 퍼시는 왕국 안의 모든 나무와 꽃과 풀까지 핑크색으로 칠하라는 법을 만들고, 퍼시가 다스리는 왕국은 그야말로 온통 핑크색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왕국을 바라보며 행복해하던 퍼시는 문득 하늘을 바라보고 다시 슬퍼졌다. 하늘이 파랬기 때문이다. 하늘을 핑크색으로 칠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는 왕국의 현자인 에릭에게 도움을 청했다. 고민하던 에릭은 마침내 퍼시에게 핑크색 안경을 선물했다. 핑크색 안경을 끼고 바라본 세상은 온통 핑크색이었으므로, 퍼시는 무척 행복했다. 물론 백성들도 기뻐했다. 더 이상 핑크색 옷을 입고 핑크색으로 건물을 칠하고 핑크색으로 동물과 식물을 칠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우스꽝스러운 동화로 생각될지 모르겠지만, 곰곰이 생각할수록 여러모로 생각할 점이 많은 동화다. 퍼시처럼 자신의 색깔을 남에게 강요하면 다른 사람이 고통스러워진다. 그리고 퍼시처럼 핑크색 안경을 끼고 본 핑크색 세상은 실제 세상과 다른 세상이다. 혹시 우리도 퍼시처럼 사실과는 다른 것을 보고, 사실과는 다른 세상을 살고 있지는 않을까?
‘나는 지극히 보편타당한 사람이야’라고 자신을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보통 사람들처럼 생각하는 것이 반드시 객관적이고 옳은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라. 지구가 태양의 주변을 돌고 있다는 지동설이 증명되기 전까지, 남들로부터 또라이 취급을 받은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는 천동설을 믿었다. 지구는 평평하고 바다 끝까지 가면 낭떠러지에서 떨어진다고 믿기도 했다. 만약 우리가 그 시대에 살고 있었더라면 홀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확신하고 믿을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천동설을 맹신할 것이다.
직접 경험하는 것도 좋지만, 문제는 그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의 소속이나 역할, 성공이나 실패, 경험은 때로 자신이 속하지 않은 부분을 전적으로 부인하게 만든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소통하고 싶다면 상대방의 입장과 상대방의 경험, 상대방의 소속이나 역할,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해야 한다. 내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면 상대를 이해할 수 없다.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가 천동설을 버리고 지동설을 택한 것처럼, 내 입장을 완전히 버려야 상대의 처지가 이해된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생각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갓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는 아이조차 하려는 것을 못 하게 하면 화를 내고 짜증을 낸다. 하고 싶어 하는 것과 원하는 것에 대한 자기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수십 년을 살아온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만의 생각의 방식, 생각의 프레임이나 패러다임이 없겠는가?
‘나는 항상 상대방 처지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해. 내 사고는 틀에 갇혀 있지 않아’라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 처지에서 생각하고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성향의 사람마저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자신의 주관성을 완전히 버리기는 어렵다. 우리의 생각을 가두는 프레임이나 틀은 내가 눈에 쓰고 있는 검은 선글라스, 퍼시 대왕의 핑크 안경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을 단편적이 아니라 전방위적으로 가리고 있는 것이다.
좌정관천(坐井觀天)이라는 말이 있다. ‘우물 안에서 하늘을 바라본다.’ 즉 ‘우물 안 개구리’라는 뜻이다. 평생을 우물 속에서만 자란 개구리는 자신이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물 안에서만 자란 개구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우물밖에 없다. 우물 안에서만 보는 하늘은 어떨까? 동그란 원형을 가지고 있으며, 밤에는 별이, 가끔은 달이, 낮에는 태양과 구름이, 가끔은 낮달이 지나갈 것이다. 그러면 우물 안에 있던, 지극히 철학적인 개구리는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 코페르니쿠스가 우리를 깨우쳐주기 이전의 인간들처럼, 우물을 중심으로 달과 별과 태양이 있는 하늘이 돌아간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가 갇혀 있는 생각의 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우물 안 개구리가 하늘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물 밖으로 나와야 한다. ‘경험’이 사고의 폭을 넓혀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많은 경험을 하고 여행을 많이 다니고, 여러 사람과 대화하면서 상대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경험하려 해도 여자가 남자의 경험을 한다든지, 젊은이가 늙은이의 경험을 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나이가 들어 경험이 많아지면 이번에는 자기 생각의 틀에 갇혀버리는 사람이 많다. 경험치만큼 자신이 얻어낸 것들이 모두 옳다고 믿어버리는 그릇된 신념은 어쩌면 무경험보다도 더 위험한 것일 수 있다. 상대보다 자신이 옳다고 단정을 내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가진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이 사실을 인정하면 된다. 코뿔소가 그린, 그림 한가운데 늘 뿔이 있는 그림은 당연하다. 사람이라면 늘 자신이 가진 뿔을 가운데 그려놓고 출발한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면 안 된다. 상대를 깎아내리고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시선을 가지면, 주변 사람들이 피곤하다.
내가 늦게까지 회식을 하는 것은 발전을 위한 것이고 배우자나 애인이 늦게까지 회식하는 것은 쓸데없이 술 먹는 거라고 우긴다면, 그리고 그것이 반복된다면, 당신은 커다란 뿔을 가진 코뿔소다. 주변 사람을 이해할 수 없거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꾸 말다툼이 생길 때는 자신을 먼저 돌아보자. 혹시 내가 핑크 대왕의 핑크 안경이나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커다란 뿔로 눈 앞을 가리고 있는 코뿔소가 아닌지 한번 짚어볼 일이다.
3부 진짜 행복의 비밀
소통의 컬래버레이션
우리가 소통해야 하는 진짜 이유는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소통은 불편함을 없애고 관계의 방향을 넓혀주는 신이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75년 동안 행복에 관해 연구한 결과는 사람과의 관계가 좋으면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굳이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구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불행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오기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가 좋으면 인간은 행복해진다.
요즘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과 협업이라는 말이 마케팅뿐만 아니라 방송, 광고, 프로그램 등 다양한 현장에서 많이 등장한다. 컬래버레이션은 사전적 의미로는 협업이나 협력, 마케팅의 측면에서는 합작을 말한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제품이 만나서 ‘1+1=2’가 아니라 ‘1+1=3’도 되고 ‘1+1=5’도 될 수 있도록 시너지를 내기 위한 융합전략인 것이다.
컬래버레이션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는 원래 마케팅 용어지만 근본적으로는 소통의 이야기다. 마케팅 전문가들에게 지금까지 역사상 최고의 컬래버레이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더니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라고 답했다고 한다. 도원결의는 뜻이 맞은 세 사람이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복숭아밭에서 행동을 같이 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도원결의로 시작되는 『삼국지』는 수많은 책과 만화,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콘텐츠로 만들어지며 사랑받았다. 이렇게 오랫동안 폭넓은 사랑을 받은 이유는 유비와 관우, 장비가 각기 개성이 뚜렷하고 서로가 갖지 못한 장점을 갖고 있어서, 서로 소통함으로써 시너지를 극대화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