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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애들이 삼성 간다 할까 두렵다

유선종 지음 | 이너브리지
나는 우리 애들이 삼성 간다 할까 두렵다



유선종 지음

이너브리지 / 2019년 6월 / 160쪽 / 15,000원





PART 01 우리 애들이 삼성 간다 할까 두렵다



나는 우리 애들이 삼성 간다 할까 두렵다



2년 전부터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한국의 대학교와 기타 기관에서 일본 사회와 문화 및 트렌드 관련 강의를 하고 있는데 매번 한국에 돌아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다. 바로 한국 아이들 얼굴이 늘 화가 나 있는 듯한 인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언제라도 폭발할 것처럼 말이다. 일본 현지 학교로 두 자녀를 유학 보내고 있는 나는 한국의 아이들만큼 역량이 뛰어난 아이들도 없다고 확신한다. 자질이 뛰어난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화가 나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왜?”라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 일본이 자국 아이들에게 행하고 있는 교육의 모습을 보면서 아찔한 마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국민에게도 이랬는데 과거 일제 강점기 시대에 우리나라 아이들에게 그들은 어떤 교육을 시켰을까? 식민지 통치자들이 원하는 교육의 결과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안타깝게도 한국 학교에는 아직도 그 일제 강점기 교육 잔재들이 면면히 남아 있다.

우리나라 아이들이 얼마나 우수하고 잠재 역량이 뛰어난지는 우리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성장해서는 지극히 평범한 어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아이들의 뛰어난 자질과 부모들의 지극정성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다이아몬드 원석 같은 한국의 아이들이 부디 호두 까는 용도로 사용되지 않았으면 하는 절실한 마음이다. 나는 종종 지도하고 있는 대학생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곤 하는데 그때마다 획일화된 교육에 지친 그들의 무거운 상실감을 그대로 느낀다. ‘이 상실감을 만든 건 누구일까?’ 그것은 아마도 기성세대의 잘못이고, 아이들의 화난 표정의 원인이 사실은 어른들에게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일본은 과거 자국민에게 행했던 제국주의의 잔해들이 아직도 생활 곳곳에 깊게 뿌리 내려 있다. 일본 아이들이 태어나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은 듣기에는 공공의식이 있는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남이란 말은 전체를 의미하는 말이다. 즉, 개인이 전체에 방해되는 행동을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체를 위해 개인의 희생이 당연시되고 그것이 미덕으로 고착화 되어 있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초등학교 학생들이 6년 동안 메고 다니는 배낭인 란도셀을 볼 때마다 제국주의 일본 군인의 배낭이 떠오른다. 부국강병의 기치를 내걸고 아이들에게 유순한 노동자와 군인 양성을 목적으로 칼을 차고 행했던 교육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교육의 잔재들이 완전히 청산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한국 아이들의 화난 표정은, 개개인이 가진 뛰어난 능력을 뒤로하고 획일화된 교육을 강조하는 간극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학교는 학생 개개인이 진정한 자신을 찾고 만나는 장소이어야 한다. 선생님과 친구들을 통해 여러 과목을 접하면서 자신이 가장 흥미를 느끼는 과목은 무엇인지, 더 깊이 공부해 보고 싶은 학문은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그러나 현재 학교의 현실은 전 과목을 잘하는 것이 공부를 잘하고 우수하다는 평가의 기준이 되어 있다. 자기 자신을 찾는 과정이 되어야 하는 학교는 그 역할과 목적과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 아이들은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 고통 받고 화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학교에서 과연 우리 아이들은 즐겁고 행복할 수 있을까? 학교가 답습하고 있는 전통적인 교육 방향과 방식은 AI 시대의 흐름과 방향에 역행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나라 학생들 대부분이 비슷한 것들을 공부하고, 자신이 원하는 꿈 대신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대기업 취업 또는 적성과 관계없이 공무원이 되는 것이 목표라면 그야말로 안타깝고 서글픈 현실이다. 많은 아이들이 꿈을 포기하고 안정적인 목표를 향해 학교 교육을 받고 있는 지금의 모습이, 일제 식민지 시대에 말 잘 듣는 노동자를 육성하는 것이 목표였던 당시 학교의 모습과 과연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우리 아이들이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하고 경쟁에서 이기기만을 위해 상위 학교에 진학하고 많은 이들이 동경하는 삼성에 간다고 할까 봐 솔직히 두렵다. 암기만 잘해서 우등생이 되는 것도 두렵고, 혼자만 자신의 멋에 취해 있는 벌거벗은 임금님이 될까 봐 두렵다.

교육을 받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



빅 데이터(Big Data)의 발전으로 엄청난 양의 정보를 취급하는 분야에서는 인간이 AI에게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학교 교육의 대부분은 과목의 암기 및 지식의 전달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 실제 사례로 인간과 AI의 체스, 바둑 등에서 인간의 패배를 지켜보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그 결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학교는 AI 시대가 시사하는 바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 즉 직업과 인생의 방향 문제이기 때문이다. AI와 몇 번을 싸워도 한 번을 이길까 말까 하는 현실에서 기존의 싸움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며 AI라는 강적과 싸워야 하는 당사자인 학생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학교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교육(Education)’의 어원을 풀어 보면 학교 교육의 목적이 잘 나와 있다. Education은 라틴어의 ‘duce’가 어원인데, ‘이끌어 내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에 E가 붙은 ‘educe’는 ‘밖으로 이끌어 내다’가 되고, 다시 ‘~하게 하다’라는 ‘ate’가 붙은 Educate는 ‘밖으로 내 능력과 자질을 이끌어 내다’의 뜻이 되다. 즉, 자신의 잠재되어 있는 능력과 자질을 밖으로 이끌어 내게 하는 것이 바로 교육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타고난 재능은 제각기 다르다. 개개인이 가지고 태어난 그 능력을 끄집어내는 것! 이것이 바로 교육을 받는 진정한 의미이자 목적이다.

5%가 망친 나머지 95%



우리 인생 전체를 100으로 봤을 때 우리가 학교라는 공간에서 공부를 하는 시간은 몇 %나 될까? 평균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학교를 다닌다. 하루 24시간, 인생의 평균 수명 80세를 기준으로 했을 때 초등학교 들어가는 8세에서 고등학교 졸업하는 20세까지,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학교에서 공부한다고 가정하면, 공부하는 시간은 전체 수명 중 약 5%이다. 학교를 다니는 5%의 시간대에 무엇을 하는가가 나머지 95%의 시간에 도움이 될까? 우리는 그 5% 시간에 학교에서 무엇을 경험했는가? 지식의 내용을 묻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받은 교육에 과연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묻는 것이다.

여러분은 학교에서 공부할 때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이 즐거웠는가? 솔직히 나는 공부는 재미없고 귀찮은 것이었고, 단지 명문대나 좋은 직장에 가기 위해 마지못해 하는 것이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한 인식으로 5%의 시간을 보냈는데 나머지 95%의 시간에 공부, 탐구라는 것을 자발적으로 찾아서 하는 일이 가능했을까? 지금 돌이켜보면 그 5% 때문에 잃어버린 나머지 95%가 너무 안타까울 뿐이다. 5%에 해당하는 시기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95%의 시간에 대학을 포함하여 본인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 재미있어 하는 것, 보수를 조금 받아도 진정으로 즐겁게 하는 일을 배워가며 살았다면 지금 어떤 모습이었을까? 미꾸라지 한 마리가 웅덩이를 전부 흐려 놓은 느낌이다.

인생 최고의 선생이자 기회는 무엇일까?



우리는 그동안 실패는 피해야 하는 것, 만나면 불행하고 낙오하는 것으로 배워왔다. 그러나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이러한 실패에 대한 인식은 달라진다. 전체가 중시되는 상황에서의 실패는 절대적으로 피해야 하지만 개인의 발견이라는 목적에서는 실패만큼 유용한 거울 역할을 하는 것도 없다. 전자의 경우 실패를 통해 궤도 수정을 할 여유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가장 크게 배우는 순간이 언제인지 생각해 보라. 실은 거의 대부분이 실패에서 얻어진다. 우리가 처음 걸음마를 시작할 때 얼마나 많은 엉덩방아를 경험한 후에야 설 수 있고 걸을 수 있었는가? 그리고 부모님들은 그 멋진 실패 앞에서 얼마나 많은 행복한 박수를 보냈는가? 그 박수 받던 실패는 학교에 들어가면서 대접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동안 인정 속에 격려를 받아왔던 실패는 학교라는 경쟁사회에서 절대 겪으면 안 되거나 하게 되면 뒤처지는 것으로 취급 받게 된다. 어떻게 해서든 실패를 안 하고 결과를 내는 것만이 대접을 받게 됨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된다.

하지만 삶은 실패를 극복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아! 그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 무엇이 문제였구나, 어떻게 하면 바뀌게 될까?’ 등등의 원인과 방법은 사실 실패를 통해서 배우게 된다.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를 만나게 되면 돌아가거나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했다. 에디슨은 전구를 완성할 때까지 약 1,200번의 실패를 거듭했다. 그 많은 실패를 거듭하고 마침내 성공을 거둔 후 열린 기자회견 자리에서 기자가 에디슨에게 말했다. “1,200회나 실패를 거듭하고도 포기하지 않으셨다니 대단하시군요.” 그러자 에디슨은 “1,200회를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전구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경우를 1,200회나 관찰하는 데 성공했던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의 모습과 길을 찾은 성공한 사람은 실패에 좌절하거나 흔들리지 않았기에 일반인이 이루기 힘든 성공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 후 그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만나는 실패와 시행착오는 사실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반증이며 진정한 스승이자 발전을 위한 좋은 기회인 것이다. 인생에 있어 이러한 실패를 경험하지 않는 것만큼 무미건조한 일도 없다. 하는 일마다 다 잘 풀리고, 보는 시험마다 합격하고, 하는 사업마다 순풍대로라면 그의 인생은 얼마나 무미건조할 것인가? 과연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지혜로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을까? 실패를 안 한 사람이 멋있는 게 아니라 실패를 기회로 받아들이고 극복한 사람이 진정으로 인간적이고 멋있는 사람이다. 성공의 반대말은 실패가 아니라 포기이다.

사람들이 행복해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 3가지



행복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 셀 수 없이 많은 설이 있다. 하지만 그 방법들은 사람에 따라 각자 인지하는 영역과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나와 맞지 않을 확률이 더 높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행복해하지 않는가? 사람들이 행복해하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 다음 3가지에 원인이 있다.

첫째, 가장 큰 이유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만나지 못해서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의외로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조차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놀라곤 한다.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고 대화하기보다는 부모나 주위의 의견에 맞춰 수동적으로 살다 보니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외형의 집은 내 집인데 나는 그곳에 살고 있지 않는 아이러니.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닌데 그 집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둘째,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자유에 있다. 자유에서 우리의 행복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은 크게 경제적 자유, 시간의 자유, 장소의 자유, 인간관계의 자유다. 학교에서 우리들은 직업을 선택할 때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지, 어떤 것이 훨씬 가치가 있는 일인지 등에 대해서는 거의 배우지 못했다. 취업을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어느 일정한 시간의 자유를 일정한 보수와 교환한다는 것이다. 일을 한다는 것은 내 자유를 담보로 하는 것이기에 자신의 삶에 있어 자유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이 자유를 얻기 위해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는지 역사는 말해준다. 그리고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가 행복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자유의 가치를 알고 평생 업을 선택한 사람과 아닌 사람과는 행복을 느끼는 데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셋째, 사람들이 행복과 멀어지는 이유는 바로 상대와의 비교에 있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은 사람은 남들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동시에 타인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타인과 나의 비교 자체가 무모하고 의미 없는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한 사람은 항시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상대적인 박탈감과 불행을 느낀다. 이러한 비교의 본격화는 학교에 입학한 이후 시작되며 비교가 일상화 된다. 한 학급에 30명이 있다면 1등부터 30등까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1등에서 멀어지고 30등에 가까워질수록 인생의 질도 낮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나보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모든 면에서 우등하고 더 좋은 학교와 직장, 보수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식이 부지불식간에 우리들 뇌에 이식이 된다. 이처럼 객관적인 지표와 획일화된 기준으로 평가되는 것에 우리들은 자연스레 길들여져 왔고 더욱 무서운 것은 이것을 인식조차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비교는 필연적으로 순위를 동반한다. 비교는 우열을 정한다는 것이고, 우열을 정하는 기준으로 사용되는 것이 숫자로 표시되는 순위이다. 이 순위 앞에서 사람은 행복과 멀어진다. 경쟁 구도에서 상대방은 나에게 적으로 인식될 뿐 동료로 인식되지 않는다. 여러분은 행복한 검투사가 이해되는가?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여야 하는데 그 검투사가 행복할 수 있을까? 상대방보다 내가 더 높은 순위에 있어야 더 나은 학교, 더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는 현실에서 어떻게 그들이 친구나 동료가 될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는 모든 조직과 사회에서 물리적인 1등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다. 늘 비교 경쟁 속에서 스트레스와 피곤함만이 쌓이게 되는데 어떻게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이렇듯 사람이 행복해하지 않은 이유들을 이해하고, 그 해결책이 자신의 본모습을 찾는 일임을 다시 한 번 인지하길 바란다.



PART 02 우리 애들이 우등생이 될까 두렵다



나는 우리 애들이 우등생이 될까 두렵다



미래의 고용 지도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데 학교의 근원적인 교육 방식은 요지부동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교사의 수업 방식과 그 내용은 정해진 틀 안에서 진행된다.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기보다는 대개는 선생님 혼자 한 시간 내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의 아이들은 집중력을 잃고 선생님의 일방적인 수업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러한 교실의 모습이 학교의 주인공인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과 결과를 가져올지 깊게 고민해 봐야 한다.

국어, 영어, 수학과 그 외의 과목들을 나누어 중요도를 가르고 학업의 효율이라는 이유로 학생의 등급을 우등, 열등(우열반)으로 나누어 놓은 지금의 학교 행태. 優等(우등)의 ‘優(우)’는 ‘우월하다, 뛰어나다, 넉넉하다’는 의미이다. 반대로 ‘劣(열)’이라는 말은 ‘일정 등급에서 떨어진다’는 것이다. 즉, 어떤 기준을 만들어서 그에 못 미치면 열등생, 그보다 조금 더 나으면 우등생으로 등급을 매기고 있다. 잔인한 말이지만 마치 소, 돼지의 등급을 매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식민지 시대의 교육 목적이 지금도 학교 현장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식민지 시대에 학교는 말 잘 듣는 황국의 유순한 신하 국민을 양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 잔해들이 아직도 우리의 학교에 남아 있다. 미술은 잘하는 데 영어나 수학을 못하면 열등한 것인가? 전 과목 평균이 일정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정말 열등한 것일까? 나는 우리 아이들이 남이 세워 놓은 납득할 수 없는 기준에 의해 평가 받아선 안 되는 존재임을 안다. 우리 아이들이 어쭙잖은 기준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본모습을 잊고 살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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