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 인 코리아
이영현 지음 | 성안당
메이드 인 코리아
이영현 지음
BM주식회사 성안당 / 2019년 7월 / 262쪽 / 15,000원
I am Korean
내 별명? ‘A poor Korean!’
무역인으로 살아온 지 40년. 이제 와 고백하자면 40년 무역인으로 받아든 나의 성적표는 ‘낙제’에 가까울 것이다. 사업가로서 최고의 덕목은 ‘수익 창출’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남들보다 낮은 수익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40년간 내가 취급했던 모든 제품이 한국산, ‘Made in Korea’였던 까닭이다. 세계 수위를 다투며 기술력을 자랑하는 지금과 달리 과거에는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한국 제품의 품질을 인정하지 않았다. 팔리지 않는 상품을 파는 ‘어리석은 한국인(A poor Korean)’, 당시 나에 대한 동료들의 냉정한 평가였다.
내가 본격적으로 무역업에 뛰어든 것은 1960년대로, 우리나라 GDP가 80달러를 갓 넘긴 시점이었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하루 세끼 식사’도 당시에는 일부 특권층과 부유층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였다. 길거리에는 넝마주이와 거지, 전쟁고아가 넘쳐나고 역한 냄새가 나는 일명 ‘꿀꿀이죽’도 없어서 먹지 못할 정도로 경제 상황은 살얼음판이나 마찬가지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 내가 마주쳤던 동포들의 힘겨움이 어느 누군가는 신보다 더 따른다는 ‘돈’조차 마다하고 팔리지도 않는 한국 제품만 취급했던 우직한 애국심의 시발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누군가에게 우리나라 제품을 파는 작은 재주 하나가 전부였지만, 나로 인해 우리나라 경제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는 단 하나의 굳건한 심지가 있었기에 주변의 부정적인 평가와 실질적인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었다.
여든을 바라보는 내가 때 아닌 애국심 타령을 하는 것은 소위 꼰대처럼 젊은이들에게 무조건적인 애국을 강요하기 위함이 아니다. 다만 부모가 하나인 것처럼 조국 역시 하나일 수밖에 없음에도 ‘헬조선’ 혹은 ‘헬코리아’라는 말로 자신의 조국인 한국을 부정하는 시대적 흐름이 그저 안타까운 까닭이다. 현재 청춘들이 느끼는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책임이 어느 정도 국가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니, 어쩌면 꽤 많은 비중의 책임이 국가를 비롯해 나와 같은 선배들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때는 먹을 것도 제대로 없었어”와 같은 케케묵은 반론은 꺼내지 않겠다. 고정된 과거에 얽매이기보다는 현재의 어려움을 직시하고 이를 인정한 후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발판으로 삼는 것이야말로 ‘장사꾼으로서’ 가장 현명한 선택지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이 시대 청춘들은 좀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좋든 싫든 한번 정해진 부모와 조국은 바꿀 수 없다. 헬조선이란 날카로운 단어로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행위는 변하지 않는 과거를 원망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선택일 뿐이다.
이쯤에서 욕먹을 각오로 후배들이 뜨끔하게 느낄 만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종종 각종 매스컴을 통해 헬조선이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가슴속 저 깊은 곳에서 울컥 치미는 화를 쉬이 가라앉히지 못한다. 제2의 고향인 캐나다나 자주 강의를 다니는 미국, 일본, 중국 등을 포함해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한국을 헬조선 혹은 헬코리아라고 부르지 않는다. 전 세계에서 한국을 무시하는 사람은 바로 우리나라 국민, 그중에서도 젊은 친구들이 주를 이룬다. 이 같은 현상은 자신의 부모를 스스로 욕하는 꼴과 마찬가지다. 어찌 자신의 조국을 그렇게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40년 이상 해외를 떠도는 힘겨운 이방인의 삶을 버텨낼 수 있었던 이유인 조국이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던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제 반대로 내가 질문을 던져보겠다. “헬조선이란 단어 그대로 우리나라가 지옥인 게 사실이라면, 그 지옥을 이겨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전 세계 곳곳에서 강의를 하는 나는 자연스럽게 수많은 청춘들을 만난다. 자신들의 꿈을 이루기 위한 준비에 한창이기에 아직 ‘번데기’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누구보다 큰 경제적 성공을 거뒀다고 자부하는 나조차 놀랄 만큼 이미 ‘성체’가 된 젊은 친구들도 제법 여럿 있다. 물론 그들 모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적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같은 대한민국 국민임에도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해서 굳이 글로 옮길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바로 ‘노력.’이다.
남들보다 앞서 성공에 다다른 이들은 예외 없이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확고한 목표를 정하고, 이를 향해 흔들림 없는 걸음(노력)을 이어왔음을 직접 확인했다. 우리나라 대다수의 청춘들이 ‘헬조선’이라고 욕하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노력으로 이를 극복한 것이다. 그중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에서 만난 한 친구의 이야기가 아직도 나에게 진한 여운으로 남아 있다.
“한국에 있는 많은 친구들이 하나같이 제게 ‘넌 헬조선을 떠나서 좋겠다’고 말합니다. 마치 제가 캐나다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성공을 보장받았다는 뉘앙스죠. 하지만 세계 최강국인 미국이나 세계 경제 2위의 대국인 중국, 전통적인 경제 강국 독일이나 일본과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무조건 성공할 수 있을까요? 어떤 나라든 각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에게는 저마다의 십자가가 주어지기 마련입니다. 그 십자가의 무게를 견디는 것은 오롯이 본인의 몫입니다. 헬조선이라는 말로 잠시 정신 승리를 하면 본인의 미래가 달라질까요? 죽을 만큼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때 국가에 대해 차진 욕을 하든 말든 아무도 지적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조건 남 탓을 하기 전에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먼저 인정하고 이를 채우기 위한 노력이 우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청춘들이여, 결코 아프지 마라
경복고등학교를 다니던 1956년, 나는 우연한 기회에 당시로서는 접하기 힘든 아이스하키를 배울 수 있었다. 미국에서 유학을 하던 한 지인이 스케이트를 선물해준 덕분이었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에서 취급하는 대부분의 아이스하키 장비는 캐나다산이었다. 부모님이 어렵게 스틱을 마련해주셨는데 거기에도 ‘Made in Canada’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나만의 세계 최고 나라’ 캐나다로의 유학을 꿈꿨다.
외국으로의 여행조차 쉽지 않았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오직 캐나다에 갈 거란 막연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군에 자원입대를 했다. 이유는 하나, 당시만 해도 병역 의무를 마쳐야 해외에 나갈 수 있는 여권을 발급해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역과 동시에 군복도 갈아입지 않고 말년 휴가 때 미리 준비해둔 캐나다 유학 수속을 밟았다. 당장이라도 캐나다로 향하리라는 꿈에 부풀었지만 정작 유학을 떠난 것은 전역한 지 10개월이 지난 후였다. 1996년, 부모님을 조르고 졸라 억지로 마련한 200달러를 들고 꿈에 그리던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 참는 자에게 돈이 온다!
희망과 설렘이 가득했던 유학길이 가시밭길로 판명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명색이 한국에서 알아준다는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나는 아이스하키에 빠져 공부를 게을리 했던 탓에 영어 한마디 하지 못했다. 그런 내가 반나절 이상 다운타운을 헤집고 다닌 끝에 선택한 집은 도시 끝자락 모퉁이 즈음에 위치한 지하방이었다. 한 달 월세는 8달러. 식대와 생활비를 포함해도 1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 나왔다. 한정된 공간 탓에 식사조차 마음대로 못했지만 그래도 돈은 어린아이 곶감 빼먹듯 줄어들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가 지난 후 다시 한 번 생활비를 계산해보니 현재 가진 돈으로 6개월간 생활하려면 식비로 하루 1달러 이상을 사용하면 한 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원래 다니던 슈퍼마켓보다 조금 더 먼 곳에 위치한 대형 슈퍼마켓을 찾아갔다. 도통 마음에 차는 음식을 발견하지 못하고 마켓 내부를 방황하던 중 마치 운명처럼 한국에서는 귀한 음식으로 대우받는 통조림이 가득 찬 진열장을 마주하게 됐다. 스팸 통조림의 가격은 1달러에 네 개. 하루 식비인 1달러로는 충분했지만, 한창 나이인 내게 한 끼에 스팸 하나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고민하던 중 내 눈에 또 다른 문구가 들어왔다. ‘1$=8(eight)’ 비슷한 모양과 디자인, 게다가 스팸보다 조금 더 큰 통조림이 1달러에 여덟 개라는 문구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통조림을 한 아름 들어올렸다.
이후 6개월 동안 나의 식사는 오직 그 통조림뿐이었다. 작은 체구의 동양 꼬마가 일주일에 한 번씩 몇 십 개의 통조림을 사가는 모습이 신기해서였을까. 슈퍼마켓 직원들은 종종 내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Do you like animal?” 동물을 좋아하냐는 질문의 속뜻도 모르고 그저 나에게 대화를 시도했다는 기쁨에 나는 앞뒤 생각할 것 없이 “Yes!”라고 대답하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후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은, 지난 6개월간 내 주식이었던 통조림의 실체가 바로 ‘동물 전용 통조림’이었다는 것이다. 통조림의 진실에 대해 알게 된 날, 나는 동물 전용 통조림을 손에 들고 한참을 웃었다.
동물 전용 통조림의 실체를 깨달은 후 다른 음식으로 식단을 바꾸니 당장 생활비가 문제였다. 돈 벌 궁리에 빠져 있던 나는 불현듯 손위 형들이 미국 유학 시절 접시닦이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내가 일을 구하기까지는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한 식당에서 오후 5시부터 새벽 2시까지 안내, 정리, 서빙, 청소 등의 일을 하는 버스보이(busboy)로 일하기로 했다. 일은 힘들었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의 실수로 1주일 만에 해고되었다.
당신은 과연 성공을 꿈꿀 자격이 있는가?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의 우격다짐으로 떠난 캐나다 유학은 첫 단추부터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한국에서 제법 귀한 집 자식으로 대우받고 살았던 나는 일조차 요령껏 하지 못했다. 첫 번째 직장이었던 레스토랑에서 조화를 생화로 착각해 식당 바닥을 온통 물바다로 만들고 해고 통지를 받은 이후, 어렵사리 두 번째 일자리를 얻어 건물 청소를 할 때에는 응급실로 실려 가기도 했다. 퇴원과 동시에 해고 통지를 받은 것은 물론이다. 몸을 추스르자마자 내가 향한 곳은 ‘캐나다판 인력 시장’이었다. 한국의 막노동 일꾼 모집 현장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것인데, 그곳은 농장에서 지렁이를 잡는 막노동 일꾼을 뽑는 인력시장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두 달을 버텼다. 그리고 새로 찾은 일자리는 캐나다 굴지의 D항공사 조립라인이었다.
새로 근무하게 된 직장의 임금은 주당 35달러였다. 산술적인 임금도 지렁이 잡기보다 훨씬 높은 것은 물론 업무 환경 및 내용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했다. 하지만 출퇴근길이 녹록지 않았다. 제법 먼 곳에 위치한 공장을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야 했던 탓에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새 직장에서도 영어를 못하는 동양인으로서 받는 차별은 여전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무시를 당하기 시작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저 주어진 일을 열심히 수행함으로써 잡생각이 나지 않도록 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동료와 시비로 인해 나는 해고되었다. 해고를 당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긴 시간 동안 나의 머릿속에는 오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심각하게 귀국을 고민할 정도였으니 당시 내가 얼마나 절박했었는지를 알 수 있을 터다. 사실 집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나의 마음은 귀국 쪽으로 무게추가 많이 기운 상태였다. 하지만 문을 열고 벽 한편에 걸린 태극기를 마주한 순간, 나의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오기의 회오리가 휘몰아침이 느껴졌다. 캐나다에서 태극기를 휘날리고 개선장군처럼 금의환향하겠노라 큰소리를 친 지 1년 만에 패자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의지가 불뚝 솟아올랐던 것이다. 나는 곧바로 굵은 펜을 들고 태극기 밑에 그날 세운 새로운 각오를 새겨 넣었다. ‘한 번 더 해고되면 자살한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밤새 의자에 앉아 그간 나의 부족했던 부분을 되짚어봤다. 부족한 영어 실력, 방향성이 잘못된 열정, 욱하는 성질 등 많은 문제점들이 하나하나 노트를 채워갔고, 그렇게 지난 캐나다 생활의 부족함과 실수들로 빽빽해진 노트를 수십 번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러한 과정이 나의 잘못을 냉정하게 되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계기를 선물했다.
소중한 인연은 기척 없이 찾아온다
문제점을 파악했으니 이제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해결책은 간단했다. 열심히 영어 공부만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내가 새롭게 정한 또 다른 목표는 바로 ‘대학 진학’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말도 안 되는 목표였음을 인정한다. 다소 억지스러운 목표를 정한 나는 그길로 토론토 라이어슨 대학교를 찾아갔다. 과거 공장을 오가며 눈여겨봤던 대학교였다. 학교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던 나는 무작정 가장 그럴듯한 건물을 선택해 막무가내로 문마다 노크를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건물은 토론토 라이어슨 대학교에 재직 중인 교수들의 방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나의 운명을 바꿔준 열두 번째 방의 주인은 ‘템플 교수’였다. 푸근한 인상의 템플 교수는 낯선 이방인의 방문에도 친절하게 상담을 해줬다. 부족한 영어 실력이 답답할 만도 했을 텐데, 그는 상냥한 얼굴로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 노력했다. 내 인생의 전환점에서 만난 소중한 은인이다. 템플 교수를 통해 나는 한국에서의 학력은 캐나다에서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과 라이어슨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자격(토플)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렇게 만난 템플 교수는 내게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줬을 뿐만 아니라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알려준 은인이다.
새로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길을 확인한 나는 전화국으로 가서 부모님께 전화해 한국에서 발행된 영어 참고서를 모두 구해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몇 주 뒤 30여 권의 책이 하숙집에 도착했다. 그렇게 공부를 싫어했던 내가 평생 가장 열심히 책과 씨름했던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6개월,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평생 공부에 쏟아야 할 열정을 모두 쏟아 부었다고 자부했기에 나는 어떤 결과도 겸허하게 받아들이리라는 다짐과 함께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결과는 예상 이상이었다. 700점 만점의 토플 시험에서 무려 580점을 획득해 당당히 입학을 허가받은 것이었다.
입학 허가를 받은 나는 곧바로 템플 교수에게 달려갔다. 템플 교수는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연신 내 어깨를 두드렸다. 누군가에게 내 노력이 인정받았음이 뭉클했던 것일까. 지난 6개월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대학교 합격 후 나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다만 학교생활과 병행을 해야 했기에 캐나다에서 운전면허를 취득한 후 택시 운전을 했다. 사실 정식으로 택시 영업을 시작하기까지는 꽤 많은 고생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다행히 라이어슨 대학교에는 현재의 학자금 대출과 비슷한 제도가 있었다. 덕분에 나는 4년 동안 등록금 걱정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물론 1만 달러에 가까운 대출금을 갚느라 졸업 후 제법 긴 시간 동안 아등바등 살아야 했다.
Only ‘Made in Korea’
고생길 끝에서 행운을 만나다
수학을 제법 잘했던 덕분에 나는 졸업도 하기 전에 추천을 받아 IBM에 입사를 하게 됐다. IBM 신입사원은 매주 금요일마다 사업기획안을 제출해야 했다. 한 주 동안의 업무를 기반으로 회사에 새로운 사업을 제안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하지만 기획안이 속속 통과되는 다른 동료들과 달리 나는 보류 판정을 받기 일쑤였다. 아예 ‘Fail’을 받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나는 이 원인을 나 자신의 부족함이 아닌, 이방인이기에 받는 차별로 돌렸다. 마음이 엇나가 있으니 회사 생활이 원활할 리가 없다. 동료들과의 트러블은 늘어났고, 심지어 윗사람과의 마찰도 발생했다. 사실 내 기획안은 근본적인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쌓아온 영어 실력을 발휘했지만, 회사에서 요구하는 핵심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