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회사남여

조세핀 최, 신이지 지음 | 두앤북
회사남여

조세핀 최, 신이지 지음

두앤북 / 2019년 3월 / 291쪽 / 14,000원





CARTA DO AMAZONES - 아마조네스로부터의 편지



# 수상한 아이코서히드런

기내에 불이 꺼지자 배선태 부장은 눈을 감았다. ‘아, 정말 쉽지 않은 일정이었어.’ 40대 후반의 나이, 남미 3개국을 넘나들며 소화한 7박 9일간 출장 일정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심신을 더욱 무겁게 만든 것이 있었다. 어제 날짜로 발행된 한국 경제지의 1면을 장식한 기사였다. ‘영교상사와 YG패션 통합, YG코퍼레이션으로 새롭게 출범’

두 회사 모두 YG그룹의 계열사로, 영교상사는 창업주의 큰딸이, YG패션은 셋째아들이 이끌어가고 있었다. 따라서 두 기업의 합병이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영교상사의 제품기획팀과 YG패션의 상품개발팀을 통합한 뒤 다시 둘로 나누어 YG코퍼레이션의 개발기획팀과 제품전략팀으로 만들겠다는 결정은 그에게 놀라운 일이었다. 그가 바로 영교상사의 제품기획팀 팀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결정은 그가 지시만 내리면 ‘예썰(Yes, sir!)’ 하며 출동하는 여덟 남자를 거느렸던 팀장에서, 밀라노 패션위크와 뉴욕 매스티지 브랜드의 한국 론칭쇼 현장을 누비며 한 손에는 클러치를, 다른 한 손에는 샴페인잔을 들었던 여직원 다섯이 포함된 9명의 팀원들을 이끄는 팀장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배 팀장은 옆자리에 있는 사내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표지오 대리, 어제 이메일로 합병되는 회사 조직도 받았다고 했지? 우리 사장님 승진하시는 거 맞아?” “네, YG코퍼레이션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조직도 맨 위에 있었다니까요. C, E, O! 이렇게 찍혀서요.” “YG패션 조세호 사장님은?” “경영본부장인가, 운영본부장인가로 우리 사장님, 아니 우리 부회장님 밑에 있었고요. COO 직함으로요.” 배 팀장은 다시 한 번 신문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 합병의 주역 중 한 명인 영교상사의 대표이사는 보수적인 가풍의 YG그룹 가문의 딸답지 않게 일찍 회사 경영에 참여하고 싶어 했다. 그러다 보니 어른들로부터는 눈총과 구박을, 남자 형제들로부터는 견제와 무시를 받아왔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감내하며 현재의 자리에 올라서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법을 익혔다. 배 팀장은 그가 부장이었을 때 신입사원으로 입사하여 18년간 줄곧 같은 부서에서 일해 왔다.

“참, 잊어먹기 전에 이거 가져가세요. 엊그제 부장님께서 사신 걸 제가 여태 갖고 있었네요.” 연녹색빛이 감도는 낡은 목각조각이었다. 아이코서히드런(Icosahedron, 20개의 정삼각형으로 이루어진 정이십면체)처럼 생긴 그것은 각 면에 좁쌀만한 크기의 글씨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글자의 크기가 워낙 작은 데다 오랜 시간 닳고 없어져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좀처럼 읽을 수 없었다.

에콰도르의 소도시 코카에서 브라질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 국제공항으로 향할 때였다. 호객행위를 하고 있던 50대 후반의 아주머니와 마주쳤는데, 그가 정이십면체 목각조각을 건넸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가져가요.” 잠시 실랑이가 벌어졌다. 결국 1달러짜리 몇 장을 주고 목각조각을 받아든 배 팀장은 가방을 메고 옆에 서 있던 표 대리에게 맡겼었다. 그때 공항 쪽으로 가려던 배 팀장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이건… 이름이 뭡니까?” “Carta do Amazones! 아마조네스로부터의 편지!” 그러고는 씩 웃어 보였는데 그 표정이 왠지 낯이 익었다.

쉽지 않은 시작

합병작업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진행되었다. 배 부장이 팀장을 맡게 된 개발기획팀은 배 팀장을 포함하여 모두 10명이 한 팀이 되어 일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정확히 남자 다섯에 여자 다섯이었고, 직급 역시 남녀 부장 1명씩, 차장도 1명씩, 사원도 1명씩 딱딱 맞았다. 다만 남자 직원은 대리가 2명인 데 비해 여자 직원은 과장 1명에 대리가 1명이라는 사실이 조금 다른 점이었다. 배 팀장이 출장에서 돌아와 회사에 출근한 월요일 배 팀장은 팀원들끼리 인사도 나눌 겸, 앞으로 어떻게 일할지 이야기도 할 겸 잠시 회의를 하자고 했다. 그런데 전화 받느라 회의실에 늦게 들어온 고미정 과장 때문에 남자직원과 여자직원 사이에 말다툼이 일어났다. 의외의 상황에 당황한 배 팀장에게 전 YG패션 상품개발팀장이자 현 YG코퍼레이션 개발기획팀의 차석이 된 윤이화 부장이 다가왔다. “팀장님과 제가 직원들을 다독이고 나서 오후에 다시 회의를 여는 게 어떨까요?”

여왕의 전략

며칠 뒤, “배선태, 어때? 새로운 팀원들이랑 손발은 잘 맞아?” “예, 부회장님.” 배 팀장은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했다. 조선아 부회장은 배 팀장을 앞에 앉혀놓고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배 팀장이 물었다. “부회장님, 혹시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무래도 세호가 나를 몰아내려고 하는 것 같아. 상사랑 패션이랑 합병해서 명목상으로는 나를 CEO로 추대하고 자기가 COO를 맡았지만, 올해 안에 나를 퇴진시키고 자기가 CEO 자리를 차지하려는 모종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 같아. 회사를 위하고 시장이 원한다면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날 수도 있어.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내가 물러나더라도 YG를 맡게 될 사람은 조세호가 아니고,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좀 나서줘야겠어.”

잠시 후, 조 부회장이 말을 이었다. “회사를 다시 나눌 거야. 물론 합병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실제로 분할하기는 어렵고 회사 내부적으로 조직 운영을 그렇게 하겠다는 거지. 사업 영역과 매출 규모, 향후 시장 전망 등을 고려했을 때 사업 거점은 유럽과 아프리카를 잇는 모로코의 탕헤르, 중동과 아시아를 잇는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그리고 북미와 남미를 잇는 멕시코의 과달라하라야, 이 세 곳을 거점으로 별개의 사업본부 조직을 만들어서 서로 경쟁하며 성장하도록 하고, 그들이 향후 3개의 회사로 커나가도록 만들 거야. 당분간은 조세호 사장이 전체 총괄을 맡겠지만, 각 거점을 맡은 조직에 사업계획 수립 및 실행, 예산 편성 및 집행, 그리고 인사에 관한 전권을 부여할 거니까 거점별 사업본부가 제대로 자리만 잡으면 조 사장이 개입할 여지는 거의 사라질 거야.”

“그럼 제가 해야 할 일이….” “모로코 탕헤르나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비해 멕시코의 과달라하라는 지사의 규모나 조직이 거점으로 삼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한 것 같아. 자네가 팀을 이끌고 과달라하라로 가서 조직을 재편하고 사업 전략을 새롭게 수립해주는 역할을 해줬으면 해.”

두 인간의 대립

회의하자는 배 팀장의 말에 이번에는 모두 제시간에 회의실로 모였다. 배 팀장이 회의의 취지만 간략하게 전달하고 나서 안두호 차장이 전체적인 설명을 이어갔다. 조선아 부회장이 구상한 거점별 사업 본부 설립 계획과 준비가 덜 된 과달라하라의 조직에 대한 지원 방안이었다. 설명을 마친 안 차장이 자리로 돌아가자 배 팀장이 수첩을 펼쳐 팀원별 담당 업무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저기… 질문 있는데요.” 노옥선 차장이었다. 순간 남녀 직원들의 표정이 묘하게 엇갈렸다. “방금 전 안 차장께서 설명하신 내용에서 궁금한 점이 있어서요. 안 차장님은 혹시 멕시코라는 나라에 가보신 적은 있나요?” “허 참! 노 차장, 내 전공이 뭔지 알아요? 서어서문학이에요. 멕시코를 가봤냐고요? 내가 영교상사 밥만 15년인데, 참 어이가 없네. 도대체 뭐가 문제인데요?” “멕시코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마치 멕시코를 다녀오시거나 살다가 오신 것처럼 말씀을 하셔서요.” 배 팀장이 물었다. “그래서 노 차장이 궁금한 건 뭐죠?” “아까 안 차장이 보고하신 내용은 지나치게 미국 관점에서, 멕시코시티 중심으로 정리하셨는데,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아서요.”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안 차장이 보고한 내용에 대한 점검으로 이어졌고, 일부 사항에 대해서는 치열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30분 정도로 예상했던 회의가 쉬는 시간을 포함해서 2시간 넘게 진행되었다. 그 후 배 팀장이 회의를 종료하면서 말했다. “각자 담당하게 된 업무에 만전을 기해주시고, 이번 일은 회사 안팎에 새나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써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COO 직속조직 쪽으로는 절대 알려지면 안 됩니다.”

중재의 손길

“안 차장, 저한테 시간 좀 내줄래요?” 윤이화 부장이 직접 안 차장의 자리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지하에 있는 커피전문점에 자리를 잡았다. 윤 부장은 컵을 만지작거리다가 어렵게 입을 떼었다. “어찌 되었든 잘 부탁합니다. 앞으로 우리 팀에서 안 차장님이 큰 역할을 해주셔야 하니까요. 겪어보니 남자 직원과 여자 직원 사이에는 커뮤니케이션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그렇죠?” “글쎄요. 굳이 말하자면 남자는 txt, 여자는 jpg?” 얼마 후 배 팀장이 팀원들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 미팅을 진행했다. “일단 고미정 과장이랑 오성두 대리가 선발대로 먼저 가서 수고를 해줘요. 멕시코시티에 가면 영교상사 소속으로 일했던 현지인이 합류해서 도움을 줄 거예요. 한국에서는 우빈이와 지아 씨가 고 과장이랑 오 대리가 맡고 있던 업무를 백업하는 걸로 하고.”

소문의 정체

커피를 마시려고 탕비실로 들어선 표지오 대리는 순간 움찔했다. 여직원 서넛이 커피를 마시며 비밀 이야기라도 나누듯 속닥거리고 있었다. 한 사람은 같은 팀원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 팀 소속이었다.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건넨 표 대리는 커피를 뽑자마자 밖으로 나왔다. 다음 날, 회의가 소집되었다. 안 차장이 소집한 회의였다. 배 팀장과 윤 부장은 없었고 안 차장과 노 차장 이하 남녀 직원들만 참석했다. 회의실로 모이자 안 차장이 입을 열었다. “부장님께서 그렇게 보안에 신경을 쓰라고 신신당부하셨건만, 일부 직원이 COO 쪽 사람들과 사적인 대화를 나눈다는 얘기가 들려서 다시 한 번 주의를 당부하기 위해 모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제 오후 탕비실에서 표 대리와 마주쳤던 오지아가 표 대리를 째려보았다. 잠시 후 둘은 언성을 높이며 다투었다.

그때 배 팀장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안 차장과 노 차장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무 일도 아니라며 회의를 끝내려고 했다. 배 팀장이 다 모인 김에 간단히 회의를 하자며 그들을 붙잡고 말했다. “다음 달에 조세호 사장께서 멕시코로 출장을 가신다고 하는데, 왜 가는지 혹시 아는 사람 있나? 사업전략팀 마태호 부장이 수행해서 다녀오신다는데.” 오지아가 말했다. “휴가 가신대요. 로스앤젤레스에 유학 중인 큰딸 졸업식에 참석했다가 가족과 함께 멕시코 칸쿤으로 여행을 다녀오신대요. 마 부장은 우연히 샌디에이고 출장 일정이 잡혀 로스앤젤레스까지만 동행하는 건데, 말이 부풀려진 거고요.” 배 팀장이 오지아에게 물었다. “우리 지아 씨는 어떻게 그런 정보를 알고 있지?” 오지아가 안 차장과 표 대리를 한 번씩 째려본 뒤 대답했다. “탕비실에서 수다 떨다가요.”

불만 폭발

유희아 대리가 중얼거렸다. “어라, 이게 아닌데….” “왜, 뭐가 잘못됐어?” 고미정 과장이 물었다. “우빈 씨가 보내온 자료가 포맷도 다르고, 폰트도 안 맞아서요.” “불러서 물어봐.” “우빈 씨, 잠깐만요.” 조우빈은 유 대리가 두어 번을 더 부르고 나서야 느릿느릿 일어났다. 유 대리는 기분이 상했다. “우빈 씨, 이거 포맷이 왜 이렇죠? 폰트도 전혀 안 맞고.” “어차피 최종적으로 자료를 취합하는 사람이 다 종합해서 한꺼번에 맞추면 되는 거 아닌가?” “뭐예요?” 유 대리의 말은 거의 고함에 가까웠다. 사무실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조우빈 역시 지지 않고 맞섰다. 사무실 안쪽 미팅룸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배 팀장과 윤 부장이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나왔다. 배 팀장이 조우빈에게 뭐라고 하려는 순간 윤 부장이 그를 제지하며 조용히 말했다. “팀장님, 이번에는 제게 맡겨주시면 안 될까요?” 두 사람이 윤 부장을 따라 미팅룸으로 들어갔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나머지 팀원들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유 대리와 조우빈이 미팅룸에서 나오더니 각자의 노트북을 챙겨가지고 함께 사무실을 나갔다. “윤 부장, 쟤네한테 뭐라고 했기에 저렇게 고분고분해진 겁니까?” “별거 있나요. ‘너네 친하게 안 지내면 둘 다 확 잘라버릴 거다!’ 겁 좀 줬죠.”

부회장의 초대

배 팀장의 진행 보고를 들은 조 부회장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집으로 배 팀장과 팀원들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했다. 맛있는 요리와 함께 조 부회장이 돌린 술이 몇 순배 돌고 나자 처음의 서먹한 분위기가 많이 풀어졌다. 웃고 떠드는 사이 시간은 금방 흘렀다. 배 팀장이 일어나 조 부회장에게 말했다. “마무리할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우리 멤버들에게 좋은 말씀 한 마디 해주시지요.” 조 부회장은 언젠가 책에서 읽었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플라톤이 지은 ‘대화편’ 가운데 『향연』이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에서 유명한 희곡 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가 이런 얘기를 합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의 몸에 머리가 둘, 팔과 다리가 각각 네 개인 형태였다. 그러다 보니 다른 동물들은 그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고, 그 때문에 오만해진 인간들이 자꾸 신에게 도전하자 화가 난 제우스 신이 그런 인간을 반으로 쪼개버려서 현재와 같은 남자와 여자 둘로 분리된 인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라는. 물론 과학적으로 말도 안 되는 지극히 신화적, 상징적, 은유적인 표현이겠지요. 하지만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 이야기를 거꾸로 생각해보면, 우리 남자와 여자, 여자와 남자가 서로 뜻을 모아 하나로 힘을 합친다면 과거 제우스 신이 두려워했던, 그런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말이에요.” 그 말에 사람들은 숙연해졌다.

위기의 순간

선발대로 떠난 고미정 과장과 오성두 대리는 LA국제공항 환승구역에 있었다. “아! 이걸 어쩌지?” 중요한 뭔가를 빠뜨린 모양이었다. “다시 뒤져봐.” 오 대리는 다시 주머니를 뒤지고 메고 있던 백팩까지 탈탈 털어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안내방송에서는 탑승시각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내용을 내보내고 있었다. 초조해진 오 대리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그때 찰싹 소리가 났다. 고미정 과장이 오 대리의 목덜미를 때린 것이었다. “야! 오성두, 정신 차려! 이 비행기 못 타면 다음 비행기 타고 가면 돼! 티켓팅 비용? 걱정 마. 나 원월드(oneworld) 마일리지 많아. 어차피 다 써야 돼! 여권도 영사관 친구한테 부탁하면 해결할 수 있을 거야.”

1%의 다정함도 없었지만 고 과장의 말에서 묘한 힘이 느껴졌다. 넋을 놓고 있던 오 대리는 그 말에 이성을 찾고 인천공항에서부터 지금까지 거쳐 온 곳들을 되짚어 보았다. “허드슨 뉴스!” 오 대리의 외침에 고 과장이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20분 전쯤, 기내 잡지는 식상하다며 《보그》를 사다달라는 고 과장의 부탁을 받고 오 대리가 LA국제공항 면세구역에 있는 허드슨 뉴스라는 서점에 갔었다. 고 과장이 그걸 기억하고 재빨리 달려간 것이다. 잠시 후 오 대리 앞에 항공권을 사이에 낀 여권을 흔들어 보이며 고 과장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탑승구를 향해 내달렸다.

그날 밤 11시, 고 과장과 오 대리는 과달라하라의 리우플라자호텔의 라운지바 블루문에 앉았다. 오 대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과장님, 고마워요.” “뭐가요?” “솔직히 영교상사와 YG패션이 통합되고 저희 팀과 개발기획팀이 한 팀이 되어 같이 일해야 한다고 했을 때 팀원들의 불만이 대단했어요. 여자들이랑 무슨 일을 하겠냐면서요.” 오 대리의 말에 고 과장이 장난스레 대꾸했다. “우린 한강으로 뛰어들려고 했어요. 영교상사 아재들이랑 일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러나 오 대리는 웃지 않았다. “그런데 아까 제가 여권과 항공권을 잃어버려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과장님이 그러셨잖아요. 걱정하지 말라고, 티켓은 다시 끊으면 된다고. 그 말씀이 정말 큰 힘이 되었어요. 그 순간 얼마나 의지가 되었는지 몰라요. 그러면서 정신이 들어 허드슨 뉴스가 생각났어요. 전에는 영교상사의 고참들만 선배로 생각했고 남자들만 진정한 동료가 될 수 있다고 여겼는데… 제 생각이 틀렸습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