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 와비사비
베스 켐프턴 지음 | 윌북
매일매일, 와비사비 - 채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베스 켐프턴 지음
윌북 / 2019년 3월 / 238쪽 / 13,800원
와비사비란 무엇인가
일본에서 평생을 보낸다 하더라도 누군가 입 밖으로 와비사비라는 단어를 크게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할 수도 있다. 사전을 펼쳐 봐도 와비사비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다. ‘와비’라는 단어와 ‘사비’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은 길게 나와 있지만, 두 단어를 합한 ‘와비사비’는 없다. 와비사비는 문자가 아니라 사람들의 가슴과 마음에 산다. 그리고 일본인에게 와비사비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하면, 아마 대다수는 그 의미를 알아도 정확한 단어로 설명하지 못해 전전긍긍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 단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와비사비는 직관적 이해이며 사고방식이자 삶의 태도다. 천편일률적인 기계적 학습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와비사비를 터득한다. 와비사비의 지혜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우리의 언어에서 진정한 메시지는 말하지 않은 ‘행간’에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와비사비는 별개의 두 단어가 합쳐진 것이다. 두 단어 모두 미적인 가치관을 담고 있으며 문학과 문화,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와비(侘)는 단순함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자 물질적인 세상에서 떨어져 정신적 풍족함과 고요함을 누리는 것이다. 사비(寂)는 시간의 흐름과 관련이 있다. 모든 것이 자라고 시드는 방식이자, 세월이 흐르면서 그 외형이 변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두 개의 단어가 결합하여 와비사비가 되었을 때 그 의미는 더욱 확장되고 매혹적으로 바뀐다.
다도: 와비라는 단어의 기원을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다도 문화를 만나게 된다. 가루 형태의 녹차인 말차는 1191년이 되어서야 일본의 다도 문화에 등장했는데, 말차는 중국 송나라를 다녀온 일본 승려 에이사이가 들여왔다. 에이사이는 선불교 내 린자이 학파를 창시한 인물이다. 그는 차 씨앗을 교토 근처 우지를 포함한 세 곳에 나눠 뿌렸는데, 훗날 우지는 세계적인 수준의 차 재배지가 되었다.
15세기 승려이자 다도 장인 무라타 슈코는 차를 준비하고 마시는 행위를 통해 선불교의 교리를 성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는 오늘날까지도 다도 문화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이후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슈코의 다도를 계승했다. 한편 오카쿠라 가쿠조는 산문집 『차 이야기』에서 다도의 숭배는 “일상에 존재하는 더러운 현실들 가운데 아름다운 것을 숭배하는 …… 미학적 종교”가 되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이 단순한 미학은 16세기 다케노 조에 의해 한층 더 발전했다. 시인이었던 그는 차의 개념을 시로 표현했고, 차 마시는 공간을 자연의 요소들이 있는 공간으로 바꾸었다. 이는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차 스승이었던 센리큐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와비란 무엇인가?: ‘와비’는 ‘차분한 정취’라는 의미다. 본래 이 말의 뜻은 빈곤함, 불충분함, 쓸쓸함을 의미하는 ‘와비루(한탄하다, 슬퍼하다)’에서 왔다. 형용사는 ‘와비시(쓸쓸한, 고독한, 빈약한)’다. 모두 센리큐 시대 이전에 수백 년 동안 일본 문학에 사용되던 표현이었다. 와비는 단순함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을 깨달아 생긴 정서라고도 말할 수 있다. 온통 물질적인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발견하는 조용한 만족감이다. 궁극적으로 와비는 겸손함과 단순함, 검소함을 이해하고 평온함과 만족감으로 나아가려는 사고방식이자 태도다. 와비의 정서는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 이미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귀하게 여기고 겸손해하는 사고방식이다.
사비란 무엇인가: ‘사비’는 ‘고색창연함, 오래된 모습, 우아한 단순함’이라는 의미다. 한자는 ‘고요할 적’이다. 사비의 형용사인 사비시는 ‘쓸쓸한, 외로운, 적적한’의 의미다. 사비는 소중하게 정성껏 매만진 사물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손길이 아닌 시간이 만든 것이다. 사비는 세월이 흐르면서 정제되는 우아한 아름다움이다. 사비는 시간의 흐름이 물리적으로 사물에 배어 있는 방식과 관련이 있지만, 그 의미를 깊이 헤아려보면 우리가 보는 사물의 표면 아래 숨겨진 것을 보는 방식이기도 하다. 사비는 모든 것들이 성장하고 사멸하는 방식을 나타내며, 이러한 생명의 덧없음을 성찰할 때 문득 마음 한구석에 옅은 슬픔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사비의 아름다움은 과거와 연결되어 있는 우리 자신, 순환하는 생명, 죽음 같은 비애감을 느끼게 한다.
와비사비의 탄생: 사비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이 와비의 핵심이며, 둘은 수세대에 걸쳐 나란히 사용되었다. 와비사비가 주는 교훈을 더듬어보려면 몇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두 단어가 합쳐진 와비사비라는 용어가 하나의 개념으로 인식된 것은 불과 100여 년 전이며, 이 단어는 ‘일본인들의 철학의 근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다. 사람들이 항상 알고 있던 그 무엇에 붙여줄 이름이 필요했던 것이다. 와비사비는 어떤 물건 혹은 환경이 지닌 아름다움을 초월하는 것이자, 그 깊은 아름다움에 대한 반응이다. 와비사비는 오직 느낄 뿐, 만질 수 없다. 사람마다 세상을 다르게 경험했기 때문에 한 사람의 와비사비가 다른 사람의 와비사비와 같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진정한 아름다움의 본질을 접할 때 와비사비를 느낀다. 소박한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이런 느낌을 많이 받는다.
삶 속에 와비사비를: 삶의 어려운 숙제를 풀기 위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삶의 틀이 필요하다. 좀 더 천천히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삶도 우리 곁을 황급하게 스쳐 지나가지 않는다. 우리 정신을 맑게 해주고 늘 깨어 있게 하는 아름다움에 눈을 떠야 한다. 이런저런 평가와 완벽을 향한 끝없는 욕심은 이제 그만 내려놓으라고 스스로를 다독여야 한다. 자기 자신과 상대방을 바라보면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완벽하게 불완전한(Perfectly Imperfect) 보물을 응시해야 한다.
우리에게 간절히 필요한 이 모든 것들이 와비사비 철학에 담겨 있다. 와비사비 철학은 단순히 문제를 피상적으로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다.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준다. 와비사비는 우리에게 모자라도 만족하는 법을 알려준다. 와비사비는 고요함, 조화, 아름다움, 불완전함 등 귀중한 지혜의 보고다. 불완전함을 수용한다고 해서 삶의 수준이 낮아지거나 질이 떨어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완벽하게 불완전한, 독창적인 존재다. 간단히 말하면, 와비사비는 나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다. 와비사비는 최선을 다하라고 용기를 준다. 하지만 성취할 수 없는 완벽한 목표를 추구하느라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는다. 반드시 해야 한다고 여겼던 것들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와비사비는 편하고 느긋하게 삶을 즐길 수 있도록 부드럽게 우리를 다독인다. 아름다움은 가장 있을 법하지 않은 곳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며, 일상을 기쁘게 해주는 문턱을 만들어준다.
단순하고 아름답게
일본은 국토의 80%가 산과 숲, 들판, 농경지다. 따라서 도심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작은 건축물과 디자인을 만드는 데 통달했다. 하지만 대다수 일본인이 물건 하나 없는 집에서 살고 있을 거라는 착각은 버리길 바란다. 그렇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이 좋은 것도 아니다. 미니멀리즘이 많은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는 있지만, 미니멀리즘 또한 또 다른 형태의 완벽함이 될 수 있다. 자신을 자책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어쩌면 여러분도 나와 같은 사람인지 모른다. 미니멀리즘을 좋아하고 완벽하게 깔끔한 집을 꿈꾸지만 미니멀리즘의 엄격한 규율은 어쩐지 잘 맞지 않는다. 여러 이유들이 있을지 모른다. 아이들, 반려 동물들, 바쁜 라이프스타일, 앤티크 주전자에 대한 집착, 어지간한 동네 도서관보다 많은 책들……. 어쩌면 세를 살고 있어서 생활공간을 바꾸는 데 제약이 있을 수도 있다. 혹은 아늑한 집을 꾸미기에는 예산이 너무 빠듯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중 여러분 생각과 비슷하다고 느끼는 점이 있다면, ‘마음이 담긴 단순함’이 답이다. 나에게 ‘마음이 담긴 단순함’이란 집을 강박적으로 미니멀하게 꾸미거나 물건을 비우기 위해 피곤할 정도로 노력하지 않고도 잡동사니를 정리해서 사랑스러운 공간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공간을 정돈하고 자신을 위한 곳으로 만드는 일이며, 집을 아늑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여전히 사람 사는 느낌을 물씬 주는 곳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사는 곳은 살아가는 방식과 같다: ‘마음이 담긴 단순함’의 미덕은 집의 크기나 예산에 상관없이 어떤 주거지도 아름다운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집은 생활하는 공간이다. 생활은 완벽하게 깨끗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좋은 소식은 혼돈의 생활을 아주 약간만 수정하면 꽤 많은 변화를 줄 수 있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이미 이런 방식으로 아늑한 공간을 만들고 있다. 약간의 시간과 노력만 있으면 우리 집도 정말 중요한 것만 남겨둔 안식처가 될 수 있다. 차를 마시는 전통적 공간, 다실은 와비사비의 전형이다. 다실에서 우리는 깨끗하고 단순하며 불필요한 것이 없는 공간을 상상할 수 있다.
이런 공간을 만들려면 무엇을 남길지, 무엇을 버릴지, 무엇을 보여줄지, 무엇을 보관할지, 무엇을 고칠지, 무엇을 소중히 간직할지를 정해야 한다. 완벽한 시간이 올 때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집을 단장할 돈이 생기기를, 자녀가 집을 떠날 시기가 오기를, 혹은 서랍과 그릇 수납장을 정리할 시간이 생기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저 오늘, 지금 당장, 바로 눈앞에 있는 공간에서 시작하면 된다. 무슨 규칙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자신만의 방식대로 공간을 정리하기 위한 생각과 질문을 해보면 된다.
와비사비 정서가 깃든 집: 나는 삶의 중요한 변화를 바라는 이들에게 늘 물건 정리를 우선순위에 두라고 조언한다. 그들은 물건을 많이 비울수록 부정적인 사고방식, 불안한 감정, 정신없이 바쁜 생활, 과거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한 집착, 진정한 자신의 모습과 관계없는 삶에 대한 열망 등이 비워지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바로 이 공간에 와비사비가 머문다.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이 완벽하게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자신의 이미지를 과대 포장하기 위한 ‘물건’도 덜 필요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단순하게 충만한 집은 나 자신과 가족, 친구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한 집이다. 이를 위해서는 내가 사랑하는 공간, 미적인 영감을 주는 공간으로 집을 바꾸면 된다. 나의 판단을 한쪽으로 치워두고, 이미 가진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에만 오롯이 집중해보자. 마음이 담긴 단순함은 충만함을 느끼게 해준다. 와비사비에 영감을 받은 집은 손님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가족의 삶을 잘 가꿔주는 편안한 공간이다. 충동적으로 구매한 새 물건들이 아니라 애정과 추억이 스민 소중한 것들이 있는 공간이다. 옳고 그름은 없다. 완벽하게 불완전한 방식으로, 꾸미지 않고도 꾸미는 공간이다.
자연과 더불어
와비사비, 그리고 자연: 와비사비는 인간을 자연에서 분리하지 않고 자연의 일부로 보는 관점과 맥락을 함께한다. 그런데 와비사비와 자연은 너무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이 두 단어의 연관성을 찾으려고 애쓰다 보면 오히려 둘 사이의 관계가 흐릿하고 모호하게 보인다. 따라서 자연과 와비사비의 관계를 좀 더 명확하게 보려면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초점과 우리의 시야를 다시 조정해야 한다.
본질적으로 와비사비를 경험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진정한 자연의 아름다움에 직관적으로 반응한다는 의미다. 모든 것이 덧없고, 불완전하고, 미완의 상태임을 일깨워주는 그런 아름다움이다. 종종 자연에 있을 때 와비사비를 느끼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자연에서 보내는 시간에는 강력한 힘이 있다. 자연에 있노라면 우리가 기적의 일부가 된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처리해야 할 업무들, 집안일,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들에서 잠시 벗어나 와비사비를 거울처럼 비춰주는 생명의 장엄함을 바라보노라면, 그 거울 속에서 설핏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된다.
자연은 내 머리 모양이 어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산은 내 직책이 무언지에 관심 없다. 강물은 내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가 몇 명인지, 월급이 얼마인지, 내가 얼마나 인기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 아무 관심 없이 그저 무심히 흐른다. 실수를 저질렀건 말건 꽃은 활짝 핀다. 자연은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준다. 와비사비를 경험하는 능력은 이러한 진실의 순간들에 맞닿게 해준다.
계절의 순환을 따라: 인공 빛으로 낮을 늘리고, 전자 장치에서 나오는 청색광이 신체의 바이오리듬을 방해하고, 오늘은 그저 또 다른 평일이라는 생각으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자신을 힘겹게 밀어붙이는 현대의 삶은 자연의 징표들을 늘 가로막는다. 몸이 이제는 쉬어야 할 때라고 혹은 나가서 여름날의 햇볕을 쬐어야 할 때라고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신경 쓰지 않고 무리하게 일을 한다. 그러고는 왜 몸이 이렇게 아픈지 의아해한다. 계절은 우리에게 그렇게 힘겹게 밀어붙이지 않아도 된다고 규칙적으로 상기시켜주곤 한다. 힘을 들일 때가 있으면 쉴 때도 있어야 한다. 집중해야 할 시간도 필요하고 꿈을 꿀 시간도 필요하다. 밀물이 있으면 썰물도 있다. 피기도 하고 시들기도 한다. 자연은 이렇듯 대비를 이룬다. 와비사비는 우리를 자연의 주기에 맞춰준다. 계절의 순환에, 올해 찾아온 지금 이 계절에, 오늘 하루 중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게 해준다.
받아들임, 내려놓음
모든 것은 변한다: 우리의 삶, 인간관계, 일, 건강, 재정, 태도, 관심, 기회 등은 늘 변한다. 때론 그 변화가 돌풍이 불어 닥치듯 강렬하고 빠르게 지나가기도 하고,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드는 수선화처럼 조용하고 느리게 찾아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아주 가까이 그 변화를 관찰해야 한다. 영원히 변치 않고 머무는 것은 없다. 인간도 그렇다. 와비사비는 우리에게 덧없고 무상한 것이 모든 자연의 본질임을 일깨워준다. 변화는 피할 수 없으며, 과거나 현재를 붙잡으려 애쓰는 행위는 부질없고 괴롭다.
나는 친구의 집에서 붉은 쌀과 니모노(연한 육수에 채소를 조려서 만드는 일본 음식)를 먹으며 세월의 무상함을 이야기했다. 친구는 정원에 조성된 작은 대나무 숲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서도 변화는 보여. 대나무는 늘 조금씩 자라고 있어. 환경의 변화에도 아주 민감하지. 대나무는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있지만 유연해. 바람이 불면 버티지 않거든. 그냥 바람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면서 바람에 따라 움직여. 그 와중에도 숲은 계속 자라고. 이렇게 지진이 잦은 땅에 있는 건물들을 생각해봐. 지진에 살아남은 건물들은 땅이 요동칠 때 그 흐름을 따라 같이 움직인 건물들이야.”
모든 것은 변한다. 정리해고, 상실, 뜻밖의 사건, 질병 등을 겪게 되면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단단하게 버티는 태도는 오히려 우리를 약하게 만든다. 상황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을 때 갑작스러운 일들이 닥치면 쓰러질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는 상황을 받아들인다면 (혹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현실적으로 인식한다면) 넘어지더라도 완전히 쓰러지지 않고 금방 회복할 수 있다. 유연할수록 강하다.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대나무처럼.
불완전함에 감사하기: 어느 저녁, 히다다카야마에 살던 나는 집 모퉁이를 돌아 유토피아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곳은 단돈 420엔(약 4,300원)이면 오롯이 나만의 시간에 푹 빠질 수 있는 대중목욕탕이었다. 목욕탕 내부는 습기가 자욱했고 양 옆으로 몸을 씻을 수 있는 공간이 나란히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아주 작은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플라스틱 대야에 물을 받아 몸을 씻는다.
머리를 감는 동안에는 보려 하지 않아도 목욕탕 안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들 몸매나 나이, 기타 남의 눈을 의식할 만한 요소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조용한 자신감을 드러내며 목욕탕을 걸어 다닌다. 따뜻한 욕탕에서 쑤시는 관절을 푸는 노인도 있다. 수다를 떠는 두 친구도 있다. 어린 딸을 데리고 온 어머니도 있다. 이 공공장소에서 목욕을 하며 자라온 저 어린 소녀들의 자신감은 어디에서 비롯된 건지 문득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