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63가지 심리실험 - 뇌과학편
이케가야 유지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63가지 심리실험 - 뇌과학편
이케가야 유지 지음
사람과나무사이 / 2018년 12월 / 404쪽 / 17,500원
사랑에 빠지면 왜 동공이 커질까?
“The eyes are the windows of the mind.”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의미의 영어 속담이다. 일본에도 이와 비슷한 뜻을 지닌 속담이 있는데, “눈은 입만큼 말한다”가 그것이다. 이처럼 눈을 중시하는 경향은 모든 나라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것 같다.
나는 누군가와 대화할 때 무의식중에 상대방의 눈을 자주 바라본다. 말이나 어조만으로는 알아차릴 수 없는 마음을 살피기 위해서다. 갓난아기는 엄마나 아빠에게 배우지 않아도 상대방의 눈을 바라본다. 그러고 보면 눈을 보는 행위는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성질인 모양이다.
영어 속담 의미대로, 우리 눈에는 실제로 마음이 투영된다. 그야말로 눈은 마음의 창인 셈이다. 시선(視線)이라는 단어에 대해 잠깐 생각해보자. 사전을 찾아보면 시선은 ‘눈이 가는 길’, 또는 ‘눈의 방향’으로 정의돼 있다. 앞에서 언급한 그 유명한 영어 속담대로, 눈은 마음의 창이므로 시선은 마음이 가는 길, 또는 마음의 방향이 되는 셈이다. 아무에게도 교육받지 않았으나 갓난아기가 엄마, 아빠의 눈을 보고, 사람이 누군가와 대화할 때 상대방의 눈을 무의식중에 바라보는 것도 모두 마음이 ‘눈’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이다.
대화하는 동안 사람들은 상대방의 눈을 본다. 그리고 보아야 한다. 눈은 마음이 가는 길이고, 눈을 통해 마음이 전달되므로 아이 콘택트(Eye Contact), 즉 밀도 있는 시선 교환 없이는 제대로 소통하기 어려우며 관계 향상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과 자연스럽게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불안하게 눈빛이 흔들리는 사람은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며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다’는 의심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
자, 이제 눈의 특성과 구조에 대해 간략히 짚고 넘어가자. 흔히 우리가 ‘눈매’라고 부르는 눈 주위의 상태는 나의 감정을 전달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파악하려고 할 때 중요한 단서로 사용할 수 있다. 우리 눈 주위는 ‘눈둘레근(Orbicularis Oculi)’이라는 이름을 가진, 의식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제대로근 (Involuntary Muscle = 불수의근)’이 관장한다. 어떤 사람이 필사적으로 억지웃음을 지어도 ‘눈이 웃고 있지 않다’고 느끼거나 ‘차가운 눈’이라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것도 그래서다.
우리 눈은 수많은 정보를 내보낸다. 그런데 우리는 눈동자가 내보내는 정보를 까맣게 잊고 사는 경향이 있다. 좀 더 전문적으로 말하자면, ‘동공 지름(The Diameter of the Pupils)’이다. 유럽인 중에는 홍채가 푸른 사람이 적지 않다. 눈동자가 푸른 사람은 동공 지름이 커서 상대적으로 잘 보인다. 검정색이나 갈색 동공이 일반적인 아시아인들 사이에서도 동공 지름은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동공이 큰 사람은 동공이 작은 사람과 비교해 훨씬 생기 넘쳐 보인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은 눈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운동에 몰입할 때나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는 교감신경이 우위에 선다. 교감신경이 우위에 서면 자연스럽게 동공이 커진다.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이나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 보이는 것도 그래서다. 이 ‘동공 문제’를 먼저 지적하고 나선 이는 재미있게도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는 일이 일상인 안과 전문의나 세계적 권위를 가진 안과학 박사가 아니라 심리학자였다.
시카고대학교 심리학자 폴트 헤스(Polt Hess) 교수가 바로 그다. 1950년대에 이미 헤스 교수는 동공 지름 측정 장치를 개발하는 데 성 공했고, 그 장치를 활용하여 본격적으로 실험했다. 그는 여러 번의 실험을 통해 참여자가 좋아하는 대상을 보여주면 순간적으로 동공이 확장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한 그는 연구에서 암산할 때도 동공이 커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람이 암산 등을 하느라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쓸 때 발휘되는 주의력과 집중력이 동공에 오롯이 투영된다는 것이다. 헤스 교수는 실험을 통해 실제로 계산이 까다로워질수록 동공 확장률이 증가하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후 헤스 교수의 동공 관련 실험에 자극받은 하버드대학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 교수가 도전장을 던졌다. 카너먼 교수가 이끄는 하버드대학교 연구팀은 피실험자에게 여러 자리 숫자를 들려주고 2초 후 암기하게 하는 ‘단기기억 실험’을 했다. 실험 결과, 그들은 기억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동안 지속해서 동공이 확장해 있는 반면, 정답을 말한 뒤에는 동공이 원래 크기로 줄어든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들은 외워야 하는 숫자의 자릿수가 길어질수록 그에 비례하여 동공이 확장하는 비율이 높아진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교 도너 크나펜(Donner Knapen) 교수 연구팀은 뭔가 의사 결정을 내리려고 고심 중인 사람의 동공 지름을 측정해 그 결과를 《미국 과학원 회보》에 실었다. 그들은 화면에 나타나는 영상에 줄무늬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간단한 실험만으로 대답하기 1, 2초 전 피실험자의 동공이 눈에 띄게 커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흥미롭게도, 피실험자가 ‘줄무늬가 있다’고 대답할 때가 ‘줄무늬가 없다’고 대답할 때보다 동공이 훨씬 커졌다. 이는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답변이 아닌 긍정적인 대답을 하려고 적절한 말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 동공이 더 크고 빛나 보인다는 의미다.
고전으로 자리 잡은 영화 <카사블랑카(Casablanca, 1942)>를 보면 주연을 맡은 험프리 보가트(Humphrey Bogart)가 “Here’s lookin’ at you, kid.”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미국 영화 명대사 100’ 중 5위에 빛나는 명대사다. 한데, 원래 대본에는 이 말이 없었다고 한다. 배우의 즉흥 연기, 즉 애드리브(Ad Lib)였던 셈이다. 일본에서는 이 주옥같은 명대사가 “그대 눈동자에 건배”라는 말로 번역되었다. 박수를 보내고 싶은 번역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원문보다 번역 문장에 훨씬 매력을 느낀다. 마음이 긍정적이라면 자연스럽게 눈동자가 빛날 테니 말이다.
많이 걸으면 기억력이 좋아지는 이유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모로코 출신 이슬람 여행가 이븐 바투타의 『이븐 바투타 여행기』, 『서유기』의 모태가 된 현장의 『대당서역기』 등 나라와 시대를 막론하고 옛사람들은 수많은 기행문을 남겼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태생적으로 걷기를 좋아하는 생물인 것 같다. 물론 현대인 중에는 걸으면 다리도 아프고 발도 아프고, 이래저래 피곤해져서 싫다며 걷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해맑은 얼굴로 아장아장 걷는 아기를 보면 두 발로 서서 걸어 다니는 행위가 사람에게 본질적 쾌감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산책은 마음 건강뿐 아니라 신체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된다. 게다가 최근 산책이 뇌에 미치는 영향이 속속 밝혀지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클레이먼(Kleiman) 교수 연구팀의 실험이 대표적이다. 연구팀은 이 실험을 논문으로 정리하여 《미국 과학원 회보》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55~80세 남녀 60명에게 하루 40분 동안 주 3회 산책하게 한 다음, 뇌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조사했다. 그로부터 반년 후, 산책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은 해마 크기가 평균 2퍼센트 남짓 확대되었고 기억력도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해마 증가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사람일수록 기억력 시험에서도 좋은 성적을 얻었다.
산책으로 체내의 ‘뇌유래신경영양인자’ 분비량이 증가하는데, 이 물질이 기억력 증강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한다. 걷기의 신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애초에 걷기라는 행위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족보행 로봇을 제작해보면 이 점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이족보행으로 체중을 떠받치는 설계 자체가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중심이 불안정해 까딱하면 넘어져서 볼썽사납게 바닥에 나뒹굴거나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버둥거린다.
그렇다면 우리 뇌는 보행 중 어느 정도로 정교하게 두 다리의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 수많은 신경 과학자가 이 수수께끼 풀이에 도전했다. 그러나 보행을 실행하는 정교한 신경 메커니즘은 아직 해명되지 못했다. 이 난제에 뜻밖의 곳에서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선발 투수로 나섰던 신경과학이 아니라 구원투수로 등판해 멋지게 공을 던진 시스템 공학 연구자가 실마리를 찾아냈다. 답은 뇌가 아니라 ‘다리’에 있었다.
1990년, 캐나다의 사이먼 프레이저대학교(Simon Fraser University) 소속 맥기어(McGuire)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이 동력 장치가 없는 컴퍼스 모양의 이족보행기가 넘어지지 않고 경사면을 걸어서 내려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수동 보행이라 부르는 현상이다. 이후 일본 나고야공업대학교 후지모토 히데오 교수 연구팀이 한층 정교해진 보행 로봇을 디자인했다. 잠시 책을 덮고 인터넷을 검색해 실제로 움직이는 동영상을 감상하기 바란다. 그것은 사람의 보행운동을 빼닮았다.
컴퓨터 연산은 물론 모터조차 사용하지 않는 장난감이 뚜벅뚜벅 걸어 다니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진다. 골격과 관절 모양이 적절하면 중력에 몸을 맡기기만 해도 진동으로 토크(Torque: 물체에 작용하여 물체의 회전을 촉발하는 물리량으로, ‘비틀림 모멘트’라 부르기도 한다)가 발생해 안정된 보행을 실현할 수 있다. 즉, 보행 균형은 뇌 신경 회로에서 생성되지 않고 다리의 형태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셈이다. 고도의 구동력과 제어장치가 필요하지 않은 보행운동의 이점은 효율적인 연비에 있다. 그러므로 장시간 걸어도 좀처럼 지치지 않는다.
인류는 보행에 적합한 다리 골격을 완성함으로써 강력한 이동수단을 손에 넣게 된 셈이다. 실제 사람의 이동 범위는 야생동물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하게 넓다. 인간과 비슷한 영장류라는 침팬지조차 태어난 지역에서 평생을 마치는 게 일반적이다 효과적인 직립 이족보행을 시작한 현생 인류는 6만 년 전 아프리카 대륙을 나와 4만 년 전 머나먼 북극권까지 거주지를 확장하고, 지구 구석구석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 기행문이라는 예술작품까지 창작해냈다. 모두 사람의 다리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러 의미에서 동물계에서도 인간은 손에 꼽을 정도로 아름다운 각선미를 타고나는 생물이다. 갑자기 평소 귀하게 여겨본 적이 별로 없는 튼튼한 내 두 다리가 오늘따라 왠지 고맙고 대견하게 여겨진다.
고대 인류가 풍요로움을 포기하고 사냥 대신 농경을 선택한 이유
‘여유로움’이란 무엇일까? 넉넉한 재산이 여유로움의 지표일까? 소유물의 양만으로 여유로운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하기 어렵다. 사람은 날마다 녹록지 않은 현실에 얽매여 아등바등 일하며 산다. 왜 그토록 힘들고 고통스럽게 일하며 살아야 할까? 노동의 목적 중 하나는 일종의 여유로움을 얻기 위해 서다. 바로 이 부분에 실마리가 숨어 있다.
노동의 정의나 의의에 대해 공부하고 고심하다 보면 어느 순간 오묘한 깨달음을 얻게 될 때가 있다. 오늘날 노동시간에는 상한선이 정해져 있다. 일본의 노동기준법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하루 8시간을 초과해 일해서는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야근이나 휴일 근무를 하더라도 주당 노동시간이 45시간을 넘기면 안 된다. 즉, 1일 노동시간은 평균 10~11시간 정도를 상한선으로 정해놓았다. 일본에서는 이를 두고 ‘36 협정’이라고 부른다. 법률에서 정해진 노동시간이 제도로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새록새록 야릇한 감정이 샘솟는다.
원시 인류는 사냥으로 생활했다. 인류 전 역사를 통틀어 99퍼센트가 넘는 대부분의 시대는 수렵ㆍ채집 생활로 채워졌다. 당시 노동시간은 3시간 남짓이었는데, 그 정도만 일해도 일용할 양식을 충분히 얻을 수 있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소박한 생활이지만, 야근이 필수가 되어 저녁이 없는 삶을 사는 현대 직장인들에게 묻는다면 어느 쪽을 여유로운 생활이라고 답할까?
농업은 우리 인류의 생활방식을 획기적으로 뒤바꾸어놓는 계기로 작용했다. ‘농업(農業)’을 나타내는 한자를 찬찬히 뜯어보자. 농사 농(農)과 풍년 풍(豊)이라는 글자는 서로 묘하게 닮은꼴이다. 실제로, 농경은 인류에게 풍요로운 자연의 은혜를 선사했고, 인류는 농경으로 정착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농경 시대가 막을 올리며 노동시간은 수렵ㆍ채집 시대보다 길어졌다.
고대의 인류는 왜 사냥을 멈추고 땅을 일구기 시작했을까? 충분한 영양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을까? 상식 수준에서 생각하면 답을 찾기 어렵다. 농경을 시작하면서 평균수명은 1~2년 정도 짧아졌고, 키는 10센티미터 이상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원시 농경기술로는 수확량이 적었고, 품종 개량도 이루어지지 않아 영양분이 부족하거나 수확량이 적은 작물밖에 재배할 수 없었다. 농경을 시작한 결과, 수렵ㆍ채집 시대보다 영양 상태가 더 열악해졌다. 그런데도 1만여 년 전 미리 서로 짜기라도 한 듯 세계 곳곳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농경이 시작되었다. 왜 고대 인류는 편한 수렵ㆍ채집 생활을 버리고 고된 농사일을 시작해야 했을까? 학자들이 너무 많은 가설을 제시하여 그중 어느 한 가지를 정답이라고 내놓을 수는 없다.
그중 한 가지 유력한 학설을 살펴보자. 오랜 옛날, 인도네시아에서 엄청난 규모의 화산 폭발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화산재가 지구의 상당 부분을 뒤덮었고, 이후 1,000년 넘게 한랭기가 이어졌다. 그 여파로 수많은 동식물이 멸종했고, 수렵ㆍ채집으로 얻을 수 있는 식량은 바닥을 드러냈다. 그런 최악의 환경 속에서 인간은 울며 겨자 먹기로 어쩔 수 없이 농경을 시작해야 했다는 주장이다. 영양가가 낮더라도 농사를 지어서 수확한 작물을 먹고 살아야 했던 것이다. 당시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농경 이외의 다른 마땅한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일 수 있다.
다행히도 농경에는 기대하지 않은 이점이 있었다. 농작물, 특히 곡물은 날고기와 달리 저장성이 좋아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식량 비축으로 악천후와 천재지변 등 예기치 못한 재난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사람들은 다시 수렵ㆍ채집 생활로 돌아가지 않았다. 늘어난 노동시간에 합당한 대가를 얻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처럼 종의 보존을 위한 선택이 ‘여유로움’의 원점이 되었다고 추정한다. 풍요로움에서 여유로움이 나왔다. 살림살이가 곧바로 나아지지는 않더라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손을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 문제가 없다. 다시 말해 언젠가 찾아올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여유로움을 갈망하는 형태로 우리 인류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았을까.
우리 인간의 몸 구조에 눈을 돌려보면 허점투성이에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면역세포나 정자는 대부분 사용되지 않고 버려진다. 어쩌면 우리 뇌의 능력도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고 있을지 모른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일종의 ‘낭비’도 생물이 채용하는 ‘여유로움’의 여러 수단 중 하나다.
유비무환, 즉, “준비가 철저하면 근심이 없다”는 옛말이 있다. 사람은 여유로움을 얻기 위해 노동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많이, 너무 오래 일한다. 노동법이라는 기묘한 규칙을 정해두고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것도 그런 지나침과 부작용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여러모로 참 불가사의한 생물이 아닐 수 없다.
비슷한 정도의 맛이라도 새롭게 발견한 맛이 더 많은 쾌감을 주는 이유
늘 하던 방법대로 해서 성공하는 것보다 새로운 전략으로 성공하면 뇌의 쾌감이 커진다. 이 주장을 실험으로 증명한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사이언스》에 발표된 프랑스 국립 보건의학연구소의 쾨슐랭(Koechlin) 박사 연구팀의 논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