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공격자들
안드레아 브랜트 지음 | 영인미디어
소심한 공격자들
안드레아 브랜트 지음
영인미디어 / 2018년 11월 / 316쪽 / 16,000원
소심한 공격자들에 대하여
수동적 공격이란 무엇인가?
루시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정말 싫다. 그녀는 어머니가 몇 번이나 소리쳐 깨우지만 그녀는 못들은 척 하면서 이불 속에서 꾸물거린다. 이런 소소한 싸움을 끝내려고 루시의 어머니는 새로운 방침을 정한다. 그녀는 루시에게 이제부터 한 번만 깨울 것이라 말한다. 만약 그때 일어나지 않으면 루시는 알아서 학교에 가야 한다. 다음 날 아침, 루시는 어머니가 깨우는 소리에 일단 일어난다. 하지만 그녀는 가족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하나뿐인 욕실에 양치하고 세수하러 들어가서 온갖 늑장을 부린다. 그녀가 욕실 문을 열고 나오면 가족들이 짜증스런 얼굴로 서 있다. 그들도 시간에 맞추어 준비해야 하는데 욕실을 사용할 수 없어 짜증이 나 있다. “엄마가 하라는 대로 했잖아요! 아직 잠이 덜 깨서 조금 느린 걸 가지고….” 루시는 하품을 하면서 퉁명스럽게 말한다.
루시의 행동이 수동적 공격에 대해 말하는 것을 살펴보자. 온화한 형태의 소심한 수동적 공격 행동은 우리가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어렵지 않게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겉으로 ‘Yes’를 말하지만 그것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우리 감정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준다.
여기에는 수동적 공격의 핵심 요소인 분노가 빠져있다. 루시는 어머니가 아침에 깨울 때마다 조금씩 짜증이 났다. 그녀는 어머니가 언성을 높이는 동안 겉으로는 차분함을 유지했다. 마뜩찮은 상사로부터 받은 지시를 메일 수신 상자 제일 밑에 두는 사무실 직원이나 마트에 갈 때 아내가 원하는 식품을 언제나 잊어버리는 남편 또한 다르지 않다. 이런 행동의 이면에는 분노가 깔려있다.
수천 명의 환자들과 심리 상담 경험을 가진 심리학자로서 내가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애초에 나쁜 씨앗은 없다. 다시 말해, 나쁜 씨앗, 나쁜 아이, 나쁜 사람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수동 공격적으로 행동한다고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행동 이면에 깔려 있는 분노 역시 그렇다. 나는 수동 공격의 사례를 루시처럼 어린이나 사춘기 아이를 선택했다. 왜냐하면 수동 공격이 대개 인간의 발달 단계에서 뿌리를 내리기 때문이다.
그것이 시작된 지점이 어디일까?
수동 공격은 사람들이 자신은 힘이 없다고 생각할 때, 혹은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 나쁜 결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 때 사용하는 대응 방식이다. 상대방과 갈등이 생길 수도 있고 상대방을 잃을 수도 있다. 따라서 수동 공격의 뿌리가 되는 행동을 어린 시절에서 찾는 것은 당연하다.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아이들에게는 삶의 많은 측면을 통제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본적인 의식주를 부모나 후견인에게 의존한다. 우리는 법에 따른 교육을 받기 위해 학교를 다녀야 한다. 그곳에서의 시간은 다소 획일적이다. 아이들은 부모나 후견인이 자신들의 물리적인 욕구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것을 안다. 그들의 안정감, 애정이 담긴 돌봄과 배려, 그리고 신뢰하는 법을 배우고 애정을 공유한다. 집과 학교를 오가며 그들은 능력과 자신감을 발달시킨다. 그들은 보살핌을 받으며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이것이 보편적인 경험은 아니다. 가족 내의 어떤 관계는 수동 공격을 조장하기도 하지만 직접 수동 공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공격 + 수동성 = 수동적 공격성
부모 중 한쪽이 지배적이고 다른 한쪽이 복종적이면 아이들은 불가피하게 거의 수동 공격적 성향을 발달시킬 것이다. “이건 너의 아버지한테는 비밀이야.” 수동 공격성을 가진 배우자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아버지 몰래 해주며 이렇게 말한다. 아이는 힘이 있거나 변덕스러운 대상은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비밀로 하면 괜찮다는 것을 학습한다.
거의 불가피하게 지배적인 부모를 향한 분노감과 적대감이 발생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복종적인 부모의 부정직한 소통을 암묵적으로 따라할지도 모른다. 수동 공격성을 가진 아이가 지배적인 부모를 향해 가지고 있는 분노와 복수심은 권위 있는 인물을 대할 때 무의식적 패턴으로 나타날지 모른다. 더 나이 많은 형제자매, 친척, 그리고 친구를 통해 수동 공격적 행동에 역할 모델이 될지도 모른다. 부정적 감정을 숨기는 사회적 문화 또한 여기에 일조한다.
숨겨진 분노 인식하기
분노는 나쁜 것이 아니고 당신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수동적 공격 행동을 극복하고 이해함에 있어 첫 번째 핵심은 분노가 건강하고 정상적인 감정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분노는 안전하고 효율적인 삶의 항해에 필수적인 도구이다. 그것을 적절히 사용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분노에 대해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제한적 믿음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작은 분노라도 느끼면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답을 알려주는 어린 시절 경험을 들여다보기를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혹은 우리는 자신이 화가 나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만약 이런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한쪽으로 제쳐두고 열린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여기에 분노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이 있다.
통념: 당신은 착한 사람이어야 한다. 아니면,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 당신이 언제나 착하다면 사람들은 당신이 진짜 뭘 생각하는지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할 수도 있다.
통념: 분노는 위험하다. 당신은 자제력을 잃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힐 것이다. 혹은, 나중에 후회할 말이나 행동을 할 것이다.실제: 만약 분노에 대응하는 방법을 배운다면 당신은 그 위험을 없앨 수 있다. 하지만 분노가 쌓이도록 놓아두면 참다가 결국 폭발할 가능성이 더 높다.
분노가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통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분노를 느끼면 언제나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폭발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 문화는 ‘선함’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에게, 조 삼촌에게, 동생 피터에게 잘하라.”는 말을 듣는다.
수동 공격의 회로에 갇힌 사람들은 착하지 않으면 아무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들은 사랑받고 소속되기를 필사적으로 원한다. 그것이 그들의 파트너에게 화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이다. 그들은 파트너가 자신을 떠나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어떤 분노나 갈등이 관계의 단절로 이어질까봐 두려워한다.
여기서 나는 분노야말로 친밀함으로 통하는 문을 여는 열쇠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분노를 느끼고 그것의 메시지를 평가하는 것이 가능해질 때 행복감과 사랑받는 느낌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중요한 정보를 알게 된다. 이 정보를 파트너와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상처에 취약한 우리 모습을 상대방에게 노출시킨다. 그것은 위험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방이 우리를 더 깊이 알도록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너무 많은 관계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사랑에 빠진다. 현실은 때로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직 그것만이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사랑하게 하는 길이자 상대방의 진정한 자아를 사랑하는 길이다.
당신의 몸에 귀를 기울여라
감정은 처리되어 해소될 때까지 우리 몸에 머무른다
수동 공격성의 회로에 갇힌 사람이 감정에 대해 보이는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은 그것을 보이지 않도록 꾹꾹 누르는 것이다. 만약 인간의 정신이 터널처럼 되어 있어 버려진 감정이 무해하게 다른 쪽 끝으로 슬며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 정신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이 부풀기만 하는 봉지에 더 가깝다. 당신이 감정을 탐색하고 그것의 메시지를 정확히 회수하여 내보낼 때까지 그것은 봉지에 남아 있다. 어떤 사람들, 특히 소심한 공격의 성격적 특성을 가진 사람들의 봉지는 꽤 부풀어 있을 수 있다.
신체에 물리적인 상처가 생길 때 일련의 직접적 치료 단계가 있다. 손가락을 베였다고 가정해보자. 혈관이 출혈량을 줄이기 위해 수축한다. 혈소판과 응고 단백질이 제일 먼저 반응하며 상처를 신체의 나머지 부분으로부터 봉쇄한다. 다음으로 백혈구가 세균이나 독성 물질의 침범을 물리치기 위해 빠르게 달려온다. 상처는 한동안 아프다. 하지만 곧 새살이 돋는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의 흉터마저도 사라진다.
우리 정신도 다르지 않다. 신체처럼 정신도 아픈 곳을 치료해야 한다. 상처가 곪으면 곪을수록 해로움이 더 크다. 살면서 비슷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해묵은 감정이 모습을 드러내며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고통을 안겨준다. 감정은 치유를 원한다. 우리가 그것을 누르고 있는 한 그것은 계속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다.
치유 과정에서 중요한 첫 단계는 상처, 특히 분노가 하는 말이 들릴 때까지 오랫동안 함께 앉아 있는 것이다. 당신이 그 상처와 함께 있지 않으면 그 감정은 다시 돌아와 당신을 고통스럽게 하고 당신이 이루려고 노력하는 모든 관계에 방해 공작을 펼칠 것이다. 당신은 원래 상처를 유발한 상황을 재현하는 선택을 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학대하는 부모가 있었던 사람이라면 자신을 학대하는 파트너에게 연이어 끌리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서로 감정을 표현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것이 안전한 가정을 이루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런 가정에서의 아이들은 부모가 어떻게 느끼고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애쓰지 않는다. 분노나 감정을 억압하는 양육 스타일은 아이들로 하여금 억눌린 감정으로 부풀어있는 정신적인 봉지를 그대로 가지고 성인이 되게 한다. 더 최악은 그들이 자신의 분노를 처리하는 법과 그들이 학습한 것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런 짐을 떠안고 성인이 된 사람들을 위한 희소식은 치유를 시작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가 여전히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인체는 물리적 상처의 흉터를 견디는 데 그치지 않고 분노, 두려움, 슬픔 같은 경험 또한 기록한다. 인체 감각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감정을 경험함으로 우리는 회복할 수 있고 과거를 재설정하여 그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인체는 정보의 보고이다. 그것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인체에 정확히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감정에 접근하기 위한 새로운 습관을 형성할 수 있다. 새로운 전략이 우리 삶을 지배해 왔을지 모르는 수동 공격적 패턴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것이다.
이것의 핵심은 ‘현재에 집중하기’이다. 우리가 경험의 진실을 포용하도록 도움을 준다. 분노 그리고 다른 고통스러운 감정을 포함하여 말이다. ‘현재에 집중하기’ 기술은 인체와 그것의 감각을 좀 더 풍요로운 내적 삶으로 들어가는 열쇠로 이용하는 것이다. 시간을 가지고, ‘현재 집중하기’ 훈련을 하면 이용 가능한 내적인 정보를 점점 더 많이 얻게 될 것이다.
? 인체 감각과 근육 긴장
? 정서와 기분
? 생각과 믿음
? 기억과 정신 이미지
? 건강과 판단
? 충동과 욕구
이것이 좀 더 솔직하고 만족스러운 삶으로 통하는 길이자 수동 공격성의 감옥의 문을 열 수 있는 핵심 열쇠이다.
‘현재에 집중하기’는 무엇일까?
‘현재에 집중하기’ 테크닉은 의도적으로 현재의 초점을 맞추는 행동이다. 즉, 현재 있는 곳과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비록 인간이기에 우리 마음이 자주 과거나 미래로 흘러간다고 해도 ‘현재 집중하기’를 행하고 있을 때는 오직 현재와 있다. 이것은 순간이라는 강렬한 지점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은 어떤 것에도 정신을 팔거나 마음이 산만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현재에 집중하기’ 기술의 또 다른 요소는 우리 생각과 감정을 판단하지 않고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감정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현재에서 딴 데로 정신을 팔게 하는 반응을 피한다. 이를테면 ‘현재에 집중하기(순간에 집중하기)’라는 테크닉이 있는데 이 테크닉은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현재에 집중하는 기술로 스님들이 도를 닦는 과정을 연상하면 된다.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왜 느끼는가?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이것과 완전히 다르다. 사람들은 많은 시간 과거에 사로잡히고 미래를 걱정한다. 그들은 실제로 현재 일어나는 일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거의 완전히 포착하지 못한다. 우리가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를 때 자신이 그 문제의 근원지일 수 있음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자신의 분노, 그리고 다른 감정들을 간과하겠지만 삶의 많은 즐거움과 기쁨을 같이 놓칠 것이다.
건강한 경계선을 정하기
경계선은 무엇일까?
경계선은 우리의 자아 정체성의 윤곽을 그어놓은 보이지 않는 선이다. 경계선에는 물리적인 경계선, 에고 경계선, 그리고 자아 이미지 경계선이 있다.
물리적인 경계선: 나는 환자들에게 일어나 보라고 한 후, 그들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그들에게 불편함이 느껴지는 순간을 말해달라고 한다. 하지만 대개 바디랭귀지에서 먼저 분명한 신호가 나타난다. 팔짱 끼기, 시선 딴 데로 돌리기, 심지어 뒷걸음질 치기 등은 상대방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물리적 경계선에는 확장된 개인 공간의 개념까지 들어있다. 우리 사무실이나 침실, 소지품, 그리고 신체 접촉에 대한 개방성. 우리 이전 세대는 혈연관계가 아닌 사람들과 악수하는 것을 호의가 담긴 접촉의 최대 한계선으로 여겼다. 오늘날에는 지인들끼리 서로 껴안는 일이 흔하다. 건강한 물리적인 경계선은 또한 성적 접촉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느 정도 허용되고 어떤 상황에서 허용되는지와 관련하여 말이다. ‘PDA’는 공공장소 애정 표현이라는 의미다. 사람들마다 수용 가능한 PDA는 상당히 다르다.
에고 경계선: 건강한 에고에는 일부 사람들만이 어떤 상황이 되면 들어갈 수 있는 개인 공간이 있다. 우리는 이웃이나 동료들에게 말하지 않는 자신의 배경에 대한 것을 제일 친한 친구에게 털어놓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건강한 정서적 경계선은 상대방과의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에고 경계선’과 ‘정서적 벽’은 얼핏 보기에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건강한 에고 경계선과 정서적 벽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거리감을 두는 방법이다. 건강한 경계선은 유연하며 만나는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의 목표는 자기 보호이다. 정서적 벽은 융통성이 없고 고립으로 통해 있다. 벽을 만든 사람들은 형식을 따지고, 편협하며 규칙에 얽매인다.
자아 이미지 경계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반영한 자아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대개 그 속에는 우리가 가족, 직장, 사회에서 우리 역할을 무엇으로 보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 들어 있다. 멋진 집과 엄청난 자부심이 있는 여성은 집에 대한 비판에 민감하다. 반면에 자신을 주로 건강한 어머니로 바라보는 여성은 집에 대해서는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다.
경계선 지키기
분노는 건강한 경계선을 따라 순찰을 돌고 있다가 경계선이 공격을 받고 있는 순간 우리에게 알려주는 병사이다. 그것의 무기는 우리의 뇌에 내장된 ‘투쟁 혹은 도주’ 반응이다. 만약 우리가 공격을 받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폭풍 속에서 위험에 처하면 화학 물질을 뇌에 방출하게 되는데 그것은 상당한 에너지를 솟구치게 한다.
자신의 감정과 접촉하고 있는 사람들은 분노를 인지하면 그것의 근원을 확인하는 동안 잠시 행동을 멈춘다. 그런 후에 그들은 인지된 위협에 어떤 말이나 행동이 최고의 대응인지를 결정한다. 만약 파트너가 당신의 외모에 대해 비판적인 말을 하면 당신은 그것을 지적하거나 그냥 흘려듣기로 결정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분노를 인정하고 반응을 생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