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남들처럼 살 뻔했다
송혜진 지음 | 비즈니스북스
하마터면 남들처럼 살 뻔했다
송혜진 지음
비즈니스북스 / 2018년 8월 / 344쪽 / 15,000원
제1장 혼자만의 성공은 싫다_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다
퇴사 선언으로 회사의 노예에서 인생의 주인이 되다
일본 《아사히신문》 기자였던 이나가키 에미코는 마흔 살이 됐을 때 사표를 쓰기로 결심했다. 누구나 한번 들어가면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는 최고의 직장으로 꼽히는 아사히신문사를 당장 그만두려는 건 아니었다. 10년 후, 그러니까 쉰 살이 됐을 때쯤 회사를 관두기로 마음먹었다.
“월급날만 쳐다보고 사는 내 모습이 싫었어요. 인사철만 되면 일희일비하는 것에도 지쳐갔고요. 월급을 받으려고 열심히 일했지만 인사철만 되면 일희일비하는 것에도 지쳐갔고요. 월급을 받으려고 열심히 일했지만 돈은 늘 모자랐고, 갖고 싶은 건 끝이 없었어요. 집에 옷과 물건이 넘쳐났지만 결코 행복하지도 않았고요.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니까, 사는 방식과 가치관을 완전히 바꾸지 않고서는 은퇴 후에도 답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미코는 그때부터 소비를 줄였다. 도시락을 싸서 다녔고 집에 있던 TV와 냉장고도 없앴다. 저축이 차곡차곡 쌓였다. 이쯤 되니 월급 없이도 살 자신이 생겼다. 회사 생활도 뜻밖에 즐거워졌다. 월급과 인사고과에 목맬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10년 동안 아사히신문사 오사카 지국 사회부 데스크, 논설위원으로 일하다가 2016년 1월 사표를 냈다.
1965년생인 에미코가 딱 쉰 살이 된 해였다. 그해 6월엔 『혼의 퇴사』라는 책을 냈다. ‘힘써 퇴사를 준비했다’는 뜻이다. 이듬해 1월에 한국에도 『퇴사하겠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에미코는 왜 이토록 열심히 퇴사를 준비했을까. 그리고 회사를 나오고 나서 그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에미코는 “기자 생활을 28년 했지만 외국에서 온 기자와 인터뷰를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못 해봤다.”라면서 배시시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 그에게 회사를 그만두고 나면 인생이 정말 환해지느냐는 질문부터 던져봤다. 에미코는 웃으며 답했다 “아뇨.”
퇴사 후 찾아온 진짜 내 인생: 그가 아니라고 대답한 이유는 이렇다. 첫째, 사표를 쓴다고 고민이 사라지진 않는다. 에미코는 이렇게 표현했다. “나도 회사를 그만두면 모든 복잡한 고민이 다 사라질 줄 알았지만, 고민은 그게 마치 자기 자리인 양 늘 같은 자리에 있었어요.” 둘째, 사표를 내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는 월급날만 되면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다. 꼬박꼬박 들어오던 돈이 들어오지 않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셋째, 더는 남 탓을 할 수 없다. 회사 다닐 땐 일이 풀리지 않으면 항상 남을 탓했다. 그러나 회사를 그만두고 나면 그럴 수가 없다. 모든 일이 결국 ‘내 탓’이다.
“이제야 내 인생을 사는 것 같아요.” 에미코는 이 한마디로 답을 정리했다. 매달 꼬박꼬박 입금되던 월급이라는 돈은 퇴사와 동시에 사라졌지만 대신 자유가 늘었고, 남 탓을 못 하는 대신 이젠 스스로 인생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놀라운 일도 많이 생겼다. 가령 자기와 마주친 주변 사람들이 돈도 없는데 집에서 자고 가라고 한다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본래 남의 사생활에 간섭하는 것이 큰 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웬만하면 이런 말을 건네지 않는데 말이다. 덕분에 에미코는 일도 곳곳에 ‘별장’이 생긴 기분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에미코는 이렇게 덧붙였다. “빈틈없이 살 때는 사람들이 나한테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반대로 내게 빈틈이 많이 생기자 사람들이 저절로 다가와 마음을 열더라고요. 사람은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요.”
회사 다닐 때보다 회사를 그만두고서 더 다양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 것도 놀라운 점이다. 에미코는 본래 기자였고, 기자로 일하는 동안 세상 누구보다 많은 사람을 만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사표를 내고 나니 생각지도 못한 분야의 사람들을 훨씬 더 많이 만나게 됐다. 퇴사 후 자기 이름과 이메일 주소를 새긴 개인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에미코는 “정말이지 요즘 명함이 팍팍 없어진다.”라면서 웃었다. 회사를 통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와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회사의 노예가 된 나를 보았다: 에미코는 일본 명문 국립대 히토쓰바시 대학 사회학부를 졸업하고 1987년 아사히신문사에 입사했다. 일본에서 ‘남녀고용 균등기회법’이 시행된 첫해다. 기자 직군을 포함한 입사 동시 70여 명 중 여성은 열 명 정도였다. 입사하면 지방 근무부터 시작하는 아사히신문사 전통에 따라 시코쿠에 있는 다카마츠 지국과 교토 지국 등을 거친 후 오사카 지국 사회부 기자, 사회부 데스크를 지냈다. 퇴사 직전까지는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에미코는 회사가 싫어서 떠난 것은 아니라고 했다. “회사가 내게 준 많은 것을 감사했고, 그만큼 열심히 일했어요. 최선을 다해 일했고, 은혜를 갚을 만큼 다 갚았다고 느껴졌을 때 그리고 이곳에서 내가 더는 할 일이 없다고 느껴졌을 때 비로소 사표를 낸 것뿐이에요.”
그렇다면 왜 10년 동안이나 퇴사를 준비해온 걸까? 에미코는 기왕이면 회사를 더 잘 다녀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야기는 그가 서른여덟 살이던 무렵으로 돌아간다. 30대 후반이면 조직에서 중견 대접을 받기 시작하는 나이다.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회사에서 팀장직을 거쳐 데스크급을 향하고 있었다. 단순히 기자로서 활동하는 것을 넘어 조직을 관리해야 하는 관리자의 위치에 접어든 것이다. 슬슬 회사에서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시기, 즉 그만큼 처신과 정치가 필요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일만 열심히 하던 ‘젊은 기자’ 시절과는 또 다른 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를 또 다른 기회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에미코는 그 무렵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처량하다,’ 어느덧 조직이라는 틈바구니 속에서 부속품처럼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만 일하고 있음을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회사에서의 평가에 일희일비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밀려나지 않고 버틸 수 있는지 고민하는 동안 눈동자는 생기를 잃었고 얼굴도 푸석해졌다. 바로 그 순간부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월급의 노예가 되지 말자고, 회사의 노예가 되지 말자고, 가능한 한 자발적으로 즐겁고 행복하게 일하다 떠나자고. 그러려면 역설적이게도 언제든 내킬 때 사표를 쓸 수 있어야 했다. 회사가 날 언제 자를까 전전긍긍하면서는 결코 마음껏 즐겁게 일할 수 없고, 원하는 삶을 살 수도 없겠다는 답이 나왔다. 에미코는 바로 그때부터 언제든지 사표를 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준비를 시작했다.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월급에 의존하는 삶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거든요.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달라질 거예요. 소비 생활을 한번 찬찬히 들여다보세요. 죽어도 없애지 못할 지출이란 건 없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가장의 월급에만 기대어 사는 삶, 모든 가족이 경제적인 부담과 의무로 얽매여 있는 인생, 그것을 바꿔놓을 수도 있어요. 왜 아빠만, 엄마만, 누군가만 그렇게 계속 허덕여야 하나요. 왜 월급은 그렇게 늘 고정적으로 쓰는 돈이어야 하나요. 어쩌면 우리는 당연하게 돈을 쓰는 건지도 몰라요.”
돈, 그 묘한 존재와의 관계: 에미코는 10년 동안 퇴사를 준비하면서 아주 열심히 돈을 모았다. 그 덕에 사실 죽을 때까지 먹고살 걱정은 없다고 했다. 그래도 월급이 끊겼으니 아무래도 불안하지 않을까. 에미코의 생활 패턴을 들여다보면 그가 돈을 모은 비결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일단 에미코는 퇴사하고 나서 발품을 팔아 도쿄 도심에서도 아주 싸고 작은 집을 찾아냈다. 집이 워낙 좋으니 뭘 들여놓으려야 들여놓을 수가 없다. 결국 어떤 가구도 들이지 않았다. 그의 집에는 전등, 라디오, 노트북, 휴대전화밖에 없다. 옷은 열 벌쯤밖에 없고 화장품도 거의 없다. 책도 다 읽고 나면 근처 북카페에 가져다준다. 밤에 불을 끄고 작은 집에 홀로 누우면 멀리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의 집은 그야말로 여백이 가득하다.
에미코는 돈이란 게 참 묘하다고 말한다. 남녀관계와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집착할 때는 손에 쥐이지가 않아요. 쓰고 싶은 곳이 많고 벌어들이고 싶을수록 돈은 잘 안 모이거든요. 반대로 돈에 관심이 없어지면 돈이 슬슬 모여요. 제 앞에 차곡차곡 쌓이는 거죠.”
이웃에게 돈을 쓰는 미니 빌 게이츠: 그렇다고 에미코가 각박하게 산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에미코는 웃으며 말했다. “매일 아주 열심히 돈을 쓰려고 노력해요.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돈을 써도 돈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으니 오히려 걱정이에요.”
돈은 어디에 쓸까. 에미코는 ‘이웃’에 쓴다고 했다. 그의 집 근처에는 일본에서 찾아보기 힘든 오래된 손두부 가게가 있다. 아주 맛있는 빵 가게도 있고 아주 정성스럽게 커피를 내놓는 작은 카페도 있다. 에미코는 매일매일 자전거를 타고 그런 곳들을 들러서 두부나 빵을 많이 산 다음 친구들에게 나눠주곤 한다. 그러면 친구들도 정말 맛있다면서 그 가게에 찾아온다.
노인이나 젊은이가 자신의 인생을 걸고 운영하는 작은 가게들, 그들을 응원하기 위해 에미코는 매일매일 돈을 쓴다. 에미코는 이를 두고 일종의 풀뿌리 운동, 들불 운동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일본 총리는 아베 신조지만, 저는 내 이웃과 우리 동네의 총리가 나라고 생각하고 살거든요. 내가 내 이웃의 주인이고 대장인 거죠. 신나지 않나요?”
에미코는 그렇게 평생 모으고 번 돈을 이웃에게 아낌없이 투자해 그들이 잘살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살고 싶어 한다. “내가 가진 걸 그들을 위해 다 쓰다가 죽는 것이 꿈”이라면서 스스로를 ‘우리 이웃의 미니 빌게이츠’라고도 했다. 빌 게이츠처럼 돈이 엄청나게 많지는 않지만, 이웃들을 위해 소소하게 투자할 정도의 돈은 자기에게도 있으니 ‘미니 빌게이츠’라고 불러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돈을 쓰고 살다 보면 언젠가는 죽기 전에 이웃을 위해 ‘이나가키 재단’ 같은 것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요.”
제2장 핑계 따윈 필요 없다_ 악조건을 자산으로 만든 사람들
영어 한마디 못해도 열정, 성실, 정직으로 성공하다
‘돈 안 받고 일하겠다. 일단 써 달라. 마음에 들면 그때 월급을 달라.’ 스물일곱 살이었던 송진국 회장은 영어로 이렇게 휘갈기듯 쓴 종이를 화장품호사 코스메틱 스페셜티 랩 사장에게 내밀었다. 아주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1981년 미국 오클라호마로 건너간 직후의 일이었다. 2차 오일쇼크로 미국 경제도 휘청거리던 시절이었다. 애초에 취직하고 싶었던 정유회사는 이미 직원을 2,000명이나 해고해 고용할 여력이 없다고 했다.
수소문 끝에 한 화장품회사를 찾아갔으나 역시 사람을 뽑을 계획이 없다고 했다. 그는 사정을 한 번이라도 만나게 해달라며 로비에서 버텼다. 사장이 로비로 내려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송진국 회장은 취직을 하고 싶다고 말했으나 사장은 잘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어가 짧은 탓이었다. 황급히 종이를 꺼냈다. 펜을 쥐고 써내려갔다. ‘나는 한국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화장품 연구원으로 일을 잘할 자신이 있다. 돈은 받지 않겠다.’ 사장은 재밌다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오케이. 그럼 내일부터 출근하세요.” 미국에서의 첫 취직이었다.
브로큰잉글리시로 회사에서 1등이 되다: 나테라인터내셔널은 가족들이 100퍼센트 지분을 갖고 있는 패밀리 기업이다. 빚이 하나도 없는 기업으로도 알려져 있다. 유니레버, 피앤지, 로레알 같은 공룡 기업들과 경쟁하고 있지만 밀리지 않는다. 현재 남미를 비롯, 캐나다ㆍ일본ㆍ동남아 등지에 진출해 있고 모두 현지 유통업체를 통해 제품을 판매한다. 그러나 이 회사는 하루아침에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송 회장은 그저 묵묵히 일해 온 시간이 쌓여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처음에는 영어 한마디 못하는 무급 연구원에 불과했다. 다른 미국 직원들보다 돋보이려면 성실함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회사에 앉아 미국인 동료들을 관찰했다. 뜻밖에도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 그다지 많지 않아 보였다. 심한 경우엔 시간만 때우고 가는 사람도 종종 눈에 띄었다. 송진국 회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이들과 반대로 일해야겠구나.’
누구보다 일찍 출근했고 가장 늦게 퇴근했다. 단순히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쌓인 업무를 빨리빨리 제대로 처리했다. 2주쯤 지났을까. 회사에서 그에게 월급을 주기 시작했다. 800달러였다. 다시 몇 개월쯤 지났을까. 회사는 연구실 열쇠를 송진국 회장에게 맡겼다. 매일 연구실 문을 열고 닫는 이가 그였기 때문이다. 2년쯤 지나자 이번엔 아예 연구실장 직함을 줬다.
직위가 높아졌다고 송진국 회장의 태도가 바뀌진 않았다. 여전히 묵묵히 주어진 일을 했다. 그간 연구한 내용을 정리해 화장품으로 여드름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책도 썼다. 그러다 회사가 곧 파트너들끼리의 싸움으로 여러 개로 쪼개질 위기에 놓였다. 다들 부지런하고 성실한 그를 제품 개발팀장으로 데리고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송진국 회장은 그때 어느 곳도 택하지 않고 미련 없이 회사를 나왔다. 그만의 회사를 직접 차리기 위해서였다. 1985년쯤의 일이다.
아무리 창피해도 세 번은 가라: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송진국 회장은 직접 월마트, K마트 등을 다니며 제품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그때도 여전히 영어는 짧았다. 바이어들은 그의 앞에선 열심히 웃고 박수를 쳐줬으나, 뒤돌아서선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다고 했다. 그래도 송진국 회상은 그들을 다시 찾아갔다. 두 번째 세 번째 방문할 땐 그들도 웃음을 거두고 정식 계약을 체결하고 제품을 구입했다. 송진국 회장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동양인 사업가, 그럼에도 그는 창피를 모르고 열심히 설명했다. 두 번째 가면 다들 그의 얼굴을 보고 놀라곤 했다. ‘아, 미스터 송! 또 왔어요?’ 하면서. 그땐 제품을 실제로 써보고 테스트해봤다. 세 번째 가면 결국 샀다. ‘제품 참 좋던데요!’라고 하면서. 송진국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망신당했다고 창피하다고 물러설 거면 애초에 미국에 오지 말았어야 했고, 사업도 시작하지 말았어야죠!”
실수 덕에 이기고 앞으로 나간다: 송진국 회장은 스스로를 어릴 때부터 쓸데없는 일을 많이 했던 아이로 설명한다. 어머니 말은 잘 듣질 않았다고 했다. 하지 말라는 건 많이 했고, 가지 말라는 곳도 잘 갔다. 대학생 시절 주말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런저런 장사와 아르바이트를 했다. 시장에서 땅콩도 팔았고 길거리에서 엿도 팔았다. 대학 졸업 후엔 피어리스에 입사해 1년 정도 연구원으로 일했다. 동진제약으로 옮겼고 연세대 대학원에서 경영학도 공부했다. 그래도 늘 더 큰 세상이 궁금했다. 미국 비자를 받자마자 그렇게 이민을 떠나왔다.
회사를 운영하면서도 그는 누가 시키지 않는 혼자만의 도전에 몰두해왔다. 빚 없이 일하려고 애썼다지만, 그렇다고 혁신까지 포기한 건 아니었다. 연구팀을 언제나 회사의 중심에 놓고 생각했다. 직원이 제품 개발을 하면서 실수하거나 실패해도 절대 문책하지 않았다. 엉뚱한 아이디어를 낼수록 칭찬하고 상을 줬다. 토론도 많이 시켰다. 생각이란 좌우, 상하, 시계 방향, 시계 반대 방향으로 다 흘러야 막힘이 없이 문제가 풀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제품 하나를 개발해도 이게 최선인지 몇 달이고 토론하고 고민해보라고 했다.
물론 그럼에도 때론 실패했다. 가령 1987년 ‘소페이스’라는 남성 화장품을 론칭했다. 야심차게 스킨ㆍ로션ㆍ세럼까지 미국 대형마트에 쫙 깔았지만 소비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후에도 송진국 회장은 크게 주목받지 못한 브랜드를 종종 내놨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나름 멋진 제품이었고 자신이 꿈꾸던 것을 실현시키는 경험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고 했다. 현재 송진국 회장은 미국 특허 열한 개를 갖고 있다. 그는 더 많이 실수해서 더 많은 특허를 따내보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