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나는 회사를 떠나지 않기로 했다

양은우 지음 | 영인미디어



나는 회사를 떠나지 않기로 했다

양은우 지음

영인미디어 / 2017년 12월 / 280쪽 / 15,000원





Part I. 자기계발에서 자기전문화로



고용과 경제적 안정에 대한 불안

직장인들은 늘 자신의 자리에 불안함을 느낀다. 언제 자신이 회사에서 쓸모없다고 쫓겨나게 될지 불안하다. 특히나 업무 성과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40대 전후의 직장인들은 더욱더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한 취업 포털사이트의 조사에 의하면 직장인들의 60%가 고용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나이가 많을수록 그 비율이 점점 높아진다.

입사 초기에 하늘을 찌를 듯했던 포부나 자신감은 해가 거듭될수록 현실에 부딪혀 둥글게 마모되어 버린다. 나이가 들수록 어떻게든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만이라도 살아남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남는다. 나 역시 다를 바 없었다. 국내에서 재벌기업들을 거치면서 회사의 지원으로 유학도 다녀오는 등 꽤나 안정적인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허울일 뿐이었다. 재벌기업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늘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렸다. 일을 못한 것도 아니고 조직에서 나름대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은 줄어들지 않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이직이라는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직을 하고 나니 오히려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 이직과 함께 나의 업무 능력이나 업계 사람들과의 관계도 리셋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벗어날 수 없는 고용불안의 덫: ‘사오정’ 또는 ‘오륙도’라는 말처럼 정년이 점점 짧아지면서 40대 전후의 직장인들이 느끼는 고용불안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다. 2016년부터 기업의 정년이 60세로 상향 조정되었지만 여러 조사에 따르면 임원이 되지 못하는 경우 회사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심리적인 마지노선은 48세라고 한다. 아무리 잘나가는 사람이라 해도 사회적인 정년인 60세를 넘기 어렵다. 100세 시대라고 하는 요즘 60세는 야구경기로 치면 5회~6회에 해당한다. 아직 게임이 끝나려면 한참이 남아 있는데도 60세쯤에는 직장을 떠나야만 하니 누구든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에는 한번 회사에 입사하면 정년퇴직 때까지 고용을 보장해 주는 회사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평생고용이 보장되는 회사는 거의 없다. 따라서 직장인들은 일상적인 고용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개인의 역량과 상관없이 벌어지는 여러 상황으로 인해 순식간에 실직자 신세로 전락할 가능성도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노키아가 몰락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휴대폰 시장에서 철옹성 같은 지위를 구축하고 있던 노키아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순식간에 침몰하고 말았다. 대우그룹, 웅진그룹, STX그룹 등 수많은 ‘잘나가던’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거나 도산했다. 회사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구조조정에 처하거나 회사가 문을 닫는 경우 개인들은 하루아침에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고 만다.

회사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는 존재: 이런 여러 가지 요인들이 직장인들을 늘 회사에 매여 사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혹시라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충직한 회사의 노예임을 입증하기 위해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욱 길어진다. 회사가 삶의 중심이고, 회사가 삶의 존재 이유이고, 삶의 목적이다. 회사를 떠나서는 어떠한 것도 생각할 수 없고 회사를 벗어나면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낀다. 개인의 삶보다는 회사의 실적을 우선시해야 한다. 그것이 회사로부터 버림받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되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삶의 만족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가끔은 사는 게 허무하게 느껴지고 ‘내가 정말 제대로 사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지만 뾰족한 대안이 없으니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또 그렇게 살아간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야근에 찌들어 사는 우리들이 ‘칼퇴근’을 하는 선진국에 비해 생산성이 훨씬 낮다고 한다. 2015년 OECD 통계 자료에 따르면, 룩셈부르크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82.5달러로 OECD 회원국 중 최고를 기록했다. 이어서 아일랜드가 81.3달러, 미국과 프랑스, 독일 등은 60달러 내외를 기록했다. 반면 우리나라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겨우 31.8달러에 불과하다.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이라 하지만 생산성보다는 여전히 몸으로 때우고 있는 수준인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장인께서 돌아가신 날에도 회사에 출근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자랑도 아닌 그 일을 그들은 자랑처럼 얘기한다. 그만큼 자신은 가정과 개인적인 생활을 포기하고 회사에 충성을 다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회사를 위해 인륜마저 벗어던져야 하는 것이 회사원들의 숙명이다.

벌어도 벌어도 늘 쪼달리는 삶: 40대 전후는 직장생활에서 자신의 역량을 최대로 발휘하며 성과를 창출하고 자리를 잡아 가는 시기다. 인생의 정점을 향해 힘차고 거침없이 달려가는 가장 황금 같은 시기다. 반면 경제적으로는 가장 힘든 때이기도 하다. 집 마련, 육아와 교육 등이 이 시기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20대 중후반에 직장생활을 시작하면 대개 10년 동안은 집 장만에 여념이 없다. 30대 중반부터 10년간은 대출금 상환과 아이들 육아로 허리 펼 날이 없다. 40대가 되면 또 10년 동안 아이들 교육을 위해 밤낮없이 뛰어야 한다. 이후에도 아이들 결혼자금 마련을 위해 여유를 부릴 틈이 없다. 잠시 허리 펴고 쉴 만한 틈도 없이 돈 쓸 일이 줄줄이 이어지는 시기가 40대 전후이다.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온 가족이 길거리로 나앉을 수도 있기 때문에 감히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대책 없는 노후: 그나마 30대는 조금 나은 편이다. 40대나 50대 초반이 되면 경제적인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들어가야 할 돈은 더욱 많아지기 때문이다. 퇴직 연령은 점점 짧아지는데 아직 돈 들어갈 곳은 많으니 이만저만 고민이 아니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재취업은 하늘의 별 따기다. 창업이라도 할라치면 국가로부터 혹은 창업지원 기관들로부터 사업자금을 지원받기도 불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더라도 안면몰수하고 회사에 남아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 시기를 지나면 임금피크제로 인해 임금은 줄어들어, 돈이 제일 많이 들어가야 하는 시기에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봉착하게 된다. 월급만으로 생활하기가 어렵게 되자 부업에 매달리는 직장인들도 늘어났다. 2016년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직장인들의 10%에서 30% 정도가 부업을 하고 있고 한다. 이들 두 명 중 한 명은 편의점이나 마트 아르바이트, 과외, 주차원, 대리운전 등의 부업을 한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고 100세 시대가 도래하면서 은퇴 이후 생활에 대한 대책도 시급해지고 있지만, 이렇게 사는 것이 빠듯하고 아이들 뒷바라지에 치이고 나면 자신의 노후 준비는 소홀해지고 만다. 평생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면서 ‘뼈가 부서지도록’ 일만 한 것 같은데 당장 눈앞에 들어가는 돈부터 메우고 나면 내 손안에 남는 게 없다. 노후가 걱정되긴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무너지고 상처 입은 자존심: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돈 들어가는 곳이 많다 보니 40대 전후의 직장인들은 막상 회사를 떠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싶어도 회사를 떠날 수 없다. 회사를 그만둔다는 것은 곧 가족의 생계를 위협받는 일이기에 이를 악물고 버텨야 한다. 자존심이 상하고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어도 쓴 소주 한잔으로 달래며 잊어버리려 애쓰는 것이 40대 전후의 직장인들이다.

D사에 근무하던 시절 내 책상 서랍에는 늘 사직서가 들어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솟구치는 분노로 사표를 던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나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면 사표를 던진다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다. 15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마음껏 쓰지 못했음에도 내 손에는 퇴직 후를 보장할 만한 자금이 없었다. 벌어도 벌어도 늘 쪼들리는 삶이었기에 당장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할 자신이 없으니 그대로 버티는 수밖에.

확신할 수 없는 미래가 만들어 낸 두려움

밀란 쿤데라는 “두려움의 원천은 미래에 있고, 미래로부터 해방된 자는 아무도 겁날 게 없다.”라고 말했다. 오늘날의 생활환경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통신기술과 교통의 발달은 전 세계를 마치 하나의 손바닥 안에 올려놓듯 압축시켜 버렸다. 세상이 좁아지다 보니 그 안에서 돌아가는 것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학자들은 지난 100년의 변화가 과거 1만 년, 즉 인류의 역사 전체의 변화와 맞먹는 규모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향후 20년간 도래할 변화는 지난 100년의 변화와 맞먹는 크기일 것으로 전망한다. 아마도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지난 100년과 맞먹을 만한 변화가 단 10년 안에 펼칠 수도 있을 것이다.

점점 높아지는 미래의 불확실성: 언젠가는 과거 100년을 능가할 만한 큰 변화가 단 몇 년 사이에 이루어질 날도 닥쳐올 것이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성장의 압축’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고조시키고 있다. 세상이 그리 빠르게 돌아가지 않던 시절에는 과거와 미래가 동일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다. 즉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동일한 선상에서 움직였기 때문에 지나간 과거의 일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다가올 미래에 대한 유추가 가능했다.

그러나 자고 나면 어제와 다른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오늘날에는 과거로부터 현재, 그리고 현재로부터 미래의 움직임을 유추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한마디로 우리의 미래는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르는 불확실한 세상이 된 것이다. 또한 IT버블 붕괴, 글로벌 금융위기 등 예측하지 못한 돌발 상황이 발생하는 주기도 과거에 비해 점점 짧아지고 그 파장 또한 커지고 있다. 이러한 불확실성의 증가는 세계와 내가 속한 국가, 사회, 직장이나 일터의 미래,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미래를 확신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확신할 수 없는 미래는 우리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오며, 그 두려움은 현대인들의 삶을 불안 속으로 몰아넣는 원인이 되고 있다.

사회적 지위의 상실과 ‘실패자’ 낙인: 불확실한 미래는 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걸까? 프랑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의 이유가 ‘사회적 지위’의 상실 때문이라고 얘기했다. 고대나 중세의 계급사회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개개인의 신분이 정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평생을 살아가면서 신분의 변동이 일어날 일이 거의 없었고, 그에 대한 불안함을 느낄 이유도 없었다. 귀족으로 태어난 사람은 귀족 신분을, 평민으로 태어난 사람은 평민 신분을 벗어날 기회도 없고 자신이 속한 신분으로부터 이탈될 염려도 없는 것이다. 간혹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

또한 같은 신분에 속하는 사람들끼리는 차이도 거의 없었다. 평민들은 누구나 먹고살기 힘들었고 모두 똑같이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권력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그보다 아래 계층인 노예 역시 모두가 그만그만했다. 타고난 신분에 대한 불만은 가졌을지언정 같은 신분에 소속된 사람에 대한 상대적인 열등감 따위는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18세기 초 농경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산출물이 급증하게 되자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노동생산성의 증가로 인해 삶의 가치가 ‘이념에서 물질로’ 옮겨 가면서 숙명처럼 받아들이던 신분제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농업이나 공업, 상업을 통해 돈을 축적한 부자들이 힘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허울뿐인 신분 대신 실속을 택하게 되면서 철옹성 같던 신분사회도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번 금이 가기 시작한 신분사회는 급격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후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시민 저항과 혁명을 통해 신분에 의한 차별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신분제도 자체가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신분제도가 폐지되고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기회와 권력을 누리는 사회가 되자 사람들은 타고난 운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노력에 의해 신분 상승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노력하는 만큼 돈을 벌고,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개인의 능력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즉, 높은 자리에 오르고 많은 돈을 번 사람은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여기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보는 시선은 아주 차가워졌다.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가치를 동일시하는 사고가 퍼지면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부를 축적하지 못한 사람은 가치가 낮은 사람이며, 능력이 부족하고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내리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지위와 부를 얻지 못하는 무능력한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데 대한 극심한 불안감을 갖게 되었다. 직장이나 사회에서 높은 위치에 오르지 못하고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개인의 능력 부족이나 ‘실패’로 인식되고 사회에서 실패자로 분류되고 만다. 그것이 바로 현대인들이 두렵고 불안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경제적 능력 상실의 우려: 『이카루스 이야기』에서 세스 고딘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사방이 막힌 산업사회라는 시스템 안에서 길들여져 그 밖으로 벗어나면 먹고살기 힘들어질 것이라는 일상적인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없게 되었다.” 이를 알랭 드 보통의 이야기와 연계시켜 보면, ‘사회적 지위의 상실’을 두려워하는 불안의 기저에는 인간적인 삶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돈’이라는 물질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먹고, 입고, 자고, 사람들을 만나고, 아이들 양육과 교육, 문화 활동, 배움 등 인간으로서의 삶을 위해 필요한 근본적인 수단의 상실에 대한 우려를 안고 있는 것이다.

직장인들이 간이며 쓸개며 다 빼놓고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직장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며 각종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근본적인 이유도 따지고 보면 결국 ‘돈’에 있다. 직장을 잃으면 돈을 벌 수 없고, 돈이 없으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삶을 영위해 나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돈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자존심을 내팽개치면서까지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자연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과거에는 돈이라는 개념이 희박했다. 돈에 대한 개념이 정립된 이후에도 일부 권력을 가진 부유층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이 거의 대등한 조건에 놓여 있었다. 때문에 돈에 대한 집착과 욕구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나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공평하게 가질 수 있게 되고,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사회적으로 누릴 수 있는 권리와 혜택의 차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돈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치 예전 계급사회의 신분처럼,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상류층과 중산층, 하류층으로 사회적 신분이 암암리에 구분됨에 따라 돈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은 더더욱 심해졌다. 특히나 일상의 모든 것들을 돈을 통해 그 가치를 교환하게 되면서 돈 없이는 살 수 없도록 시스템화되었다. 결국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은 결국 미래에 쓸 수 있는 돈을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다. ‘사회적 지위의 상실’에 대한 불안은 ‘돈’이라는 현대인의 삶에 필수 불가결한 물질적 수단을 만들어 내는 경제적인 능력의 상실에 대한 불안을 기저에 깔고 있는 것이다.

종합해 보면 이렇다. 우리는 직장생활을 하는 순간부터 자유를 담보 잡히고 대신 소득을 보장받는다. 그리고 그 삶이 주는 편안함에 취해 자기 자신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데 게을러진다. 현대의 삶을 살아가는 데 필수 수단인 ‘돈’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가로막힐 경우 하류층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상존한다. 결국 경쟁을 이겨낼 수 있는 자신만의 차별화된 수단의 부재와, 미래의 어느 날 닥칠 수 있는 생계수단의 상실 가능성으로 인해 두려움과 불안은 꾸준히 높아진다. 이를 이겨 내기 위해 우리는 고되고 힘들어도 인간적인 삶을 누리기 위한 자유보다는 안정적인 복종을 선택하는 것이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