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학
신동준 지음 | 리더북스
난세학
신동준 지음
리더북스 / 2018년 1월 / 432쪽 / 20,000원
제1부 한비자의 정도(政道)
먼저 내준 뒤 취하다 - 여취지도(予取之道)
이익을 향해 내달리는 이치를 알라: 『관자』 〈오보〉는 ‘백성을 얻는 방안으로 백성에게 이익을 주는 것보다 더 나은 방안은 없다’고 역설한 바 있다. 백성에게 이익을 안겨 주는 이민(利民)이 다스림의 근본이라는 주장이다. 『관자』는 전편을 통해 득민(得民)의 요체가 백성들을 배불러 먹이며 이익을 안겨 주는 데 있음을 거듭 역설하고 있다.
옛날 조양자의 마부 왕량이 말을 사랑하고, 구천이 사람을 아낀 것은 전쟁터에 내보내 잘 싸우게 하려는 취지였다. 의사가 환자의 고름을 뽑아내기 위해 상처를 빨아 나쁜 피를 입 안에 머금는 것은 골육의 친애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 그런 것이다. - 『한비자』 〈비내〉
인간의 호리지성(好利之性)에 가장 예민한 반응을 보인 것은 한비자를 비롯한 법가들이다. 한비자가 볼 때 인간의 호리지성은 결코 예치로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군신 간은 물론 부자 및 부부 사이에서도 예외 없이 드러나는 근원적인 문제에 해당하는 까닭에 강력한 법제를 동원하지 않으면 그로 인한 혼란을 막을 길이 없다고 보았다. 아래는 『한비자』 〈육반〉의 해당 대목이다.
“남아를 낳으면 축하를 하고 여아를 낳으면 죽인다. 나중에 편안함을 고려해 장기적인 이익을 계산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부자의 관계에 있어서도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해관계를 벗어날 수 없는 까닭에 가족관계도 예의가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의사가 환자의 종기를 기꺼이 빠는 것도 바로 이해관계 때문이라는 게 한비자의 해석이다. 신하가 군주들에게 충성스런 모습을 보일지라도 사실은 영달하려는 마음으로 군주에게 아첨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경고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한비자의 ‘성악설’은 엄한 법치를 통해서만 인간의 호리지성을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한 점에서 덕치를 역설한 맹자의 ‘성선설’과 극명하게 대립한다. 이는 인성에 대한 철저한 불신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은 그 누구라도 가면을 벗기고 나면 이해관계에 따른 이기주의의 추악한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고 본 결과다.
한비자가 개인 차원의 심신수양과 정반대되는 국가공동체 차원의 법적 제재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는 기본적으로 유가가 강조하고 있는 민의 및 민심 역시 개인적인 이기심의 표현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난세 상황에서 나라의 안녕을 기하고, 한발 더 나아가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력한 법치로 호리지성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지금 버릇 나쁜 자식이 있다. 부모들이 성내어도 행동을 고치지 않고 고장 사람들이 욕해도 꿈쩍하지 않으며 스승과 윗사람들이 가르쳐도 변하지 않는다. 관리가 병사를 동원해 법적 제재를 가하고자 하면 무서워서라도 태도와 행동을 바꾼다.” - 『한비자』 〈오두〉
인간의 호리지성은 결코 맹자가 말하는 덕화나 공자나 순자가 언급한 극기복례의 교화로 치유할 수 없고 오직 강력한 법치를 동원한 교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전국시대 말기의 험악한 세태가 법가의 이런 신념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상황에 비춰 한비자의 이런 주장은 나름대로 타당하다. 인심은 먹고사는 문제가 제대로 해결됐는지 여부에 따라 각박해지기도 하고 너그러워지기도 한다. 세태로 따른 인심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놓고 인간의 본성 문제로 다루려는 것 자체가 호사가의 사변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한비자』 〈비내〉에 이를 뒷받침하는 구절이 나온다.
“수레를 만드는 사람은 수레를 제작하면서 사람이 부귀해지기를 바라고, 관을 만드는 사람은 관을 짜면서 사람이 요절하기를 바란다. 이는 수레를 만드는 사람이 어질고, 관을 짜는 사람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부유해지지 않으면 수레가 팔리지 않고, 사람이 죽지 않으면 관을 팔 수 없기 때문이다. 관을 짜는 사람이 마음속으로 사람을 증오해서 그런 게 아니라 사람이 죽어야 이익을 볼 수 있기에 그런 것이다.”
무선무악설을 주장한 고자가 역설했듯이 인성은 선한 것도, 그렇다고 악한 것도 아니라고 보는 게 정답에 가깝다. 특히, 인심의 부침은 한비자가 지적한 것처럼 인성의 선악 여부와 하등 상관없는 일이다. 성선설과 성악설로 나누어 덕치와 법치 등을 해법으로 제시한 것은 동문서답이나 다름없다. 천하를 석권코자 하면 반드시 인간의 호리지성을 통찰해야만 한다.
계책부터 미리 짜다 - 계모지도(計謀道之)
수시로 가지치기를 하라: 신하의 세력을 방치하면 그 나뭇가지가 무성하게 뻗어나 이내 궁궐의 문을 엎어버린다. 신하의 세력을 가지치기하지 않고 방치해 나뭇가지가 밖으로 자라나면 장차 군주의 자리를 위협하게 된다. - 『한비자』 〈양각〉
여기서 나뭇가지는 권신을 상징한다. 나뭇가지가 크고 줄기가 작으면 나무는 미풍에도 견디지 못한다. 줄기는 군주를 상징한다. 나뭇가지가 줄기를 해치지 않도록 나뭇가지를 수시로 잘라내는 길밖에 없다. 한비자는 〈양각〉에서 또한 이같이 충고했다.
“군주는 붕당세력의 근원인 흉용한 연못을 메워 연못의 물이 넘쳐나지 못하게 미리 손을 써야 한다. 또 신하의 마음속을 미리 짐작하고 그 권위를 빼앗아야 한다. 군주의 이런 행동은 상대가 전혀 대비하지 못하도록 번개처럼 재빨라야 한다. 군주가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반드시 신하들이 붕당을 만들지 못하도록 미연에 막아야 한다. 군주가 영토를 잘 다스리려면 반드시 봉지를 적절히 하사해야 한다. 이를 적절히 하지 못하면 난신이 일어나 더 넓은 봉지를 요구할 것이다. 신하가 요구하는 대로 받아주면 이는 적에게 도끼를 빌려주는 격이 된다. 군주는 신하에게 결코 도끼를 빌려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장차 그것을 이용해 군주를 치게 된다.”
신하들이 붕당을 결성치 못하게 하려면 우선 업무를 분장시켜 서로 견제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한비자는 〈용인〉에서 이같이 지적했다.
“명군은 각자의 임무가 서로 간섭하지 못하게 해 소송이 없게 하고, 여러 관직을 겸직하지 못하게 해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케 하고, 동일한 임무로 똑같은 공을 노리는 일이 없도록 해 다툼을 제거한다. 분규와 다툼이 멈추고 각기 맡은 분야에서 각자의 재능이 발휘되면 얼음과 숯처럼 서로 용납지 못하는 것들이 한 용기 안에서 충돌하는 일이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다스림의 극치이다.”
주목할 것은 신하들로 하여금 상호 견제케 하면서 동일한 임무로 인해 똑같은 공을 노리는 일이 없도록 조치해야 한다고 언급한 점이다. 군주의 입장에서 볼 때 곁에서 간언이나 자문을 해줄 수 있는 인물은 이내 막중한 권한을 지닌 중신으로 활약할 소지가 크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이내 실권을 틀어쥔 권신이 된다. 군주는 신하와 입장이 서로 반대되는 까닭에 자신의 속마음을 엿보려는 신하들의 간계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관건은 제신술(制臣術)의 터득에 있다. 한비자는 〈관행〉에서 전국시대 초기에 활약한 위나라의 현대부 서문표를 명군의 ‘롤모델’로 언급했다.
“서문표는 성미가 급해 늘 허리에 곱게 무두질한 가죽을 차고 다니며 성급한 마음을 부드럽게 다스렸다. 여유 있는 것으로 부족한 것을 메우고, 긴 것으로 짧은 것을 이어주면 가히 ‘명군’이라고 이를 만하다.”
서문표가 스스로 절제하며 무위의 제신술을 구사했다고 판단한 내용이다. 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절도가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절도는 장수의 기본 덕목이기도 하다. 허리에 곱게 무두질한 가죽을 차고 다니며 성급한 마음을 부드럽게 만든 서문표를 좇아 늘 스스로 절제하며 ‘무위의 제신술’을 구사해야 한다.
권력과 위세를 쓰다 - 권세지도(權勢道之)
권력에 복종하게 만들라: “백성은 본래 권세에 복종하지만 의로움을 품고 따르는 사람은 적다. 천하 사람들은 공자가 말한 인을 좋아하고, 그 의를 칭찬했지만 복종한 자는 70명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노나라의 애공은 보잘것없는 군주였지만 보위에 올라 공자를 신하로 삼을 수 있었다.” - 『한비자』 〈오두〉
한비자는 사람들이 군주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인의와 같은 덕성 때문이 아니라 권세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비자가 공자와 노애공을 대비시킨 것은 권세의 위력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군주의 위세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오직 한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보위에서 나온다. 한비자는 〈난세〉에서 이같이 말했다.
“무릇 요순과 같은 인물이 태어날 때부터 보위에 앉아 있게 되면 비록 걸주가 10명이 있을지라도 천하를 어지럽힐 수 없다. 추세 자체가 잘 다스려질 수밖에 없는 ‘자연지세’이기 때문이다. 또 걸주와 같은 인물이 태어날 때부터 보위에 앉아 있게 되면 비록 요순이 10명이 있을지라도 천하를 잘 다스릴 수 없다. 추세 자체가 잘 다스려질 수 없는 ‘자연지세’이기 때문이다. 결국 ‘추세가 잘 다스려지는 쪽이면 어지러워질 수 없고, 추세가 어지러워지는 쪽이면 잘 다스려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연지세’를 말한 것이지, 사람이 만들어낸 ‘인위지세’를 언급한 게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 만들어낸 ‘인위지세’이다. 이 경우 ‘자연지세’의 현자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자연지세’는 말 그대로 객관적인 상황하에서 만들어진 당연한 위세를 뜻하고, ‘인위지세’는 군주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실현된 인위적인 위세를 말한다. ‘인위지세’가 바로 권세이다. 그렇다면 ‘인위지세’, 즉 권세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크게 총명지세와 위엄지세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총명지세’는 천하의 총명을 자신의 총명으로 이용하면 된다. 군주 자신의 총명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총명지세’의 요체는 바로 득인(得人)에 있는 셈이다. 군주는 신민들과 지혜를 다투는 이른바 투지(鬪智)를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군주는 천하의 총명을 자신의 총명으로 이용하면 되는 것이지 신민들과 천하의 총명을 다툴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위엄지세’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힘으로 다스리는 일종의 역치(力治)를 뜻한다. 난세에는 결코 군주의 덕성으로 나라를 이끌 수 있는 게 아니다. 난세에 군주가 덕성까지 뛰어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이는 부차적인 것이다. 기본적인 것은 주변 정황을 모두 감안한 올바른 판단과 과감한 결단, 강력한 추진력이다. 이는 반드시 강력한 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위엄지세’의 요체가 여기에 있다. 〈오두〉에 이를 뒷받침하는 대목이 나온다.
“백성이란 본래 자애로운 모습을 보이면 교만해지지만 위세를 보이면 순종하기 마련이다.”
철저한 성악설에 입각한 분석이다. ‘총명지세’와 ‘위엄지세’ 2가지로 구성되어 있는 세치(世治)는 보위의 유지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명군의 경우는 굳이 세치를 구사할 필요가 없다. ‘자연지세’에 올라타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평범한 군주인 용군의 경우이다. 결국 ‘인위지세’를 어떻게 만들어낼까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용군의 경우는 ‘총명지세’를 기대할 수 없다. 기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위엄지세’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하해야 ‘위엄지세’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일까? 한비자는 〈난세〉에서 그 해법을 제시했다.
“용군이 법을 쥐고 권세에 의지하는 이른바 포법처세(抱法處勢)를 행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 그러나 법을 어기고 권세를 버리는 이른바 배법거세(背法去勢)를 행하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 지금 ‘배법거세’를 행하면서 요순과 같은 성군을 기다리면 1천 년 만에 요순이 나타나 천하가 비로소 잘 다스려지게 된다. 요순을 기다리는 1천 년 동안 천하는 줄곧 어지럽다가 겨우 1세대에 한해 천하가 다스려지는 셈이 된다. 반대로 ‘포법처세’를 행하면서 걸주와 같은 폭군을 경계하면 1천 년 동안 천하가 줄곧 잘 다스려지다가 겨우 1세대에 한해 어지러워지는 셈이다. 권세만이 능히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 기름진 밥과 고기를 먹기 위해 1백 일을 기다리면 굶주린 사람은 이내 죽고 만다. 지금 요순의 출현을 기다리며 당대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은 마치 1백 일 뒤에 나올 기름진 밥과 고기를 기다리며 굶주린 백성을 구하려는 짓이나 다름없다.”
용군이 능히 신하들을 제압하며 의도한 대로 부릴 수 있는 비결이 바로 법을 쥐고 권세에 의지하는 ‘포법처세’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포법처세’는 권세를 달리 표현한 것으로 곧 ‘인위지세’를 말한다.
제2부 마키아벨리의 정략(政略)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다 - 득인지략(得人政略)
이익을 주면서 유대를 강화하라: “군주가 견고한 도시를 보유하고 백성의 미움을 받지 않으면 그 어떤 외부 침공에도 안전할 수 있다. 인간은 원래 수혜나 물론 시혜를 통해서도 책임감을 느끼며 유대를 강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군주론』 제10장
여기서 마키아벨리는 백성과 군주가 하나가 되는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반드시 백성을 자기편으로 잡아두어야만 한다’는 대목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기도 하다. 주목할 것은 마키아벨리가 군민이 하나로 뭉치는 배경을 백성이 군주로부터 혜택을 받는 수혜자에서 문득 군주에게 혜택을 베푸는 시혜자로 바뀐 데서 찾고 있는 점이다. ‘군주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들의 집이 불타고 재산이 파괴되었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군주가 자신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여긴다’고 언급한 게 그렇다. 고금을 막론하고 군주와 백성이 서로 시혜자 겸 수혜자가 될 경우 그 유대는 더욱 돈독해질 수밖에 없다. 마키아벨리가 ‘인간은 원래 수혜는 물론 시혜를 통해서도 책임감을 느끼며 유대를 강화하는 존재’라고 언급한 이유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시종 백성과 함께 가야만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역설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백성의 지지를 받아 보위에 오른 군주는 늘 백성을 자기편에 잡아두어야만 한다. 백성의 소망은 귀족들로부터 억압당하지 않는 것이 전부인 까닭에 이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설령 귀족들의 지지로 보위에 오른 군주일지라도 무엇보다 민심을 얻는 데 진력해야 한다. 이 또한 백성의 보호자로 나서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백성의 지지로 즉위했을 경우에는 백성에 대한 귀족의 억압을 막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귀족의 지지로 즉위했을 경우에는 백성의 보호자를 자처하면 능히 백성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백성의 지지로 보위에 올랐든, 아니면 귀족의 대변자로 선택되어 보위에 올랐든 권력 유지의 관건은 백성의 지지에 있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백성의 지지를 정권 유지의 요체로 파악한 결과다. 제21장에서 서민의 생업을 안정적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군주는 서민이 안심하고 생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고취해야 한다. 서민이 착취를 두려워해 재산 증식을 주저하거나, 무거운 세금을 우려해 개업을 망설이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라를 풍족하게 만들려고 하는 자들을 격려하며 보상할 필요가 있다, 또한 1년 중 적절한 시기에 축제와 구경거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서민의 생업 보장을 역설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백성의 지지를 확고하게 붙들기 위한 방안으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백성에 대한 귀족의 억압이 그리 크지 않거나, 귀족이 백성과 크게 대립하지 않았을 때는 어찌 대처해야 하는 것일까? 이때 군주가 잘못 대처했다가는 귀족과 백성이 합세해 군주를 협공할 수도 있다. 이는 파멸의 길이다. 마키아벨리는 백성의 재산에 손을 대지 않는 데서 답을 찾았다. 제19장의 해당 대목이다.
“군주는 백성의 증오를 사거나 경멸을 받는 일을 삼가야 한다. 이를 삼가면 설령 다른 비행이 있을지라도 그로 인해 위험에 처하는 일은 없게 된다. 군주가 증오의 대상이 되는 가장 큰 이유는 탐욕을 부려 백성의 재산과 부녀자를 빼앗는 데 있다. 대다수 백성은 군주가 자신들의 재산과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 한 대개 자족하며 살아가지만 소수의 야심 많은 귀족들은 그렇지 않다. 군주가 늘 이들을 경계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