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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닦는 CEO

임희성 지음 | 영인미디어



계단을 닦는 CEO

임희성 지음

영인미디어 / 2017년 12월 / 276쪽 / 15,000원





Chapter 1. 패배를 모르는 하룻강아지



어떻게 여자가 사장까지?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나요?” 내가 만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궁금해하는 것이 있다. 어떻게 여자가 청소용역업체 사장이 되었느냐는 것. 여기에는 두 가지 호기심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여자가?’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사장이?’이다. 여성 CEO가 그렇게 흔하지 않은 데다 청소용역업이라는 분야가 낯설고 그 두 가지의 조합이 연매출 100억 원대의 회사라고 하니 더 신기할 법도 하다. 수저는 고사하고 맨주먹으로 살아온 내가 어떻게 사장까지 되었을까.

무슨 일이 있어도 기죽지 않아!: 우리 집은 전북 익산에서 손꼽히는 부잣집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부자 소리를 듣는’ 가난한 집이다. 친할아버지는 목재소와 숯공장을 운영했고, 해방 후에는 미군들이 버리고 간 트럭을 개조해 화물차 운수사업을 했다. 이후 택시회사도 경영했는데, 할아버지가 천운을 타고나 사업이 무척 번창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따로 살림을 꾸렸고 본처에게서 아들 둘만 데리고 가서 첩과 생활했다. 첫째 아들인 아버지는 어렸을 때 무슨 병에 걸렸는지 계속 설사와 구토를 했고, 민간요법으로 겨우 목숨을 구했지만 후유증으로 심한 말더듬과 지능장애를 갖게 되었다.

아버지가 17세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이듬해에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시면서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할 부(富)는 후견인을 자처하던 작은할아버지의 차지가 되었다. 작은할아버지는 지적 능력이 부족한 아버지를 대신해 회사 운영을 도와주었지만, 친할아버지의 알짜배기 재산들을 차근차근 자신의 명의로 돌려놓았다. 이리운수의 사장이라는 허울뿐인 직함만 가지고 있었던 아버지는 작은할아버지에게 맞서기에는 너무나 연약했다. 작은할아버지가 경영을 맡고 있을 때 아버지는 차 수리, 운전사, 조수 등 일인다역을 했다.

이러한 집안 사정을 알 리 없는 외부에서는 우리 집을 부자라고 믿었다. 그래서 어머니와의 혼사도 성사된 것이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지만, 외갓집은 대학교 중퇴에 운수회사를 경영하는 사장이라는 소개를 받고 막내딸을 시집보냈다고 한다. 어머니는 결혼한 지 두어 달 만에 아버지의 장애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도망을 치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나를 임신한 사실을 알고 포기했다고 한다. “너 때문에 내 신세가 이 꼴이 되었어.” 어릴 때부터 나는 어머니로부터 이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다. 어머니의 머릿속에는 ‘너만 아니면 내 인생이 꼬이지 않았을 거야.’ 하는 원망이 자리 잡았던 것 같다.

현실을 바꾸고 싶은 꿈: 겉만 멀쩡했던 우리 집은 나날이 가난해져 갔다. 결국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 사업이 망하고 말았고, 우리 가족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서울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시작했고, 아버지는 버스 운전, 빵 배달, 연탄 배달 등의 일을 전전했다. 이후에도 아버지는 계속 잦은 사고를 냈다. 벌어 오는 수입보다 합의금이 더 많이 나가게 되면서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유치장에서 빼내기 위해 빚을 얻어 합의금을 마련하곤 했다. 빚을 갚으라며 찾아온 사람이 어머니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마당에 내동댕이치는 모습에 공포에 떨기도 했다. 나는 집안의 맏딸로서 반드시 우리 가족을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내겠다고 결심했다. 꼭 돈을 많이 벌어서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잘살아야겠다고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 존재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점은 어려움을 만날 때 도망을 가려고 한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속마음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의연하게 행동했고,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의 힘으로 현실을 바꿔야겠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남대문 시장 ‘옥동자’와의 만남

버스를 타고 무작정 남대문시장으로: 나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돈벌이에 나섰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전자부품 만드는 회사에 취업했고, 졸업 후에는 외삼촌의 소개로 관공서 임시공무원으로 일했다. 매일 김치죽으로 끼니를 잇던 가족들은 내가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 시기에 친구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났다. 그의 달콤한 배려와 보호에 나는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어린 나이에 맞지도 않는 가장 노릇을 하느라 버거웠던 나에게 그는 유일한 쉼터였다. 만난 지 몇 달 만에 임신을 했고, 시댁과 우리 어머니의 치열한 씨름 끝에 혼인신고를 하고 작은 단칸방에 신혼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임신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남편은 방황했고, 거친 폭언과 폭력을 휘둘렸다.

나는 22세의 나이에 딸을 낳았다. 남편은 2주 후에 군대에 갔고 나는 딸아이를 안고 시댁으로 들어갔다. 시댁이 운영하는 돼지갈비 집에 있던 작은 방이 우리가 거주하는 공간이었다. 뜨거운 열기에 아기가 보채서 애를 먹었다. 영양부족으로 젖이 나오지 않아도 분유를 사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고심 끝에 나는 시댁 어른들의 허락을 받고 집을 나왔다. 아기를 어머니에게 맡기고 일자리를 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남대문시장으로 가는 버스를 보고 무작정 올라탔다. 시장 안의 수많은 가게를 둘러보다가 ‘옥동자’라는 간판을 단 가게로 들어갔다. 아동복을 취급하는 가게였다. “사장님, 저 여기서 일하고 싶어요.” 내가 간절하게 매달리자 사장님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마지못해 받아주었다. 그날부터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시장 생활은 너무나 고단한 중노동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내가 열심히 하고 옷을 제법 잘 팔자 사장님은 “어디서 이런 복덩이가 들어왔어.”라고 감탄하며 후하게 월급을 챙겨 주셨다.

불행은 예고 없이 다가온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아기를 데리고 남편의 면회를 갔다. 남편은 여전히 우리 모녀에게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제대하고 나오면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살 수 있을 거라는 장밋빛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통 연락이 없던 시댁으로부터 셋방 주인집으로 전화가 왔다. “아기 엄마, 얼른 부대로 가봐야겠어. 아기 아빠가 …… 자살을 했대.” 부대에 도착한 후 남편 죽음에 대한 군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남편을 묻으면서 시댁 식구들은 “너 때문에 OO이가 죽었어!”라며 울분을 토했다. 나도, 내가 재수 없는 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남편을 보내고도 나는 곧장 옷가게로 출근했다. 딸과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감정을 추스르는 데 시간을 쓸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그가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죽을 만큼 내가 싫었어요?” 하는 자책이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녔다. 먹먹한 가슴과 달리 현실은 바쁘게 나를 떠밀었다. 나는 더욱더 미친 듯이 일했다.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 “쟤가 그렇게 일을 잘한다며?” 남대문시장에서 내 이름은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졌다. 43킬로그램의 마른 몸이었지만 나는 옷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훨훨 날아다녔고, 화장실 갈 시간, 식사 시간을 줄여가며 일을 했다. 우리 가게 매출이 껑충껑충 올라가고 단골이 늘어가자 옆 가게들은 시샘과 부러움이 섞인 눈으로 우리 가게를 지켜보았다. 어느 날 앞집 가게 언니가 명동에서 의상실을 운영하는 사장님을 소개해주었고 나는 월급을 두 배로 받고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1980년대 교복 자율화 바람을 타고 장사는 불티나게 잘되었고, 마침내 1989년 나는 독립해서 내 가게를 열었다. 내 생애 첫 사업이었다. 내 가게니까 신이 나서 더 열심히 일했다. 남편이 죽은 후 내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살다 보니 다른 길이 있었다. 가보지 않으면 모르는 게 인생이고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게 인생이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하나의 문이 열린다.

우리 일은 양복 입고 사무실에 앉아서 하는 일이 아니에요

해골물도 맛있게 먹으면 약수가 된다: “아파트나 빌딩을 청소하고 관리해 주는 일이에요. 처형과 함께 하면 성공할 자신이 있어요. 같이 해보실래요?” 셋째 제부는 강남의 아파트들을 다니면서 베란다에 샷시를 설치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강남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는 것을 눈으로 목격한 제부는 새롭게 생겨나는 아파트와 빌딩을 관리하는 사업을 생각해 낸 것이다. 지금이야 웬만한 아파트나 빌라와 같은 공동주택과 빌딩들은 건물 청소 및 관리를 위해 용역회사를 이용하는 게 상식처럼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그 일은 하나의 사업영역으로 자리 잡은 상태가 아니었다. 또한 용역이라고 하면 소위 ‘깡패’들이 무리 지어 다니면서 남의 이권을 빼앗으려고 폭력을 휘두르는 일이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모아서 일을 시키고 과도한 소개비를 떼어먹는 정도의 일로 인식되었다.

어머니는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사업자금을 마련해 주었다. 나는 낮에는 청소용역 일을 하고 밤에는 남대문에서 장사를 했다. 그러다가 청소용역 일이 빠르게 자리를 잡으면서 남대문 가게를 친구에게 맡기고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청소용역업은 남대문 옷장사와 여러모로 달랐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경쟁이 치열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보다 발로 뛴 만큼 효과가 바로바로 나타났다. 아파트와 빌딩 건설 붐까지 맞물려 사업은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남대문 점원부터 시작했던 열일곱 살 꼬마, 스물둘에 과부가 되었던 내가 회사를 차리고 성공하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타이밍과 촉이 좋았을 뿐 아니라 운도 따라 주었다. 내가 시도한 일이 시대의 니즈에 딱 맞아떨어진다는 건 흔한 일은 아니다. 내 인생이 온통 ‘재수 없는 년’이기만 한 건 아니었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바로 매일의 최선이다. 내가 내 선택에 책임을 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들어도 주저앉지 않았다. 원효대사가 해골 물을 마시고 약수 물이라고 여겼듯이 모든 일은 내 마음에 달렸다고 믿었다. 내가 마시는 물이 썩은 물인지, 약수인지는 내가 정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악착같이 매달렸다. 지금은 초라하지만 언젠가 내 삶을 바꿀 수 있다고 간절히 믿었기 때문이다.

달걀 프라이가 되기 싫다면 닭장을 박차고 나가라: 간절함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매일의 최선은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힘이 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이 두 가지를 느끼면 함께 일하자고 제안하곤 했다. 우리 회사가 담당하는 어느 빌딩에 청소용역을 나갔을 때의 일이었다. 잠시 쉬는 시간에 빌딩 앞 공원에서 직원들과 함께 있는데 한 중년 남자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준수한 외모에 말쑥한 차림새, 점잖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건물 청소하는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이런 일 안 해보셨을 것 같은데, 저희가 하는 일에 관심이 있으세요?” 그가 아까부터 우리가 일하는 것을 지켜보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도 호기심이 가던 차였다. “네, 괜찮으시다면 방법을 알고 싶네요.” 그는 대기업에서 오랫동안 일하다가 명예퇴직을 한 후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일을 하고 싶다는 그의 간절한 바람이 나에게 와 닿았다. 나는 그에게 명함을 건넸고, 얼마 후 그가 회사로 찾아왔다.

나는 그에게 청소용역업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대표님, 저 이 회사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저희 일은 양복을 입고 사무실에 앉아서 하는 일이 아니에요. 선생님께서 그동안 하셨던 일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상관없습니다. 제가 일할 수 있다는 자체가 너무 좋아요. 시켜주시면 정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는 간절히 일을 원했다. “저처럼 명퇴를 한 친구들이 주위에 많아요. 경제적 사정이 비교적 괜찮은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공통점은 그동안 하던 일과 동떨어진 일을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거죠. 그렇지만 저는 아예 물러서는 것보다 뭐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그는 우리 회사에 입사하여 6개월간 현장근무를 했다. 열정이 있는 데다 눈썰미가 뛰어나 현장을 빠르게 익힌 그는 이후 사무실에서 관리 업무를 맡게 되었고, 몇 년간 충실히 일을 한 후 직접 청소용역회사를 차려 독립했다. 나는 우리 회사에서 최선을 다해 일을 해준 그가 사업 초반에 잘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거래처를 소개해 주고, 회사운영 시 주의할 점들도 알려 주었다. 현장 경험을 탄탄하게 쌓은 그의 사업체는 지금 순항 중이다.

자신의 인생을 구원하는 성공은 한 발짝 차이다. 불만족스러운 현재에서 새로운 미래로 딱 한 발만 내디디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구원하고 싶어 한다. 남들 보기에 당당하고 떳떳하게 그리고 근사하게 살고 싶어 한다. 그러한 바람이 너무나 간절한데, 정작 뛰어들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다른 인생을 꿈꾸면서도 가만히 머물러 있는 한 변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실을 한탄하면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순응한다면 계란 프라이가 될 뿐이다. 병아리가 되고 싶다면 깨어져 프라이가 되기 전에 발을 내디뎌야 한다. 그것이 설혹 따뜻한 닭장을 나가는 위험한 선택이라 할지라도.

죽을힘을 다해 산다는 것

그야말로 지독하게 일하는 나에 대해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독종, 깡패, 조폭, 모두 거칠 것이 없이 일하는 나에 대한 평가다. 지금도 그렇다. 내가 머릿속에 종양을 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혀를 내두른다. 뇌종양이라고 하면 남들은 머리에 띠 두르고 누워서 꼼짝도 안 할 텐데, 안 아픈 사람보다 훨씬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란다. 특히 남편은 잔소리를 더 많이 하다. “그러다가 병이 더 나빠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지금 내 곁을 지키고 있는 남편은 나와 동갑으로, 아내와 이혼한 뒤 아들 딸 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우린 서로의 빈자리를 위로하다 36세 때 재혼했다. 회사에서도 함께 일하고 있다. 남편은 내가 이것저것 배우고 공부하는 것을 지지해 주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에너지를 많이 쓰니 건강이 상할까 봐 불안해한다.

“뇌종양? 그럼 회사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곱씹은 말이 있다. 바로 ‘아버지처럼 살기 싫어!’이다. 힘들거나 마음이 약해질 때 이 생각만 하면 다시금 의욕을 활활 불태울 수 있었다. 무능력한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그에 대한 반발로 누구보다 책임감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심지어 뇌종양을 처음 발견했을 때조차도. 나는 종합병원에서 진단받고 수술 날짜를 잡은 후에도 시큰둥했다. 입원 당일, 출근 준비를 하는 남편에게 말했다. “나 오늘 회사에 출근 못 해.” “왜?” “아, 병원에 가야 해서.” “병원? 어디 아파?” “응, 나 뇌종양이래. 오늘 입원하는 날이야.” 남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그런 남편을 향해 말했다. “나 대신에 회사 일 잘 봐야 해. 문제 있는 건 나에게 말해 줘.”

입원 후 약 일주일 동안 온갖 검사를 하면서도 머릿속엔 온통 회사 생각뿐이었다. 수술 후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온통 회사 걱정에 사로잡혀 있는 나의 모습에 남편과 딸, 어머니, 동생들 모두 아연실색했다. 퇴원 후 충분히 휴식을 취해야 했지만 고집을 부리고 사무실에 출근했다가, 볼펜을 제대로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손이 부들부들 떨려서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집에서도 쉬지 않고 노트북을 가지고 업무를 봤다. 내가 없으면 회사가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고, 모든 것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렸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에서 탄생한 나의 악착같은 책임감, 죽어도 무책임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도무지 나 자신을 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은, 사랑이었네: 아버지는 병원에 있는 나에게 매일 찾아왔다. 아버지는 말수가 적고 표현이 어눌했으며 나는 감정에 둔감했으니, 우리가 제대로 대화를 나누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퇴원할 때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내 곁을 지키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내 병이 아버지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는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남대문 장사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의 모습을 바꿔 놓고 싶었다. 어느 누구도 무시하거나 조롱하지 못하도록 당당하고 멋진 모습으로, 돈을 많이 벌면 나의 바람은 충분히 현실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옷을 입고 번듯한 집에서 살면 늘 움츠려 있는 아버지의 어깨와 등이 자연스럽게 쫙 펴질 것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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