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짜 원하는 인생을 살고 있는가
임재성 지음 | 평단
나는 진짜 원하는 인생을 살고 있는가
임재성 지음
평단 / 2017년 9월 / 288쪽 / 14,500원
아직도 원하는 인생을 살고 있지 않다면
정체성, 존재의 본질을 발견하라
정체성은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을 말한다. 정체성 연구로 유명한 독일 태생의 미국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정체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저 그렇게 생각한다거나 때로는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밑바탕에서 항상 무엇을 하든 그것이 아니면 인생의 모든 것을 볼 수 없게 될 정도로 개인에게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즉, 정체성이란, 인생이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자기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순항할 수 있도록 토대가 되어주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것을 아는 것이 쉽지 않다. 자기 밑바탕에서 삶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기가 힘들다.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 또 무엇을 위해 삶의 열정을 쏟아부어야 할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이런 고민은 쉽게 해결할 순 없을 것 같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보통 사춘기에 시작된다. 그리고 ‘제2의 사춘기’라 불리는 중년기에 다시 한 번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는다. 중년기가 되면 어느 정도 인생을 경험하고 자신이 추구한 삶의 결과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나름대로 성공적인 삶을 이어나갈 수도 있고, 원하는 삶의 결과를 얻지 못해 힘겨워할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이 쌓아온 인생의 결과물들을 보며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 점검하며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사는가?’ 자문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궁금해하며 그 실체를 찾으려고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더 나은 삶으로 항해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중년기라는 시기가 불분명하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35세부터 65세까지를 중년기라고 하니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어느 한 시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새로운 인생 항로를 설정할 때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은 마음 밑바탕에서 꿈틀대니 정체성은 평생을 살면서 고민하고 발견해야 하는 과제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45세 때 자기 삶을 돌아보며 진실한 자기 고백을 담아 《고백록》을 썼다. 철학적 성찰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적은 글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렇게 밝힌다. “사람들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센 파도와 넓게 흐르는 강과 별들을 보며 놀란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사상가이자, 문학가, 신학자로 명성을 떨치고 성인으로 추앙받았던 인물이지만 아우구스티누스도 자신에 대해 알려고 하는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그런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신을 향한 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의 사상적 배경이 곧 정체성에 대한 의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통찰력, 살아갈 세상을 읽어내라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 던져져 있다. 최첨단기기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세상을 지배한다. 4차 산업혁명은 미래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급속하게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사회구조와 정치 구도도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하루 앞을 예측하기 힘든 불확실한 격랑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안개 속 같은 삶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불확실한 미래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역량은 여러 가지다. 그중에 강력한 한 가지를 추천한다면 통찰력이다. 통찰력이 있으면 현재와 미래를 꿰뚫어 볼 수 있다. 나아갈 길의 모습을 훤히 볼 수 있으니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미래를 완전히 예측해 낼 수 없다. 하지만 변화가 일어나기 전의 조짐은 발견할 수 있다. 변화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그에 상응한 신호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기미라고 한다. 기미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기미를 보고 준비를 한다. 그 조짐과 기미를 알아챌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살아갈 날을 미리 대비할 수 있다.
《주역》의 <계사전>에 기미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기미를 아는 것은 신일 것이라, 군자가 윗사람과 사귀며 아첨하지 않고 아랫사람을 사귀며 함부로 하지 않으니 그 기미를 안 것이다.” “장차 배신할 사람은 그 말에 부끄러움이 있고, 마음속에 의심이 있는 자는 그 말이 갈라진다. 길한 사람의 일에는 말이 적고 조급한 사람은 말이 많다. 선을 속이는 사람은 그 말이 놀고 지조를 잃은 사람은 그 말이 비굴하다.”
인간관계에서도 기미를 보면 그 사람이 품고 있는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기미는 무슨 일에서든지 나타난다. 한 번의 큰 재앙이 일어나기 전에 유사한 29번의 경고와 300번의 징후가 나타난다는 내용의 ‘하인리히 법칙’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재앙적인 수준의 큰일이 일어나기 전에 수많은 기미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삶에 나타난 여러 가지 기미를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우리 삶의 기미를 읽어내는 것 중 인문학만 한 것은 없다. 인문학은 말 그대로 사람에 대해 공부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과 이미 살아왔던 삶의 궤적을 살필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사람답게 살아가는 법도 알게 한다.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인간의 본성과 존재 이유는 물론 미래의 삶과 세상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인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역사와 철학, 문학과 신화, 다양한 예술은 어떻게 참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읽어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정답을 외우는 시대에 살았다. 생각하고 사색하며 나아갈 길을 열어가도록 교육받은 것이 아니라 정해진 길을 잘 따라가도록 훈련받았다. 지금 우리 교육체계의 근간이 된 일제 강점기의 교육령이 그것을 증명한다. 일본은 생각하며 살지 못하도록 우민화 정책을 폈다. 그 일환으로 실업교육과 전문교육에 박차를 가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당장 끼니를 해결하고 기술을 배워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그런 교육의 영향으로 삶의 질이 달라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가도 톡톡히 치러야 했다. 스스로 삶의 길을 열어가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진 삶을 살았던 것이다. 누군가 제시해주는 정답을 외우고 그것대로 따랐지, 삶을 주도적으로 개척하며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운명론에 휩싸였고 시대와 환경을 탓했다. 한때는 부당한 사회와 시스템에 저항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오늘 하루를 버티며 살기도 벅차다. 스스로 길을 생각하고 나가지 못한 결과다.
대답에 길들여진 삶은 창의와 융합이 요구되는 시대에 부응하며 나아가기 힘들다. 앞으로 일어날 기미를 발견하기도 어렵다. 대답하는 사람은 기존의 것으로 사는 사람이기에 그렇다. 이미 있는 지식이나 이론을 잘 먹어서 그대로 뱉어내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기존의 지식을 잘 소화해서 누군가의 요구에 대답을 잘하면 똑똑하다고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렇게 대답한 것은 자신이 사유한 결과물이 아니다. 누군가의 것을 그대로 여과시켜주기만 했을 뿐이다. 그러기에 대답하는 사람은 새로운 것을 미리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힘들다.
그에 반해 일부 기득권층들은 ‘다른 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길들여진 교육이 아닌 스스로 생각하며 삶의 길을 열어가는 인문고전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또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를 키워나갔다. 즉, 통찰력을 기르는 교육을 받은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예측하며 자신들만의 성을 견고하게 쌓아갔다. 그때 쌓아 올린 성벽은 지금도 건재하다. 이제는 철옹성이 되어 어지간한 힘으로는 허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부의 대물림, 개천에서 용 나지 않는 사회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성벽을 무너뜨리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부 깨어 있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지만, 함께 힘을 모아 행동하지 않는다. 당장 내 삶의 앞날을 헤쳐 나가기도 벅차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 스스로 인문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대답만 잘하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 현실을 명확하게 진단하고, 나아갈 길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인문학의 힘은 정답을 가르쳐주지 않는 것에 있다. 삶을 스스로 여는 길이나 일을 잘하는 방법, 당면한 인간의 어려움을 헤쳐 나갈 구체적인 방법을 직접 알려주지 않는다. 대신 인간 삶의 여러 부분을 보여주고, 스스로 생각하며 답을 찾아가도록 돕는다. 인간의 본성, 존재의 의미와 이유를 여러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기미를 포착할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현실과 미래, 내 삶의 문제를 통찰할 수 있도록 이끈다. 해답 대신 질문을 던지게 한 것이다. 다양한 삶의 문제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며 답을 찾아보라고 유도한다.
질문을 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한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궁금증과 호기심을 해결하려면 도전이 필요하다. 무모한 도전까지도 말이다. 무엇보다도 궁금한 것을 누군가에게 질문해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때로는 황당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치에 어긋날 수도 있는 것들에 굴하지 않아야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의문에 반응하지 않으면 질문으로 이어질 수 없고, 삶을 읽어낼 수도 없다. 질문으로 이어지는 의문은 관심에서 비롯된다. 관심이 있어야 호기심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나의 현재 인생에 대한 관심,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 대한 관심, 나아가 내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에 대한 관심도 끊임없이 가져야 한다. 관심을 가지지 않는 순간 더 나은 미래는 보장받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후회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익숙함, 좋은 습관을 만들어라
사람은 쉽게 바꾸지 않는다. 잔소리를 해대고 채찍질을 해도 그때뿐이다. 가끔 삶을 바꾼 사람들이 나타나긴 하지만 얼마 못 간다. 스스로 삶을 변화시켜야 하는 명확한 동기를 부여받고, 그에 따른 습관을 형성하지 않는 이상 작심삼일에 그치고 만다. 어제와 같은 익숙한 생활과 결별하지 않는 이상 삶은 변화되기 힘들다. 가만히 살펴보면 해마다 비슷비슷한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짰다. 굳은 다짐으로 결심하고 슬그머니 포기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아 결심하고, 또 힘에 부쳐 포기하며 반복된 삶을 산 이들이 많다. 왜 이런 일이 매년, 매월, 매주 반복되는 것일까? 삶을 변화시켜보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의지를 다지지만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익숙한 삶으로 회귀하는 것은 모두 습관 때문이다.
삶을 바꾸는 데 가장 영향력 있는 덕목 한 가지를 말하라면 단연 습관이라고 할 수 있다. 습관을 정의해 주는 이야기를 들으면 공감이 갈 것이다. “나는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하인이고, 또한 모든 실패한 사람들의 하인입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사실 내가 위대하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실패한 사람도 사실 내가 실패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를 택해주십시오. 나를 길들여 보십시오. 엄격하게 대해 보십시오. 그러면 세계를 제패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나를 너무 쉽게 대하면, 당신을 파괴할지도 모릅니다.”
위의 이야기에서 ‘나’는 바로 습관이다. 습관의 힘이 놀라울 뿐이다. 지금 내 삶을 변화시키려면 습관을 바꾸어야 한다. 습관을 바꾸지 않는 한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대를 뛰어넘어 삶의 지혜를 전수해주는 《논어》의 시작도 습관에 대한 이야기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우리가 공부하는 학습이라는 단어의 유래이다. 배우는 일이 기쁜 일이라는 것이다. 사실 배움으로 모르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은 무척 즐거운 일이다. 이런 기쁨이 배움의 과정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배움을 통해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익히고 익히는 습(習)의 과정이다.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는 습관이 길러져야 배움을 통해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논어》<양화편>에는 대놓고 습관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성상근야 습상원야(性相近也 習相遠也), 타고난 본성은 서로 비슷하지만 습관이 차이를 만든다.’ 습관이 본성을 누를 만큼 힘이 있다는 이야기다. 결국 습관의 차이가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이는 선천적인 재능보다 후천적인 습관의 형성이 차이를 만든다는 의미다. 그러니 바람직한 습관을 기르는 데 온 힘을 다 쏟아야 한다. 습관이 이렇게 중요하지만, 삶에 온전히 적용해 나가기는 힘들다. 바람직한 습관을 만드는 것이 쉬웠다면 각종 명언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논어》의 첫 시작도 다른 이야기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좋은 습관을 형성시키는 것은 어렵다.
습관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기업경영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소비자들의 패턴, 즉 습관을 읽어내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습관 분석 프로그램은 임산부의 임신 개월 수까지 맞춘다. 그들이 다음에 사용할 물건을 예측해 마케팅에 활용한단다. 패턴이 읽히면 마케팅 전략에 넘어가고 만다. 사지 말아야 할 물건까지 카트에 담게 되는 것이다. ‘빅데이터’도 사람들의 습관을 읽어내고 분석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수많은 기업이 소비자의 습관을 읽어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습관을 읽어내는 것만큼 수익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자기 삶의 패턴, 즉 습관적인 행동을 살펴보라. 그 습관을 분석해보면 앞으로 어떤 삶이 펼쳐질지 예측이 갈 것이다. 눈에 훤히 보이는 삶을 보고도 아주 작은 노력도 기울이지 않겠다면 할 수 없다. 지금 그대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습관을 바꾸지 않고서 더 나은 미래를 꿈꾸지 마라. 어제와 같은 익숙한 인생이 펼쳐질 뿐이다.
뜨거움, 뜨거워야 움직인다
뜨거움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뜨거운 심장이 뛰고 36.5도의 체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주검은 싸늘하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몸에 첨단 의료기기와 의료 기술은 소용이 없다. 어떤 노력으로도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살아 있는 생명체로 다시 살아나게 하려면 뜨겁게 심장이 뛰어야 한다. 삶을 바꾸기 위해 움직이려면 가슴이 뜨거워야 한다. 뜨거워져야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뜨거운 가슴으로 인생을 살았던 이를 이야기한 소설이 있다. 바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이다. 소설 속의 조르바야말로 뜨겁게 인생을 살았다. “학교의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그 머리는 지식의 세례를 받은 일이 없다. 하지만 그는 만고풍상을 다 겪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열려 있고 가슴은 원시적인 배짱으로 고스란히 잔뜩 부풀어 있다.” 뜨거운 삶을 사는 것은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상관이 없다. 조르바는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가슴에는 뜨거움이 있다.
화자가 조르바를 본 생각을 글로 적어 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 나는 그제야 알아들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언어, 예술, 사랑, 순수성, 정열의 의미는 그 노동자가 지껄인 가장 단순한 인간의 말로 내게 분명히 전해져 왔다.” 조르바는 배움은 부족했지만 삶은 열정적이었다. 책벌레라는 화자보다 훨씬 경험이 풍부했다. 뜨거운 심장으로 세상을 산 살아 있는 경험은 사람을 대하고 사업을 하는 것에 지혜로 나타났다. 그런 조르바의 매일의 삶을 어떠했을까.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 자네 뭐 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 보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