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마지막 강의
제임스 라이언 지음 | 비즈니스북스
하버드 마지막 강의
제임스 라이언 지음
비즈니스북스 / 2017년 8월 / 191쪽 / 12,500원
첫 번째 질문 - 잠깐만요, 뭐라고요? (Wait, What?)
무언가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
“잠깐만요, 뭐라고요?”는 우리 인생에서 필수적인 다섯 가지 질문 중에서도 맨 처음에 위치한다. 이 질문은 명확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명확성이야말로 개념이든, 신념이든, 사업을 제안할 때든 간에 무언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여기서 “잠깐만요.”란 말은 불필요한 수사어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단어가 필수불가결한 이유는 이 말이 내가 그리고 다른 사람이 이 문제를 정말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시간을 벌어 주기 때문이다.
“조금 더 명확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잠깐만요, 뭐라고요?”는 성급한 결론이나 경솔한 판단을 방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생각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쉽게 단정을 지어 버릴 때가 있다. 짧은 토막글이나 전화 한 통만으로 그 사람이 무지하거나 나쁘다고 판단하여 거부해 버리기도 한다. 조금만 시간을 내어 그들의 생각과 개념, 특히 새롭거나 도전적인 관점을 이해하려고 했다면 거부감 대신 호기심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미 연방 대법관이었던 존 폴 스티븐스는 내가 사회에서 만난 이들 중 가장 훌륭한 질문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늘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을 했다. “변호인, 말하는 도중에 방해해서 미안합니다만 조금 더 명확히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후에 이어진 변호사의 답변은 백이면 백 모두 논리의 허점을 드러냈다. 스티븐스 대법관은 변호사에게 변론의 속도를 조금 늦춰 달라거나 요점을 풀어서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것은 증거나 사실일 수도 있고 법적인 근거일 수도 있다. 이를 통해 변호사들의 변론에 오류가 있다는 점을, 그것도 아주 큰 문제가 있다는 점을 드러냈다.
스티븐스 대법관은 변론의 중심에서 ‘잠깐만요, 뭐라고요?’에 해당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변호사들의 주장을 하나하나 해체했던 것이다. ‘질문’을 활용한 스티븐스 판사의 접근 방식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기억하고 적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을 시사한다. 처음엔 명확한 사실 관계를 밝히는 질문을 하고 주장은 그 다음에 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어떤 입장을 표명하기 전에 “잠깐만요, 뭐라고요?”라는 질문을 꼭 하길 바란다. 즉, 묻거나 확인하는 절차가 옹호나 지지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섣불리 확신하지 말 것!
물론 일상 속에서 실행하기는 말처럼 쉽지 않다. 작년에 라케시 쿠라나 교수의 마스터 클래스에 참가했던 교수들도 그 점을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하버드의 훌륭한 교육을 더욱 향상시키기 위해 내 동료들과 나는 매년 하버드의 능력 있는 교수들을 초대해 하버드 교육대학원에서 여러 차례의 마스터 클래스를 열고 있다. 교수들은 공개 수업을 한 뒤 이 수업을 통해 무엇을, 왜 달성하고 싶은지 참석한 교수들에게 설명한다.
라케시는 마스터 클래스에서 실화에 근거한 한 가지 사례를 들려주었다. 사건의 주인공은 제니, 리, 파이어트이다. 제니는 작은 홍보 회사의 직원으로 파이어트라는 네덜란드인 고객과의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제니는 파이어트와의 점심 식사에 자신의 멘토이자 회사 소유주인 리를 초대했다. 리는 아직 파이어트와는 초면이었다. 그날 파이어트는 제니와 함께 일하는 것이 너무 좋다며, 이를 여러 차례 언급했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얼마나 젊고 매력적인 여성인지 반복해서 강조했다. 리와 제니는 파이어트의 칭찬을 무시하며 대화의 초점을 사업에다 맞추려고 애썼다. 파이어트는 제니가 이 프로젝트를 직접 맡게 되는지 알고 싶어 했고, 리는 그녀와 회사의 다른 직원들이 함께 맡게 될 거라고 대답했다. 점심 식사가 끝나자 파이어트는 리를 향해 즐거운 시간이었으며, 미모의 젊은 여성과 함께 하는 식사 자리는 놓치지 않는다는 말도 남겼다.
이 마스터 클래스에서 하게 될 토의는 제니의 딜레마와 그녀가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 가야 하는 것인가였다. 제니는 파이어트의 발언이 성차별적이라고 지적하여 고객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까? 아니면 회사의 이익을 위해 잠자코 있어야 할까? 우리의 논쟁은 리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자신의 후배이자 직원인 제니를 위해 나서 주어야 했으며, 제니가 혼자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 라케시가 깜빡한 게 있다며 말했다. “오, 죄송해요! 리가 여성이라는 말을 안했나요?” 말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순간 나를 포함한 청중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잠깐만요, 뭐라고요?” 우리는 리가 남성이라고 제멋대로 가정해 놓고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한 온갖 주장을 펼쳤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민망해 하며 웃었다. 그 사례에서 리의 성별을 나타내는 힌트는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바로 그것이 라케시의 요점이었다. 그는 우리가 잘못된 가정을 내린 채 얼마나 쉽게 판단하고 주장을 펴는지를 보여주었다. 그 마스터 클래스 이후 나는 이 사실을 절대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감정적으로 대응하거나 섣부르게 예측하는 실수를 범하기 쉽다. 그럴 때 잠깐 멈춰서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잠깐만, 뭐라고?”는 나의 생각을 보다 분명히 하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명확히 사고할 수 있도록 해준다.
두 번째 질문 - 나는 궁금한데요? (I Wonder…?)
“왜 그럴까?” 궁금하면 질문하라
결혼하고 얼마 후 케이티와 나는 네덜란드에서 잠깐 살았다. 어느 날 아침, 우리 아파트에서 좀 떨어진 공원에서 조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원의 잔디밭이 이상했다. 내가 뛰고 있는 곳의 잔디는 짙은 녹색인데, 몇 미터 앞에 있는 잔디는 노란 빛이 나는 연두색이었다. “잔디 색깔이 왜 이렇게 다르지?” 의심은 그뿐이었다. 그냥 계속해서 뛰었다. 운하의 가장가지까지 가서 중심을 잡지 못했을 때, 몇 미터 앞의 그 연두색 ‘잔디’가 사실은 녹조식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때는 이미 늦었다. 1초 후 나는 운하의 초록색 점액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이 경험은 나의 두 번째 필수 질문을 떠올리게 했다. 그것은 바로 “나는 궁금한데요?(I wonder…)”이다. “I wonder…?”는 엄밀히 말해서 완성형 질문은 아니고, 질문의 앞부분에 위치한 단어들에 불과하다. 또한 ‘왜(why)’와 ‘할 수 있는지(if)’와 짝을 이루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질문, “왜 그런지 궁금한데요?”와 “…할 수 있는지 궁금한데요?”를 함께 묶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세상 모든 것은 발견되고 해석되길 기다리는 메시지
“왜 그럴까?”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유지하게 해주는 질문이다. 또한 내가 이 세상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지, 적어도 내 주변만큼은 어떻게 개선시킬 수 있을지 생각하게 해준다. 그래서 “왜 그럴까?”라는 질문은 결국엔 “…할 수 있을까?”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참고로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들면서 궁금한 것들이 줄어든다. 어린 시절 “왜요?”라는 질문을 귀찮아했던 부모나 교사들 때문에 호기심을 키우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른의 삶이란 매일 자신의 눈앞에 닥친 임무들을 수행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매사 호기심을 가질 여유와 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다. 그런데 호기심을 되살리려면 “왜 그런지 궁금한데요?”라는 질문을 생활화하면 된다.
“왜 그럴까?” “그럼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지 궁금한데요?”라는 질문은 그 자체도 물을 만한 가치가 있지만 “왜 그런지 궁금한데요?”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일단 “왜 그런지 궁금한데요?”를 먼저 물어보다가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지 못했을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가 달라질 수 있을까?”라고 묻게 된다. 다른 방식으로 하면 현재의 “왜 그럴까?”는 자연스럽게 미래의 “…할 수 있을까?”로 이어진다. 흑백 분리교육 같은 사회 문제를 살펴보자.
지난 20년 동안 사실상 흑백 분리교육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형편이다. 학교는 인종과 사회경제적 위치에 따라 점점 더 분리되고 있다. 여기서 필요한 질문이 바로 “왜 그런지 궁금한데요?”이다. 다행스럽게도 열정적인 교육 운동가들과 교육학자들이 이 질문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그들이 찾아낸 정답은 상당히 직설적이다. 인종차별 폐지 법령은 언제나 일시적일 수밖에 없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법적인 제재가 풀리면서 흑백 통합교육 프로그램은 다시금 무산된다. 지역사회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학교도 서로 분리된다. 최근 설립되는 차터 스쿨(자율형 공립학교. 정부의 지원은 받지만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학교)은 인종 통합학교라는 취지보다는 가난한 유색인 학생들을 지원하는 데 집중한다.
교육 운동가들이 “왜 그럴까?”라는 질문을 하고 이에 답하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도 이어지게 되었다. 다양한 인종이 함께 어울려 사는 지역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학생들에게 자신의 거주 지역 외의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기회를 더 주면 어떨까? 일부 차터 스쿨들이 좀 더 다양하게 집중하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통해 교육 운동가들은 끊임없이 흑백 분리교육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모았고, 이러한 노력으로 미국 교육부 장관 존 킹도 흑백 통합학교와 다양성을 교육부의 중점 과제로 삼았다. 그렇다고 변화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흑백 통합 학교가 예외적인 곳이 아니라 일반 학교가 되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하지만 개인들이 끊임없이 “왜 그럴까?”, “이러면 어떨까?”라고 질문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상태를 도저히 바꿀 수 없다고 받아들였다면 킹 장관은 인종학교 통합을 연방 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 번째 질문 - 우리가 적어도 …할 수 있지 않을까? (Couldn’t We at Least…?)
한 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물음
앞서 말한 두 번째 필수 질문처럼 “우리가 적어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한 가지의 구체적이고 완결성 있는 질문이라기보다는 다양한 맥락과 방식으로 질문의 핵심을 건드리는 물음이다. “우리가 적어도 이 점에는 동의할 수 있지 않나요?”라고 물으면 의견 차이를 넘어서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적어도 우리가 시작은 해 볼 수 있지 않아요?”라고 물으면 결과가 어떨지 확신할 수는 없어도 일단 시작은 해볼 수 있다. 구체적인 형태가 무엇이건 “우리 적어도…”로 시작되는 질문은 조금이라도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우리가 적어도 이 점에 동의하진 않나요?”는 둘 사이의 공통분모를 찾는 방법이기도 하다. 특히,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논쟁 중에 “우리가 적어도 이 점에 동의하진 않나요?”라고 물으면 잠깐 멈춰서 그래도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낼 수 있다. 한 발 물러서서 합의점을 찾은 후에는 두 발 앞으로 나가는 방법을 모색하면 된다. 영국의 어느 정치가는 이런 말을 했다. “대화의 진정한 가치는 상대방의 의견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세 번째 질문이 빛을 발한다. “우리가 적어도 동의할 수 있지 않나요?”는 집단주의와 극단주의를 해소할 수 있는 방편이다. 적어도 어떤 영역은 동의한다는 것을 알려 주는 초대장이기 때문이다.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과의 사이에서 공통분모를 찾으려면 이 세상엔 수많은 미묘하고도 다양한 결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보스턴 레드 삭스와 뉴욕 양키스 예를 들어보자. 몇 년 전 양키스의 유격수 데릭 지터가 은퇴했다. 그는 야구장 안팎에서 존경받는 출중한 선수이자 모범적인 인물이었다. 레드 삭스의 데이비스 오티즈는 2016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빅 파피’라는 별명의 데이비드 오티즈 또한 팀의 간판 타자로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양키스와 레드 삭스 팬들 사이에서 공통분모를 찾고 싶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지터와 오티즈 이야기를 꺼내면 된다. 양키스 대 레드 삭스의 격양된 대화 속에 이 두 선수의 이름이 나오기만 해도 경쟁의 열기가 약해지고 분위기가 부드러워진다.
네 번째 질문 - 내가 어떻게 도울까요? (How Can I Help?)
상대방 입장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겸손하게 묻는 것
타인을 돕는 것은 존경할 만한 일이지만 여기에도 위험이 따른다. 그 위험이란 바로 ‘구원자 증후군’이라는 덫에 빠지는 것이다. 말 그대로다. 꼭 자신이 나서서 구해 주어야 한다고 믿고, 자신이 그 방면의 전문가라고 믿는 태도나 입장이다. 자신이 구원자라고 믿거나 구원자처럼 행동하는 태도를 버리고 순수하게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당신이 누군가를 돕는다는 사실만큼이나 어떻게 돕는지가 중요하며, 이것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내가 어떻게 도울까요?” 이 질문은 누군가를 돕기 전에 겸손하게 방향에 관해 묻는 것이기도 하다. 누구나 자기 삶의 전문가는 자신이다. 우리가 약간의 도움을 제공할 순 있겠지만, 결국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상대가 자신의 문제에 주도권을 갖게 할 것
내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묻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표현하고 마주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쉽지는 않다. 아툴 가완디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말기암 환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치료법을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설명한다. 하지만 가완디가 지적했듯이 암 환자들과 가족들에게는 정직함과 애정을 갖고 그들에게 가장 나은 길을 제시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 물을 수 있다면, 각종 수술과 생명연장 치료를 제시하기 전에 오직 환자만이 대답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요?” “인생의 마지막 나날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가요?”
어떻게 도와줄까를 묻는 것은 죽음처럼 급박한 상황은 물론 평소에도 효과적일 수 있다. 어떻게 도와야 할지 묻는 것은 상대가 자신의 문제에 주도권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친구, 가족, 동료들에게도 매우 유용한 질문이다. 특히 어린이나 청소년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건 사랑이니까요.”
어떻게 도울 수 있겠는지 묻는다는 건 곧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고, 동등한 입장에서 관계를 이어가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내가 지금 도움을 제안하고 있지만 상대 또한 나에게 똑같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이다. 나는 켄터키 시골에서 몇 달 동안 자원봉사자로 일하며 이 교훈을 배웠다. 당시 나는 장애 아동이 사는 작은 복지관에서 봉사를 하게 되었다. 대부분은 선천적인 장애와 질병을 안고 있는 어린 아동들이었고, 십 대까지 건강히 살아갈 수 있는 아이들은 많지 않아 보였다. 그중 명랑한 십대 다운증후군 소녀 ‘신디’가 있었다. 장애우 복지관에 내가 들어가자마자 신디가 다가오더니 내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짐 오빠는 예뻐요.” 신디의 말에 웃기고 재치 있는 답을 해주려 시도했지만 번번이 시시하게 끝나 버렸다. 그런데 신디의 반응은 달랐다. “짐은 정말 웃겨요.” 이후로 매일 아침 신디는 내 손을 잡고 여러 가지 버전의 “짐은 너무 예쁘고요, 웃겨요.” 라는 말을 해주었다. 아무튼 하루의 대부분은 목욕시키기, 옷 입히기, 밥 먹이기, 아이들과 놀아 주기 등의 일들을 했고, 그곳에서 근무하는 몇 안 되는 직원들이 내가 배워야 할 것들을 틈틈이 가르쳐 주었다.
대부분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지만, 튜브로 식사해야 하는 아이의 튜브를 세척하는 일은 솔직히 두려웠다. 아이에게 해를 끼칠까 봐 겁부터 덜컥 났다. 그런데 신디는 불안해하는 나를 보더니 자신이 직접 시범을 보여주었다.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 동료에게 눈짓으로 물어보니 동료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디는 능숙하게 튜브를 세척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거 어렵지 않아요. 매우 쉬워요.” 나는 신디가 어른들 못지않게 아동들을 돌보는 법을 안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