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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탈무드 경전

박안석 지음 | 빅북



유대인의 탈무드 경전

박안석 지음

빅북 / 2017년 4월 / 320쪽 / 15,000원





유대인의 경전 - 탈무드



토라와 탈무드의 내력

토라는 구약성경의 첫 5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가리키는데, 히브리어로 ‘율법,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토라는 모세 5경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토라라는 말은 꼭 성경의 첫 5경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유대교 회당에 놓여 있는 두루마리 필사본을 토라라고 일컫기도 한다.

토라는 단순히 하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의미하기도 하고, 성경 자체를 가리킬 때도 있다. 유대인의 율법 전체를 ‘토라’라는 말로 부를 수도 있다. 또한 ‘토라’는 유대교의 가르침에 따라서 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토라는 유대인이 신념을 가진 민족이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유대교와 유대인의 생각을 오랫동안에 걸쳐 집대성한 탈무드는 모세가 전하였다는 또 다른 율법서인데, 구전하는 율법을 담은 문서집인 미슈나와 게마라를 병칭하는 용어이며 전 6부 6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대교는 보통의 다른 종교와 구별된다. 그리고 탈무드는 단순한 책이 아니다. 보통 이슬람교 또는 기독교라고 할 때는 고정된 가르침을 말한다. 그러나 토라와 탈무드는 성경도 아니며, 일반적인 개념으로서의 책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 도대체 탈무드가 무엇인가? 가장 적절한 대답으로 그건 종교, 법률, 철학, 도덕의 심포지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심포지엄은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고 1,200년 동안 지속되고 있다. 랍비들에 의해서 기록하고 정리된 것이 탈무드이다.

탈무드란 말은 ‘연구’란 뜻을 지니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200년 전에 편찬이 시작되어 현재 6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엄청난 분량이지만 오늘날에도 아직 집필이 끝난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탈무드는 ‘결말이 정해지지 않은 책’인 것이다. 각 시대에 따라서 새로운 학설, 견해가 자꾸만 추가되어 간다. 이것은 연구와 학습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몸을 굽히면 진리를 주울 수 있다

모름지기 사람은 겸허해야 한다. 하시디즘의 창시자인 이스라엘 벤 엘리젤(바알 셈 토브)은 이러한 말을 써서 후세에 남겼다.

어느 날 한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진리라는 것은 어디에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마치 길에 굴러다니는 돌처럼 흔한 것입니까?”“그렇다. 그러니 누구나 주울 수가 있는 거야.”

“그러면 왜 사람들이 그것을 줍지 않을까요?”

제자가 다시 물었다. 그러자 엘리젤은 이렇게 대답했다.

“진리라는 돌을 주우려면 몸을 굽혀야 하네. 사람들이 못하는 일은 몸을 굽히는 일이야.”



바알 셈이란 신으로부터 특별한 힘이 주어진 사람에게 부여된 칭호였다. 그는 1만 명의 헌신적인 제자를 거느렸고, 18세기에 동유럽에서 활약한 유대인 랍비였다.



배움에 관한 탈무드의 교육과 철학



지식보다 지혜를 소중히 여긴다

“사람이 가진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지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째서 지성이 가장 소중하냐?”고 하면 그것은 유대인의 종교적 전통에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은 오랜 역사에 걸쳐서 혹독한 박해를 받아왔다. 수없이 많은 도시가 불타고 재산을 빼앗겼다. 그래서 유대인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반드시 묻는 수수께끼가 있다.

“만일 네가 집이 불타고 재산을 빼앗긴다면 무엇을 가지고 달아나겠느냐?”



그러면 아이들은 돈이나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간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어머니는 “모양도 빛깔도 냄새도 없는 거야.” 하고 힌트를 준다. 그래도 대답할 수 없으면 어머니는 가지고 가야 할 것은 돈이나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지성이라고 가르쳐 준다. 누구도 사람의 지성을 빼앗을 수는 없다. 이러한 연유로 유대민족에게는 책에 관한 속담이 많이 있다.

- 여행하다가 고향 사람들이 모르는 책을 보게 되면 반드시 그 책을 사서 고향으로 가지고 오라.- 만일 집안 살림이 너무나 가난해서 물건을 팔아야 한다면 먼저 금, 보석, 집, 토지를 팔아라. 마지막까지도 팔아서는 안 되는 것은 책이다.- 만일 두 아이가 있어서 한 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책을 빌려주는 것을 싫어하고, 또 한 아이는 책을 빌려주기를 좋아한다면 너희 책은 뒤의 아이에게 물려주어라.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할 유산은 뭘까?

요즘의 부모들은 자식에게 자동차까지 사주고, 게다가 용돈을 많이 주고 능력 이상의 학교에 보내고 싶어 한다. 이런 일들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현상에 속하는 일이다. 즉, 이러한 부모는 자기가 예전에 가질 수 없었던 것들을 자녀들에게 주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부모가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것과 같은 걸 자식들에게 갖게 하면 족하다. 부모가 가지고 있는 애정, 근면성, 겸손, 절약의 정신 등 이러한 것을 아이들이 받아들이기만 해도 충분히 훌륭한 교육이 된다.

물론 자녀들이 좋은 회사에 들어가거나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러나 흔히 부모가 갖지 못했던 것을 자녀들에게 주고 싶다거나 부모가 못했던 일을 자녀들이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싶다고 부모가 애를 태우는 동안 정작 부모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주지 못할 수가 있다. 탈무드에서는 말한다.

- 아버지가 나의 마음에 남겨준 것을 나는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고 싶다.

- 다섯 살 된 아이는 당신의 주인이고, 열 살 된 아이는 노예이고, 열다섯 살 된 아이는 당신과 동격이 된다. 그리고 그 뒤에는 양육 방식에 따라서 친구도 되고 원수가 되기도 한다.



유대인에게 배우는 중용의 덕



돈이나 섹스는 더러운 것이 아니다

유대인은 결코 금욕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유대인에게는 청빈이라는 개념이 없다. 그러나 젊을 때는 오히려 가난한 것이 좋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가난한 젊은이가 나중에 성공하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면 비참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젊을 때의 가난은 성공의 실마리를 주는 절호의 환경이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만큼 강한 것도 없다. 젊어서 가난하다는 것은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중년이 되어서도 가난한 것은 불행한 일이다. 젊음은 원인이고 중년은 결과이다.

유대인은 돈과 섹스를 더러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난을 악이라거나 부끄러운 것이라고는 보지 않으나 불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과 섹스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이 없으면 사람은 그것만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있어야만 비로소 다른 일을 즐길 여유가 생긴다. 그러므로 궁색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쨌든 가난은 인간의 행복에 큰 적이 아닐 수 없다. 가난하면서도 정신적으로 독립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성경에도 “지혜는 힘보다 낫다! 그러나 가난한 자의 지혜는 멸시를 받고 그의 말은 사람들이 귀담아 듣지 않는다.”(전도서 9:16)라고 쓰여 있다. 성경 시대부터 인간의 사회는 지금과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 사회에도 거지가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놀라겠지만 동유럽에는 마을이나 읍마다 한두 명씩이나 한 무리의 거지가 반드시 있었다. 그들은 ‘슈노렐’이라는 불렸는데,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구걸하는 일은 없었다. 거지도 하나의 직업이며 신의 허가를 받은 존재였다. 그들은 사람들의 선행(자비)의 대상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슈노렐 중에는 대단한 독서가가 많았고 탈무드에 정통한 자도 적지 않았다. 시너고그(유대교에서 예배하는 장소)의 단골 참석자이기도 하고 유대교 모임의 한 사람으로서 토라와 탈무드의 토론에도 참여했다. 이런 사정 때문이었는지 탈무드에는 가난한 자를 변호하는 취지의 격언도 볼 수 있다.

-가난하다고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 그들의 셔츠 속에는 영혼의 진주가 숨겨져 있다.



과도한 향락은 파멸을 초래한다

어떤 여객선이 바다를 항해하는데 뜻하지 않게 폭풍우를 만나 항로를 벗어나 버렸다. 강한 비바람이 불어대고 며칠 동안이나 하염없이 바다를 표류했다. 이윽고 낯선 섬에 닿았다. 그러자 바람이 잔잔해지고 배가 움직이기 않게 되었다. 섬에는 무성하게 나무가 우거지고 맛있는 갖가지 과일이 열리고 예쁜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배를 탄 승객들은 다섯 그룹으로 나뉘었다.

첫째 그룹은 “우리는 배에서 떠나지 말자. 언제 좋은 바람이 불지 모른다. 바람만 불면 바로 닻을 올리고 배는 떠난다. 그때 우리가 섬에 남겨지면 신세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니 만일을 대비하여 배에서 떠나지 말자.” 하면서 배에 남아 있었다. 둘째 그룹은 잠깐만 섬에 올라가 보자고 했다. 그들은 상륙하자 꽃을 꺾고 맛있는 과일을 따먹고 적당한 시간을 즐기다가 배로 돌아왔다. 셋째 그룹은 배에서 내리자 섬에서 충분히 즐겼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는 것을 잊었다. 그러나 배가 닻을 올리는 것을 보자 허둥지둥 돌아왔다. 그래서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편안한 자리를 잃고 비좁은 구석 쪽에 앉아야 했다.

넷째 그룹은 섬에 들어가 너무나 즐기다가 출발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소리를 들었어도 닻을 올리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다고 하면서 마지막까지 섬에서 즐기자고 하였다. 그러다가 배가 거의 움직이기 시작하자 당황하여 나무 덤불 사이를 허둥지둥 달려 돌아왔다. 그 바람에 여기저기 긁혀서 상처를 입고 혹은 넘어져서 다치기도 하였다. 다섯째 그룹은 섬의 즐거움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 배가 떠나는 것을 모른 채 섬에 남겨지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맹수에게 잡아먹히고 혹은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쓰러졌다.

이 이야기 속에서 배는 우리의 바른 생활을 상징하고 있다. 배는 목적지가 있고, 섬은 쾌락을 상징한다. 랍비들은 첫째 그룹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항해는 괴로운 것으로 인식되므로 이런 즐거운 섬이 보이면 한동안 가서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둘째 그룹이 가장 옳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적당하게 섬을 즐겼기 때문이다. 셋째, 넷째, 다섯째 그룹으로 나갈수록 그들은 쾌락에 점점 깊이 빠져버렸다. 특히 다섯째 그룹은 자기의 장래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렸기 때문에 망했던 것이다.



삶에 여유를 주는 유대인의 해학과 유머



세 개의 통과의례(관문)

예루살렘에서 온 부자 나그네가 여행 도중에 어느 도시에서 병에 걸려 죽었다. 그는 자기의 죽음이 가까운 것을 알자 신세를 진 집주인을 불렀다. 나그네는 이 집주인을 믿고 자기가 가졌던 귀중품을 모두 맡기고 이런 말을 남겼다. “만일 나의 아들이 예루살렘에서 찾아와 세 번 기지를 발휘하면 내가 맡겼던 것을 그에게 내주시오. 나의 아들이 그런 재치를 부리지 못한다면 당신이 가지시오.”

이윽고 이 나그네는 죽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의 아들이 이 도시에 찾아왔다. 성문을 들어선 아들은 이 도시 사람들에게 자기 아버지가 신세진 집을 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집이 어딘지 가르쳐주려고 하지 않았다. 거기에 마침 큰 나무 짐을 짊어진 사람이 왔다.

“그 나무를 나에게 파십시오.” 아들이 말했다.

“좋습니다.” 하고 그 사람이 대답했다.

“이건 나무 값이오.” 그런 후 젊은이는 그 나무를 자기 아버지가 신세진 집에 가져다 달라고 말했다. 아들은 나무를 짊어진 사람을 뒤따라가서 마침내 그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것이 젊은이의 첫째 기지였다. 그는 자기가 죽은 부자의 아들이라고 자기소개를 하고 주인에게 기분 좋은 환대를 받았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점심을 들게 되었다.

이 집에는 집주인 외에도 아내와 두 아들, 두 딸이 있었다. 식탁 위에는 치킨 구이 다섯 마리가 나왔다. 주인은 손님에게 치킨을 나누어 달라고 부탁했다.“제가 나누다니요. 황송합니다.”라고 젊은이가 말했다.

“뭐 그렇게 사양하지 마시고 공평하게 나누어 주십시오.”라고 주인이 말했다.

그래서 젊은이는 치킨을 나누게 되었다. 그는 치킨 한 마리를 나누어 부부에게 주었다. 다음 치킨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마찬가지로 셋째 것을 두 딸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마리는 자기 앞에 놓았다. 그들은 음식을 먹기 시작하였지만 손님의 이 엉뚱한 분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 젊은이의 두 번째 기지였다.

저녁식사에는 살찐 암탉이 나왔다. 주인은 또 손님에게 이 암탉을 가족에게 나누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번에는 그는 머리 부분을 주인에게, 내장을 부인에게, 두 다리를 두 아들에게, 날갯죽지를 두 딸에게 주고 몸통은 자기가 가졌다. 이것이 그의 세 번째 기지였다.

“예루살렘에서는 그렇게 나눕니까?”라고 주인이 물었다.

“점심때는 아무 말도 드리지 않았지만 이번엔 꼭 그 까닭을 듣고 싶군요.”

“저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만 굳이 나눠달라고 청하셨기 때문에 나누어드렸지요. 그러면 제가 왜 그렇게 나누었는지 이유를 말씀 드리지요. 낮에는 일곱 사람에게 다섯 마리의 치킨이 나왔었습니다. 나눈 근거는 이렇습니다. 주인어른과 부인 그리고 치킨 하나로 셋이 됩니다. 또 아드님 두 분과 치킨 하나로 셋이 됩니다. 따님 두 분과 치킨 하나로 역시 셋이 됩니다. 그리고 저와 치킨 둘로 셋이 됩니다. 모두 평등하게 나누었습니다. 다음에는 저녁식사입니다. 저는 먼저 주인어른께 머리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주인어른이 이 댁의 우두머리이기 때문이지요. 부인께 내장을 드린 것은 부인은 풍요의 상징이기 때문이지요. 또 두 아드님에게 두 다리를 드린 것은 두 분이 이 집의 기둥이기 때문입니다. 두 따님에게는 날갯죽지를 드렸습니다. 장차 두 분은 이 집을 날아서 떠나실 분이니까요. 제가 몸통을 먹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배를 타고 여기에 왔으며 돌아갈 때도 배를 타고 가기 때문입니다.”

“참 훌륭합니다. 과연 당신은 그분의 아들이오.”

주인은 그렇게 말하고 보따리를 내밀었다.

“이것이 당신에게 주는 유산이오. 당신의 집이 번영하기를 빕니다.”



유대인은 세련된 조크를 아는 민족이다

유대인은 기지나 재치를 중요시한다. 아마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그것을 중요시하지 않나 싶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조크나 수수께끼도 매우 좋아한다. 조크나 수수께끼는 두뇌를 가는 숫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의외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철이 들면 저녁 식탁에서 아버지가 여러 가지 수수께끼를 내준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 서로 조크를 주고받는다. 조크가 웃음을 가져오기 때문이 아니다. 거기에는 뜻밖의 암전이 있기 때문에 머리의 두뇌활동을 도와준다. 머리라는 기계에 기름을 쳐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미드라쉬에는 다음과 같은 전형적인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느 부자 유대인이 병에 걸렸다. 그는 자기의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유서를 구술하였다. 유서의 골자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유서를 아들에게 가져다준 충실한 노예에게 나는 전 재산을 남긴다. 내 아들 유데아에게는 내가 가진 모든 것 중에서 하나만을 골라서 주기로 한다. 한 가지만 골라서 가져라.”

드디어 이 유대인이 죽자 노예는 유서를 랍비에게 보였다. 랍비는 노예와 함께 아들한테 갔다.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에게 단 한 가지밖에 남기지 않았다. 나머지는 모두 노예에게 준다고 말했다.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겠는가?”그러자 아들은, “나는 이 노예를 상속받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들은 노예를 상속받은 결과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물려받은 것이다. 죽은 아버지는 자기가 그렇게 쓰지 않았다면 자기의 재산을 노예가 멋대로 처분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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