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선으로 승부하라
유영만, 고두현 지음 | 새로운제안
곡선으로 승부하라
유영만, 고두현 지음
새로운제안 / 2016년 12월 / 288쪽 / 15,000원
PART 1 삶은 End 게임이 아닌 And의 향연이다
삶은 End 게임이 아닌 And의 향연
삶은 오로지 앞만 보고 끝을 향해서 달려가는 End 게임이 아니라,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그 끝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And의 향연입니다. 하루의 끝에서 내일이 시작되고, 주말에서 주초가, 월말에서 월초, 그리고 연말에서 연초가 시작되듯이. 언제나 끝은 영원한 종착역이 아니라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또 다른 출발선임을 안다면 삶을 대하는 새로운 자세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끝은 그냥 끝이고 바닥이며 절망이고 좌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을 직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비록 오늘의 끝이 안 좋더라도 오늘의 끝에서 새로운 내일을 꿈꾸면 됩니다. 한 번의 시도 끝에 맞이하는 기대 이하의 성과도 또 다른 성취를 위한 출발선의 교훈으로 삼으면 됩니다. 이렇게 삶은 끝(End)에서 또 다른 출발이 시작되고(And) 그 시작이 어제와 다른 끝을 맺어가는 수많은 And의 향연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왜 까맣게 잊고 사는 것일까요.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는 아무것도 아닌 눈만 존재할 뿐입니다. 시작해서 끝으로 달려가는 사람에게는 출발선과 목적지만 보입니다.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목적지로 가는 여정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만나는 모든 마주침이 깨달음의 원천이고 행복의 원동력입니다. 오로지 달성하고 싶은 목표만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저의 경우 온몸으로 체험하고 느끼면서 생각한 바를 20여 년간 글로 남기려는 노력을 하다 보니 애쓰지 않아도 사물을 바라보는 스케일이 커졌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급하게 ‘이건 끝이야!’라고 단정해버리는 습관이 조금씩 사라집니다. 물론 애써 썼던 원고를 버릴 때는 보통 화가 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곧 화가 풀리고 나중에 다른 책에 꼭 되살려주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원고를 따로 모아둡니다.
이것이 End와 And의 차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영구삭제’ 해버리면 End지만 자꾸 모으고 또 모으면 And입니다. 지금 당장 쓰는 책에는 쓸모가 없을지 몰라도 나의 원고 저장고에는 보험금이 쌓이는 것처럼 차곡차곡 늘어납니다. 그리고 반드시 한 번은 안타를 날려주곤 합니다. End가 And로 이어지면서 수많은 끝을 겪어본 체험이 가장 소중한 상상력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나도 글을 쓸 때는 멋진 테마를 향해 일직선으로 단박에 질주해서 끝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나의 머리는 늘 여러 가지 아이디어와 잡다한 생각들로 가지를 칩니다. 다른 골목으로 빠지거나 국도와 지방도로로 우회하고, 어떤 때는 서행을 하고 후진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아이디어의 광맥을 만나기도 합니다. 길을 잃고 헤맨 덕분에 색다른 길이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 곡선으로 헤매는 우여곡절의 여정이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우연을 만나는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살면서 아주 빠르고 단호하게 End를 선언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초점을 최대한 좁히고 모든 잡동사니를 배제해 단순명쾌한 프로세스를 따라 뚜렷한 결론 혹은 결과를 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주로 ‘단기전’일의 때가 많습니다. 글로 따지자면 칼럼이나 짤막한 에세이 정도랄까요. 삶은 End 게임이라기보다는 길고 넓게 봐야 하는 And의 향연이 아닌가 합니다. 너무 많이 잘라버리고, 너무 야박하고, 너무 빡빡하고, 너무 조급했다가는 얼마 가지도 못해서 지쳐 떨어지기 십상인 게 삶의 본질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자주 ‘이게 마지막’이라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합니다. 그런데 정말 End라고 확신할 만한 근거를 갖고 있습니까?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 다른 가능성을 품고 기다리는 또 다른 마지막이 있습니다. 마지막이라고 말하는 순간 거기서 가능성은 성장을 멈춥니다. 마지막은 한 번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곡선형 인간은 흐르는 물처럼 언제든 속도와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사람입니다. 천천히 흐르지만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혹시 실패와 좌절을 인생의 장애물로, 폭파하고 뚫어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만약 그것을 폭파하거나 뚫지 못하면 End를 선언하실 건가요? 걸림돌도 지나고 나면 디딤돌로 바뀝니다. 장애물도 당시에는 나에게 괴로운 장벽이지만 지나고 나면 어둠 끝에 맞이하는 새벽의 깨우침이자 마주침의 교훈입니다. 당시에는 곤경이었지만 지나고 나면 아름다운 풍경으로 되살아납니다. 모두가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끝에서 새로운 배움이 다시 시작되는 And 출발선입니다.
PART 2 곤경도 지나고 나면 풍경이다
1%가 되어야 한다는 불행한 자기 암시
혹시 ‘20 대 80의 사회’하는 말을 기억하십니까? “백화점 매출의 80퍼센트는 단골손님 20퍼센트가 올려주는 것이다.” 이 사례는 1897년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가 실제로 관찰하고 연구해서 내놓은 명제이기도 합니다. 100을 80과 20으로 나누는 몇 가지 다른 예도 있습니다. 회사 일의 80퍼센트는 일 잘하는 20퍼센트의 직원들이 하고, 부의 80퍼센트는 20퍼센트의 시간이 창출한다 등등. 경영학에서 거의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내려면 이 ‘20 대 80’의 법칙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돈 되는 20퍼센트의 고객을 각별히 모시고, 성과를 많이 내는 20퍼센트의 핵심인재에게 확실히 보상을 해줘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참 좋습니다. 생산적이고 신선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심리라는 게 참 묘해서, 뭐가 하나 신묘하게 들어맞는다 싶으면 무리하게 확대 적용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오남용하듯, ‘20 대 80’ 프레임도 전가의 보도처럼 이리저리 끌려 다닙니다. 갖고 있는 물건의 80퍼센트는 쓰레기, 인맥 가운데 80퍼센트는 무의미한 사람들, 학생들의 80퍼센트는 열등생…. 나아가 ‘20 대 80’의 법칙은 암울한 미래를 암시하는 숙명의 법칙으로까지 받아들여집니다. 잘나가는 20퍼센트와 전혀 그렇지 못한 80퍼센트로 사회가 양극화된다는 것이지요. 20퍼센트만 일을 하고 나머지 80퍼센트는 ‘사회적 잉여자’가 된다고 합니다.
요즘은 더 살벌해져서 1 대 99, 즉 잘나가는 1퍼센트와 그 외의 99퍼센트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것들)’ 인생으로 사회가 갈리게 된다고 단정하는 목소리가 사회 곳곳에서 울려 퍼집니다. 지금 죽어라고 준비하지 않으면 잉여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고 협박하는 마케팅이 사회적 트렌드의 하나로 정착해버릴 것만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1%가 될 가능성은 1%도 안 됩니다. 그런데도 그 1%가 되기 위해 인생의 99%의 시간을 조급함과 불안감에 휩싸여 직선으로 질주하는 불행한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조금만 게으름을 피워도 암담해집니다.
사람들은 발버둥을 칩니다. 어떻게든 1퍼센트가 되어야 한다, 혹은 더 밀려 내려가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 속에 불안한 미래를 두려움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언제 찾을지도 모르는 네 잎 클로버의 행운을 얻기 위해 주변에 널려 있는 세 잎 클로버의 행복을 짓밟고 다니는 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볼 일입니다. ‘20 대 80’과 그것이 업그레이드(?)된 ‘1 대 99’ 프레임은 언제 찾을지도 모르는 행운의 네 잎 클로버를 위해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행복의 세 잎 클로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사고방식의 병폐입니다. 1퍼센트라는 목표점만 바라보고 뛰어가는 사람은 목표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변 풍경을 즐길 시간적 여유가 없고 언제나 불안과 긴장, 초조와 조급함 속에서 인생의 많은 부분을 놓치고 살아갑니다.
몇 년 전에 제주도 100킬로미터 마라톤에 출전한 적이 있습니다. 시종일관 선두권을 유지하는 선수들에게는 오로지 출발선과 골인지점만 보입니다. 오로지 1등을 해야 되겠다는 긴장감과 선두권에 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이 눈에 들어오지 못하게 희석시킵니다. 반면에 선두권에는 끼지 못하지만 후미에서 달리는 선수들은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며 달리는 나의 존재를 깊이 생각해보는 사색의 달리기를 즐길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20 대 80, 혹은 그보다 더 촘촘한 1 대 99라는 생각의 그물에 걸려 발버둥치는 물고기가 되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20 대 80과 1 대 99에서 20%와 1%가 되려는 노력 자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20%와 1%에는 꼭 공부 잘하는 사람, 돈 많이 버는 사람, 일 잘하는 사람만 포함되는 건 아닙니다. 평범한 삶을 살면서도 자기 일에 만족하며 행복을 느끼는 1%가 되는 게 중요합니다. 비록 가진 것은 부족하지만 내 능력과 시간의 20%를 남을 위해 사용하며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진정한 1%의 사람이 아닐까요?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 경제가 처한 작금의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절대화하는 것이 정말 불편합니다. 그런 직선적 사고는 복잡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만듭니다. ‘파레토 최적(Pareto optimal, 다른 사람이 불리해지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유리해질 수 없는 상황)’이나 ‘20 대 80’ 법칙은 신중하게 적용되면 아주 효과가 좋은 명약입니다. 하지만 자칫 남용하면 자기충족적 예언 혹은 불행한 자기암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정말 불행한 게 아니라 불행하다고 스스로를 자학하다 보니, 그것이 현실이 되어버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PART 3 인생은 객관식이 아니라 주관식이다
객관식 시험 치듯 살아가지 마라
중고등학교 시절 시험기간을 기억하십니까? 나는 사지선다형 세대입니다. 네 가지 보기 중에서 하나를 골라 답으로 적으면 되는 것이었지요. 이때 답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네 가지뿐입니다. 넷 중에서도 정답은 오직 하나고 그 외에는 답이 될 수 없지요. 그런데 우리는 학창 시절 그랬듯이 지금도 객관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인생을 객관식으로 본다면 답이 될 수 있는 것은 네 가지뿐입니다. 많아야 오지선다, 다섯 가지 정도겠지요. 우리는 여전히 네다섯 가지 잣대로 이 다양한 인생의 성공과 실패, 정답과 오답을 재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미국 코넬 대학교 심리학 연구팀은 올림픽 당시의 방송화면을 통해 은메달리스트 23명과 동메달리스트 18명의 표정을 분석했습니다. 메달 색깔이 결정되는 순간,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살펴본 것이지요. 동메달리스트의 행복점수는 10점 만점에 7.1점으로 환희에 가까웠지만, 은메달리스트는 행복점수가 고작 4.8점으로 평가되었습니다. 행복점수는 은메달보다 동메달이 더 높은 점수를 받은 것입니다. 연구팀은 나아가 메달리스트들과 직접 인터뷰를 했고 그 결과, 동메달리스트들은 “적어도 이것만큼은 이루어졌다”는 만족감이 더 많이 표출되었고, 은메달리스트들은 “거의 이길 뻔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더 많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동메달이 은메달보다 순위가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더 만족감을 나타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은메달을 딴 사람은 1등을 할 수도 있었는데 금메달을 놓쳤다는 진한 아쉬움 때문에 더욱 불만족을 느낍니다. 하지만 동메달을 딴 사람들은 이것이라도 나에게 주어진 큰 성취이자 행복이라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한국사회로 돌아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금메달리스트와 은메달리스트에 대한 평가는 너무나도 다릅니다. 금메달 외에는 모두 실패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깁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한 대다수의 선수들은 행복감을 느끼기가 어렵겠지요. 더 큰 문제는 1등을 해도 만족하지 못하고 불안감에 휩싸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1등을 해도 지난번보다 더 완벽한 1등을 하고 싶고, 엄청난 성과를 내도 지난번과는 질적으로 다른 완벽한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열차가 끝없이 가속페달을 밟으며 질주하고 있습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한 개그맨의 유행어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은 것도 1등을 하지 못하면 2등과 3등도 모두 실패자요 패배자라고 낙인찍어버리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이 표출된 것 아닐까요?
이처럼 한국인들은 지나친 경쟁 구도 속에서 살아가면서 생기는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해 한국의 자살률은 2003년 이후 12년 동안 OECD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옆과 뒤를 돌아다볼 여우가 없고 앞과 위만 보고 달리면서 겪는 심각한 불안감과 성공 공포증은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꼭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성공했어도 성과가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견디지 못하는 심리적 불안감은 외부의 변화를 감당할 수 있는 내면 기반이 취약하거나 삶의 다양한 측면을 유연하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1등이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객관식형 사고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성공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며, 나는 무엇을 위해 성공하려고 하는지, 나에게 성공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자기 확신 없이 무조건 앞만 보고 질주해왔기 때문입니다.
곡선은 시작이 곧 끝이고, 끝이 곧 새로운 출발입니다. 시작과 끝이 구분되지 않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세계가 곧 곡선의 세상입니다. 반면 직선은 출발점과 종착지가 정해져 있습니다. 시작과 끝만 존재하고 직선은 출발점과 종착지가 정해져 있습니다. 시작과 끝만 존재하고 결과에만 의미를 부여하는 세계입니다. 때문에 과정에서 즐기는 여유로움과 운치는 생략되고 오로지 결과에만 집착하게 되지요. 직선적 삶에서는 호기심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직선의 여정에는 약간의 변수가 작용하긴 해도 비교적 규칙적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곡선으로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세계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날지 불확실하기에 불안하지만, 그래서 기다림과 설렘, 모험심과 도전정신이 활발하게 일어나지요.
객관식 인생은 주어진 문제에 대한 답 중에서 한 가지 정답을 찾아야 하는 시험의 연속입니다. 객관식 인생에는 주인은 없고 손님의 관점, 즉 객관만 존재합니다. 객관적으로 볼수록 관객의 입장으로 전락해서 주인의 관점으로 보기가 어려워집니다. 반면에 주관식 인생은 주어진 문제에 대한 하나의 정답을 찾는 인생이 아닙니다. 주관식 문제에는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저마다의 주관적 견해와 가치판단이 반영된 여러 가지 현답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네 가지보다 훨씬 많은 답이 있습니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리는 게 세상사의 이치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닫힌 문 앞에서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을 찾아 두드리는 것입니다. 많은 청춘이 20대가 넘어서 오춘기를 겪는 이유는 유년 시절을 성장통 없이 지나면서 자기 자신을 성찰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장통이란 다르게 표현하면 ‘창조적 마찰’입니다. 새로운 자신을, 더 나은 자신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고통입니다. 직선적 삶을 살고 있는 우리는 성장통을 피해 앞으로만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길을 따라, 속도를 높이는 데만 주력하고 있습니다.
곡선적 삶은 성장통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쳐 충분히 경험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합니다. 행동을 바꾸기 위해서 생각을 바꾸려는 안이한 노력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행동을 통해 타성에 젖은 생각을 망치로 부셔야 합니다. 정답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입니다. 인생은 본래부터 저마다의 신념과 가치판단으로 살아가는 주관식입니다. 당신의 인생에서만큼은 당신이 써가고 있는 그 답이 바로 정답임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PART 4 삶에서 중요한 것은 남의 시선이 아니라 나의 주관이다
행복해지고 싶은가, 행복해 보이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