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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지혜에서 배우다

나이토 요시히토 지음 | 태인문화사



성경의 지혜에서 배우다

나이토 요시히토 지음

태인문화사 / 2016년 12월 / 208쪽 / 12,000원





CHAPTER 1. 인간관계를 좋게 하는 10가지 지혜



쓸데없는 편견을 버려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태복음 9장 13절)

위에 소개한 구절은 당시 엘리트 계급이었던 바리새인들이 세리(시민으로부터 세금을 걷는 사람) 마태의 집에서 예수가 세리와 같이 식사하는 것을 보고 함께 있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 선생은 어찌하여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느냐?”라고 따지자, 예수가 그에 대한 대답으로 들려준 이야기다. 예수는 매춘 여성이나 세리처럼 사회적으로 무시당하고 차별받던 사람들과도 허물없이 교제했다.

예수는 남자든 여자든, 병든 자든 건강한 자든 누구에게나 똑같이 대했다. 누구에게도 편견을 갖지 않는 그는 상대가 세리든 매춘 여성이든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사실 이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기본 요령이다. 사람을 사귈 때는 쓸데없는 편견은 버려야 한다. 상대가 여자라고 해서, 외국인이라도 해서, 철없는 어린아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편견을 갖는다면 그 사람과의 관계는 삐거덕거릴 수밖에 없다. 편견을 갖고 대하면 아무래도 표정이나 행동에 부정적인 느낌이 묻어나기 마련 아닌가. 당신이 불쾌한 감정으로 대하면 상대도 고스란히 그 감정을 느끼고 당신에게 부정적인 느낌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편견을 버릴 수 있을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상대방과의 접촉을 늘리는 것이다. 당신이 먼저 상대방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쓸데없는 편견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의 한 심리학자는 정신병 경력이 있는 사람들과 대학생을 모아놓고 대화의 장을 만들어준 다음, 그들이 공동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짰다. 그 결과 놀랍게도 정신병 환자에 대한 대학생들의 편견이 기대 이상으로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싫다고 해서 무조건 그 사람을 피하면 편견은 사라지지 않는다. 편견이 있기에 더더욱 자주 만나고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편견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쓸데없었는지 피부로 느끼게 된다. 번잡스럽고 시끄럽기만 한 요즘 젊은이들을 너무 싫다고만 하지 말고 일단 그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라. 그들 역시 당신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인간임을 알게 되리라. 대화를 나눌수록 편견은 사라진다.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지 말라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도서 11장 1절)



여기서 이야기하는 ‘떡’이란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되는, 일상적인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의미한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버리라고 하니 있으니 실로 희귀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생명과 직결되는 식량을 물에 던져버리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버럭 화를 낼 법도 하다. 하지만 무턱대고 화부터 내지 말고 좀 더 다른 의미로 해석해보는 건 어떨까. 예를 들어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해하지 말고 긴 안목으로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말이다. 다짜고짜 재고 따지기보다는 장기적 시점으로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는 “진정한 사랑은 아무것도 바라거나 기대하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라고 했다. 실로 의미 깊은 이야기가 아닌가. 코네티컷 대학의 데이빗 케니 교수에 따르면, 당신이 상대방에게 친절을 베풀면 상대도 당신에게 ‘호의를 갚고 싶은’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즉, 내가 굳이 되돌려 받으려고 하지 않아도 상대방은 호의를 베푼다는 것이다. 전 직원 다섯 명의 자그마한 공장을 운영하는 오카노 마사유키 사장도 『인생은 학벌보다 처세술이다』라는 책에서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당장은 자신이 손해를 보고 상대방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처럼 보여도, 긴 안목으로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사귈 때는 멀리 내다보고 인내하는 마음가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멀리 보지 않으면 소중한 ‘빵’을 쉬이 놓을 수 없다. 더구나 물에 던져버리라니! 언제라도 장기적인 안목을 갖출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하기 바란다. 지금은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나중에 크나큰 이익으로 되돌아온다.

타인의 말과 행동보다 자신의 행동에 눈을 돌려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누가복음 6장 41-42절)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거슬린다고 해서 “당신은 이런 점이 나빠. 고치는 것이 좋겠어.” 하고 지적해 줄 필요는 없다. 보통 당신에게 감사하기보다는 발끈해서 화를 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이 못마땅해도 못 본 척 지나쳐 버리는 것이 좋다. 반면교사라는 말도 있듯, 상대방을 고치려고 하기보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되돌아보고 고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직장 선배가 일할 생각은 않고 게임 삼매경에만 빠져 있더라도, 상사에게 일러바치거나 그에게 충고할 필요는 없다. ‘다른 사람이야 뭘 하든 나는 근무 시간에 열심히 일만 하자’라고 마음먹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이상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조지타운 대학의 마르시아 미셀리 교수는 공공기관 열다섯 곳에 근무하는 13,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시행한바 있다. 그 결과 ‘조직 내에서 부정과 부조리, 법규 위반 등을 발견하고 그것을 지적했을 때 시정이 이루어졌는가?’라는 질문에 응답자 대부분이 ‘아니오’라고 답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결국 잘못을 지적하고 주의를 준다고 해도 이렇다 할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지적을 받은 사람이 잔뜩 기분 상해 있다가 훗날 당신이 사소한 잘못이라도 저지르면 ‘옳거니!’ 하고 앙갚음을 해 올지도 모른다. ‘나는 게임중독이긴 하지만, 당신도 커피숍에 앉아 수다나 떨면서 시간을 낭비하잖아!’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신에게는 관대한 반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심하다 싶으리만치 엄격하고 냉혹한 존재다. 앞의 성경 구절은 그러한 본성을 엄하게 경고하는 것이다. 길에 쓰레기를 버리는 장면을 목격했다면 그 사람을 훈계하고 꾸짖기보다는 본인 스스로 그 쓰레기를 주워서 휴지통에 버리면 된다. 지적하고 지적받느라 언짢을 일 없이 만사 오케이 아닌가.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주의를 들으면 기분이 그리 유쾌하지 않으니 말이다. 게다가 단 한 번의 주의를 듣고 잘못된 행동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그런 실수를 하지도 않는다. 매번 똑같은 주의를 들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실수가 눈에 띄더라도 절대로 지적하지 마라. 그 사람을 거울삼아 자신의 말과 행동을 다스리면 된다. “나쁜 점을 나쁘다고 지적하는 것이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 “나는 이 세상의 어떠한 악과 불의도 용서할 수 없어!” 이렇게 주장한다면 참으로 옹졸하고 그릇이 작은 사람이다. 타인의 허물과 잘못은 무조건 덮어 주고, 오로지 자신만 돌아보며 단속하는 일에 온 마음을 쏟기 바란다.



CHAPTER 2. 적을 내 편으로 만드는 10가지 지혜



남을 용서하는 일은 나를 위한 일이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태복음 18장 21-22절)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어떻게 싫은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세요, 내가 그 사람을 싫어하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요. 그런데 용서하고 사랑하라니!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안 될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무조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포기하지 마라. ‘용서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일단 몇 번 ‘억지로 용서하는 척’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절대로 안 돼!’라고 다짐하기 때문에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가 있어!’ 하고 완강하게 버틸수록 점점 더 용서할 수 없게 된다.

용서는 상대를 위한 행동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내가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상대방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용서를 하고 나면, ‘나라는 사람, 정말 착한 사람이야.’ ‘역시 나는 마음이 넓은가 봐.’ ‘저렇게 나쁜 사람을 용서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난 정말 대단한 인격자야.’ 이렇게 뿌듯해지고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 어렵거나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고개 흔들 일만은 아니다.

노스웨스턴 대학의 로라 루치스 교수는 결혼한 지 6개월이 채 안 된 신혼부부 72쌍을 5년에 걸쳐 밀착 취재한 적이 있다. 그 결과 배우자의 외도나 가정에 대한 무관심, 무절제한 씀씀이 같은 결격사유도 과감히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자기 가치감, 자존감(자신을 사랑하고 귀히 여기는 마음)이 높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듯 내가 상대방의 허물과 실수를 너그럽게 받아들이면 상대방도 마음이 놓이고 행복해진다. 그런 부부는 평생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상대를 용서하는 것은 내가 먼저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절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다. 다짜고짜 ‘원수를 사랑하라!’고 강요받으며 욱하는 마음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지만,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기꺼이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게 된다. 나 역시 신경질적이어서 화를 잘 냈다. 거기다가 집요하기까지 해 누군가를 ‘용서하는 마음’을 갖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그런데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이 결국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생각을 바꾸고 나자 마음이 넉넉해지면서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사람은 원래 타산적인 면이 있어서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고 하면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할 줄 아는 자신’을 좋아하게 되리라.

말이 아닌 행동으로 사람을 움직여라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0장 15절)

위의 성경 구절은 예스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이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한 구절이다. 사도 바울은 글 쓰는 데는 자신 있었지만 언변이 약했다. 그래서 항상 예수의 가르침을 전할 때 말보다 몸을 사용했다. 누구보다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누비며 자신의 순수한 신앙을 전하고자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지중해 지방을 순례하면서 기독교 전파를 위해 일생을 헌신한 공로자다. 말과 글이 아닌 온몸으로 열정을 불사른 눈물겨운 노력과 헌신을 보고 사람들도 마음을 열었으리라. 이렇듯 아무리 미사여구를 늘어놓고 감언이설로 달래도 사람 마음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 말을 유창하게 하지 못해도 자세가 성실하고 진실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당신의 진지한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은 당신의 행동을 따라 하고 흉내 내려고 할 것이다.

“직원들이 너무 게을러서 큰일입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울먹이며 고민을 털어놓는 경영자. 내가 만일 이 사람으로부터 상담을 의뢰받았다면 이렇게 충고하리라. “직원들은 지금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우선 사장님이 솔선수범해서 직원들보다 먼저 출근하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직원들에게 보여 주세요!” 종업원이 게으른 것은 순전히 사장 때문이다. 냉방 완비된 사무실에서 한가롭게 놀고 있는 사장을 보면서 열심히 일할 종업원이 어디 있는가.

캘리포니아 대학의 토머스 사이 교수에 따르면 부하는 리더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리더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부지런히 움직이면 부하도 열심히 일하고, 리더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즐겁게 일하면 부하도 일을 즐기게 된다는 것이다. 사이 교수는 이를 가리켜 ‘리더의 감염작용’이라고 부른다. 이 법칙을 활용하면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 상대방에게 어떤 일을 시키고 싶다면 본인이 먼저 하면 된다. 행동으로 본을 보이면 사람은 감화되기 마련이다. 내가 하기 싫은 일, 내 능력 밖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라. 다른 사람이 해 주기를 바라는 일은 본인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 당신이 움직이면 주변 사람들도 당연히 움직인다.



CHAPTER 3.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10가지 지혜



불행도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라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욥기 2장 7-10절)

힘든 일은 피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사람은 누구나 불행해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최대한 불행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다가 끝내 불행이 닥치면 하늘을 원망하고 신을 저주한다. 그러나 구약의 사람, 욥은 달랐다. 행복도 불행도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므로 “행복만 바랄 뿐, 불행은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이토록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욥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칭송하는 것이다. 사람은 불행이 닥치면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또 그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불행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워싱턴 주립 대학의 맥밀런 교수는 어릴 때 부모로부터 학대받았던 여성 15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시행했다. 항목은 학대받은 경험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조금은 도움이 된다.’, ‘정말 유익했다.’ 이 세 가지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학대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고통스럽고 불행한 기억이다. 그 어디에도 유익하다고 말할 근거가 없다. 하지만 맥밀런 교수가 조사한 바로는 무려 46.8퍼센트나 되는 여성이 ‘도움이 되었다’고 대답했을 뿐 아니라, 그중 24퍼센트는 ‘매우 유익했다’는 답변을 했다.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은 불행이지만 그것을 통해 깨닫고 배울 수 있다면 더 이상 고통도 아픔도 아닐 수 있다. 설령 학창시절에 집단폭력과 따돌림을 당하며 고통 속에서 지냈더라도 ‘그 덕분에 이렇게 강하고 단단해졌다’고 한다면 유익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불행한 일이 닥쳤을 때 ‘아, 난 이제 틀렸어’라고 포기하지 말고, 오히려 이 일을 성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사업에 실패했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일을 해보라고 기회를 주시는 거야’라고 밝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 불행을 불행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불행에 대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일’을 겪었어도 ‘여러 가지 좋은 교훈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대성공 아닌가. ‘모든 불행에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라.

꿈은 이미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마가복음 11장 24절)

이 성경 구절은 암시 능력을 유효적절하게 활용하는 데 유용하다. 물론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방법이다. ‘언젠가는 최고가 되겠지.’ 간절히 소망하기만 한다고 해서 최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 최고야!’ 이렇게 자기암시를 하고, 이미 최고가 된 것처럼 행동하면 정말 최고가 된다는 이야기다. 이미 그렇게 되었다고 믿어버리면 행동도 말투도 최고처럼 변해 간다. 소망을 이루고 싶다면 이미 이루었다고 믿어야 한다. 확신하지 않으면 암시 능력은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눈앞에 산더미처럼 일이 쌓여 있을 때,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하고 고개를 저으면, 마무리는커녕 정리정돈도 힘들다. 이럴 때는 차근차근 정리하면서 이미 일을 다 끝내 버린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일주일이면 충분해’라고 생각하면 실제로도 일주일 만에 일을 마칠 수 있고, ‘아무래도 한 달은 걸리겠는데……’ 하고 머리만 긁적이고 있으면 정말 한 달은 걸려야 일을 마치게 된다. 자기암시를 걸어 준 그대로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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