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승자가 되라
신동준 지음 | 미다스북스
최후의 승자가 되라
신동준 지음
미다스북스 / 2017년 1월 / 543쪽 / 18,000원
큰 꿈을 품어라 - 분방(奔放)
환경에 억눌리지 마라 - 불사계(不事計)
역사는 승리자의 붓으로 기록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으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이기는 순간 모든 것이 미화되고, 패배하면 모든 것이 일거에 폄훼되거나 왜곡된다. 20세기 초 중국의 이종오 역시 『후흑학』에서 이같이 갈파했다. “나는 역대 왕조의 역사서인 24사(史)를 읽으면서 많은 진실이 누락된 사실을 발견했다. 사관의 논평은 흥망성쇠의 이치와 완전히 상반될 뿐만 아니라, 성현이 말한 도리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유방과 항우의 관상만 언급해 놓았을 뿐, 두 사람이 얼마나 뻔뻔하고 음흉한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쓰지 않았다. 『사기』를 좋은 사서로 평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후흑학』은 바로 『사기』를 포함한 24사의 흑막을 파헤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서를 읽을 때 반드시 그 이면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가 역사의 중심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새 왕조 내지 새 정권이 들어서면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통상 두 가지 책략을 예외 없이 구사한다. 첫째, 앞선 왕조 내지 정권을 가차 없이 매도하는 것이다. 둘째,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면서 작은 사안도 크게 부풀려 미화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조교체기에 충역(忠逆)의 기준이 크게 헷갈리게 된다. 이전 왕조 및 정권에 충성한 자를 일률적으로 충신으로 평하는 것도 잘못이고, 새 왕조 및 정권에 참여한 자를 획일적으로 역신으로 매도하는 것 역시 잘못인 것이다.
평가의 잣대가 이처럼 상대적이면서 불완전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새 왕조의 창업과 새 정권의 수립 과정이 대부분 ‘인의’ 등의 윤리 도덕 대신 ‘힘’이라는 한 물리적인 폭력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철학과 역사의 분기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철학 이론과 경서(經書)는 통일적인 원칙과 이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까닭에 심지를 굳건히 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나, 인간의 온갖 추악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난세에는 실용성이 떨어진다. 이와 정반대로 역사 경험과 사서는 있는 사실을 그대로 수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까닭에 사람과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워준다.
‘무엇을’ 먹고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라: 주목할 것은 대다수의 사가들이 거의 예외 없이 새 왕조에 아부하는 모습을 보였음에도 ‘역사의 아버지’를 뜻하는 사성(史聖)의 칭송을 들은 사마천은 한고조 유방을 일방적으로 미화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승자인 유방의 사적을 그린 「고조본기」 앞에 패자인 항우의 전기를 담은 「항우본기」를 수록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실제로 첫머리에 나오는 “유방은 사람이 어질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했고, 성격이 활달했다. 늘 큰 포부를 품고 있었던 까닭에 일반 백성처럼 돈을 버는 생산 작업에 얽매이려 하지 않았다.”는 대목은 유방을 크게 미화한 것도 아니다. ‘사람이 어질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했다.’는 대목 정도만 약간 미화한 느낌이 있고, 나머지 대목은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요약해 묘사한 느낌이 강하다. 특히 ‘일반 백성처럼 돈을 버는 생산 작업에 얽매이려 하지 않았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이는 요즘 버전으로 해석하면 정시에 출근해 정시에 퇴근하는 회사원의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대목의 중요한 메시지는 유방이 먹고사는 문제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기』의 전체 내용에 비춰볼 때 한고조 유방의 삶은 ‘건달’에 가장 가까웠다. 빈한한 집안 출신 유방이 이처럼 ‘건달’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나중에 얻은 정실부인 여씨의 집안이 크게 부유했던 사실과 관련이 있다. 이는 21세기 디지털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내조나 외조를 받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 비해 훨씬 자유로운 입장에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추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고조 유방이 보여준 ‘건달’의 삶은 통상적인 의미의 ‘건달’ 행보와 달리 해석해야 한다.
큰 뜻은 신중히 세워라 - 장부계(丈夫計)
‘유방은 일찍이 정장으로 있을 때 함양에서 요역을 감독한 적이 있다. 한번은 진시황의 행차를 종관하게 됐다. 이를 보고는 길게 탄식했다. “아, 대장부라면 응당 이래야 할 것이다!” - 「고조본기」’ 여기의 ‘종관’은 구경을 허락받아 마음대로 본다는 뜻이다. 사다케 야스히코는 『유방』에서 전후 맥락에 비춰 진시황 31년인 기원전 216년의 일로 보았다. 배인의 『사기집해』주석을 좇아 유방의 출생 시기를 기원전 256년으로 잡을 경우, 진시황의 행차를 관람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40세가 된다. 사다케 야스히코는 정장으로 임명된 지 3년 뒤의 일로 보았다. 당시의 정황에 비춰 ‘정장’ 유방은 패현 아전의 우두머리로서 자신의 상관으로 있던 소하의 재가를 받고 갔을 것이다. 출장의 명목은 강제 노동에 징발된 인부의 인솔과 감독이었다. 진시황은 당시 의욕적으로 사상 최초의 제국 진나라를 새롭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함양에서는 연일 토목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범부 유방은 어떻게 황제가 되었나?: 진시황 사후 천하가 혼란에 빠지고 이에 편승해 진승 및 오광이 반기를 들었을 때, 덩달아 시골 건달 유방도 반진(反秦)의 깃발을 들고 나선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유방은 내심 ‘진승과 오광 같은 인물도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느냐고 말했는데, 내가 그들보다 못한 게 무엇인가?’라는 식으로 자문했을 것이다.
‘큰 뜻’은 정교하고 은근하게 세워 나가라: 반진의 깃발을 처음으로 올린 진승을 비롯해, 진승과 항량 사후 천하를 놓고 다툰 항우와 유방 모두 기개가 큰 인물이었다. 사마천이 『사기』를 편제하면서 진승의 전기를 「열전」이 아닌 「세가」로 격상시키고, 항우의 전기를 「본기」로 높이면서 「고조본기」 앞에 배치한 것도 이들 세 사람의 이런 기개를 높이 평가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성패를 떠나 난세에 뜻을 펴고자 할 경우 이들 세 사람과 마찬가지로 천하를 거머쥐려는 대지(大志)를 품을 필요가 있다. 스스로 그릇을 키우는 게 관건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결국 유방이 최후의 승자가 된 점이다. 난세에 큰 뜻을 품는 것도 중요하지만 뜻을 이루기 위한 정교한 접근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최고의 인재로 팀을 만들어라 - 득인(得人)
자존심을 버리고 인재를 얻어라 - 섭의계(攝衣計)
원래 유방은 입이 거칠고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천하를 거머쥔 뒤에도 그 언행은 조금도 바뀐 게 없었다. 그럼에도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던 항우를 누르고 최후의 승자가 됐다. 여기에는 나름 비결이 있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현능한 자를 만나면 몸을 굽히고 아낌없이 베풀며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고, 그로써 사상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게 유방 밑에서 뛰어난 유세가 역할을 수행한 역이기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일화이다. 「고조본기」는 간략히 소개하는 데 그쳤으나 「역생육가열전」은 당시 상황을 자세히 묘사해 놓았다. 이에 따르면 역이기는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에 속해 있는 진류현 고양 출신이다. 독서를 좋아했으나 집안이 가난해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없었다. 생계를 유지할 길이 없자 마을 성문을 지키는 아전인 감문리가 됐다. 이후 역이기는 패공 유방이 군사를 이끌고 진류현의 외곽을 공략한다는 얘기를 듣게 됐다. 마침 유방 휘하의 기병 한 사람이 동향 사람의 아들이었다. 유방은 가끔 그 기병에게 진류현 사람들 가운데 누가 현자이고 호걸인지 물었다. 그 기병이 마을로 돌아왔을 때 역이기가 말했다.
“나는 패공이 비록 거만하고 남을 업신여기지만 원대한 뜻을 지녔다고 들었네. 바로 내가 진정으로 추종하며 사귀고 싶은 사람인데, 소개해주는 사람이 없네. 자네가 만일 패공을 보거든 ‘신의 고향에 역생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나이는 60여 세이고, 신장은 8척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미치광이로 부르나 자신은 미치광이가 아니라고 합니다.’라고 전해 주게!” 그 기병은 역이기가 부탁한 말을 전했고, 유방은 고양의 객사에 머물며 사람을 보내 역이기를 불렀다. 역이기가 객사에 이르러 안으로 들어갔을 때 유방은 다리를 벌린 채 침상에 걸터앉아 두 여인에게 발을 씻기고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역이기를 맞이했다. 역이기가 들어가 두 손으로 길게 읍하면서 절하지 않고 말했다.
“족하는 진나라를 도와 제후들을 치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치려는 것입니까?” 유방이 대뜸 역이기를 꾸짖었다. “이 어린 선비 놈아! 천하가 진나라로 인해 고통을 당한 지 이미 오래됐다. 제후들이 서로 협력해 진나라를 치려고 하는 이유다. 어찌하여 진나라를 도와 다른 제후들을 친다고 말하는 것인가?” 역이기가 말했다. “실로 사람을 모으고 의병을 합쳐 무도한 진나라를 치고자 하면 이렇게 걸터앉은 자세로 나이 든 사람을 만나서는 안 됩니다.” 유방이 그 말을 듣고는 문득 발 씻던 것을 그만두고 벌떡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역이기를 윗자리에 앉힌 뒤 사과했다. 유방의 인간적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으면 곧바로 격식을 가리지 않고 사과를 하며 상대를 존중했다. 험한 말과 거친 행동이 몸에 밴 사람이 이토록 놀라운 변신을 보인 경우는 없었다. 역이기를 비롯한 수많은 재사들이 유방의 이런 행동에 감탄하며 기꺼이 자신의 몸을 맡겼다.
계획적으로 팀을 지휘하라 - 치장(治將)
최강의 팀을 만들어라 - 빈혼계(賓婚計)
유방은 천하를 놓고 항우와 각축을 벌이는 ‘초한지제’ 내내 병사들을 지휘하는 것보다 장수들을 장악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사실 이게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압도적인 우위에 있던 항우를 제압하고 천하를 거머쥔 비결이기도 하다. 병사들을 움직여 작전을 펴는 통상적인 치병(治兵) 대신 장수들을 확고히 장악한 뒤 장기알이나 바둑알처럼 운용하는 이른바 치장(治將)이 관건이다.
유방이 구사한 ‘치장’의 용인술은 치국평천하의 비결을 백성을 다스리는 치민(治民)이 아니라 관리를 다스리는 치리(治吏)에서 찾은 한비자의 주장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이른바 ‘치리불치민(治吏不治民)’의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원리이다. 이 원리는 난세에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데, ‘초한지제’와 같은 군웅쟁패의 시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평민 출신인 유방이 치세와 난세의 이치에 관해 배운 게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치병’이 아닌 ‘치장’의 이치를 통찰한 것은 아무래도 그의 건달 경력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마치 마피아와 야쿠자 조직의 정점에 있는 우두머리가 조직을 운영할 때 말단의 하부 조직 운용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은 채 중간 보스들의 움직임에 모든 신경을 기울이는 것과 같다. 유방은 건달의 삶을 통해 조직의 운영 원리인 이른바 치장불치병(治將不治兵)의 이치를 터득했을 것이다. 한비자가 역설한 ‘치리불치민’과 유방이 건달의 삶 속에서 생래적으로 터득한 ‘치장불치병’의 이치는 대상의 규모에서만 차이가 날 뿐 기본 이치는 똑같다. ‘치리불치민’은 치국평천하가 대상이다. 나라와 천하가 기본 단위다. ‘치장불치병’은 전술이 아닌 전략의 이치로, 승패가 갈리는 크고 작은 주요 전장(戰場)이 기본 단위가 된다. 주목할 것은 ‘치장불치병’의 이치가 전장의 승패를 가르는 전략의 차원을 넘어 득국득천하(得國得天下)의 이치로 작동하고 있는 점이다. 치국평천하는 득국득천하 다음에 행해지는 일이다. 군사적 우위가 관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난세 때마다 강력한 무력을 지닌 자가 들고 일어나고, 이들 군웅들의 각축전에서 최후의 승자가 천하를 거머쥐는 패턴이 반복된다. 치세에는 문(文), 난세에는 무(武)가 앞설 수밖에 없는 이유다.
책임은 맡기되 사람은 장악하라 - 탈부계(奪符計)
유방은 시종 최고의 병법가인 한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도 그의 무력이 비대해지는 것을 계속 견제했다. 유방은 장이와 한신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새벽에 침실로 뛰어 들어가 이들의 인수를 빼앗은 뒤 제장들을 모아놓고 자리를 재배치했다. 「회음후열전」의 기록이 대표적이다. 『사기』 「고조본기」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유사한 내용의 기록이 매우 많다.
“초나라 군사가 문득 유방을 형양에서 포위했다. 유방이 남쪽으로 달아나다가 완과 섭 사이에서 경포를 자기편으로 만든 뒤 성고로 함께 들어갔다. 초나라 군사가 다시 그곳을 급히 포위했다. 궁지에 몰린 유방이 등공 관영과 단둘이 수레를 타고 성고성의 북문인 옥문을 통해 황급히 달아났다. 북쪽으로 황하를 도하한 뒤 말을 내달려 수무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어 다음 날 새벽 자신을 사자라고 칭하며 급히 말을 몰아 장이와 한신의 군영에 들어간 뒤 이들의 군대를 빼앗았다. 이어 장이를 북쪽으로 보내 조나라 땅에서 병사를 더 많이 모집했다. 또 한신을 시켜 동쪽으로 제나라를 치게 했다.”
이 기록에서 주목할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휘하 장수인 장이와 한신이 전혀 예상치 못하는 새벽 시간에 그들의 군영으로 뛰어 들어가 그들의 인수와 병부를 빼앗은 점이다. 사실상 병권을 박탈한 것이나 다름없다. 둘째, 장이와 한신을 북쪽과 동쪽으로 보내 병사를 모으고 적과 싸움을 벌이게 한 점이다. 쉽게 말해 이들이 가지고 있던 나머지 힘마저 소진시킨 것이다. 장이는 당대 최고 수준의 학문과 병략을 자랑하는 문무겸전의 인물이다. 한신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당대 최고의 병법가였다.
난세에는 이런 자들을 휘하에 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인 동시에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끝없는 충성을 바치며 적과 대치할 때는 보물과 같은 존재가 되나, 저항하며 독립 세력으로 떨어져 나갈 경우에는 가장 무서운 적이 되고 만다. 그렇기에 유방은 위기상황에서 장이와 한신을 적극 견제하고 나섰다. 유방이 장이와 한신의 인수와 병부를 거둔 것은 병권을 박탈한 것이나 다름없다. 무인의 입장에서 볼 때 단순히 군사 동원의 권한을 잃는 차원에 그치는 게 아니라 생사여탈권마저 잃은 것이다.
기선을 제압하라 - 기선(機先)
때를 기다릴 줄 알라 - 소잔계(燒棧計)
‘항우에 의해 한왕에 봉해진 유방이 봉지로 갈 때 장량이 유방을 배웅했다. 포중 땅에 이르러 고국인 한나라로 돌아가는 장량을 보냈다. 장량이 출발에 앞서 유방에게 권했다. “대왕은 어찌해 지나간 곳의 잔도(棧道)를 불태워 끊지 않는 것입니까? 천하 사람들에게 동쪽으로 돌아올 뜻이 없음을 보여주고, 그것으로 항왕의 의심을 없애 안심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유방은 장량을 한나라로 돌아가게 한 뒤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지나온 잔도를 모두 불태워 끊어버렸다. - 「유후세가」’ 원래 잔도는 험한 벼랑에 임시로 놓은 나무 다리를 지칭한다. 잔도를 끊으면 오가는 길이 막히게 된다. 유방이 한중으로 가면서 장량의 건의를 받아들여 관중과 한중을 연결하는 잔도를 모두 불태운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을 의심하는 항우의 눈을 속이고자 한 것이다. 한중에서 은밀히 힘을 기른 뒤 관중을 손에 넣으려는 속셈이었다. 큰 틀에서 볼 때 상대방보다 먼저 손을 써 유리한 위치에 서고자 하는 계책이다. 우리말에서는 이를 통상 ‘기선(機先)을 제압한다’고 표현한다.
유방이 장량의 계책을 받아들여 잔도를 불태운 것은 공격이 아닌 수비 측면에서 이뤄진 것으로, ‘기선을 제압한다.’는 취지로 사용되는 통상적인 의미와 다르다. 그러나 기본 취지만큼은 동일하다. 상대방을 속여 방심하게 한 뒤 힘을 길러 배후를 치고자 한 점에서 보면 공격의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로 역사는 그렇게 진행됐다. 그게 바로 당대 최고의 병법가인 한신이 구사한 암도진창(暗渡陳倉) 계책이다. 따지고 보면 당시 한신의 명성을 떨치게 만든 암도진창의 계책도 유방이 장량의 건의를 받아 구사한 ‘소잔계’의 사전 작업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방에게 한중 땅을 봉지로 내준 항우가 최후의 결전에서 유방에게 패한 것도 이런 식으로 여러 차례 기선을 제압당한 결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