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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위를 뜨겁게 걸었던 프런티어들의 깨우침

전창협 지음 | 깊은나무



지구 위를 뜨겁게 걸었던 프런티어들의 깨우침



전창협 지음

깊은나무 / 2016년 11월 / 288쪽 / 15,000원





남성 세상에 유리천장을 부순 여성 개척자들의 한마디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_ 헬렌 애덤스 켈러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는, 3일만 볼 수 있다면 가장 먼저 가정교사였던 앤 설리번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했다. 설리번은 우물가의 물에 헬렌의 손을 담가 주고 손바닥에 ‘water’라고 써 주는 방식으로 그에게 단어와 문장을 가르쳤고, 대학 시절 내내 수업 내용을 모두 써 준 스승이다.

헬렌은 3일만 볼 수 있다면 설리번의 얼굴을 본 다음, 둘째 날은 먼동이 터 오는 모습과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을 보고 싶어 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과 저녁의 네온사인과 쇼윈도 진열상품을 본 뒤 사흘간 눈을 뜨게 해 준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다고 했다.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그러나 우리는 닫힌 문을 오랫동안 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

1933년 발표된 헬렌 켈러의 글,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은 세계적인 유명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20세기 최고의 에세이로 선정되었다.

어머니가 될 것인가 되지 않을 것인가를 뜻대로 선택하기 전까지는 어떤 여성도 스스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_ 마거릿 루이즈

아이 낳는 기계 취급을 받았던 여성이 스스로 임신과 출산 여부에 대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마거릿 생어였다. 지금은 당연하지만 생어가 이 얘기를 했던 1900년대 초만 해도 미국에선 기독교 교리를 내세워 피임이 엄격하게 금지됐다. 피임에 대한 교육조차 불법이었다.

원치 않게 임신한 여성이 혼자 유산하려 애쓰다 죽는 사례가 빈번했다. 생어 역시 11명의 자녀를 낳고 50세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보면서, 과도한 출산은 빈곤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뉴욕에서 간호사를 하던 생어는 스스로 유산을 하려다 젊은 나이에 죽는 가난한 노동자의 아내를 보았다.

그녀는 1916년 뉴욕 변두리에 미국 최초로 산아제한클리닉을 차리고, 여성 스스로 임신을 결정해야 한다는 산아제한운동에 나섰다. 이곳에서 법으로 금지된 피임법을 가르치다 실형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국제산아제한 연맹이 만들어지는 등 여성해방운동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20세기 위대한 발명품의 하나로 꼽히는 경구용 피임약 개발을 주도했다. 피임약의 개발로 여성들은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에서 벗어나게 됐고, 이는 곧 여성해방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생명이란 귀한 선물이 오로지 간호사 손안에 놓여진다_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백의의 천사’, ‘등불을 든 여인’이란 별명이 있었지만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고집이 세고 강인한 여성이었다. 간호사가 하녀 취급을 받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 부유한 집의 17세 소녀가 간호사가 되겠다고 하자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그녀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10년 후 간호사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가 명성을 얻은 것은 1854년 38명의 간호사를 데리고 크림전쟁터로 가면서부터다. 참전했던 영국군은 전사자보다 병사자가 3배나 될 정도로 사정이 열악했다. 나이팅게일은 철저한 위생 관리로 환자별 사망률을 42%에서 2%로 획기적으로 떨어뜨렸다.

크림전쟁 이후에도 간호학교를 설립하고 최초로 여성 의과대를 세웠으며, 《간호론》 등 간호학의 고전을 저술했다. 실제 간호사로 활동한 시간은 몇 년 안 되지만 오늘날 간호사가 되기 위한 선서로 하는 <나이팅게일 선서> 속에 그녀의 정신이 살아 있다. 그녀가 저술한 《간호론》의 한 구절은 지금 읽어 봐도 간호사의 직업윤리를 정확하게 지적한 명문이다.

“간호사는 진지하고 정직해야 하지만 그보다 종교적이고 헌신적이어야 한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소명감을 가져야 한다. 생명이라는 신의 귀한 선물이 오로지 그의 손안에 놓여지기 때문이다.”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_ 엘리자베스 튜더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에 오른 것은 우연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인 헨리 8세는 딸들에게 무심했고, 어머니는 간통과 반역죄로 처형되었으며, 그는 공주 직위마저 박탈당했다. 이복 언니 메리는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으며, 왕위 계승에서 그가 제외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복 언니 메리 1세가 갑자기 죽나 25세의 나이에 뜻하지 않게 왕위에 올랐다.

왕에 오르자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며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국가와 결혼한’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을 ‘해가지지 않은 나라’로 만든 위대한 국왕으로 늘 첫손에 꼽힐 정도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중상주의 정책으로 나라 곳간을 가득 채웠고, 당시 해상을 장악했던 세계 최고의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퇴시키면서 세계제국의 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로 대표되는 영국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국민들은 ‘훌륭한 여왕 베스’라고 칭송할 정도로 그를 좋아했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의회에서 ‘황금연설’로 불리는 마지막 연설을 남겼다.



“왕관은 남이 쓴 모습을 볼 때 영광스러운 법이지만, 직접 써 보면 그다지 즐겁지 않다.”



변혁의 열정으로 세상을 바꾼 사람들의 한마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섰기 때문이다_ 아이작 뉴턴



1665년과 1666년, 뉴턴이 고향에서 보냈던 이 시기를 사람들은 ‘기적의 해’라고 부른다. 인류에게 ‘기적의 해’를 가져다준 계기는 페스트의 창궐이었다. 흑사병으로 대학이 일시 휴업에 들어가, 뉴턴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스물넷, 스물다섯의 뉴턴은 이 시기에 20개 넘는 다양한 주제를 동시에 연구했다.

인류의 역사를 바꾼 사과로 꼽히는 에덴동산의 ‘선악과’, 애플사의 로고로 유명한 ‘먹다 만 사과’에 이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게 한 ‘뉴턴의 사과’ 역시 1666년의 일이며, 미적분학, 천체역학 역시 마찬가지다. 태양과 달, 지구가 같은 물리력의 영향을 받는다는 뉴턴의 주장은 인류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섰기 때문입니다.”

그는 갈릴레이나 케플러 등 우주와 자연의 법칙을 연구했던, 앞선 과학자들 앞에서 겸손해했지만 이후 인류는 그의 어깨 위에서 거대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뉴턴의 장례식을 주관한 영국 시인 알렉산더 포프의 추모시 첫마디가 유명하다.

“자연과 자연법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신께서 ‘뉴턴이 있어라!’ 하시자, 세상이 밝아졌다.”

승리는 철저하게 준비한 사람에게만 찾아온다_ 로알 엥겔브렉트 그라브닝 아문센



노르웨이의 탐험가 로알 아문센과 영국 장교 로버트 스콧의 남극점의 도달 경쟁은 방식도 결과도 달랐다. 비슷한 시기에 출발했지만, 1911년 12월 14일 인류 사상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사람은 아문센이었다. 그로부터 35일 뒤에야 스콧은 남극점에 도달했다.

아문센은 동료와 함께 무사히 귀환했지만, 스콧 탐험대는 조난을 당해 전원이 사망했다. 아문센이 에스키모 옷이나 개썰매 등 에스키모의 장거리 이동 방식을 이용한 반면, 스콧은 극한의 추위에 무용지물이 되기 십상인 모터 썰매와 조랑말을 탐험에 활용했다.

“승리는 철저하게 준비한 사람에게만 찾아온다. 적절한 때에 필요한 조치를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패배가 있을 뿐이다.”

아문센은 원래 북극점 도달이 목표였다. 하지만 미국인 로버트 피어리가 북극점에 먼저 도달하자 목표를 남극점으로 바꿨고, 1910년 프람호로 남극탐험을 떠났다. 그리하여 결국 남극점에 도달한 최초의 사람으로 이름을 남겼다.

아문센의 최후 역시 탐험가다웠다. 1928년 북극 탐험에 나섰던 이탈리아 탐험대가 해빙에 불시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문센은, 동료들과 함께 사고 현지로 달려갔지만 6월 18일 오후의 무전을 끝으로 실종되었다. 아문센을 포함한 구조대의 흔적은 아직까지 오리무중으로 남아 있다.

내가 뛰어넘은 것은 정신력의 한계다_ 로저 길버트 배니스터



440야드 트랙 4바퀴를 4분 내로 주파. 4가 겹친 이 게임은 “신이 인간의 한계로 설정해 놓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난공불락이었다. 육상 1마일 경기는 1804년 5분대를 깬 뒤 4분 1초까지 끌어내렸지만, ‘마의 4분 벽’을 주파하지 못했다.

1954년 5월 영국 옥스퍼드대 운동장에선 의대생인 로저 배니스터가 불가능에 도전했다. 그는 질주 끝에 테이프를 끊었고, 아나운서의 “3분!”이란 말은 함성에 묻혔다. 20세기 스포츠의 가장 위대한 성취였던 이날의 기록은 3분 59초 4였다.

그 뒤에 놀라운 일이 연속해서 일어났다. 6주 만에 또 다른 선수가 4분 벽을 깼고, 1년 새 30명이 넘는 선수가 동참했다. 불가능이 가능해지자 순식간에 거대한 벽이 사라진 것이다.

“내가 뛰어넘은 것은 정신력의 한계다.”



로저 배니스터의 말처럼 그와 함께 인류도 또 다른 한계에 도약한 셈이다. 로저 배니스터의 1마일 도전기는 『퍼펙트 마일』이란 책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서른 살까지는 학문과 예술을 위해 살고, 그 이후부터는 인류에 직접 봉사하자_ 알베르트 슈바이처

23살 청명한 여름 어느 날, 청년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결심한다.



“행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 살까지는 학문과 예술을 위해 살고, 그 이후부터는 인류에 봉사하자.”

그의 삶은 이 다짐대로 흘러갔다. 서른이 되기 전에 이미 촉망받는 신학교 교수에다가 교회의 부목사였고 권위 있는 오르간 연주자였던 그는, 서른 살에 모든 것을 그만두고 6년 동안 공부해 의사자격증을 땄다. 그러고는 적도아프리카(현재 가봉공화국)의 랑바레네로 향했다. 잡지에서 콩고강 유역 아프리카 흑인들의 참상을 접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로 향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라고 자문했고 “의사가 없는 곳에서 고통에 시달리는 원시림 속 흑인을 돕는 일이 인도주의적 과제로 여겨졌다”고 스스로 답하고 있다.

이후 그는 90세의 나이로 현지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52년 동안 30년 넘게 병든 흑인들 곁을 지켰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슈바이처는 “우리같이 초라한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는 단 한 명의 위대한 인간”이었는지 모른다. 1952년 슈바이처에게 ‘인류의 형제애’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이 주어졌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_ 성철



‘가야산 호랑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성철 스님은 제자들에게 무서운 스승이었다. 어떤 권력자라도 3천 배를 하지 않으면 만나 주지 않았다. 16년 동안 생식을 하고, 8년 동안 눕지 않고 앉은 채 잠을 자는 장좌불와를 했다. 또, 수행 중에는 자신이 있는 곳 주위에 철조망을 치고 아무도 만나지 않는 동구불출을 20여 년이나 하는 등 자신에게 지나치리만큼 엄격했다.

전두환 군부 정권이 들어서고, 정화란 명목으로 사찰에 군홧발이 들이닥치던 1981년에 조계정 종정에 추대됐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산문 밖을 나오지 않았다.

“종정이라는 고깔모자를 썼지만, 내 사는 것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법어를 내렸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알 듯 말 듯, 선문답 같은 오묘한 법어는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울림을 주는 한마디로 남아 있다. 1993년 11월 4일 새벽,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에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라는 열반송을 남기고 입적했다. 마지막 말씀은 “참선 잘 하거라.”였다.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_ 사마천



흉노 정벌에 나섰던 한나라 장군 이릉이 투항했다. 사마천은 중과부적을 내세워 이릉을 변호했다. 그러나 무제는 분노했다. 사마천은 옥에 갇히고 설상가상으로 사형 선고까지 받는다. 50만 전을 내면 사형을 면할 수 있었지만 가난한 사마천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형을 당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궁형(거세 형벌)을 받는 길이었지만, 사형보다 치욕스러운 궁형을 받기보다는 대부분 자결을 선택했다. 그러나 사마천은 궁형을 받고 살아남았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마천은 치욕이란 단어를 19번이나 썼다. 사마천은 궁형을 택한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는다.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치욕 속에서도 새털보다 가벼운 죽음보다 태산보다 무거운 결단을 택한 사마천이 있었기에 ‘인간학의 교과서’이자 시대의 고전인 《사기》가 우리 곁에 있는 것이다.

진실은 전진하고 있고,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_ 에밀 프랑수와 졸라

“진실은 이처럼 단순합니다.”



1898년 1월 13일 프랑스 일간지 《로로르》 1면, ‘나는 고발한다’라는 대문짝만 한 제목의 격문이 실렸다.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글의 작성자는 프랑스의 대문호인 에밀 졸라였다.

그가 공개서한을 쓴 것은 유대인 장교를 간첩으로 몰면서 프랑스 국론을 양분시키고 유럽을 끓어오르게 했던 ‘드레퓌스 사건’ 때문이었다. 진범이 밝혀졌는데도 오히려 진실을 말한 자가 투옥되는 상황에서 분노한 졸라는 피를 토하듯 글을 썼다.

“저는 최후의 승리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진실은 전진하고 있고,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글은 진실과 거짓의 싸움에서 지식인 앞에 놓인 책무는 무엇인가를 언급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명언이 됐다. 드레퓌스가 간첩 혐의를 받은 뒤 무죄가 확정되기까지는 12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다. 그동안 더디긴 했지만 진실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전진한 것이다.

미래에는 모두가 15분 동안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것이다_ 앤디 워홀



“미래에는 모두가 15분 동안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것이다.” 1968년에 팝아트의 황제, 앤디 워홀이 자신의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쓴 말이다. 이 말은 ‘15분 동안의 유명세’라는 관용어로 굳어졌고, 실제로 요즘 현실에서 이 말은 낯설지 않다. 스마트폰, SNS 등 여러 가지 미디어로 무장한 현대인들은 15분이 아니라, 1분 안에도 순식간에 유명해질 수 있게 된 상황이다.

TV 세대에 나온 이 발언을 지금 와서 보면 놀라운 예지력이다. 유명세의 덧없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요즘 세상엔 ‘15분 스타’들이 넘쳐난다.

“나는 안 맞는 장소에 맞는 물건으로, 그리고 맞는 장소에 안 맞는 물건으로 있기를 좋아한다. 맞는 장소에 안 맞는 사람으로 있는 것은 항상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나를 믿어라. 나는 맞지 않는 공간에 맞는 인간으로 있고, 맞는 공간에 안 맞는 인간으로 있다가 지금의 내 지위를 얻은 사람이다.”

커다란 안경에 왜소한 체구, 외모부터 어딘가 구색이 맞지 않는 듯해 보였던 이 예술가는, 그의 말대로 맞지 않은 공간에 맞는 인간으로 살았던 인물인지도 모른다.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건 저주를 퍼붓는 것과 같다_ 앤드루 카네기

앤드루 카네기의 인생은 1부와 2부로 완벽하게 나뉜다. 1부는 직조공의 아들로 미국에 건너와 미국 철강시장의 65%를 거머쥐며 억만장자가 된 시기다. 그로 인해 ‘철강왕’ 카네기는 ‘악덕 자본가’란 평판을 들었다. 2부는 사업을 매각하고 냉혈한 사업가와는 정반대의 따뜻한 ‘기부왕’의 삶을 산 시기다. 그는 젊었을 때 이미 35세에 은퇴하고 생활비를 뺀 나머지를 기부하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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