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나와 나누는 대화
허우원용 지음 | 다연
내 안의 나와 나누는 대화
허우원용 지음
다연 / 2016년 9월 / 256쪽 / 14,000원
나는 정말로 돈을 사랑하는 것일까?
내재적 가치 vs. 외재적 가치
어느 날 나는 친구로부터 재밌는 이야기 하나를 듣게 되었다.
다섯 살 아이에게 물었다. “앞으로 어떤 학교에 가고 싶니?”
“건국고등학교(타이베이에 위치한 명문 고등학교)요.”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건국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어디에 가고 싶니?”
“타이베이대학교 의대에 들어가고 싶어요.”
아이에게 또다시 질문했다. “타이베이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나면 무엇을 할 거니?”
아이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대답했다. “택시 운전을 하고 싶어요.”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마냥 웃기기만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이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무엇이 아이 스스로의 생각이고, 무엇이 다른 사람들이 심어준 생각인지 구분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만약 아이에게 명문 고등학교와 의과대학까지 나와서 택시 운전을 한다는 건 모순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아이는 모순이라는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조차 모를 것이다. 일반적으로 스스로의 생각이든 다른 사람들이 심어준 생각이든, 오랜 시간이 흐르다 보면 서로 뒤섞여 나의 내재적 가치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두 가지 서로 다른 가치의 충돌이 일어날 경우 자연스럽게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이 다섯 살 아이의 이야기를 큰아들에게 들려줬다. 이야기를 듣고는 아들이 내게 물었다. “아버지는 어릴 적에 ‘나의 장래 희망’ 이라는 글을 쓰면서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죠? 그럼 의사가 되고 싶다는 것은 아버지 스스로의 생각이었어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심어준 생각이었어요?” 아들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어린 시절 감기에 걸렸을 때마다 마주하던 소아청소년과의 의사 선생님이 떠올랐다. 제법 큰 체격이었던 그 선생님은 늘 커다란 진료 의자에 앉아 다소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료를 받고 오는 날이면 부모님은 늘 그 선생님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입이 닳도록 얘기했다. 부인은 얼마나 예쁜지, 사람들에게 얼마나 존경을 많이 받는지, 마을에 진료를 한 번 올 때마다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는지, 집은 또 얼마나 큰지 등등을 말이다.
고등학교 때의 기억도 떠올랐다. 중간고사 성적이 나오던 날이었는데 나는 다섯 과목 모두 100점을 받아 반에서 1등을 했다. 그때 선생님이 말했다. “이렇게 성적이 좋으니 나중에 의대에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겠어.” 어쩌면 이러한 외부의 기대 혹은 암시 때문에 나의 장래 희망이 의사로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분위기에서 성장하며 교육을 받았고 주변의 바람대로 의과대학에 합격했다. 그리고 의사가 되어 흰색 가운을 입었다. 또 그리고 몇 년 후, 나는 주치의가 되었고 통증의학과의 특성상 주로 암 병동에서 일했다.
처음 암 병동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는 환자들이 흘리는 갑작스러운 눈물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의사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것, 그리고 웃으면서 “오늘 안색이 좋아 보이시네요” 또는 “더 좋아지실 거예요” 같은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것, 그러고는 도망치듯 병실을 나오는 것뿐이었다. 이러한 허탈감과 죄책감은 서서히 마음속에 쌓여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말기 암 환자가 내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여느 때처럼 상투적인 말로 그를 위로하고 재빨리 병실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도망만 칠 수는 없어!’ 그 순간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최소한 환자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는 병실을 떠나지 않기로 말이다. 그 후 나는 화장지를 몇 장 뽑아 환자에게 건네고 의자를 가져와 그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환자는 슬픔에 빠져 영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 10여 분 동안 나는 병실을 떠나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억눌렀다. 예전 같았으면 몇 마디 선의의 거짓말로 위로하고 병실을 떠났을 테지만 그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환자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앉아있겠노라 다짐했기에! 그때 한 수녀가 병실로 들어와 나와 환자를 향해 인사하고는 의자를 가져와 조용히 앉았다. 그러고는 두 손을 모아 환자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흐느끼고 있는 환자와 기도하는 수녀, 그리고 마지못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의사라니! 조금 희한한 광경이었다.
문득 어린 시절 나를 진료해주던 의사 선생님의 표정과 그의 아름다웠던 아내, 진료실의 모습 그리고 반에서 1등을 했을 때 선생님이 내게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결국 내가 장래 희망으로 의사를 선택한 이유는 부와 명예 등과 같은 외재적 가치 때문이었던 것이다. 나는 환자를 치료하여 이러한 가치를 얻었다. 하지만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가 문제였다. 절망에 빠져 있는 환자들을 매일 마주하면서 어떻게 두 발 뻗고 그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을까?
내 앞에 앉은 수녀는 침묵 속에서 정성을 다해 기도하고 있었다. 나는 그 침착한 모습에서 나보다 훨씬 강한 힘을 느꼈다. 사실, 수녀에게는 병세를 호전시킬 의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도를 해준다고 어떤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강한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지금까지 의사라는 신분으로 일하면서 중시했던 가치들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갑자기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엄숙한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슬픔 때문이었는지 어느덧 내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나는 수녀에게서 건네받은 화장지로 눈물을 훔쳤다. 눈물을 닦으며 나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내가 의사가 된 동기는 순전히 외재적 가치, 즉 부와 명예 때문이었음을! 내 관심은 오로지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었다. 그러나 수녀가 하는 기도의 동기는 온전히 신앙이라는 내재적 가치에서 비롯되었고, 관심의 대상 역시 환자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말기 암 환자는, 수녀에게는 기도가 필요한 존재였고 내게는 도망치고 싶은 존재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엇에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 우리 능력의 범위가 정해진다. 나는 처음으로, 어떤 일에 종사할 때 ‘내재적 가치’가 결핍되어 있으면 언젠가 한계가 드러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대학교에 입학하던 그해, 나는 의과대학에 지원하면서 의사라는 직업의 내재적 가치에 대해 별달리 고민하지 않았다. 내가 고려한 것은 단순히 그 일을 통해 무엇(what)을 얻을 수 있는지, 혹은 어떻게(how) 그 직업을 얻는지 등이었다. 내가 왜(why) 그 일을 해야 하는지, 내가 왜(why) 그 일을 좋아하는지, 왜(why) 그 일이 내게 의미 있는지는 거의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떤 일에 종사할 때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그 일을 통해 진정한 만족감을 얻을 수 없을뿐더러 일을 오래 지속할 수 없다. 이것이 그날 내가 병실에 앉아 있는 동안 얻은 깨달음이다.
한 시간쯤 지나서야 환자는 울음을 그쳤다. 나는 환자를 가만히 다독여주고는 용기를 북돋는 말을 몇 마디 건넸다. 수녀는 병실을 떠나기 전 내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고 나 역시 예를 갖춰 인사했다. 내게 커다란 깨달음을 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였다. 나는 수녀가 복도 저 끄트머리에서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그 모습을 지켜봤다.
취미를 직업으로 삼아도 될까?
즐겁고 자유로운 길을 선택하라
사람들은 미래를 알 수 없기에 두려워하고 망설인다. 또 그렇기 때문에 전망 있는 일인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인지 등의 현실적인 문제에 더욱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는 귀 기울이기 힘들다. 나는 목적지까지 데리고 가는 것은 오직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뿐이다. 그러니 유일하게 의지하고 경청하며 신뢰해야 할 대상은 바로 마음이다.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나만의 직업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실패를 경험하지 않는다면 변화나 발전은 도무지 기대할 수 없다. 단언컨대 실패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않고 가슴을 활짝 열고 기꺼이 받아들이자. 그런데 현실에서 각종 실패를 경험하고 적응해가다 보면 과연 종점은 어디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알아둬야 할 것은 마음의 소리에 응답하는 과정은 마라톤과 같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장기전에 뛰어들겠다거나 모든 과정을 즐겁고 자유롭게 즐기겠다는 식의 마인드가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결사의 각오로 현실과 싸우거나 쉼 없이 전진하는 태도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높이 살 만하지만 이것은 종점이 어디일지도 모르면서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속도로 마라톤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단기간에 성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앞서 모든 자원과 체력을 소진해버린다면 목표에 도달하기도 전에 결심이 흔들리거나 자신감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든 멀리 내다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이 5년, 10년 심지어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린다면 어떤 자원이 필요하고 어떤 리스크가 있을지, 내가 정말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인지를 잘 고려해봐야 한다. 이러한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야 마음의 소리를 따라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고 싶은 일을 처음 찾았을 때 가졌던 열정과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작가가 되고 싶다면 매일 자신이 쓴 글을 조앤 K. 롤링이나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성공한 작가의 글과 비교하는 것은 금물이다. 또 농구선수가 되고 싶다면 자신의 농구 실력을 NBA 프로선수들과 비교하는 것도 삼가야 한다. 무의미한 비교는 자신감을 상실시키고 좌절감을 안겨줄 뿐이다. 나를 이끄는 진정한 힘은 바로 마음속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간절한 열망이다. 이는 단순히 남들의 눈에 좋아 보이는 일을 할 때에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목적지가 없는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비록 어디로 갈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곳에서 낯선 풍경을 감상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일 모두 설레는 경험이 될 것이다. 가능하다면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노력을 기울이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성공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면 무슨 일을 하든지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
미래에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면 ‘과연 이 일을 계속해도 될까’라고 고민하기보다는 현재 그 일을 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 마라톤을 할 때 결승점을 몇 등으로 통과할까 기대하기보다는 달리고 있는 그 순간의 호흡에 집중해야 한다. 의사가 되었다면 앞으로 얼마나 큰돈을 벌 수 있을지 기대하기보다는 현재 내가 담당한 환자를 정성껏 치료하여 높은 등수나 돈보다 더 값진 성취감을 얻는 게 훨씬 가치 있다. 마찬가지로 작가가 되고 싶다면 책을 내서 얼마만큼의 수입과 명성을 얻을 수 있을지 계산하기보다는 지금 현재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노력의 결과로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을 놓고 본다면, 결과와 상관없이 늘 즐거운 마음으로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면 실패한들 전혀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면
관성적 사고에서 벗어나다
“주유는 제갈량을 제거할 목적으로 사흘 내에 화살 십만 개를 구해 오라고 명합니다. 이때 주유, 노숙 등이 생각한 방법은 대나무, 깃털, 풀 같은 재료로 화살을 만드는 전통적인 방법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제갈량은 상상력을 동원해 대담하고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낸 거죠. 바로 ‘초선차전(草船借箭, 짚단을 실은 조각배를 띄워 조조의 화살을 받게 한 것)’입니다. 제갈량은 한마디로 관성적 사고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처럼 관성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 여러분의 미래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나요?”
내가 이렇게 묻자 대부분의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말했다. “관성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 앞으로의 인생에 도움이 된다는 말에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역사적 교훈이나 깨달음 등은 예전부터 수없이 들어왔습니다. 그건 여기 모인 친구들 모두 마찬가지일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사고방식이 정말로 그때와 달라졌나요? 그러니 결국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그
저 자기만족 아닐까요?”
나는 학생들에게 다시 물었다. “여러분 거의 모두가 조금 전 ‘물고기 잡는 법’이 인생에 도움이 된다고 대답했어요. 그런데 책을 통해 여러 ‘물고기 잡는 법’을 배웠지만 인생의 구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죠. 그렇다면 결국 책을 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요?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설명해줄 사람 있나요?” 그러자 한 학생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수영 배울 때와 같은 것 같아요. 교실에서 수영 이론을 배우고 실제로 수영하는 동영상도 여러 번 봤지만 막상 누군가가 수영장에 무작정 집어넣으면 수영을 못하는 것처럼 말이에요.”“정말 좋은 예를 들었어요. 수영을 하는 것은 이론과 생각만으로는 부족하죠. 끊임없는 실천과 연습을 거쳐야만 이론과 생각도 자신의 일부분이 될 수 있어요. 그렇지 않다면 생각은 생각일 뿐이고 지금의 자신도 예전의 자신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죠. 자신의 생각과 자신 사이에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죠?”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남학생이 손을 들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저의 깨달음 혹은 생각을 실제 제 자신과 연결할 수 있을까요?”
“바로 내가 막 여러분에게 하고 싶었던 질문이에요. 자신의 생각과 자신을 연결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자기 인생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깨달음으로 현재의 자기 자신을 점검해보는 거예요. 자신의 습관 혹은 어떤 일을 처리할 때의 방법이나 결정 같은 것을요. 헤어스타일을 예로 들어볼까요. 제갈량처럼 관성적 사고에서 벗어나 지금 자신의 헤어스타일은 괜찮은지 점검해보는 거예요.”
나는 헤어스타일이 조금 독특한 남학생에게 물었다. “학생은 왜 그런 스타일로 머리를 잘랐지?”“저는 남들과 똑같은 스타일이 싫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한국 드라마를 보게 되었는데 이런 헤어스타일을 한 배우가 눈에 띄었어요.”“그러니까 남들과 다른 헤어스타일을 하고 싶었다는 말이죠? 알겠어요. 그럼 헤어스타일을 그렇게 바꾸고 나서는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요즘 이런 헤어스타일을 한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서 조금 후회가 돼요.”
그 학생이 웃으며 옆에 있는 대머리 남학생을 가리켰다. “이런 스타일도 괜찮은 것 같아요.”“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글쎄요. 멋있는 것 같아요.”
대머리 남학생에게 물었다. “학생은 지금 자신의 스타일이 멋있다고 생각하나요?”
대머리 남학생이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다른 학생이 웃으며 말했다. “어떤 여학생한테 자기 고백을 받아주지 않으면 머리를 밀어버리겠다고 협박했는데 결국 거절당해서 머리를 민 거예요.”강의실이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다.
“여러분은 이런 헤어스타일이 멋있다고 생각하나요?”
“멋있어요!”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헤어스타일과 관련해서 이보다 더 독특한 것,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해본 사람이 있나요?”
침묵이 흘렀다. 나는 예전에 읽은 기사 하나를 소개했다.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초등학교 남학생 소아암 환자를 위해 머리카락을 기부하다.’ 한 초등학교 5학년 남학생이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소아암 환자를 돕기 위해 5세 때부터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남학생은 종종 여자아이가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남학생은 4년 동안 머리카락을 35센티미터나 길러 가발을 만드는 데 사용하도록 소아암협회에 기부했다. 남학생은 이 머리카락으로 자신과 나이가 같은 여아 소아암 환자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