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더라도 멈추지 마라
조찬우 지음 | 다연
느리더라도 멈추지 마라
조찬우 지음 / 다연
2016년 6월 / 292쪽 / 14,000원
같은 시작, 다른 결과
어떤 과정에서나 그 성과를 좌우하는 것은 가장 부족한 자원, 즉 시간이다. - 피터 드러커
1985년에 개봉한 영화 <백 투 더 퓨처>를 재미있게 봤던 이들에게 2015년은 뜻깊은 해였다. 어느덧 3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를 오가는 게 핵심 콘셉트인 이 영화가 설정한 미래 시점은 2015년 10월 21일이다. 따라서 영화가 상상한 2015년의 모습이 오늘날의 현실과 얼마나 맞아떨어지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를 더해주는 또 하나의 관람 포인트다. <백 투 더 퓨처> 시리즈에서 주인공은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도 여러 번 오가며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는다. 현재 상황이 뭔가 이상하거나 만족스럽지 못하면 과거로 돌아가 꼬여 있는 운명을 다시 바꿔 놓는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산다는 것은 인류의 오랜 로망이다. 늘 시간에 쫓기거나 부족하다고 헐레벌떡 뛰어다녀야 하는 삶이 만족스러울 리 없다. 시간에 치이며 살기 보다 시간을 손에 틀어쥐고 여유롭게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 시험을 못 쳤으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 좀 더 열심히 공부해서 우등생이 되는 것, 사업하다가 잘못 판단하면 과거를 돌려 실수를 바로잡는 것. 이러한 바람들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현실에서의 시간은 결코 되돌려 붙잡을 수 없다.
시간을 잘 활용하려면 시간에 끌려 다니지 말아야 한다. 전광석화처럼 지나가버리는 시간의 꽁무니를 뒤쫓는 사람은 늘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데, 정작 이렇다 할 성과를 얻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일을 계획한 대로 하기 보다 시간에 쫓겨 가까스로 마무리하는 데 급급하다. 그저 일을 끝낼 뿐 마무리한 일의 성과는 기대에 못 미칠 때가 많다. 시간에 끌려 다니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시간을 스스로 안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계획 세우기의 습관화다. 나는 매일 아침 출근하면 먼저 컴퓨터 엑셀 파일부터 연다. 그 파일 안에는 개인 가계부ㆍ사업 관련 가계부ㆍ스케줄관리 등의 폴더가 세분화되어 있는데, 특히 스케줄관리 폴더 안에는 내가 그 날 하루 시간별로 해야 할 일과 만나야 할 사람 등의 일정이 빡빡하게 계획되어 있다. 이것들을 차례대로 실행하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에 도달하고, 비로소 나의 하루 일정이 완벽히 끝나게 된다.
구소련의 곤충분류학자인 알렉산드르 류비세프의 이야기를 다룬 책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세프』는 시간을 지배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류비세프는 82세의 생을 사는 동안 70여 권의 학술서와 무려 12,500여 장(단행본 약 100권 분량)에 달하는 연구 논문을 집필했다. 그 엄청난 저술을 남기기까지 도대체 그는 어떻게 시간을 보냈을까. 하루 네 시간의 수면 시간을 제외하곤 온종일 연구에 몰두한 에디슨처럼 그도 일생을 연구에만 파묻혀 지냈을까? 하지만 예상과 달리 류비세프의 일과는 보통 사람들과 별다를 게 없었다. 하루 평균 여덟 시간 숙면을 취했고, 매일 산책과 운동을 했으며, 1년에 평균 60회 정도 공연을 관람했다고 하니,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여유롭게 시간을 사용한 듯 하다.
남들과 비슷한 수면 시간, 더 여유로운 일과를 보내면서도 70여 권의 학술서와 12,500여 장의 연구 논문 저술이라는 비범한 업적을 이루어낸 비법은 시간 정복, 즉 시간관리에 있었다. 류비세프는 자신의 하루 시간을 용도별로 세세히 기록하고 매월, 매년 통계를 냈다. 그리고 이 통계를 바탕으로 이후의 시간을 계획대로 실행해 나아갔다. 스물여섯 살에 시작된 이 습관은 죽을 때까지 이어졌는데, 그 덕분에 류비세프는 여러 명이 작업하여 모은 것만큼의 방대한 저술을 남길 수 있었다. 결국 그는 24시간을 쓰면서 여러 명의 24시간을, 그러니까 혼자서 하루를 48시간, 72시간으로 쓴 셈이다. 그야말로 시간을 정복한 남자인 것이다.
타고난 재물이나 신분의 차이를 두고 ‘흙수저’니 ‘금수저’니 하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내 의지와 노력에 상관없이 인생 출발점부터가 차이가 나는 ‘흙수저’ 출신(?) 입장에선 부당하고 억울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다행히 감사한 것은 돈보다 귀하다는 시간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하루는 24시간이요, 1440분이요, 86,400초이다. 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꿈과 목표를 이루는 것은 물론이요, ‘흙수저’의 백그라운드를 ‘금수저’의 그것으로 바꿀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건강을 관리하고 가족과의 소중한 추억을 만드는 것 또한 오늘 주어진 하루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달렸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해지는 것은 역시 시간이다. 그러니 이 귀한 시간 혹여 지금 허투루 흘려보내는 건 아닌지 한번 돌아보자.
느리더라도 멈추지 않는 오늘 하루
꾸준히 참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성공이라는 보수가 주어진다. 잠긴 문을 한 번 두드려서 열리지 않는다고 돌아서면 안 된다. 오랜 시간 동안 큰 소리로 문을 두드려보라. 그러면 누군가 단잠에서 깨어나 문을 열어줄 것이다. - 헨리 롱펠로
얼마 전 사업차 대구에 들른 적이 있다. 일을 마치고 시간이 남아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김광석 거리’를 찾았다. 내가 청소년기와 대학 시절을 보내는 동안 가수 김광석은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최고의 가수였다. 그의 노래는 청춘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힘듦을 위로해주던 알싸한 소주 한 잔과 같았다. 특히 그의 노래 ‘이등병의 편지’는 군 입대를 앞둔 대한민국의 모든 청춘에게 눈물로도 모자라 콧물까지 쏙 빼내기에 충분했다. 그를 추억하며, 그때의 나를 추억하며 나는 그리 길지 않은 ‘김광석 거리’를 한 시간 넘게 오갔다. 비록 그의 노래는 들을 수 없었지만 벽화로 추억되는 그의 모습과 노랫말 그리고 그가 전하는 메시지들이 내 가슴을 두드렸다.
김광석의 에세이는 공감의 한숨과 함께 왠지 모를 안도의 미소도 이끌어냈다. 그랬다. 나 혼자 힘든 게 아니었다. 우리가 천재라고 부르던 그조차도 자기만의 한계를 느끼며 답답해했다.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의 명작을 남긴 20세기의 대표 작가 헤밍웨이도 ‘세상에서 가장 고달픈 것’으로 글쓰기를 꼽을 만큼 소설 집필을 힘겨워했다고 한다. 그러니 천재도 아닌 내가, 대다수의 우리가 스스로 한계를 느끼며 힘들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고민들이 우리가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일 터이니 오히려 반길 일이다.
목적지로 가다 보면 길도 잘 닦여 있고 컨디션 또한 좋아서 생각보다 속도가 나기도 한다. 반면, 길도 험하고 컨디션 역시 좋지 않을 때는 속도가 더뎌지기도 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바라던 대로 순탄하게 흘러가고 열심히 한 만큼 인정을 받을 때도 있지만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하거나 어떤 이유에선지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하는 때가 있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일은 잠시 숨을 고르며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일이다. 때론 순탄하게 때론 힘겹게……. 그러나 지금껏 잘 오지 않았는가.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괴테는 말했다. “운명이 겨울철 과일나무 같아 보일 때가 있다. 그 나뭇가지에 꽃이 필 것 같지 않아 보여도,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고 또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이 결국 해내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 김광석을 비롯해 헤밍웨이, 괴테 등 거장이라 불리던 이들조차 자신의 재능에 한계를 느끼며 슬럼프 시기를 겪었다. 그러니 왜 나는 이렇게 부족할까, 못났을까 자학하며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말자.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단거리 달리기에선 순위도 중요하고 기록도 중요하다. 그래서 누가 더 빨리 달리느냐가 경기의 승패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하지만 42.195킬로미터라는 먼 길을 달리는 마라톤에선 1등, 2등의 순위보다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하는 것이 사실 더 중요하다. 마라톤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선수에게조차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평균수명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요즘, 인생이라는 긴 길을 달리는 동안 숨을 헐떡일 수도, 걸음이 느려질 수도 있다. 다들 그런다. 신발 끈이 풀렸으면 잠시 허리를 굽혀 숨도 고르고 조금 휴식도 갖자. 그런다고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는다. 앞서가는 이와 비교하며 좌절할 이유 또한 없다. 속도가 아닌 방향을 살피며, 더디더라도 멈추지 않는 오늘 하루를 보낸다면 분명 바라던 꿈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단지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다. - 헬렌 켈러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들이 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한다. 두 눈을 부릅뜨고 본 게 과연 전부이고 사실일까? 봉이 김선달에게 속아 대동강 물을 산 한양의 상인들은 모든 게 확실해야 거래를 했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누구나 다 공짜로 길어가는 강물을 돈 주고 사고 말았다. 김선달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장난을 많이 쳤다. 겨울이 되어 강물이 얼기 시작하자 한밤중에 볏짚과 모래를 얼음 위로 뿌린 뒤에 마치 기름진 논처럼 속여 팔았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가짜 볏짚과 모래에 속아 눈에 보이지 않은 얼어붙은 강을 덜컥 사고 만 것이다. 봉이 김선달은 눈에 보이는 것이 오히려 허상이고 부질없는 것이라고 알려주려는 듯 사람들의 눈을 속였다. 봉이 김선달에게 속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매달렸다. 만약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감안할 줄 알았다면 그리 허망하게 속지는 않았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판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럴싸하게 보이는 것에 가려져 실제의 가치가 터무니없는 것도 있지만, 그와 반대로 아주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도 있다. 예컨대 공기나 사랑의 감정이 그것이다. 공기가 없으면 살 수가 없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면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신선한 공기를 해치는 환경 파괴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사랑의 감정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다. 미세 먼지의 공습이나 뒤늦게 떠나간 연인의 빈자리에 괴로움을 느낄 때만 소중함을 떠올린다. 이런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면 부정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일상에서 너무나 쉽게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잊고 지낼 때가 많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보면, 어른들은 아이의 친구에 대해 몇 살인지, 몸무게가 얼마인지, 아버지의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를 궁금해한다. 눈에 보이고 측정 가능한 수치로 아이의 친구를 이해하려는 것이다. 정작 그 아이가 어떤 놀이를 좋아하는지 따위는 관심이 없다. 그리고 “장밋빛 벽돌로 지은 예쁜 집을 보았어요. 창문틀 위에는 제라늄 화분이 놓여있었고 지붕 위로는 비둘기가 날고 있었어요.”라고 말하면,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상상을 못한다. 반면에 “십만 프랑짜리 집”이라고 하면 그제야 “멋진 집이구나!”라고 감탄하는 것이다.
눈에 보인다는 것은 측정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른들은 가급적이면 값을 매길 수 있는 측정치를 믿는다. 그러니 집이라고 하면 평수, 역세권 여부 등을 종합하여 평당 얼마인지의 가치만을 따진다. 창문 틀 위의 제라늄 화분과 지붕 위로 날아다니는 비둘기를 볼 수 있는 집의 가치는 상상도 할 수 없고 가치도 가늠할 줄 모른다. 그러니 행복이라는 가치도 눈에 보이는 물질적 기준으로만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탐욕으로 흘러가는 것을 제어하지 못한 채 자멸의 길로 빠지기도 한다.
이 세상이 규칙만 존재하고 수치로만 측정할 수 있는 곳이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살이는 계산기 두드리는대로 이뤄지지는 않는 불확실과 불규칙의 연속이다. 빅 데이터의 시대라고 해도 여전히 눈에 보이는 수치와 데이터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직감과 감성이 필요하다. 분석과 확률은 말 그대로 ‘가급적’ 눈에 보이는 가치로 환산하려는 가능성일 뿐이다. 예술을 전공했던 나로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다.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감정의 표출이다. 더군다나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역할을 맡았을 때는 보이지도 않고 느끼지도 못한 것을 찾아내 연기해야 한다.
예컨대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군인의 역할을 맡았다고 치자. 이 역할을 어떻게 제대로 연기로 표현할지는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대본에 보이는 것은 그저 글로 적힌 대사일 뿐이다. 글로 된 대사를 바탕으로 감정을 이끌어내고 얼굴과 몸짓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겪은 상처투성이의 군인을 표현해야 한다. 이렇게 연기와 예술을 공부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느낌과 가치를 찾기 위해 수없이 노력해야 했다.
예술과 연기를 뒤로 하고 사업과 강연을 하는 지금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노력은 여전히 변함없다. 거래를 할 때도 눈에 보이는 재무제표나 계산에 따른 현재의 수치보다 미래의 잠재적 가치를 보려고 애쓴다. 이런 노력은 눈앞의 이익에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기둥이 되어 나를 잡아줄 것이다. 당장의 이익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려는 태도를 갖춰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은 현재보다 미래를 보려는 태도를 갖췄다는 뜻이다.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가치와 안목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일이야말로 차별화된 나만의 경쟁력이 될 것이다.
책을 왜 읽니?
책을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다. - 엘빈 토플러
“여러분, 책 읽지 마세요.”
‘아니, 책을 읽지 말라니!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어떤 강연장에서 강사가 대뜸 책을 읽지 말라고 했다. 독서는 열이면 열 모두가 강조하는 미덕이었기에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책을 많이 읽으라는 이야기를 내가 잘못 들었나?’
그러나 분명 졸지도 않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강연자를 응시하며 귀를 활짝 열고 듣고 있었다. “책 읽기는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으로 살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책을 읽으면서 자기화 과정을 거치지 않죠. 그저 책에 나온 내용을 따라 하는 데 급급한 경우가 많습니다.”강연자는 책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잘못된 책 읽기를 지적한 것이었다. 마치 연예인 코스프레를 하듯 책을 읽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냐고 죽비를 때리듯 청중에게 일갈한 것이다. 그의 지적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하고 있는 책 읽기가 그런 게 아니었을까 하는 민망함 때문이었다. 다른 이의 뒤통수를 따라가는 삶이 아닌,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사고와 행동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동경하는 대상을 고스란히 모방하거나 책 내용처럼 행동한다고 해도, 저마다 주어진 환경과 재능이 다르니 결과는 사뭇 다르게 나오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할까, 아니 책을 왜 읽는 것일까? 책을 읽지 말라는 도발적인 말은 사실 올바른 책 읽기가 무엇인지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내가 세상의 모든 경험을 할 수도 없기 때문에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책을 통해 절대적 교본처럼 그대로 따라 하라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경험을 간접적으로나마 하면서 나의 삶과 길을 찾으라는 것이다. 성장을 위해 책을 읽는 것인데, 그 성장은 모방의 삶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요, 한 가지의 인생을 정답으로 알고 살자는 것도 아니다.
‘갭이어(Gap Year)’라는 말이 있다. 영국에서는 1960년대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대학에 가는 게 아니라 1년 정도 다양한 경험을 쌓도록 한다. 그 기간 동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나 봉사, 여행 등을 할 수 있다. 그동안 학교 교육을 받으면서 공부와 대학만을 생각하던 학생들은 이 기간 동안 자신이 체험해보지 못했던 삶을 조금이나마 겪으면서 자신의 진로를 스스로 고민한다. 갭이어는 공부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여 미국과 캐나다도 이 제도를 도입했는데, 갭이어를 거친 학생들의 학업 중도 포기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아마도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이 왜 공부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