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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 굵은 고전 읽기

명로진 지음 | 비즈니스북스



짧고 굵은 고전 읽기

명로진 지음

비즈니스북스 / 2015년 10월 / 324쪽 / 15,000원





Part 1 알고는 있지만 제대로 읽어 본 적 없는 고전



《역사》_헤로도토스: 신들의 세계에 나타난 실증적 역사관

로마의 시인 키케로는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동양에 사마천이 있다면 서양에는 헤로도토스가 있지요. 헤로도토스는 분명 역사의 아버지입니다. 그것도 무척 유머 넘치는 아버지이지요. 헤로도토스(BC 484~425)는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세계’라고 알려진 유럽과 중앙아시아, 사하라사막 이북의 아프리카 지역을 여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구석구석 꼼꼼히 관찰했습니다. 해박한 지식과 놀라운 기억력, 재담을 구사하는 능력을 지닌 그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의 전쟁을 중심으로 방대한 세계사를 남겼지요 그것이 바로 《역사》(전 9권)입니다. 그는 왜 《역사》를 썼을까요? 책 첫 부분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글은 할리카르낫소스 출신 헤로도토스가 제출하는 탐사 보고서다. 그 목적은 인간들의 행적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망각되고, 헬라스인들과 비 헬라스인들의 위대하고도 놀라운 업적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무엇보다도 헬라스인들과 비 헬라스인들이 서로 전쟁을 하게 된 원인을 밝히는 데 있다.

할리카르낫소스는 지금의 터키 보드룸 지방으로 에게 해에 접한 아름다운 휴양 도시인데, 당시에는 그리스에 속한 지역이었습니다. 헬라스는 그리스를 뜻합니다. 고대 그리스는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자율성과 독립성을 지닌 여러 도시국가들의 연합체였어요. 그래서 ‘나는 아테네 사람’, ‘나는 스파르타 사람’이란 인식은 있어도 ‘나는 헬라스(그리스) 사람’이란 인식은 약했지요. 다만 같은 지역에 있는 데다 비슷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에 올림픽이나 제전을 함께 여는 등 일종의 공동체 의식은 있었습니다. 한편 위에서 말하는 비 헬라스인은 페르시아인입니다. 비 헬라스인의 어원은 ‘바르바로스’로 이방인을 뜻합니다. 이 바르바로스는 야만인을 뜻하는 영어 ‘바버리언’의 어원이지요. 영국의 그리스 역사가 H. D. F. 키토는 바르바로스가 그저 “그리스어를 할 줄 모르는 이들”을 뜻했다고 말합니다. 처음부터 이방인을 깔보는 의미는 없었다고 해요.

기원전 492년에서 기원전 448년에 걸쳐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여러 차례 침공합니다. 첫 번째 침공은 다리우스 왕 때였습니다. 기원전 491년, 동방의 강대국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점령하기 전에 사신을 보내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합니다. “너희 땅의 흙과 물을 내게 바치면 전쟁 없이 다스려 주마. 단 내게 복종하고 조공을 바쳐라. 거부하면 오직 살육이 있을 뿐이다.” 대다수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사절단을 처형하며 반발했지요. 이를 발단으로 페르시아는 기원전 490년 아테네 지역을 침공, 마라톤 평원에서 격돌하게 되는데 이 싸움에서 아테네에게 패해 물러납니다.

기원전 480년 왕위를 물려받은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는 다시 그리스를 침략합니다. 이 시기에는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강국이었어요.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와 군인들은 테르모필레 협곡을 방어하고 나머지 연합군은 살라미스 해협으로 가서 대기했습니다. 영화 《300》의 소재가 바로 이 테르모필레 전투지요. 스파르타의 주력군은 혈투를 벌였지만 중과부적으로, 백만 명에 이르는 페르시아군에 끝내 패배하고 맙니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그리스 연합 해군은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군을 물리치고 힘겹게 자신들의 흙과 물을 지킵니다.

역사는 맹신과 관습을 버리는 데서 시작한다: 헤로도토스는 지리학자이자 여행가, 탁월한 이야기꾼이었으며 후대를 위해 역사적 사실을 엄정한 기록으로 남긴 최초의 역사가였습니다. 그의 서술은 철저히 인문학적입니다. 《역사》는 신화적 세계관과 온갖 미신이 주도하던 고대 그리스 시대에 역사라는 실증적 학문의 바탕을 제시한 진귀한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라는 문구를 반복하면서 말이지요.

도도네의 여사제들은 비둘기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제우스의 신탁소를 넘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믿지 않는다. 비둘기들이 어찌 사람의 말을 하겠는가? (…)가끔 신전에 제우스 신이 내려와 낮잠을 잔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헬라스인들은 아직 인간이던 헤라클레스가 아이깁토스에 갔을 때 아이깁토스인들이 그를 때려 죽여 제우스 신에게 희생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아이깁토스인들의 성격과 관습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아이깁토스인들은 흠 없는 양과 황소, 수송아지와 거위만 제물로 바친다. 그러니 어떻게 사람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겠는가? (…)

아마도 헤로도토스가 역사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이유는 이런 실증적 태도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역사》는 페르시아 전쟁에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지만 전쟁 전후의 상황, 그리스ㆍ소아시아ㆍ이집트ㆍ바빌론 지역의 다양한 문화와 역사에 대한 저자의 편력을 고스란히 펼쳐 보입니다. 헤로도토스는 많은 곳을 여행한 덕에 한 지역에 오래 사는 사람들이 가질 법한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 모든 관습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을 고르라고 하면 심사숙고 후에 자기 나라 관습을 고를 것이다. 누구나 자기 나라 관습이 가장 훌륭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처럼 누구나 자기들의 관습이 최고라고 여기며,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다. 다음의 경우를 보면 확실히 알게 되리라.

다레이오스가 페르시아 왕이 되었을 때, 자신을 시중들던 그리스 사람들을 불러 놓고 얼마를 주면 그들 부친의 시신을 먹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리스인들은 “돈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그런 짓은 할 수 없다.”고 답했다. 그 말을 듣고 다레이오스는 인도의 칼라티아이족을 그 자리로 불렀다. 칼라티아이족은 부모가 죽으면 그들의 시신을 먹는 장례 풍속이 있었는데, 그들의 말을 그리스어로 통역하도록 한 다음 돈을 얼마나 주면 부모의 시신을 화장하겠느냐고 물었다. 칼라티아이족은 비명을 지르며 “그런 끔찍한 말은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관습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스 시인 판다로스가 말한 대로 “관습은 만물의 왕”이다.

《역사》에는 독특한 장례 풍속을 가진 두 민족이 등장합니다. 카스피해 연안의 마사게타이족과 인도의 칼라티아이족입니다. 마사게타이족 사람들은 늙으면 자식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최선으로 여겼어요. 이들은 늙은 부모를 죽여 그 시신을 토막 내서 양이나 염소와 함께 삶아 먹었습니다. 병들어 죽은 사람은 그냥 땅에 묻는데, 마사게타이 사람들은 그냥 땅에 묻히는 것을 재앙으로 여기고, 죽임을 당해 일가친척에게 먹히는 것을 축복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엽기적인 관습이지요? 인도의 칼라티아이족도 이런 관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부모의 인육을 먹는 행위는 그들의 정신과 영혼을 자기 몸으로 흡수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어찌 되었든, 사람이 죽으면 화장하는 것이 관습이었던 그리스 사람들이 보기에 마사게타이족이나 칼라티아이족의 장례 풍습은 기절초풍할 일이었지요. 하지만 칼라티아이족이 보기에 화장 풍속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페르시아 왕 다레이오스가 이 두 민족을 불러 이상한 질문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헤로도토스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써놓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다문화, 다민족을 다스려야 했던 다레이오스가 ‘너희들의 문화가 최고라는 생각은 착각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이런 이벤트를 마련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문화란, 관습이란 그런 게 아닐까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엽기적인 것도 그 관습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신성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무엇도 절대적으로 옳거나 맞을 수는 없다는 것, 이것이 헤로도토스가 《역사》에서 말하고자 한 인문 정신이 아닐까요? 그가 소개하는 또 다른 이야기를 봅시다.

아테네인은 보이오티아인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보이오티아인은 수많은 전사자를 내고 700명이 포로로 잡혔다. 같은 날 에우보이아섬으로 건너간 아테네인은 칼키스인과 싸워 이들도 이겼다. (…) 아크로폴리스 성문 왼쪽의 전차에는 이를 기념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용맹한 아테네의 아들들은

보이오티아인과 칼키스인을 정복하고

족쇄를 채워 감옥에 가두어

그 오만함의 불꽃을 껐노라.

여기에 전리품의 10분의 1로

전차를 만들어 아테네 여신에게 바치노라.



이렇게 해서 아테네는 강성해졌다. 그들은 언론의 자유와 평등이 단지 한 가지 측면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보여주었다. 아테네인은 독재 아래에 있을 때는 전쟁에서 주변의 어느 국가도 이길 수 없었지만 독재자로부터 해방되자 다른 나라를 모두 제압해 버렸다. 이것만은 확실하다. 그들은 압제 아래서는 열심히 싸우지 않았다. 싸워 봤자 독재자만 이롭기 때문이다. 자유인이 된 다음에 각자 최선을 다해 전쟁에 임했다. 자기를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

위 대목은 기원전 6세기경 아테네에 대한 설명입니다. 아테네는 주변국들과 경쟁하면서 강력해졌는데 그 이유가 독재자(참주)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민주적 체제를 갖추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헤로도토스는 참주 지배하의 도시국가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이야기합니다. 참주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지배하지, 결코 시민의 이익을 위해 지배하지 않는다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유민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참주들은 결정을 제멋대로 내리며 공공의 재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때로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기도 합니다. 자유민이라면 이런 참주를 쫓아내고 민주 체제를 옹호해야 마땅합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강자의 지배를 받으며 편히 사는 것보다는 힘이 들어도 저항하며 자유롭게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헤로도토스의 이 이야기에 당시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귀를 기울였을지는 의문입니다. 다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헤로도토스의 외침이 절실한 것을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과 역사는 반복된다는 허무감이 교차합니다.

피로미스에서 피로미스로, 인간의 역사에 신은 없다: 자, 이제 《역사》의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자 인문학 정신을 보여 주는 탁월한 대목을 소개하겠습니다.

예전에 역사가 헤카타이오스가 테베를 방문해 자신의 가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 가문의 16대 선조는 신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그곳의 제우스 신전 사제들은 내게 한 것과 똑같은 행동을 그에게도 했다. 그들은 나를 큰 홀 안으로 데려가 나무로 깎아 만든 인물상을 보여주면서 그 목상에 새겨진 숫자를 하나하나 셌다. 대사제들은 생전에 이곳에 자신의 모습을 본떠 목상을 세운다. 사제들은 그 목상들을 하나하나 세면서 각각의 목상은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우리는 가장 최근에 죽은 사제의 목상부터 시작해서 모든 목상을 한 바퀴 돌았다.

헤카타이오스가 자신의 가계를 들먹이며 자신의 16대 선조가 신이라고 주장하자, 사제들은 자신들이 가계도를 어떻게 만들어서 물려주는지 말하면서 목상의 수를 일일이 셌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이 신에게서 태어난다는 헤카타이오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제들은 345개나 되는 거대한 목상들 하나하나는 모두 ‘피로미스’에서 ‘피로미스’로 대물림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중 어느 하나도 영웅이나 신과는 상관이 없다면서, 피로미스는 그리스 말로 인간이라는 뜻이다.

헤로도토스의 시대에 이집트 사람들은 매우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사고했습니다. 그들은 범람하는 나일 강을 다스리기 위해 땅 넓이를 측정하고 줄어들거나 늘어나는 면적을 계산했습니다. 바로 여기서 기하학이 출발했지요. 헤로도토스는 《역사》 2권에서 아이깁토스(이집트) 사람들에 대해 말하면서 “내가 만난 민족들 가운데 가장 해박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세계는 신과 인간이 공존하는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신도 인간처럼 질투하고 사랑하고 시기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가끔 신이 무녀의 입을 통해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한다고 생각했지요. 특히 그리스인들은 신에 대한 맹신이 이집트보다 더했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5세기경 헤카타이오스라는 그리스인이 이집트를 방문해서 “우리 16대 선조는 신이다. 고로 나는 신의 후예다!”라고 뻥을 친 겁니다. 이 말을 듣고 이집트 사람들은 대꾸도 안 합니다. 대답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저 선조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을 목상으로 만들어 놓은 방으로 그를 데려갑니다.

《역사》에는 “인간의 3세대가 100년이므로 340여 세대를 햇수로 따지면 1만 1,340년이 된다. 이집트 사제들에 따르면 그동안 신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정말 통쾌하지 않습니까?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질타이며, 신학적 세계관에 대한 반격이지요. 인문 정신이 빛나는 대목입니다.



Part 2 지성과 교양에 목마른 당신에게 꼭 필요한 고전



《소크라테스의 변명》_플라톤: 철학을 위한 최초의 순교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여러분을 따르기보다는 신을 따를 것입니다. 목숨이 다할 때까지 철학을 가르치고 실천하며 살아가려 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지 이렇게 타이르고 설득할 것입니다.” / “이 사람아, 자네는 위대한 도시 아테네의 훌륭한 시민이면서 돈벌이나 명예, 지위를 얻는 데만 애를 쓸 뿐, 지혜나 진리에 대해서 또는 영혼을 한 단계 도약하게 만드는 멋진 일에 대해서는 어째서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 건가? 부끄럽지 않나?”

소크라테스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혜를 사랑했습니다. 이 지혜에 대한 사랑은 철학, 즉 필로소피라는 말의 어원으로 소크라테스는 그야말로 철학을 위해 생명을 바친 최초의 순교자였지요. 소크라테스는 생전에 책 한 권 남기지 않았는데 다행히 플라톤이라는 훌륭한 제자를 만나 이름을 후세에 전하게 됐습니다. 서양철학에서 소크라테스가 중요한 이유는 ‘자연은 무엇인가? 우주는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문제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아는가?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우리가 아는 것은 참인가?’라는 문제로 철학을 끌어내렸기 때문입니다. 철학적 용어로 전자를 존재론, 후자를 인식론이라고 하지요. 소크라테스가 인식론을 중요한 문제로 다루면서 철학은 인간과 삶을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대에는 ‘그리스’라는 단일한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등 도시국가(폴리스)들이 저마다 독립과 자유를 누리며 공존하고 있었지요. 소크라테스가 활동하던 시기에 가장 강력했던 두 국가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였습니다. 이 두 나라가 그리스 지역의 패권을 놓고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을 벌였지요. 이 전쟁에서 스파르타가 승리해 아테네에 영향을 미쳤으나 아테네 사람들은 곧 독립하게 됩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전에도 페르시아와 두 차례나 큰 전쟁을 치렀고, 이후에는 각 도시국가가 분쟁 속에 혼란을 거듭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에 영향을 미쳤고 《소크라테스의 변명》에도 투영되어 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영원히 무지한 법: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플라톤이 남긴 소크라테스의 재판 기록입니다. 50쪽도 되지 않는 이 고전 속에 서양철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의 핵심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도대체 소크라테스는 무엇 때문에 재판정에 서게 됐을까요? 그의 말을 들어 봅시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에 대한 고발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멜레토스 등이 제기한 그 고발이란 게 사실은 무고인데, 어쨌든 그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봅시다. 그들의 고소장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악인이고 이상한 자다. 하늘 위와 땅 밑의 일을 탐구하고 늘 빈약한 근거를 가지고 과한 주장을 한다. 그리고 남에게 이것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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