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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가 강자를 이긴다

김식 지음 | 북오션



약자가 강자를 이긴다

김식 지음

북오션 / 2015년 6월 / 224쪽 / 14,000원





Chapter 1 약자병법으로 강자와 맞서다



절대 강자를 이긴 생각하는 야구

노무라는 야구를 연구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일본 최초의 인물이다. 그라운드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따지고, 객관적인 데이터를 이용해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해냈다. 이른바 ‘ID 야구(Import Data, 야구에 필요한 데이터를 모아 중요한 정보를 뽑고 가공해 사용하는 것)’다. 노무라 이전의 일본 야구는 미국 야구를 이기고 싶은 열망으로만 가득했다. 그러나 힘과 기술이 모자라 이길 수 없었고, 강자와 똑같은 방법으로는 강자와 맞설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노무라가 ID 야구를 설파한 1990년대 이후 일본 야구는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 연구하고 분석해서 상대의 작은 틈을 파고드는 야구가 큰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하여 공부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게 됐다. 그런 과정을 거쳐 일본 야구는 2006년과 2009년 WBC에서 미국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것만으로 일본이 미국을 이겼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일본 나름의 색깔과 경쟁력을 갖게 된 것은 분명하다.

그 중심에 노무라가 있었다. 그는 생각하는 야구를 구현하고 저서를 통해 노하우를 공개했다. 상대가 그를 따라잡으려 하면 그는 새로운 방법을 연구해 더 멀리 달아났다. 그러면서 일본 야구는 더 단단해졌다. 분석 야구에서 그는 일본 최고였다. 야구의 가장 꼭대기에 있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노무라는 일본의 야신(야구의 신)이다. “생각하는 야구가 생각하지 않는 야구에 질 이유가 없다.”

노무라는 관습, 타성, 습관 등을 싫어했다. 하던 대로 하고, 남들처럼 한다면 이길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달리 생각하고, 새롭게 준비하고, 과감하게 실행하는 것이 약자가 강해질 수 있는 길이라고 노무라는 생각했다. 노무라가 강한 이유는 남들보다 더 생각하고, 남들이 생각하지 않는 부분을 찾아 연구하는 데 있다. 계획을 완벽하게 세웠다고 하더라도 계획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야구에서도 모든 계획은 조금씩 어긋나고 빗나간다. 강한 공을 던지면 알고도 못 친다. 그러나 운이 좋으면 빗맞은 타구도 안타가 되는 게 야구다. 그래서 노무라는 더욱 치밀하게 계획하고 열심히 준비했다. 1안이 실패했을 경우 2안을 꺼내고, 2안이 막히면 3안을 시도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다.

노무라는 충분한 연구를 통해 승리로 가는 길을 여러 개 만든다. 최단거리로 진격하다가 막히면 옆길로 새고, 뒷길로 돌아가도록 전략을 짠 것이다. 이기기 위해서는 힘으로 싸우는 정법과 기교를 앞세우는 기법 모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노무라는 다음 다섯 가지 대원칙 아래 세부 전략을 짰다. 첫째, 꼭 봉쇄해야 할 선수와 그렇지 않은 선수를 골라낼 수 있다면 이길 수 있다.

둘째, 전력의 부족한 부분을 정확히 안다면 이길 수 있다.

셋째, 스태프와 선수들, 선배와 후배가 단결하면 이길 수 있다.

넷째, 미리 생각하고 상대를 기다리면 생각하지 않은 상대를 이길 수 있다.

다섯째, 감독이 유능하고 구단이 감독을 지지하면 이길 수 있다.



여기에 ‘생각하는 야구’의 요체가 숨어 있다. 그리고 노무라는 팀이 하나로 뭉쳐 상대를 이길 수 있도록 교육을 실시했다. 그 결과 야쿠르트는 노무라 감독 재임 기간인 1990년부터 8년 동안 총 세 차례나 일본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1950년 창단한 야쿠르트가 60여 년 동안 다섯 차례만 일본시리즈 우승을 한 걸 감안하면 노무라 시대의 야쿠르트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Chapter 2 0에서 출발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노무라가 처음 감독이 된 건 1970년 난카이 호크스에서다. 당시 나이 35세. 그로부터 8년간 ‘선수 겸 감독’이라는 일본 야구 역사상 유례없는 시절을 거쳤다. 45세의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 프로 무대를 떠나 9년간 야인 시절을 보낸 그는 야쿠르트 스왈로스(1990~1998년), 한신 타이거즈(1999~2001년), 라쿠텐 골든이글스(2006~2009년)에서 감독을 지냈다.

노무라가 맡은 팀들은 하나같이 최하위에서 허덕대고 있었다. 일본 퍼시픽리그 명문 팀이었던 난카이는 1969년에 창단 후 처음으로 최하위까지 추락한 상태였고, 1990년 야쿠르트는 도쿄를 함께 연고지로 쓰는 일본 최고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신은 1985년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뒤 끝없이 추락한 끝에 ‘종이호랑이’라고 놀림을 받던 터였다. 라쿠텐 역시 2005년 창단 후 기록적인 패배를 이어가고 있었다.

노무라는 모두가 좋아하는 호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도 그를 필요로 하는 팀은 항상 있었다. 특히 위기에 빠지거나 체질이 허약한 구단은 어김없이 그를 떠올렸고, 그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노무라만큼 꼴찌 팀을 많이 맡은 감독은 국가와 종목을 초월해도 매우 드물다. 한국의 김성근 감독이 태평양, 쌍방울, 한화 등 하위 팀 지휘봉을 잡은 것과 비교할 수 있다. 노무라가 대답하기 가장 난처해하는 질문이 있다. “왜 최하위 팀만 당신에게 감독직을 제안하는 겁니까?” 그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내가 태어난 이유가 아닐까?”

그가 강팀을 지휘했다면 더 많은 승리와 영광을 맛봤을 것이다. 그러나 노무라의 운명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모자란 재능과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0에서부터 하나하나 채워가는 것, 그게 노무라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노무라는 0에서 1을 이끌어내는 과정을 좋아했고, 1을 2로 만드는 방법을 연구했다. 이는 노무라 야구, 노무라 경영의 출발점이다. 노무라의 유년기와 청년기 역시 0이었다. 그 시절엔 풍족하게 어린 시절을 보낸 이가 드물었다지만 그는 가난해도 너무 가난했다.

노무라는 1935년 쿄토의 해안가 마을에서 작은 식품점을 운영하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노무라가 세 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징병되어 중국 만주에서 전사했다. 어머니는 식품점 일을 보며 조산사로도 일하여 두 아들을 키웠다. 그러다 노무라가 열한 살 때 어머니마저 직장암에 걸려 가세는 더욱 기울었다. 노무라는 어떻게든 어머니를 편안하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 마음이 노무라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집념의 출발점이다.

노무라는 소학교 3학년 때 형과 함께 신문배달을 시작했고 그 덕분에 그럭저럭 생계를 꾸릴 수 있었다. 신문 배달은 중학생이 되어서도 계속했다. 하루하루가 힘겨웠던 노무라는 다짐했다. “가난은 정말 싫어. 꼭 부자가 될 거야.” 그의 가슴속에서 열망이 불타올랐다. 현실을 극복하고 싶은 마음,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갖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것이 노무라의 에너지였다. 노무라를 평생 공부하고 땀 흘리고 쉬지 않게 한 원동력이었다.

노무라는 중학교 때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다. 노무라와 달리 형 요시아키는 모범생이었다. 어머니는 노무라에게 “너는 중학교 졸업 후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요시아키를 뒷바라지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형이 나섰다. “어머니, 제가 대학 진학을 포기할게요. 제가 일을 할 테니 노무라는 어떻게 해서든 고등학교에 보냈으면 합니다.” 형은 가고 싶은 길을 멈췄다. 대신 동생에게 새 길을 열어줬다. 훗날 노무라는 “내가 야구를 할 수 있는 건 순전히 형 덕분이다. 아무도 몰라주던 내 재능을 형이 먼저 발견했다”며 수없이 감사를 전했다.

노무라는 미네야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야구를 더 좋아하게 됐다. 좋아하는 운동을 하니 실력이 꽤 빨리 늘었다. 그러나 고시엔 대회에 출전하기엔 기량이 너무 떨어졌다. 미네야 고등학교는 대회 예선 1회전에서 탈락했다. 그러던 중 노무라는 난카이 구단이 입단 테스트를 연다는 정보를 얻고, 이후 프로 선수가 되는 것만을 생각했다. 당시 그는 프로에 입단할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었다.

난카이는 신인 스카우트에 많은 돈을 투자하지 않았다. 몸값 낮은 선수들을 2군에서 키워 1군 전력으로 활용하는 것이 구단 방침이었다. 당시 난카이의 주전 포수는 서른한 살이었다. 당시에는 꽤 노장축에 속하는 나이였다. 계산이 섰다. 난카이, 거기다 포수 포지션은 이른 시일 내에 1군에 오를 수 있는 최적의 선택이었다. 노무라는 신문 배달을 하며 구단 관련 기사들을 틈틈이 읽고 필요한 정보를 모았다. 그의 첫 번째 정보전이었다.

입단 테스트에는 300명 정도가 몰려들었다. 노무라는 7명의 합격자 안에 들었다. 그 가운데 노무라를 포함해 포수가 4명이었다. 그들이 정식 선수가 아닌 불펜포수(투수의 공을 받아주는 보조 역할)로 뽑혔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어쨌든 좋았다. 불펜포수라 해도 기회는 주어진 것이다. 다른 3명과의 경쟁에서 이기만 한다면 1군에서 뛸 희망이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Chapter 3 열등감, 노무라를 최고로 만든 자산



천재를 인정하라, 그리고 훔쳐라

각고의 노력끝에 노무라는 마침내 1군으로 선발되었고 이후 은퇴할 때까지 홈런왕 9차례, 타점왕 7차례를 차지했다. 통산 3017경기에 출전해서 657홈련, 1988타점을 기록했다. 특히 노무라는 수비 부담이 큰 포수로 뛰었고, 1970년부터 8년간은 감독까지 겸했다. 따라서 노무라의 기록은 분명 경이로운 것이다. 그럼에도 노무라는 은퇴할 때까지 끊임없이 천재를 질투했다. 또한 엘리트 선수의 타고난 감각을 조금씩 훔쳐내려 했다. 최고의 스승은 모방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는 상대 투수, 라이벌 타자, 동료 타자 모두에게서 배울 점을 찾아냈다. 증오가 아닌 배우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질투는 그에게 발전의 동력이 되었다.

노무라 시대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하느님, 부처님, 이나오님’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전설적인 투수 이나오 가즈히사의 별명이다. 그는 1956년 니시테쓰 라이온스(현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데뷔해 21승 6패로 신인왕을 차지했고, 이듬해에는 20연승을 거두는 등 3년 연속 30승 이상을 올렸다.

니시테쓰는 1958년 일본시리즈에서 앙숙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싸워 1~3차전을 모두 졌다. 그러다 이후 이나오가 세 차례 완투승을 포함해 4연속 승리를 거둬 극적인 역전 우승에 성공했다. 그의 초인적인 모습에 팬들은 바닥에 엎드려 합장을 하며 “하느님, 부처님, 이나오님”이라며 목 놓아 울었다. 이나오는 일본인들이 신처럼 숭상한 야구 선수였다.

이나오는 신인 시절부터 대성할 수 있는 재능을 모두 갖춘, 진정한 엘리트였다. 노무라는 이나오는 타고난 천재이며, 자신은 노력으로 천재에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상대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에게 배울 것이 없어지는 법이다. 노무라는 이나오에게 야구에 대한 영감을 많이 얻었다. 프로 입단은 노무라가 2년 빨랐지만 이나오를 스승으로 생각했다. 노무라는 최고 투수와 싸우며 그를 이길 방법을 연구했고, 그에게 역습을 받았다. 이나오의 반격은 노무라가 또 다른 방법을 찾는 계기로 작용했다.

노무라는 최고 타자가 된 뒤에도 이나오의 공을 제대로 치지 못했다. 당시 니시테쓰는 난카이와 퍼시픽리그 우승을 다투는 강팀이었기에 노무라는, 그리고 난카이는 이나오를 반드시 이겨야 했다. 노무라는 이나오 공략법을 연구하면서 야구의 새로은 분야를 발견했다. 후에 언급할 ‘분석하는 야구’의 씨를 뿌릴 수 있었던 건 어찌 보면, 노무라를 평생 열등감에 젖게 한 라이벌 덕분이었다.

이나오는 발군의 투수였다. 무엇보다 제구력이 완벽해 치기 쉽게 들어오는 공이 없었다. 특히 날카롭게 꺾이는 슬라이더는 예술에 가까울 만큼 멋졌다. 역회전공도 좋았다. 힘과 기술로 싸우면 그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러자 노무라는 정보를 활용해서 싸워보기로 했다. 모든 투수는 자신만의 버릇이 있다. 빠른 공을 던질 때 글러브 위치가 높아지는 투수가 있고, 변화구를 던질 때 글러브 안에서 손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투수도 있다. 다른 구종을 완전히 똑같은 폼으로 던지는 투수는 없다. 그러나 이나오는 직구를 던질 때와 변화구를 구사할 때 폼이 다르지 않았다. 이나오는 신이라도 되는 것일까. 노무라가 아무리 봐도 구종에 따른 투구 폼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폼을 보며 구종을 예측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노무라는 이나오와 맞선 2년째인 1957년 상대 성적 25타수 10안타(타율 0.400) 1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1958년에는 32타수 6안타(타율 0.1888)에 그치며 삼진을 10개나 당했다. 이듬해에도 처참하게 무너졌다. 이나오는 “4번 타자 노무라는 꼭 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어디엔가 빈틈이 있을 것이다!’ 진짜 신이 아니라면 이나오에게도 약점이 있을 것이라고 노무라는 생각했다. 노무라는 이나오의 피칭을 비디오로 촬영했다. 그걸 수없이 반복해서 봤다. 그리고 마침내 실마리를 찾았다. 오른손 투수 이나오가 와인드업 하며 머리 위에 양손을 모을 때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타석에서 보면 글러브 안에 들어 있는 공이 스치듯 보일 때가 있었다. 그러면 오른쪽 타석 몸 쪽으로 공이 날아왔다. 공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는 바깥쪽 코스로 들어왔다. “이거다!” 이나오의 주무기는 역회전공과 슬라이더다. 공이 바깥쪽으로 온다면 틀림없이 직구나 슬라이더일 터다. 이나오의 미세한 폼을 훔쳐낸 노무라는 이나오를 제대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이나오 자신도 모르는 이나오의 버릇을 찾아낸 덕분이었다. 이나오의 투구는 모두가 보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의 버릇을 발견하지 못했다. 노무라의 끈기와 눈썰미, 그리고 분석력이 어우러져 이나오와의 첫 정보전에서 이긴 것이다.

그러나 노무라가 보물처럼 갖고 있던 그 정보는 곧 새어나가고 말았다. 자신의 폼을 연구했다는 것을 안 이상 이나오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며칠 후 노무라는 이나오를 다시 상대했다. 와인드업 동작에서 흰 공이 살짝 보였다. 노무라가 ‘몸 쪽이다’라고 믿는 순간 바깥쪽 슬라이더가 날아들었다. 이나오가 역정보를 흘려 노무라를 헷갈리게 한 것이다. 역시 이나오다. 노무라가 당했다. 노무라는 “고생 끝에 찾아낸 상대에 대한 정보가 소용없어졌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내가 투수를 연구하는 것이 알려지자 상대는 나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또 다른 빈틈이 보인다. 나는 또 그에 맞설 방법을 연구하면 된다”고 말했다.



Chapter 4 ‘받는 손’을 ‘생각하는 손’으로 바꾸다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은 포수의 진짜 역할

‘생각하는 야구’는 타자 노무라에게도 필요했지만, 포수 노무라에게 더욱 절실한 목표였다. 야구는 포수의 사인으로 플레이가 시작된다. 포수는 상대 타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고, 투수를 포함한 동료 8명과 얼굴을 마주하는 유일한 포지션이다. 경기의 승패를 좌우하는 공 하나가 있다. 투구 하나로, 타구 하나로 승부가 뒤바뀌는 일이 허다하다. 포수가 투수를 향해 사인을 낼 때 손가락 하나를 펴서 직구 사인을 내느냐, 손가락 두 개를 보여 커브를 유도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노무라가 선수로 뛰던 당시에 포수의 덕목은 투수의 공을 듬직하게 잘 받아내고, 빠른 송구로 도루하려는 주자들을 잘 잡아내는 것이었다. 포수의 육체적 능력만 눈여겨보던 시절이다. 그런데 노무라는 투수의 공을 받으며 두려움을 느꼈다. 큰 고민 없이 해오던 대로 사인을 내다가 뼈아픈 한 방을 얻어맞은 일이 많아서였다. 그리고 그 책임은 투수에게 돌아가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노무라의 생각은 달랐다. 특정한 상황에서 투수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공을 던지도록 유도하고, 타자의 노림수를 피해 사인을 낸다면 승리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고 믿었다. 투수의 공이 타자를 압도할 만큼 강하지 않아도 이길 방법이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래서 노무라는 영리한 포수가 되고자 했다. 포수는 육제노동자가 아닌 정신노동자라는 것이 노무라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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