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열어 주는 혁명가의 말
서상원 지음 | 스타북스
세상을 열어 주는 혁명가의 말
서상원 지음
스타북스 / 2015년 5월 / 208쪽 / 12,000원
제1장 힘없는 사람을 위해 싸운 혁명가들
아웅 산 수 치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이겨 내는 것입니다.”
아웅 산 수 치는 미얀마의 독재 정부에 항거한 정치가이자 민주화 운동 지도자이다. 미얀마 독립 영웅인 아버지 아웅 산 장군의 딸로 태어났다. 아웅 산 장군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얀마를 독립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녀는 옥스퍼드 대학교 졸업 후 뉴욕의 국제 연맹 근무를 거쳐 버마(현 미얀마)로 귀국하였다. 민중의 열렬한 요청을 받고 민주화 운동에 합류해 국민 민주 연맹을 결성했으며, 1990년 총선거에서 80%를 넘는 최대 의석을 획득하였다. 민중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지만 군사 정권은 이를 무시하고 국가 방어법에 따라 아웅 산 수 치를 체포해 15년간 자택 감금과 석방을 반복했다. 2010년 11월 가택 연금이 해제되었지만 평화적으로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일은 진행 중에 있다. 표현의 자유를 뺏기고 오랜 기간 감금되었지만 아웅 산 수 치는 평화로운 민주화를 목표로 투쟁하고 있다. 자신의 마음을 이긴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지금도 호소하고 있다.
마더 테레사
“아프도록 사랑하면 아픔은 없고 더 큰 사랑만 남는다.”
본명은 ‘아그네스 곤자 보야지우’이나, 흔히 마더 테레사라 불린다. 가난하고 질병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찾아가 따뜻한 손길을 주었다. 마더 테레사는 현재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스코페에서 태어나 18살에 수녀원에 들어갔으며 이후에는 로레타 수녀회 안에서 평생을 바치기로 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을 돌보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 빈민 거리로 나서 봉사를 시작했다. 마더 테레사는 나병 환자와 고아들을 위한 호스피스를 만들었으며 자신의 의도가 곡해될 일을 우려해 검은 수녀복이 아닌 인도의 흰색 사리를 입고 인도 국적을 취득했다. 당시 인도는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나 그 기쁨을 제대로 만끽하기도 전에 정치, 사상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거리마다 가난하고 병을 앓는 이들이 넘쳐 났다. 마더 테레사는 호스피스에 이어 ‘사랑의 선교 수녀회’를 만들었으며 열정을 다해 봉사했다. 나병 환자를 씻기고 기부금을 모두 가난한 이들을 위해 썼다.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을 때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빵을 얼마나 살 수 있는지 물어보았으며 상금을 전액 기부하였다. 40년간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한 마더 테레사는 콜카타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레흐 바웬사
“무엇보다 먼저 그 권리를 쟁취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레흐 바웬사는 폴란드의 노동 운동가이며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43년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직업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레닌 조선소의 전기공으로 일을 시작했다. 조선소에 노동자의 환경 개선을 요구했다가 오히려 실직당하자, 1976년 ‘죽은 노동자를 위한 기념탑’을 세우기 위해 서명 운동을 하고 노동 운동을 활발히 이어 갔다. 1980년 조선소 파업 운동을 벌였으며, 파업권이 있는 자유 노조 ‘연대’ 결성을 위해 투쟁했다. 위의 말 또한 당시 노동자들에게 연설한 내용이다. 집회ㆍ결사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노력한 결과 마침내 자유 노조 설립의 합법화를 인정받는다. 그러나 정부는 1981년 12월, 태도를 바꿔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바웬사는 자유 노조가 불법이 되는 바람에 11개월간 구금 생활을 해야 했다. 이듬해 노동자로서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제2장 다른 세상을 꿈꿨던 혁명가들
체 게바라
“나는 새로운 운명, 즉 목적지를 향해 출발해야 합니다.”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출생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이며 혁명가이다.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을 이끈 주역이다. 마르크스주의 혁명을 꿈꾼 체 게바라는 망명 중에 만난 피델 카스트로에게 공감해 혁명군에 참가한 뒤 아르헨티나인이면서 쿠바를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행동하였다. 어느 날,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 등 20명이 넘는 동지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때 부모님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쿠바 혁명에 참가한 사실을 밝혔다. “젊은 쿠바인이 그가 지도하는 운동에 참가하지 않겠냐고 저에게 권유했습니다. 물론 저는 그의 부탁을 받아들였습니다. (중략) 투옥이 계속되든 석방되든 저는 새로운 운명, 즉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해야 합니다.” 세계에 이름을 남긴 쿠바 혁명은 이 편지를 보내고 3년 후인 1959년에 이루게 된다.
“승리를 향해 계속 전진하라.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무한한 혁명적 정열을 담아.”
혁명에 성공해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쿠바 국적을 받아 국립 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 등 신정권에서 각료를 했다. 그렇지만 체 게바라는 거기에서 끝내지 않았다. 지도자라는 입장에서 소련의 지지를 받고 싶어 했던 카스트로를 이해하면서도 자신의 신념은 굽히지 않았다. 위 말은 카스트로와의 결별 편지에서 마지막에 쓴 게바라의 말이다. 콩고, 볼리비아의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쿠바를 떠난 게바라는 아프리카 콩고의 독립운동에 참가한 뒤 독재 정권 볼리비아를 새로운 혁명의 장으로 택했다. 1967년 볼리비아에서 싸우다 정부군에 포로로 잡혔다. 조국이 아닌 이상을 위해 계속 싸운 혁명가는 결국 이국의 정글에서 최후를 맞았다.
레온 트로츠키
“성공도 있다면 실패도 있었다. 내 생애 경험은 인류의 명백하고 찬란한 미래에 대한 신념을 파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신념의 불멸한 찬란함을 불어넣어 주었다.”
레온 트로츠키는 우크라이나 출생으로 소비에트 연합의 정치가이자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다. 1917년 2월 혁명에서 지도자적 역할을 했다. 볼셰비키에 입당하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서 10월 혁명을 레닌과 함께 추진하였다. 혁명 후, 외무인민위원, 군사인민위원 등을 역임하였지만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유럽 제국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보는 ‘세계혁명론’을 제창하여 러시아만으로도 사회주의 건설을 할 수 있다는 ‘일국 사회주의’를 제창하는 스탈린과 대립했다. 레닌의 후계자였으나 스탈린과의 권력 투쟁에 패해 공산당에서도 제명되었다. 제명에 대한 최종 변론에서 레온 트로츠키가 남긴 말이 앞의 명언이다. 그 뒤를 이어 “신념은 한층 더 성숙되지만 열렬함을 전혀 잃지 않는다”라고 하여 위원회는 감동으로 고요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국외 추방을 받은 레온 트로츠키는 1940년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멕시코에서 암살되었다.
로베스피에르
“우리와 함께 사는 수많은 사람을 비천하게 만들고 억압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결코 현명한 일이 될 수 없음을 잊지 맙시다.”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가로, 중산층 부르주아를 지지 기반으로 둔 자코뱅당의 지도자이다. 처음에는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1790년 3월 31일에, 자코뱅당의 4월 의장으로 선출되면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1792년, 식량난과 물가 폭등으로 왕정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고 왕정 폐지를 주장하는 공화파와 이를 반대하는 왕정파의 전투가 벌어졌다. 왕의 처리 문제를 두고 의견이 분분할 때 로베스피에르는 “왕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혁명이 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해 12월 루이 16세는 국민 공회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됐다.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왕정은 폐지됐으나 로베스피에르는 집요하게 반대파를 숙청하고 공포 정치를 단행함으로써 테르미도르의 반동을 불러왔다. 결국 그 또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앞의 말은 1789년 유대인의 투표권을 옹호하며 한 말이다. 이렇게 그는 한때 힘없는 사람들을 지지하면서 ‘자유와 인민의 벗’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나 어느새 ‘냉혈 동물’, ‘독재자’와 같은 악명을 쓰게 됐다.
전봉준
“크게 되지 않으면 멸족되는 것만 못하다.”
전봉준은 전라북도 정읍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떠돌이 생활을 했으나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아들에게 서당 교육만은 시키는 교육열이 있었다. 그러나 관리의 부정부패에 반발하다 곤장을 맞고 죽임을 당했는데 불의를 참지 못하는 전봉준의 성정은 아버지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전봉준은 1890년경 동학에 입교하였으며 동학의 가르침인 ‘인간 평등’에 크게 감화되었다.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고부 지방 동학접주가 되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이 심해지자 1,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으며 이를 시작으로 고부에 인접한 지역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류하자 무리는 8,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들어오면서 부정부패 관리 척결, 노비 해방, 토지 균등제 등 시정 개혁에 대한 다짐을 받고 휴전했다. 하지만 시정 개혁은 근본적으로 지켜지지 않았고 일본군의 침략이 시작되자 다시 봉기했다. 이전과 달리 형세는 패색이 짙었는데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밀려 패배를 거듭하였다. 결국 옛 부하 김경천의 고발로 붙잡혀 처형된다. 혹독한 고초를 겪었으나 그의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 앞의 말은 전봉준이 자주 했던 말로 그의 담대함과 영웅적, 혁명가적 기량을 엿볼 수 있다.
제3장 역사를 바꾼 혁명가들
호찌민
“대담하게 전진하자.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호찌민은 베트남의 민족 운동 지도자로 구 베트남 민주 공화국 초대 주석이다. 그는 1890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 중부의 호앙쭈라는 마을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응웬 닷 탕’이다. 호찌민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에 체재하다 민족 해방 운동에 참가했다. 1920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고 10년 후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결성하였다. 외국에서 활동할 때는 여러 가지 가명을 썼으며 1940년 중국 기자로 위장하며 쓴 이름이 호찌민이다. 호찌민은 어느 나라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을 목표로 하였으며 프랑스 식민지 시대부터 베트남 전쟁 때까지 시대를 거쳐 베트남 혁명을 지도하였다. 1945년 2월,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였고 정부 주석으로 취임했다.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라 불린 호찌민은 노동당 중앙 위원회의 제9회 회의 연설에서 앞의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우리가 프랑스 병사를 한 명 죽이는 동안 프랑스는 베트남 병사를 열 명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 해도 프랑스는 지고 우리가 이긴다.”
1941년 베트남 독립 동맹(베트민)을 조직한 호찌민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일해방전을 지도했다. 1945년 8월 15일에 일본군의 패전이 결정되자 호찌민은 총 봉기 지령을 일으켜 8월 혁명에 따라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건국하였다. 물론 초대 주석은 호찌민이었다. 하지만 전후에도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정부로 인정하지 않는 프랑스와 정권에 개입하는 미국 때문에 전쟁을 이어 갔다. 위의 말은 프랑스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호찌민이 선언한 것이다. 전력이 뒤처지더라도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알 수 있다.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 전쟁을 넘어 사회주의 건설과 조국 통일을 이뤘다. 호찌민, 그 이름은 ‘빛을 가져오는 사람’을 의미한다. 리차드 닉슨에 의해 베트남 전쟁이 종결되기 시작하자 호찌민은 심장 발작으로 79세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온갖 고생을 겪으며 조국의 독립을 바랐으며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탐욕을 부리지 않았다. 유언장에서도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헛되이 하지 말라. 시신은 화장해 달라”라고 말했다. ‘호 할아버지’라는 애칭으로 친근하게 불렸지만 독립에 대한 신념은 남달랐다.
올리버 크롬웰
“우리는 한 번이라도 패하면 반역자일 뿐이다.”
올리버 크롬웰은 영국의 청교도 혁명에서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한 인물이다. 1599년 잉글랜드 동부 케임브리지셔의 헌팅던에서 태어났다. 1640년 당시 국왕인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왕으로 징세와 종교 문제로 의회와 여러 차례 충돌하였는데 이는 내란으로 이어졌다. 크롬웰은 고향에서 기병대를 조직해 의회군에 가담했고 전략적으로 기병대의 증가, 규율의 엄격함, 사기 진작이 필요함을 지적했으며 그가 지휘하는 철기대는 연이어 승리를 거뒀다. 처음에는 열세였던 의회파가 승리하는 데 크롬웰의 철기대가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의회파는 찰스 1세를 처형하기까지 이르는데 이는 영국 역사상 시민의 손으로 왕을 처형한 최초이자 마지막 일이었다. 위의 말은 “왕은 아흔아홉 번 패해도 왕이지만 우리는 한 번이라도 패하면 반역자일 뿐이다”라고 한 말에서 나왔다. 크롬웰은 청교도 혁명으로 권력을 쥐었지만 독재 정치를 함으로써 혁명가이자 잔인한 독재자로 역사에 남았다.
다니엘 오르테가
“혁명의 수출 등은 가능한 것이 아니다. 싸우는 것은 그 나라의 인민이다.”
다니엘 오르테가는 니카라과의 대통령이다. 니카라과에서 3대에 걸쳐 친미 정권을 유지하던 소모사 왕조가 1979년 산디니스타 민족 해방 전선에 의해 타도되었다. 혁명 성공 후 국가 재건 회의의 의장에 취임하고 후에 대통령이 되었다. 우익 반정부 게릴라인 콘트라 게릴라에게 군사 원조를 하는 등 자국에 간섭을 계속하는 미국의 레이건 정권을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회견에서는 “니카라과는 엘살바도르의 게릴라에게 무기 제공을 하고 있다”는 미국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다니엘 오르테가는 “미국이 엘살바도르 정부에 제공하는 무기야말로 게릴라가 빼앗아 사용하고 있다”며 반론하고 “혁명 가담은 누명”이라 주장하며 위 말을 외쳤다. 혁명은 무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민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니엘 오르테가의 혁명 정권이 11년간 계속되는 동안 점점 그 기세를 잃었지만 2006년 11월 5일에 시행된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다니엘 오르테가가 승리하였다. 17년 만에 대통령에 다시 올라 현재까지 정권이 이어지고 있다. 재집권한 대통령은 제1차 집권기 당시 반미 외교 노선에서 탈피해 중남미 좌파 정부와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집중했으며 실리 외교를 중요하게 여겼다. 이후 삼선에 성공해 2012년 1월 10일에 임기 5년으로 취임하였다.
제4장 시대를 이끈 혁명가들
프랭클린 루스벨트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한 가지는 두려움 그 자체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유일한 4선 대통령이다. 세계 대공황 당시 뉴욕 주지사에서 대통령으로 취임해 경제 침체를 극복하고자 뉴딜 정책을 추진했다. 루스벨트는 39살 때 소아마비로 인한 하반신 마비가 왔지만 정상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했으며 치료 후에 1924년 정계로 복귀하는 열정을 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연합국을 승리로 이끌어 뛰어난 정치 수완을 발휘했다. 후에 “후퇴에서 전진으로 바꾸는 것에 필요한 노력을 마비시키는 막연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공포야말로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전대미문의 경제 위기에 불안해하는 국민에게 용기를 줄 때 위의 말처럼 좋은 말은 없을 것이다.
사카모토 료마
“한 사람의 힘으로 천하를 움직이려 한다면 그것은 하늘이 행한 일입니다.”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 에도 시대 무사이자 일본 근대화를 이끈 인물이다. 1835년 11월 15일, 지금의 시코쿠 남부 고치현에 해당하는 도사번에서 출생했다. 14살 때부터 도장에 다녔고 검술을 더욱 체계적으로 연마하기 위해 에도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무사들 사이에서 서양 세력을 배척하고 왕권을 복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861년 고향에서 지인들과 도사 근왕당에 가입하고 다음 해 친서양파인 가쓰 가이슈를 암살하기 위해 다시 에도로 갔다. 그러나 가이슈의 견식에 오히려 감화돼 그의 제자가 됐다. 이로써 료마는 근대 일본에 대한 이상을 키운다. 료마는 1866년 에도 막부가 일왕에게 통치권을 주는 대정봉환을 구상해 이듬해 성공시켰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막부 체제를 끝내고 중앙 집권 체제로 전환하였다. 앞의 명언은 료마가 누나에게 보낸 편지에 있는 내용으로 그 뒤에 “결코 거만하게 굴지 않고 몸을 낮추어 갯벌 속 조개처럼 언제나 코를 바닥에 붙이며 모래를 머리에 덮어 쓰고 있으니 안심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겸손함을 잃지 않으면서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기지를 엿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그가 근대 일본의 시작을 열었다는 점에서 영웅으로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