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의 역전
신동일 지음 | 리더스북
마흔의 역전
신동일 지음
리더스북 / 2014년 8월 / 284쪽 / 14,800원
1 마흔 이후, 역전을 이룬 사람들
인생후반, 행복하게 일하는 ‘시골생활’을 꿈꾼다면 (정기태, 한우 목장주)
정기태(가명) 사장을 처음 만난 건 기나긴 겨울의 끝자락인 2월 말이었다. 꾸불꾸불 산길을 굽이돌아 산기슭에 도착하니 아침 9시. 정 사장은 나를 축사로 안내했다. 1,700평 부지에 현대식으로 지어진 축사는 약 20개의 철골로 칸이 나뉘어 있고 칸마다 한우가 4~5마리씩 있었다. “정 사장님, 언제부터 축사를 하신 건가요?”
“아, 한 4년 됐죠. 지금은 한우가 85마리 정도 됩니다. 그전에는 13년간 식육식당을 했었죠.”정 사장은 기억을 떠올리듯 가늘게 눈을 떴다.
도박과 방황으로 보낸 20대 시절: “난 가방끈이 짧아요.” 그는 시골에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학업을 그만두었다. 학교에 진학할 가정 형편은 됐지만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거들었던 것이다.“학교에 다니기 싫더라고요.”
그는 사춘기 시절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등 방황도 했다.
“한동안은 도박에 빠져 살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그러나 40대 후반에 그는 이미 30억 원대 부자로 성공해 있었다. 얼핏 밑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위로 형님 세 분에 누님이 한 분 계시고 내가 막내죠. 어느 순간 시골에서 뭘 해야 하나 막막해지더군요.”그래서 그는 1980년대 후반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고 했다.
“서울에 올라가 처음 한 일이 다단계 판매였어요. 왜, 그 옥장판 있잖아요.”
그는 매일 가까운 지인들에게 옥장판을 팔러 다녔다고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재고가 쌓이고 결국 빚만 몇천만 원을 지게 되더라고요.”
다단계로 수천만 원의 빚을 지자 정말 앞길이 막막해졌다.
“작은형님이 화물차를 운전했어요. 그래서 돈을 싹싹 긁어모아 중고 화물차를 마련했죠. 그리고 형과 함께 정말 열심히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세상 물정을 많이 배운 것 같아요.”정 사장은 3년 정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화물을 배달하고 부지런하게 영업을 뛰었다. 그 덕분에 수천만 원의 빚을 전부 갚을 수 있었다.“빚을 털고 나니 정말 홀가분하더라고요. 신 소장, 이거 알아요? 대출은 정말 무서운 거예요. 이곳 시골 사람들도 농사지으며 1,000만 원, 2,000만 원씩 빚을 내는데, 몇 년만 지나면 대출원금에 이자까지 눈덩이처럼 불어나잖아요. 심각한 건 대출받은 사실조차 잊고 지낸다는 거예요. 그러다 어느 날 덜컥 대출 상환 통보를 받으면 또 다른 대출을 받아 그전 빚을 갚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죠.”정 사장은 신용카드도 사용하지 않고 가능하면 현금을 쓴다고 했다.
오랫동안 100억대 부자들의 자산관리를 하다 보니 그의 말에 공감이 됐다. 부자들 중에는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고 보니 가장 안전한 사업 비결은 내가 가진 종잣돈 내에서 대출 없이 사업을 하는 것이란 사실이 떠올랐다. 알차고 튼실한 기업을 운영하는 사장들의 공통점은 무차입 경영이었다. 그렇다면 정 사장은 어떻게 종잣돈을 마련했을까? “제대하고 스물네 살 무렵에 매형을 따라 중국에 갔어요. 매형이 작은 공장을 했거든요. 이거 참, 그런데 중국 사람들 상술이 정말 무섭더라고요. 결국 3년을 못 버티고 빈 몸으로 빠져나왔죠.”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벌써 스물여덟 살이 되어 있었다.
“뭘 해야 할지 막막했어요.”
정 사장은 2년 정도 공사판을 전전하며 막노동을 했다. 그 무렵 아버지가 오래된 집을 허물고 작은 상가를 지었는데 거기서 세를 얻어 식육식당을 하던 사람이 장사가 안 되자 채 6개월도 되지 않아 나가버렸다. 이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연로한 부모님이 생계 수단으로 지은 상가에서 더 이상 월세가 들어오지 않자 부모님의 근심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부모님의 걱정을 어떻게 덜어드릴지 고민이 깊어졌다. 워낙 시골인지라 다시 세를 놓기도 어려워 가게는 몇 개월째 비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 사장은 정육점을 겸한 식당에서 소주를 한잔하고 있었다. 순간 그의 머리를 번쩍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마침 둘째 형님이 화물차 운전을 접고 시골에서 소를 키우고 있었고 큰형님도 배추 등 채소 농사를 짓고 있었다.
칼 한 번 잡은 적 없던 그가 식육식당에 도전하기까지: 정 사장이 처음 식육식당을 한다고 하자 부모님이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때까지 칼 한 번 잡은 적이 없던 막내아들이 식육식당을 한다니 부모님의 반대는 당연한 것이었다.정 사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잠시 말을 아꼈다.
“작은형님의 소를 받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다른 집보다 1,000~2,000원 더 싸게 고기를 제공할 수 있었죠. 고기를 싸게 파는 대신 종업원 수를 늘리지 않고 밑반찬도 줄였어요. 오직 고기 맛으로 승부하자는 생각이었죠. 나도 고깃집에는 고기 맛을 보고 가지, 밑반찬이나 종업원 수를 보고 가지는 않았거든요.”생각해보면 정 사장 자신 역시 고객으로 자주 찾던 고깃집은 결국 고기 맛이 좋은 집이었다. 거기에다 고기 굽는 불판을 미리 은박지로 여러 겹 감싼 뒤 한 겹씩 벗겨내며 고기 굽는 법을 생각해내 종업원이 불판을 계속 교체하는 번거로움을 줄일 수 있었다. 때문에 적은 수의 종업원으로도 고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그래도 처음 6개월은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고기를 한 번도 썰어본 경험이 없으니 손은 상처투성이였죠. 또 손목은 얼마나 아프던지……. 다행히 차츰 저렴한 가격에 질 좋은 한우를 맛볼 수 있는 집이란 소문이 나면서 서울에서까지 차를 끌고 와 우리 식당을 찾는 거예요.”
돈 쓸 시간이 없을 정도로 성공한 비결: 정 사장의 식당은 1년도 되지 않아 하루 매출이 1,000만 원 정도로 올라섰다.“돈 버는 재미가 쏠쏠했죠. 그 재미에 아침 5시에 일어나 밤 12시까지 잠도 네다섯 시간만 자고 일한 거예요. 장장 13년 동안…….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렇게 열심히 일하다 보니 돈 쓸 시간이 없는 거예요. 돈을 버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아 열심히 일하는 거예요. 그러면 너무 바빠져서 돈을 쓸 시간도 없고 수입이 고스란히 남죠.”역전의 주인공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특징, 그러니까 최소 10년간 한 우물을 우직하게 파는 모습을 정 사장도 보여주었다. 30대 초반 식육식당을 시작해 30대 중반에 종잣돈 마련에 탄력이 붙었고 이를 바탕으로 40대 초반에는 인생 역전의 꽃이 활짝 피어난 것이다.“경험만큼 좋은 건 없어요. 나 같은 경우에도 옥장판을 팔던 경험, 중국까지 가서 사업에 실패한 경험, 화물차를 몰고 전국을 돌아다닌 경험 등이 큰 도움이 되더라고요.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인데도 말이죠.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경험하길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그냥 안정적인 직장을 찾는다고 공무원이나 대기업 시험 준비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걸 보면 안타까울 때도 있어요. 게다가 어떤 분야든 성공을 하려면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하는데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는 경향도 있고요.”갑자기 나는 정 사장이 그렇게 잘되던 식육식당을 그만둔 사연이 궁금해졌다.
“13년쯤 식육식당을 하니까 지겨워지더군요. 그러던 때 13년간 신선한 채소를 공급해주시던 큰형님이 갑자기 지병으로 돌아가셨어요. 큰형님께 항상 고마운 마음이었는데 뭐라도 표현을 해야겠더라고요.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고 실직 상태이던 큰조카에게 식당을 넘겨주었죠.”정 사장은 큰조카에게 자신의 식육식당 노하우를 아낌없이 전수해주었다. 덕분에 큰조카는 지금까지 식육식당을 잘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세상만사가 기브 앤드 테이크 같아요. 내가 먼저 줘야 얻는 것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받으려고만 하거든요. 잘 생각해보면 준다는 건 꼭 돈이나 물건을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따뜻한 말 한마디, 노하우, 좋은 경험 등을 나눠주는 거예요.”
더 행복한 미래를 위해 한우 목장주가 되다: “그런데 어떻게 목장을 하게 되셨는지 궁금하네요.”“조카에게 식육식당을 물려준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지만 그전부터 50대 이후에도 계속할 수 있는 일을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보았죠. 그런데 작은형님이 옛날식으로 목장을 하고 계셨어요. 대충 계산해보니 큰 욕심 안 부리면 50마리만 넘어도 충분히 먹고살겠더라고요.”현재 정 사장은 85마리의 소를 키우며 연간 약 2억 원 가까운 순이익을 내고 있다. 24개월령 소를 봄과 가을에 두 번 우시장에 팔고 송아지도 10개월마다 우시장에 공급하기 때문에 안정적인 수익이 확보된다고 했다. “그런데 축산이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나 역시 시골에서 나고 자랐지만 어렵더라고요. 요즘은 머리를 많이 써야 합니다. 비단 축산업뿐만 아니라 다른 일도 모두 그렇겠지만 말이에요.”정 사장은 축산업자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종잣돈이 없어서라고 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종잣돈이 없는 사람은 소 몇 마리를 키우려고 해도 비싼 이자를 주고 빚을 내야 하고, 그러다 보면 급하게 소를 팔아야 할 경우가 많거든요. 소 가격에도 시세라는 것이 있는데 종잣돈이 없는 사람은 소 값이 떨어지면 조급한 마음에 소를 마구 팔게 되죠. 하지만 나는 오히려 송아지를 더 사들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소를 키우면 소 값이 다시 오르거든요. 그때 우량 한우 위주로 파는 겁니다. 덕분에 비교적 안정적으로 직장인 연봉의 2~3배나 되는 수입을 올리죠.”정 사장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마흔의 역전을 위해서는 종잣돈부터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종잣돈을 어떻게 마련한단 말인가?
도에는 꼬리표가 없다, 종잣돈에 대한 그의 철학: “시골에서 평범하게 농사를 짓는 농부에게도 종잣돈은 중요하죠. 자신만의 방법으로 종잣돈 마련에 성공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내가 보기에 마흔 전까지 수중에 돈 한 푼 없더라도 결코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100세 시대잖아요. 현재 나이가 마흔이라도 80세까지 40년이나 남았잖아요.”정 사장이 자신의 종잣돈 마련 비법을 들려주었다.
“종잣돈을 만드는 것도 아주 작은 습관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아요. 예를 들어 하루에 단돈 100원이라도 절약하려는 사람과 아예 그런 마인드가 없는 사람의 차이는 당장이 아니라 3년이나 5년이 지나서 확연하게 드러나죠. 그리고 무엇보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어야 해요, 예를 들어 40대 직장인이라면 당장 내일 실직할지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동료와 술을 마실 때 소주를 한 병이라도 줄이고, 점심 때 습관적으로 마시는 커피도 줄이면 1년에 200만 원 정도는 모을 수가 있어요. 사실 한 방은 절대 없어요. 이렇게 매년 200만 원씩만 더 모아도 자신감이 붙을 거예요. 그렇게 2~3년 동안 작은 종잣돈이라도 모으는 데 성공하면 사실 1억 원을 모으는 방법도 눈에 보일 겁니다. 작은 돈을 귀하게 생각하면 큰돈도 모이는 법이거든요.”
나를 대신해 돈을 벌어줄 아바타를 만들어라: 정 사장은 식육식당을 하면서 조금씩 저축액이 늘자 경기도 이천 일대에 발품을 팔아 경매물건을 보러 다니며 토지를 매입했다. 식육식당이 한창 잘되던 30대 후반의 나이였다.“조금씩 발품을 팔며 땅을 보러 다닌 덕분에 좋은 위치에 축사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매입 당시 평당 20만 원이었으니 2,000평이면 4억이잖아요. 축사를 짓느라 3억이 들었으니 합치면 7억입니다. 결코 만만한 액수가 아니죠.”정 사장은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300평, 400평씩 땅을 매입 했다고 한다. 5,000만 원, 1억 원식 투자했던 것이 시세차익이 나면서 1억 원, 3억 원으로 불어났고 이것이 다시 종잣돈이 되어 축사 부지를 매입할 자금이 됐다고 한다.“하루아침에 5억 원, 10억 원의 큰돈을 마련하신 건 아니네요.”
정 사장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네, 정말 하루아침에 한 방은 없더라고요. 진득하게 자신이 잘하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소득이 늘어나죠. 그리고 작은 돈이라도 모아 땅이든 건물이든 나를 대신해 수입을 올려줄 아바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정 사장은 7년생 소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며 말을 이었다.
“이 소나무도 그루당 3만 원에 1,000그루를 사서 심었어요. 그러고는 계속 가지치기를 해 모양을 다듬어줬어요. 그래야 가격이 올라가거든요. 그리고 소똥 퇴비가 나오면 충분히 발효시켜서 거름으로 주었죠. 비싼 비료 값도 안 들고, 소나무도 튼튼하게 잘 자라니 일석이조 아닙니까?”정 사장은 애기 팔뚝만 한 소나무 묘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소를 키우고 남는 여유 시간에 미래의 추가 소득을 올려줄, 그만의 아바타로 소나무를 키우고 있다. 현재 소나무의 값은 한 그루에 10만 원 이상이라니 그의 선견지명이 놀랍기만 하다.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지만 그의 가방끈은 석박사 출신보다 길게 느껴졌다. 특히 그가 발품을 팔아 땅을 보러 다니고 단 하루도 소 먹이를 거르지 않으며 바쁜 와중에도 소나무 묘목을 심어 아바타를 키우는 것을 보면 단순히 운이 좋아 30억대 부자가 된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정오의 해가 오후 2시를 향해 넘어가고 있었다. 정 사장은 소 먹이를 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흰색 고무신을 신고 총총걸음으로 축사를 향해 가는 정 사장의 뒷모습에는 당당한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한우 200마리를 키우는 목장주를 꿈꾸는 그는 이미 역전을 이룬 멋진 모습이었다.
평범한 일상 속에 인생을 바꿀 ‘아이템’이 있다 (한경희, 한경희 생활과학 대표)
한경희 대표가 말하는 역전의 스토리: 스마트폰으로 길 안내를 받아 마침내 한경희 생활과학에 도착했다. 고등학교 건물을 연상시키는 ‘ㄷ’자 형태의 건물은 약간 낡아 보이긴 했지만 단정하고 소박했다. 입구에 도착하니 전설이 되어버린 한경희 스팀청소기를 비롯해 한경희 생활과학이 개발했던 신제품들이 유리관에 전시되어 있었고 ‘세계 1등 생활과학기업’이라는 비전이 눈에 들어왔다.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자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을 끝낸 한경희 대표가 들어왔다.
전화 통화할 때는 차분한 목소리로 느껴졌는데 막상 대표를 만나고 보니 표정 자체가 너무 밝고 호기심이 가득했다. 목소리도 한 옥타브 높아 경쾌했다. 한마디로 여걸이란 생각이 들었다.한경희 대표는 2008년 《월스트리트저널》이 선정한 ‘주목해야 할 여성 기업인 50인’에 올랐다.
어릴 때부터 꿈꿔온 사업가의 길: 1999년 당시 서른여섯 살이던 한경희 대표는 안정적인 교육부 공무원 자리를 박차고 나와 많은 이들이 실패를 예견한 스팀청소기사업에 뛰어들었다.“뭔가 허전했죠. 채울 수 없는 허기가 있었어요.”
한 대표는 그 허기의 실체를 꿈과 현실의 괴리라고 표현했다.
“사실 저는 어릴 때부터 사업가를 꿈꿨어요. 제 역량을 한껏 발휘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어요. 우리는 모두 꿈을 가져야 해요. 그리고 그 꿈은 명확해야만 이룰 수 있는 법이죠.”내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꿈이 있다면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야 합니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가슴이 시키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죠. 물론 생각에만 그쳐서는 안 됩니다. 지금부터라도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한 대표는 서른여섯 살에 안정적인 공무원직을 그만두고 꿈을 찾아 가시밭길로 들어섰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뛰어들면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그리고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죠. 지독한 실패를 맛봤지만 절대 꿈을 버리지는 않았어요. 반드시 성공한다는 믿음도 항상 움켜잡고 있었고요.”한 대표의 얼굴이 비장해졌다. 한 대표의 역전 스토리는 정말 치열함 그 자체였다.
4년간의 사투, 세계 최초 ‘한경희 스팀청소기’의 탄생: “있는 돈, 없는 돈 긁어모아 연구개발비에만 8억 원을 쏟았어요.”당시는 한경희 스팀청소기가 나오기 전이었다.
“양가 부모님이 마지막에는 집문서까지 가져다주셨어요.”
친정은 그렇다 쳐도 시댁까지 길바닥에 나앉을 위험을 무릅쓰고 자발적으로 집문서를 사업자금으로 내주다니 상식적으로는 이해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