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고통
김기중 지음 | 글로세움
행복한 고통
김기중 지음
글로세움 / 2014년 6월 / 296쪽 / 14,500원
서른여섯, 다시 살다
뚱보로 열등감에 빠져 살다 / 희귀 난치성 질환 환자가 되다: 나는 중학교에 입학할 때 70킬로그램이었고, 고등학교 입학 때는 100킬로그램이 넘었다. 그래서 대학 합격과 동시에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적게 먹고 많이 운동하면 살이 빠지겠지 생각하고, 무조건 많이 뛰고 땀을 흘리며 운동에 집중했다. 고도비만이어서 초기에는 살이 잘 빠져 대학 입학 전에 8킬로그램이 빠졌다. 또 대학 학과 공부를 시험 기간에만 몰아서 하곤 했는데, 이러한 벼락치기 공부 패턴은 다이어트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18개월간의 단기 사병 복무 동안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해서 15킬로그램을 더 뺐다. 참 지독한 다이어트였다. 3년 동안 33킬로그램을 뺀 후에 72킬로그램이 되었다. 그런데 아뿔싸,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던가. 무리한 살빼기와 극심한 운동이 가져온 결과는 비참했다. 고통이 찾아들었다. 처음에는 운동하기에 조금 버거운 정도였다. 그러나 어찌 된 건지 나중에는 걷기조차 힘든 지경에 이르렀고, 여러 병원을 전전한 끝에 전신 관절염의 하나인 ‘베체트병’이라고 했다.
베체트병은 온몸에 염증이 생겨 조금만 움직여도 아프고 방치하면 관절이 굽는다. 특히 겨울에는 통증이 심하다. 이 질환은 치료약도 완치 가능성도 없다. 그저 통증 완화를 위해 스테로이드 알약을 삼키는 게 최선의 치료책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장기 복용할 경우 부작용과 독성이 강해 위험했다. 뚱뚱한 내가 싫어 최선을 다한 결과가 이거라니. 참담했다. 겨울이면 미칠 것 같이 아팠다.
이대로 방치하면 뼈가 굽는다고 해서 겨울에는 따뜻한 나라로 요양을 갔다. 그래도 병에는 차도가 없었고,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의사는 미국 애리조나로 가서 유학하면서 장기 요양할 것을 권했다. 애리조나는 습도가 낮고 따뜻해서 관절염 치료에 좋은 지역이라고 한다. 유학생활은 내 맘을 편하게 했다. 그러다 보니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애리조나에 2년간 머물면서 증상이 많이 호전되었다. 졸업하면서는 미국에 머물면서 직장에 들어가려고 했다. 당시 내 전공을 필요로 했던 애플사에서 입사를 권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로하신 아버지는 회사를 내가 맡아주길 바라셨고 막내아들이 멀리 떨어져 생활하는 것을 아쉬워하셨다. 할 수 없이 나는 한국행을 택했고 아버지의 사업(이동통신 대리점업)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와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점차 병이 악화되고 다시 운동을 할 수 없게 되면서 체중이 불기 시작했다. 수영으로 체중을 조절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무의미한 삶을 살다: 사회생활 8년차. 서른여섯 살. 96킬로그램의 거구. 집에만 가면 무기력. 영혼 없이 회사에 다니는 뚱뚱한 아저씨. 2007년 나의 프로필이다. 그때 내 상황은 회사, 집, 나 자신 등 어느 하나 절망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는 직원들과 함께 꿈꾸며 함께 나누는 회사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업종의 특성상 한계가 있었다. 직원들에게 확실한 미래를 제시하지 못하는 나는 늘 마음이 고달프고 무거웠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직원들과의 깊은 대화도 피하게 되었다.
자전거에 꽂히다: 그러던 어느 날 대리점 담당자가 오랜만에 들렀는데 몸이 홀쭉해져 있었다. “요새 운동하시나 봐요?” “그래 보여요? 요즘 자전거 타거든요. 꽤 운동이 되더라고요.” ‘에이, 자전거가 무슨 운동이 된다고.’ 대리점 담당자의 말을 그냥 흘려보냈다. 자전거를 타보지 않았으면 모를까, 나름 중학교 때부터 자전거로 등하교를 해왔던 자전거 유경험자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우연히 자전거 가게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자전거가 내 가슴을 확 뚫고 지나가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흠칫 놀랐다. 일단 ‘구경이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자전거 가게에 들어갔고, 나는 그 자리에서 중고 산악자전거를 덜컥 사버렸다. 그런데 이 일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줄이야.
자전거를 산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울주 영남 알프스 자전거 대행진’에 참가했다. 많은 사람들 틈에서 오랜만에 달리는 기분을 만끽했다. 하지만 즐거움도 잠시, 오르막이 나타나면서부터는 자전거를 밀고 끌면서 4시간을 자전거와 씨름했다. 나는 제일 후미에 도착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어떤 목표를 향해 땀을 흘리고 헉헉대며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 중요했다. 실로 10여 년 만에 제대로 하는 운동이었다. 다리에 힘도 풀리고 몸에는 한 톨의 기운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지쳤지만, 자전거가 내게 좋은 운동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걷는 것도 관절의 통증 때문에 30분 이상 할 수가 없었는데, 자전거는 4시간 이상을 타도 괜찮았다. 그 후 출근 전 집 주변의 오르막을 매일 올랐다. 혼자서만 타다 보니 자전거 실력이 전혀 늘지 않아 산악자전거 동호회에 가입해 함께 자전거를 탔다. 동호회 가입 후 6개월이 지나자 조금씩 살도 빠졌다. 아프던 관절 통증도 신기하게 줄어들었다. 물론 자전거를 심하게 탄 날은 며칠 동안 근육통을 앓고 무릎에 침을 맞아야 했지만, 베체트병의 증상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평생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던 약봉지도 과감히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렸다.
철인 3종 경기를 완주하다: 자전거에 입문한 지 1년이 되던 해, 우리 동호회 라이딩 중 가장 힘들다는 구미에서 속리산까지 왕복 220킬로미터 구간을 달리게 되었다. 회원 12명이 참가했지만 3명만이 완주한 장거리 코스였다. 나도 그 3명에 끼어 짜릿한 완주의 기쁨을 맛보았다. 이를 계기로 장거리 라이딩 대회를 찾기 시작했다. 장거리 라이딩은 자전거 대회가 아니라 철인 3종 경기에 있었다. 철인 3종 경기는 수영 3.8킬로미터, 자전거 180.2킬로미터, 마라톤 42.195킬로미터 순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여전히 걷기가 두려웠던 나에게 42.195킬로미터 마라톤은 무리였다.
나는 수영을 하고 자전거를 달린 후 마라톤은 하지 않을 작정으로 철인 3종 경기에 참가했다. 대회 날, 수영을 마친 후 모든 힘을 자전거 경기에 쏟아부었다. 180.2킬로미터를 평균 30킬로미터 속도로 6시간 만에 완주하고 안장을 내려왔다. 그리고 천천히 식사를 하며 충분히 휴식을 취했는데도 경기 종료 시간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지금부터 걸어도 정해진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겠는데? 어떻게 한번 해볼까?’ 허참,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해보기로 했다. 속도는 무시하고 거의 걷다시피 했다. 그렇게 하여 대회 종료 시간 40초를 남기고 밤 11시 29분 20초에 결승점을 통과했다. 나는 의도치 않게 철인이 되었다. 처음 참가한 자전거 대회에서는 전체 참가자 중 꼴찌를 하고, 철인 3종 경기에서는 끝에서 2등을 했지만, 어쨌든 나는 처음 참가한 대회마다 완주자가 되었다.
내가 꾸는 꿈
인생이 바뀌는 자전거 대회: 자전거를 탄 지 2년째, 서른여덟이 되던 때였다. 동호회에서 같이 활동하는 슬로베니아에서 온 ‘유래 부르스’라는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램(RAAM, 미대륙 횡단 레이스)’이라는 자전거 대회에 대해 알게 되었다. 램의 진행 방식은 아주 단순했다. 태평양에 있는 미국 오션사이드에서 출발하여 대서양에 있는 아나폴리스까지 약 3,000마일(4,810킬로미터)을 12일 안에 완주하면 된다. 1인 솔로, 2인 팀, 4인 팀, 8인 팀 부문이 있는데, 솔로로 출전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달려야 한다. 특히 선수가 출발선을 넘는 순간부터 기록 측정 시계는 절대 멈추는 법이 없다.
토네이도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예외란 없다. 다른 선수나 자동차의 도움을 받는 것도 당연히 금지다. 심지어 다쳐서 병원에 다녀오는 시간도 모두 달리는 시간에 포함된다. 그런데 묘하게도 가슴 한편이 벅차올랐다. 베체트병으로 걷는 것조차 힘들었던 내가, 열등감과 패배의식으로 살아가고 있던 내가,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세계에서 가장 큰 지구력을 요구하는 대회, 그것도 한국인 최초로 완주한다면 어떨까. 램을 통해 나의 한계를 시험하고 조금만 힘들면 포기하고 싶은 나약함과 맞서 싸울 수 있다면! 램의 경험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다.
무모하게 도전장을 내밀다: ‘두렵지만 한번 시작해보자!’고 결심을 했다. 그런데 램 솔로 출전 자격을 얻으려면, 하루 560킬로미터를 달린 공식 기록이 있거나 램을 2인 팀이나 4인 팀으로 완주한 경험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우선 램 2인 팀으로 완주해 출전 자격을 얻기로 했다. 나는 파트너로 에베레스트를 4번이나 오르며 남서벽을 개척한 산악인이자 국내 자전거 대회에서 수많은 우승을 거머쥔 이형모를 선정했다. 램에 도전하자고 했을 때 형모는 솔로도 아닌 2인 팀으로 출전하는 것이 약간 내키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램 출전에 대한 내 확고한 의지와 진정성이 전해졌는지 이내 수락했다. 이어 자원봉사로 서포터 해줄 4명의 크루도 확정하고, 매일 훈련을 계속하면서 컨디션을 최상으로 올렸다.
그런데 준비 과정이 순조롭다 했더니 대회가 석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 대형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형모가 뺑소니 사고를 당해 종아리뼈와 허리에 있는 횡돌기뼈가 골절된 것이다. 그런데 형모는 반드시 대회에 나가겠다고 했다. 퇴원이 예상보다 늦어져서 대회를 겨우 20여 일 앞두고 형모는 퇴원했고, 퇴원한 후 구미로 내려와 램 대회 날까지 우리는 합숙 훈련을 했다.
좋은 뜻이 선물이 되다: 램 신청란에 적어야 하는 후원 단체에 대해 형모에게 물었다. 형모는 강릉에 있는 ‘자비원’이라는 보육원 이야길 꺼냈고 그곳을 후원하면 어떠냐고 했다. 나는 진오 스님이 대표로 계신 ‘꿈을이루는사람들’이 생각났다. 우리는 ‘꿈을이루는사람들’을 방문했다. 진오 스님은 ‘이제까지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다녔는데, 먼저 도와주겠다고 와준 사람은 처음’이라며 따듯하게 맞아주셨다. ‘자비원’에서도 큰 환대를 받았다. 자비원에서는 금전적인 도움도 좋지만, 램이라는 극한 도전의 경험을 자비원의 아이들에게 보여주며 용기를 주는 것이 더 큰 선물이 될 것이라고 좋아하셨다. 우리의 가슴이 다시 벅차올랐다. 두 단체를 돕고자 방문했는데, 오히려 우리가 더 큰 힘을 얻었다.
내 삶의 주인공은 나이다 / 자전거가 산산조각이 나다 / 살아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그렇게 참가한 2011년 램에서, 내가 대회 도중 캐딜락 차량과 충돌하여 자전거가 산산조각 나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상 투혼과 끈끈한 팀웍으로 우리는 50세 이하 2인 팀에서 우승했다. 공식 기록은 8일 1시간 12분이었다. 그리고 최고의 크루상도 받았다.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고 / 나는 내 생각보다 강하다
마음속 울림을 듣다: 2011년 램 2인 팀 부문에 참가할 때 무엇이 가장 두렵냐는 질문을 받았다. 내가 한 대답은 ‘솔로 참가를 위한 자격을 얻기 위해 참가했는데, 2인 팀 경험 후 솔로 참가를 겁내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 2인 팀을 마치자 너무 지쳐서 솔로 도전이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진짜 도전’이 나에게 남아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결국 2012년 한 해를 준비 기간으로 삼고, 2013년 6월에 램 솔로에 도전했다.
나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다: 드디어 2013년 램 솔로 스타트 라인. 램 솔로 선수들은 동시에 출발하지 않는다. 출발선에 서면 선수 소개가 있고, 1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나는 참여 동기와 각오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4년간 램을 준비했지만 올해 1월 무릎 수술을 하고, 3월에는 손 수술을 하는 바람에 아쉽게도 최고의 컨디션으로 출발선에 서지는 못했다. 하지만 달릴 준비는 되었다. 나는 이번 램을 통해 후원 단체인 ‘꿈을이루는사람들’과 ‘자비원’을 위한 기금을 모으고 있다. 이 두 날개가 나를 결승점까지 데려다 주리라 믿는다. 피니시인 아나폴리스에서 만나자!”
사람들의 환호와 응원을 뒤로하고 페달을 밟고 달려나갔다. 한참 후 첫 번째 TS(Time Station, 램은 총 55개의 TS로 구성됨)에 무사히 도착하고 ‘TS 2’로 향했다. 그런데 두 번째 구간 내내 심한 복통으로 먹은 음식들을 죄다 토하면서 달렸다. 램에서는 하루에 10,000칼로리 정도가 소모된다. 그래서 토하더라도 계속 먹어야 한다. 씹는 음식은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아 음료로 영양을 계속 공급했다.
52도 사막 지옥을 맛보다: 그렇게 분투하며 출발 후 9시간 동안 쉬지 않고 두 번째 TS인 브로울리까지 달렸다. 그리고 출발한 지 24시간도 되지 않아 캘리포니아에서 애리조나로 접어들었다. 애리조나는 미국에서 가장 더운 주 가운데 하나다. 이른 아침 온도를 확인하니 50.4도였다. 오전 11시가 되니 52도가 넘어갔다. 뒤따라오는 서포터 차량에 차가운 물을 달라고 해서 몸에 부어보았다. 하지만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부은 물의 효과는 어디로 갔는지 다시 뜨거워졌다. 힘들게 아주 작은 사막 도시 살로메에 도착하니 출발한 지 24시간이 조금 더 지났고 총 550.8킬로미터를 달렸다.
더위와 오르막길 균형을 잃다: 한낮의 더위가 조금 가라앉자 다른 선수들이 출발을 서둘렀다. 나도 레이스를 재개하였다. 4번째 사막을 벗어나고 고도가 점점 올라가면서 더위는 더 이상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신 높은 고도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해가 저물 무렵 ‘TS 6’인 콩그래스에 도착했는데, 뜻밖의 응원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마을을 지나는 선수들에게 내어줄 음식을 마련하고, 더위를 식힐 작은 풀장을 설치해놓았다.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시원했다. 풀장에서 나와 간단한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출발하려는데 졸음과 피로감이 몰려왔다. 출발한 지 30시간이 지났는데 1시간도 채 못자고 배탈과 더위에 시달리며 계속 달려왔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고 출발했다. 8킬로미터 정도 달리니 오르막이 시작됐다. 다리에 힘이 실리지 않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 상태로 밤새도록 달릴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앞으로 10킬로미터가 지나면 캠핑카가 진입할 수 없는 좁은 산길로 들어가기에 빠른 선택을 해야 했다. 캠핑카에 사인을 보내 트레이너에게 휴식을 요청했다. 몸의 기능을 빠르게 정상화하기 위해 포도당 수액을 링거로 맞으면서 잠깐 눈을 붙이기로 했다. 세 시간을 잤다. 램 완주자의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이 두 시간인데 너무 길게 잔 것이다.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다행히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TS 7’인 프레스콧을 향해 산길을 따라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고, 마침내 프레스콧에 도착하니 큰길로 먼저 도착한 크루들이 캠핑카에서 자고 있었다. 바로 앞에 식당이 보였다. 크루들을 좀 더 자게 하고 식당에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었다. 그런데 그 식사가 촌각을 다투는 램 선수에게는 너무 호사스러운 식사였다는 것을 다음 날 바로 알게 되었다. ‘TS 8’인 플래그스태프가 큰 도시이다 보니 서포터 차량이 길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길을 알기 위해 반대 방향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거나 하면서 우왕좌왕 시간을 보냈다. 길을 찾는 도중 서로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30분 이상 헤매다 한국인의 도움을 받아 제대로 길을 찾았다.
채찍도 지극한 사랑이다: 팀장이 이대로 가면 1차 컷오프도 못 맞추고 탈락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첫날 550킬로미터를 달렸고 둘째 날은 300킬로미터도 못 달렸으니, 지금까지의 평속(425킬로미터/1일)으로 계산하자면, 28시간 동안 520킬로미터가 남은 두랑고까지 갈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내일까지 첫 번째 컷오프 지점을 통과하지 못하면 나의 레이스는 끝이 난다. 절박한 상황에서 다행히 몸이 정상적인 리듬으로 돌아왔다. 투바 시티까지 116킬로미터를 30킬로미터 정도의 속도로 꾸준히 달려 팀에도 활력이 생겼다. 크루들은 구간별 예상 시간을 계산하며 큰 소리로 응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