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의 생각수업
후쿠하라 마사히로 지음 | 엔트리
하버드의 생각수업
후쿠하라 마사히로 지음
엔트리 / 2014년 3월 / 226쪽 / 14,000원
인식을 단련한다 - ‘나의 생각’은 무엇인가
알고 있는 것을 의심한다
인식이라는 주제를 생각할 때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제일 먼저 다루는 책은 플라톤(Platon, BC 427~347)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명저다.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399)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며 플라톤은 그의 제자다. 소크라테스 자신은 저서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은 제자들의 저서를 통해 계승되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다. 이 저서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신은 내(소크라테스)가 세계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내가 큰일에 대해서든 작은 일에 대해서든 현명하지 못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신의 말씀이 틀릴 리가 없기에 나는 큰 고민에 빠졌다.”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은 자신의 고뇌를 토로했다. 그는 “네가 가장 현명하다”라는 신의 말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하지만 신의 말씀이 틀릴 리가 없다’는 생각에서 고민하고 괴로워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나보다 현명한 사람을 찾아내 그 사실을 신에게 알려 드리면 어떨까?’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철학자답게 확실한 반증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즉시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 아테네의 정치가 중 최고의 현자라고 생각한 사람을 찾아가 ‘선(善)’, ‘미(美)’ 등 다양한 주제로 의견을 교환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 대화 속에서 결국 두 사람 모두 (본질적으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제 와서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소크라테스는 지(知)의 거인이다. 풍부한 지식을 소유했으며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깊은 사고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런 소크라테스조차도 ‘결국 우리는 본질적인 것에 관해서는 무엇 하나 알지 못한다’고 느낀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눈 정치가는 달랐다. 그 정치가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믿었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 차이, 즉 인식의 차이를 깨달았다.
그 후에도 소크라테스는 많은 현자를 찾아가 다양한 토론을 했지만 결과는 항상 똑같았다. 그리고 그는 결국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들처럼 내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즉 (그 차이만큼) 내가 그들보다 더 현명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즉, 신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무지의 지’ 일화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등장하는 신은 “인간들이여, 인간 중에서 가장 현명한 자는 가령 소크라테스처럼 자신의 지혜가 실제로는 아무런 가치도 없음을 깨달은 자다”라고 말했다. 신이 그를 높게 평가한 것은 지식과 지혜가 풍부해서가 아니라 ‘나는 무지하다’라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말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모르는 것일까? 나는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글로벌 인재를 육성하는 학교를 운영하며 어학과 사상, 교양 등의 수업을 실시하고 있는데, 인식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마다 학생들에게 제일 먼저 하는 질문은 ‘너는 과연 무엇을 확실히 알고 있을까?’이다. 다만 이 질문의 포인트는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을 물었다는 것이다. 대체 무엇을 확실히 알고 있느냐는 물음은 자신의 지에 의문을 제기해 자신의 무지와 불명(不明)을 알게 하는 중요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Q 나는 무엇을 확실히 알고 있는가?: 이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라. 이 질문에 대해 한 여학생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어떤 것이지?”라고 다시 묻자 책상 위에 있는 노트북 컴퓨터를 가리키며 “전 이것이 컴퓨터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분명히 그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발 더 나아가 “그러면 컴퓨터란 과연 무엇일까?”라고 질문했다. 책상 위에 있는 물체가 컴퓨터라고 단언한다면 컴퓨터란 무엇인가라는 부분도 설명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질문을 하자 반 전체가 소란스러워졌다. “초고속으로 계산할 수 있는 장치요”라고 말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이메일하고 인터넷을 할 수 있는 기계요”,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을 구동하는 본체요”라고 말하는 학생도 있었다. “디스플레이와 본체와 키보드로 구성된 정보 처리 기기요”라고 겉모습을 설명한 학생도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학생들로부터 “그러면 아이패드는 컴퓨터가 아니야?”, “스마트폰도 컴퓨터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등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물론 전부 다 틀린 의견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의견은 전부 개인적인 인식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컴퓨터라는 존재 자체를 확실히 표현했다고 할 수 없다. 이것이 ‘확실히 알고 있다’라는 명제의 어려움이다. 아무리 일상적으로 컴퓨터를 사용하고 내부 구조를 잘 알아 직접 조립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컴퓨터라는 존재를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등장하는 신의 말을 빌리면 어차피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지식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지식이나 경험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식이나 경험에는 커다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인식이라는 주제로 사물을 생각할 때는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라고 자문하고 평소에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에 날카로운 의문의 시선을 보낼 필요가 있다. 내가 아는 사실만으로 전체를 판단할 수 있을까? 또한 나의 인식과 옆 사람의 인식은 과연 같을까? 이런 식으로 온갖 사물에 의문의 시선을 던지다 보면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궁극의 질문에 부딪힌다. 그리고 세상은 알지 못하는 것투성이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인식이라는 주제를 생각하는 출발점이다.
국가를 이해한다 - 조직과 사회 안에서의 나를 생각하다
평등이 위험한 이유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1588년에 잉글랜드 왕국에서 태어나 17세기에 활약한 철학자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을 살펴보면 홉스가 국가를 어떤 식으로 파악하고 정의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저서의 제목이기도 한 ‘리바이어던(Leviathan)’은 인간과 비슷한 형태의 거대한 괴물 같은 존재다. 그 거대한 괴물이 우리의 머리 위를 뒤덮듯이 존재하며, 홉스는 그것이 국가라고 말했다. 애초에 그는 “인간은 평등하게 만들어진 존재다”라고 생각했다. 물론 사람마다 몸집도 다르고 힘에도 차이가 있으며, 두뇌 회전이 빠른 사람도 있고 느린 사람도 있다. 그러나 홉스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런 개인차는 별로 대단한 수준이 아니다. 몸이 크고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해도 그 사람이 자고 있는 사이에 습격하거나 여럿이 힘을 모아 공격하면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개인차는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지배ㆍ복종시킬 수 있을 만큼 크지 않다’는 것이 홉스의 생각이다.
평등하기 때문에 분쟁이 일어난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 이 말만 들으면 참으로 평화롭고 온건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홉스가 하고 싶었던 말은 정반대였다. 그는 “평등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라며 인류에 경종을 울렸다. 예를 들어 산의 정상에 보물이 있는데 A와 B라는 두 사람이 그 보물을 차지하려고 각각 산을 오르고 있다고 가정하자. 두 사람의 능력은 애초에 큰 차이가 없으므로 접전이 펼쳐졌지만, 결국 A가 승리해 그 보물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다. 경쟁에서 진 B가 어쩌면 주먹 싸움은 자신이 이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A를 습격해 보물을 빼앗으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런 사태가 일어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홉스는 그것이 당연한 모습이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이 쾌적한 집을 가지면 언젠가 다른 누군가가 침입해 원래 살고 있던 사람을 살해하거나 쫓아내고 그 쾌적한 집을 손에 넣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또 새로운 침입자가 나타나 집을 뺏고 빼앗긴다. 홉스는 “모두가 비슷한 능력을 지닌 이른바 평등한 상태인 한, 사람들은 항상 상호 불신에 빠져 서로가 적이 된다”라고 말했다. ‘성악설’에 입각해 인류를 파악한 것이다.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타인을 공격한다: 상호 불신에 빠져 주위가 모두 적인 상태에서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잠자코 얌전히 있으면 반드시 누군가가 우리를 습격해 그 평온을 빼앗으려 들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는 선수를 쳐서 주위를 공격해 지배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공격받기 전에 군비를 갖추고 선제공격을 가해 지배한다. 이것이 상호 불신의 세상에서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최선이며 유일한 방책이다. 또한 홉스는 ‘인간은 평가받기를 갈구하기 때문에 상대에게 평가받기 위해서 타인을 계속 공격한다’고 주장했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 평가받고 싶어 한다. 이때 가장 빠른 방법은 타인을 굴복시켜 “당신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강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홉스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원인으로 경쟁, 상호 불신, 명예(평가받는 것)를 꼽았다. 만약 사람들 사이에 압도적인 차이가 있다면 결과가 빤히 보이기 때문에 절대 싸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평등하며 개인의 능력 차이는 그리 대단하지 않다. 그런 까닭에 경쟁이 일어나며 상호 불신에 빠져 끊임없는 전쟁 상태를 만들어 낸다. 또한 홉스는 당장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언젠가 누군가가 공격해 올 거니까 내가 선수를 쳐야 한다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하는 상태 역시 ‘전쟁 상태’라고 말했다.
국가라는 거대한 괴물 없이는 안전하게 살 수 없다: 사람은 모두가 안전하게, 안심하며 살고 싶어 한다. 끊임없는 싸움을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냥 내버려두면 (사람은 평등하므로) 반드시 싸움이 난다. 이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공통의 권력’, ‘공통의 규칙’이며, 이것이 국가라는 발상이다. ‘리바이어던’이라는 거대한 괴물(=국가)이 공통의 권력, 공통의 규칙이 되어 사람들의 행동을 일부 관리하고 억제한다. 그럴 때 비로소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사는 세상에 공통의 권력, 공통의 규칙이 없다면 정의도 부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올바르다든가 잘못되었다는 기준 자체가 없으므로 타인의 물건을 빼앗든 사람을 죽이든 자유다. 모두가 항상 전쟁 상태이며, 정의도 소유권도 존재하지 않는다. 홉스는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 평화를 향해 나아가려면 아무래도 국가라는 공통의 권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말 그대로 평화를 향한 협정이다. 모두 함께 이 공통의 규칙을 지키자고 협정을 맺는 것이 국가라는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협정은 상호 신뢰 관계 위에서 성립하므로 누군가가 배신을 하면 협정의 의미가 사라지며, 그 결과 협정을 통해 ‘보호되던 세계’가 붕괴되고 만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강제력이 있는 권력이 필요하며, 약속을 깼을 때 얻을 수 있는 가치보다 더 무거운 처벌의 공포가 있어야 한다고 홉스는 주장했다. 처벌의 무게, 공포가 있을 때 비로소 모두가 협정을 지키며, 그 결과 안전한 생활이 보장된다. 이 역할을 하는 존재가 국가이며 정치 공동체인 것이다.
국가는 왜 필요한가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미국 독립 선언과 프랑스 인권 선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1632년 잉글랜드 왕국에서 태어난 철학자다. 나는 홉스와 비교했을 때 로크의 주장에 ‘인간관’이 가장 두드러진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홉스가 ‘성악설’에 입각해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면, 로크의 생각은 그야말로 ‘성선설’이다.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일 때 자신이 믿는 바를 따르고, 자신의 행동을 다스리며,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 자신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결정할 수 있다. 이 규칙은 누군가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먼 옛날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연 상태’의 법률, 즉 자연법이다. 요컨대 인간은 원래 올바르게 (타인에게 해를 끼치거나 타인의 생명과 자유, 소유권 등을 위협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말이다. 로크는 인간이 ‘올바르게 사는 정신’을 자연스럽게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우리가 자유롭게 산다고 해도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법률이 존재하며, 그것을 준수하면서 주위 사람들과 안전하고 쾌적하게 살아갈 수 있다. 로크의 발상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의 주장에서 인간의 양심, 정의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음이 확실히 느껴진다.
국가는 필요 없는 존재인가: 로크의 주장을 듣고 있으면 국가 같은 건 없어도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멋대로 살더라도 서로의 생명과 재산에 해를 끼치지 않고 모두가 자율적으로 생활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국가가 없어도 안전하고 건전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로크도 “국가는 필요 없다”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같은 지역에 모여 사는 이상은 아무래도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침해에 대해 공고한 안전 보장을 실현해 모두가 평화로운 생활을 하려면 공동체를 만드는 데 개인이 동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로크의 주장이다. 원래 인간은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지만 예외적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며 우발적인 상황이 분쟁을 낳을지도 모른다. 로크도 이 점을 인정하고 국가의 필요성을 외친 것이다.
이런 로크의 생각에 대해 사람들이 분쟁을 일으키니까 국가가 필요하다면 결국 홉스의 주장과 다를 게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것 또한 하나의 의견이다. 그러나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사고 과정이나 인간관의 차이는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다. 정원에 심은 나무를 예로 들면, 홉스는 ‘그 나무의 가지는 언젠가 반드시 이웃집의 부지를 침범해 분쟁을 낳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전에 명확한 규칙을 설정하고 그 규칙을 따름으로써 서로의 안전을 보장하자’는 자세다. 한편 로크의 생각은 ‘어쩌면 나뭇가지가 이웃집의 부지로 넘어갈지도 모른다. 그럴 때는 서로 대화를 나눠서 서로의 양심에 따라 처리 방법을 결정하면 된다. 하지만 그때 간단한 규칙이 정해져 있는 편이 대화가 원활할 터이므로 미리 규칙을 정하고 함께 그 규칙에 동의하자’는 식이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근본적인 사상에 따라 그 규칙의 내용이나 시행 방법이 크게 달라진다.
자유를 깨닫는다 -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대부분의 의견은 남의 의견에 불과하다
업무 시간 외에 인터넷을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의사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할 것이다. 자신의 시간을 자신의 의사에 따라 사용하는 자유, 돈을 버는 자유, 번 돈을 쓰는 자유 등 자유라는 말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한다’라는 이미지가 있을 터이다. 그러나 18세기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생각하는 자유는 다르다. 그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자유라는 것을 정의했다.
그의 주장을 단적으로 해석하면 “원래 인간은 올바른 도덕(이성)이라는 것을 지니고 있으며 그 도덕에 따라 행동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다”라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이 본래 지닌 도덕관에 따라 행동할 때가 가장 자유롭게 행동할 때라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자신이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이 올바른 도덕, 이성에 바탕을 둔 행동이 아니라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는 말이다.
가령 여러분이 업무 시간이 끝난 뒤 회사의 컴퓨터로 업무와는 관계가 없는 사이트를 보고 있다고 가정하자. 업무 시간 외이므로 규칙 위반은 아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동료로부터 “업무 시간은 아니지만 아직 일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업무와 상관없는 사이트를 보는 건 좋지 않다”라고 주의를 받았다. 이에 “업무 시간도 아닌데 무슨 사이트를 보든 내 자유잖아?”라고 대답했다면? 칸트라면 이렇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자네의 도덕이나 이성에 비추어볼 때 그것이 정말 올바른 행위라고 말할 수 있나? 만약 그것이 인간으로서 정말 올바른 행위라고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네. 사악한 욕망에 현혹당하고 있을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