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30분 베이징대학교에서 인생철학을 배우다
천위신 지음 | 시그마북스
하루 30분 베이징대학교에서 인생철학을 배우다
천위신 지음
시그마북스 / 2013년 9월 / 352쪽 / 16,000원
순풍에 돛 단 배를 바라지 마라
물처럼 부드럽게, 물처럼 강하게
노자의 <도덕경>에 이런 말이 있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이 훌륭한 것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물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다. 부드럽기 때문에 강하다. 세상 누구와도 다투지 않으므로 이길 수 없다. 참으로 물의 성질을 잘 드러낸 말이다.
“다시는 챔피언의 심장을 과소평가하지 마라!” NBA 스타선수이자 감독이었던 루디 톰자노비치가 했던 말이다. 1992년 톰자노비치는 휴스턴 로키츠 감독으로 부임했다. 선수 시절에는 강하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의 농구를 선호했지만 감독이 된 뒤로는 부드러운 스타일로 돌변했다. 1993~94년 시즌에 그가 이끄는 휴스턴 로키츠는 우승을 차지했다. 그런데 1994~95년 시즌을 시작하기도 전에 문제가 생겼다. 지난 시즌의 우승이 오히려 독이 되어 우승을 향한 선수들의 열망을 꺾어버렸던 것이다. 결과는 좋지 않았고 톰자노비치와 선수들은 이내 벼랑 끝에 내몰렸다.
그러나 톰자노비치는 언론의 무자비한 공격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고 평소처럼 차분히 시합을 지휘했다. 톰자노비치의 변함없는 애정에 깊이 감명받은 선수들은 다시 마음을 다잡고 시합에 나섰다. 그 결과 남은 시합에서 챔피언다운 모습을 과시하며 두 번째 우승컵을 받았다. 톰자노비치는 물처럼 고요하고 바다처럼 넉넉하며 태산처럼 굳건한 사람이었다. 부드러움과 강함을 모두 지닌 사람이 못 이룰 일은 없다.
가장 완전한 것은 모자란 듯하다
소동파는 참으로 절묘한 시구를 남겼다. ‘사람에게는 기쁨과 슬픔, 만남과 헤어짐이 있고, 달은 밝음과 어둠, 둥그러짐과 이지러짐이 있으니, 이런 일은 예로부터 완전하기 어려워라.’ 그렇다. 세상에 한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하느님에게 자신의 운명을 바꿔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하느님이 말했다. “세상에서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는 사람을 찾는다면 네 소원을 들어주마.”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서둘러 여행길에 올랐다. ‘세상에 널린 게 행복한 사람인데 그중 한 사람을 찾는 것쯤이야 누워서 떡 먹기지.’
그는 곧장 궁궐로 가 왕에게 물었다. “왕이시여, 당신의 운명에 만족하십니까?” 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만큼 불행한 이가 또 있을까! 왕위를 노리는 무리가 사방에 깔려 있고 백성과 나라의 안위가 시시때때로 위협받고 있어 밥 한술 제대로 넘길 수 없고 잠 한숨 편히 잘 수 없느니라. 차라리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가 부럽구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는 곧장 떠돌이를 찾아갔다.
그가 떠돌이에게 물었다. “당신의 운명에 만족하십니까?” 떠돌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하도 굶어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게 생겼고 한뎃잠을 자느라 온몸이 쑤시는데 만족이라니요! 나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하늘을 원망합니다.” 이번에도 헛다리를 짚은 사람은 방방곡곡을 떠돌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같이 ‘아니올시다’였다. 그제야 그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이때 하느님이 나타나 물었다. “아직도 네 삶이 불행하고 괴롭다고 생각하느냐?” 그 사람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제야 사람의 삶이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불만족스러운 일만 생각하며 제 자신을 괴롭혔습니다. 이제 저는 제 삶에 만족합니다.” 하느님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아라. 네 운명은 이미 바뀌었다.”
세상에 마음대로 착착 진행되는 일은 없다. 아무리 꼼꼼하게 계획을 세워도 가다 보면 삼천포로 빠지는 게 인생이다. 그런데도 내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조상이고 하늘이고 닥치는 대로 원망한다. 하지만 내 운명의 주인이 나이듯, 내 고통의 주인도 나다. 공자가 이르기를, 군자는 허물을 자신에게서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찾는다고 했다. 모든 결과가 제 탓임을 알았다면 안분지족의 가르침을 떠올려라. 숱한 불행에도 늘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지족(知足)’에 있으니.
바람이 불지 않으면 풍경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누구나 다다르고 싶은 이상이 있다. 그러나 인생의 정상에 오르는 길에는 온갖 고난과 시련이 도사리고 있다. 마르크스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사람만이 빛나는 정상을 밟을 수 있다.”고 했다. 인적이 드문 샛길로 들까 무섭고 험준한 봉우리에 오를까 두려운 사람은 인생의 ‘정상’에 오를 자격이 없다.
청대의 거상 호설암은 그야말로 한 편의 연극 같은 삶을 살다 갔다. 호설암은 가난한 집의 맏아들로 태어나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래서 친척의 도움으로 전장(근대 이전 중국의 상업금융기관) 견습생이 되어 잡일부터 배워 나갔다. 훗날 거상으로 크게 성공했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질시와 증오의 대상이 되어 천당과 지옥을 오가게 됐다. 그러나 그는 결국 위대한 거상으로 후세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이렇듯 고난과 시련을 마주한 적이 없는 사람은 굳은 의지를 기를 수 없다. 루쉰은 이렇게 말했다. “생활이 너무 편안하면 그로 인해 일이 피곤해진다.” 평탄한 길만 가면 산 정상에 오를 수 없고 모험이 두려워 평안함만 바라는 사람은 인생의 정상에 오를 수 없다. 성공하고 싶은가?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반드시 정상을 정복하겠다는 자신감을 가져라.
전화위복 전복위화
‘화는 복이 의지하는 곳이고 복은 화가 도사리는 곳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화와 복이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통하는 관계이며 경우에 따라 화가 복이 될 수 있고 복이 화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 이치를 일깨워주는 옛날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오랑캐가 사는 땅과 마주한 변방 지역에 한 늙은이가 살고 있었는데 이름은 ‘새옹’이었다. 그는 낙천적이고, 문제를 대하는 태도나 처세술도 남달랐다. 어느 날 그가 기르던 말이 이유 없이 국경 너머로 도망쳐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새옹은 ‘말을 잃어버린 것은 물론 나쁜 일이나 이 일이 복을 불러올 줄 누가 알겠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달 뒤, 도망쳤던 말이 오랑캐가 타는 좋은 말을 데리고 돌아오는 복이 굴러왔다. 이웃들은 모두 축하했다. 그러나 새옹은 오히려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일이 화를 불러올 줄 누가 알겠나!”
어느 날, 과연 일이 터졌다. 새옹의 아들이 오랑캐 말에서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절름발이가 된 것이다. 이웃들은 달려와 새옹을 위로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새옹은 이 일이 복을 불러올 줄 누가 알겠냐며 이상한 말만 되풀이했다. 1년 뒤, 오랑캐가 쳐들어와 변방이 위태로워지자 젊은이는 모두 전쟁터에 끌려 나가 대부분 전사했다. 그러나 새옹의 아들은 절름발이였기 때문에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아 부자 모두 무사할 수 있었다.
화와 복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러므로 억지로 복을 받으려고 하거나 기를 쓰고 화를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어떤 상황에 놓이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만 복이 찾아왔을 때 설레발치다가 복을 화로 바꾸는 일이 없고, 화가 닥쳤을 때도 금세 기운을 차리고 화를 복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복’은 저절로 굴러오는 것이지 강제로 끌어당긴다고 오는 것이 아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화가 다하면 복이 올 테니 느긋하게 기다리는 게 상책이다.
옥에 티가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완벽주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삶이 어디 있겠는가! 흠 하나 없이 산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이 생겨도 여유롭게 받아들일 때, 행복이 찾아온다. 그리고 사실 옥에 티가 좀 있다고 꼭 나쁜 것만도 아니다. 다음의 이야기를 보라.
늙은 국왕에게는 7명의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다. 모두 밤하늘처럼 아름다운 검은 머리를 길게 길렀는데 국왕은 공주들에게 예쁜 머리핀을 10개씩 선물했다. 어느 날 아침, 첫째 공주는 머리핀으로 머리를 정리하다가, 어제까지만 해도 있던 머리핀 1개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둘째 공주의 방으로 가 머리핀 한 개를 훔쳤다. 둘째 공주도 머리핀 한 개가 보이지 않자 셋째 공주의 것을 훔쳤다. 그렇게 다른 공주들은 머리핀 10개를 채울 수 있었지만, 일곱째 공주는 9개뿐이었다.
이튿날, 이웃 나라 왕자가 찾아와 국왕에게 말했다. “어제 제가 기르던 종달새가 머리핀 하나를 물어 왔는데 이 나라 공주의 것이 틀림없습니다. 인연도 보통 인연이 아닌데, 누구의 머리핀인지 알 수 있을까요?” 여섯 명의 공주는 머리핀 10개를 모두 꽂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나설 수가 없었다. 이때 눈이 충혈된 일곱째 공주가 나서며 말했다. “제가 머리핀 한 개를 잃어버렸어요.” 말을 마치자마자 삼단 같은 머리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머리핀이 모자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 모습에 왕자는 눈을 떼지 못했고, 두 사람은 아름다운 인연을 맺게 되었다.
어째서 사람들은 모자라는 부분을 채우려고만 할까? 이야기에 나오는 머리핀 10개는 완벽한 인생을 상징한다. 10개 중 한 개라도 모자라면 완벽함에 금이 간다. 그러나 머리핀 한 개가 모자랐던 일곱째 공주는 오히려 전보다 더 행복해졌다. 인생뿐만 아니라 일도 마찬가지다. 모자란 부분이 있다고 실패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자란 부분을 역이용하면 더 큰 성공을 거둘 수도 있다.
어둠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햇빛이 사라질까 두렵다
비관주의자들은 별의 비밀을 밝혀낸 적이 없다
비관과 실패는 쌍둥이처럼 붙어 다닌다. 실패는 비관을 부르고 비관에 빠진 사람은 결국 실패한다. 그런데 사실 좌절과 실패가 없는 성공은 어불성설이다.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은 좌절과 실패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 거듭되는 실패에도 성공한 사람은 비관에 빠지지 않는다.
철학자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고통 받는 사람은 비관할 권리가 없다.” 우리는 이미 너무 큰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런 자신에게 더 큰 고통을 얹으려 하다니, 이는 안 될 말이다. 지금 당장 비관에 안녕을 고하고 낙관적이고 적극적인 삶으로 돌아서라. 단 한 번의 실패를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실패다. 당신이 진창을 나와 다시 일어섰다면, 그 진창은 결코 실패가 아니다.
19세기 미국 뉴멕시코 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페랄라스는 군인인 남편을 따라 사막 근처의 육군기지로 가게 되었다. 그녀는 혼자 병영에 남겨지는 일이 많았는데, 주변에는 영어를 모르는 멕시코인과 인디언뿐이어서 그녀는 온종일 아무와도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래서 멀리 떨어져 계신 부모님에게 편지를 써서 모든 것을 버리고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얼마 후 아버지로부터 답장을 받았다. 편지에는 단 두 줄만 적혀 있었다. ‘수감자 두 사람이 철창 밖 세상을 보았다. 한 사람은 진흙을, 다른 한 사람은 별을 보았다.’ 페랄라스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는 사막에서 별을 찾기로 결심했다. 이때부터 그녀는 인디언과 멕시코인과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사막에 사는 동식물을 연구했으며 사막의 기후변화에도 관심을 가져서, 사막에 있는 소라껍데기로 이곳이 수만 년 전에는 바다였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기도 했다. 별을 보기로 한 순간부터 사막은 꿈속에서도 보고 싶은 그리운 곳으로 변해 있었다. 자신의 변화에 스스로 감동한 그녀는 지난 경험을 『행복한 성』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써냈다.
사막은 변하지 않았고 열악한 환경도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단 하나, 페랄라스의 마음 상태였다. 생각만 바꿨을 뿐인데, 그토록 싫던 상황이 가장 즐겁고 의미 있는 모험으로 바뀐 것이다. 페랄라스는 비관주의를 버린 덕에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역경 속에 핀 꽃이 가장 아름답다
바닷물에 밀물과 썰물이 있듯이 인생에도 오르내림이 있다. 사람은 항상 오르막만 있기를 바라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쉽겠는가. 누구도 바라지 않는 상황은 언제라도 닥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괴로워도, 삶은 계속 이어진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기죽지 말고 가슴을 펴라. 진창을 빠져나가면 평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유기화학자 그리냐르는 역경 속에서 활짝 꽃을 피운 인물이다.
어린 시절 그리냐르의 집은 넘칠 정도로 부유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그리냐르는 이상도, 포부도 없이 사교회장이나 기웃거리며 놀았고, 돈과 시간을 오페라와 여자, 사냥에 허비했다. 그러나 큰 변고를 겪고 집안이 몰락하면서 알거지 신세가 되었다.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니던 친구들은 등을 돌렸고, 그의 애인마저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줬다. 그제야 그리냐르는 그간의 잘못을 깨닫고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9년 후, 그는 ‘그리냐르 시약’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해 이름을 널리 알렸다.
오늘은 승리의 축배를 들었지만 내일은 패배의 쓴잔을 들게 될지도 모르는 게 인생이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 그저 나 자신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온실 속의 화초는 미풍에도 꺾이고 만다. 만약 태풍이라도 몰아치면 뿌리까지 몽땅 뽑히고 말 것이다. 비바람을 두려워하지 마라.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보면 결국 찬란한 태양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괴로움에도 이유가 있는데 즐거움에 이유가 없을까!
주변에서 우울한 기분에 빠진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생각만큼 처지가 나쁘지 않은데도, 심지어 부러운 점까지 있는데도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이 괴로운 이유를 찾아내 슬픔에 빠진다. 처음부터 자신은 불행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꼬리표를 단 사람이 행복해질 리 없다. 세상에는 이와 정반대인 사람들도 있다. 삶이 아무리 고단해도 어떻게 해서든지 즐겁고 기쁜 이유를 찾아내 미소를 짓는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현명하며, 보람 찬 인생을 살 수 있다.
어떤 노부인이 벽을 칠하는 페인트공을 불렀다. 페인트공은 노부인의 남편이 앞을 못 본다는 사실에 문득 연민의 감정이 생겼다. 그래서 그와 함께 있을 때는 각별히 말을 조심했다. 그런데 분명 앞을 못 보는데도 노인은 언제나 명랑하고 긍정적이었다. 며칠 동안 함께 하면서 두 사람은 갈수록 많은 대화를 나누고 더욱 가까워졌다.
며칠 뒤, 페인트칠을 마친 페인트공이 영수증을 내밀자 노부인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처음에 말했던 비용보다 훨씬 적은 액수를 청구했기 때문이다. 노부인이 페인트공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비용이 줄어든 거죠?” 페인트공이 대답했다. “며칠 동안 부인의 남편과 함께 지내면서 무척 즐거웠습니다. 남편분의 인생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제 인생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고마움의 표시로 할인해드린 것입니다.”
알고 보니 이 페인트공도 몸이 불편한 사람이었다. 왼손이 의수였던 그는 늘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고 괴로워했다. 그런데 두 눈이 안 보이는데도 행복하게 사는 노인의 모습을 보며, 자신에게는 세상의 밝은 빛을 볼 수 있는 두 눈이 있음을 감사하게 되었다.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인생은 무대’라고 했다. 인생의 무대에서 모든 사람이 주연을 맡을 수는 없다. 조연을 맡게 되고, 심지어 악역을 맡게 되더라도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 눈에 띄지 않는 역할이라도 힘닿는 대로 열심히 한다면 당신은 무대 위의 주인공처럼 빛날 것이다.
질투는 인생길을 더욱 좁게 만든다
질투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질투는 인간의 본능이므로 자신이 질투한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질투는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줄여 최대한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 이 세상에서 오래 생존하고 더 발전하려는 심리적 방어기제이므로 질투심이 생기는 것은 나쁜 일도, 괴로워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질투가 지나쳐 실제 행동으로 이어진다면 문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