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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구건서 지음 | 행복에너지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구건서 지음

행복에너지 / 2013년 6월 / 304쪽 / 15,000원





1st Wheel - My Dream (꿈)

꿈조차 가난했던 어린 시절: 나는 충청북도 보은의 산골에서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당시 우리 집은 변변한 땅 한 마지기 없는 형편으로, 글자 그대로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은 지경이었다. 내가 5학년을 마쳤을 무렵, 농촌 생활의 한계를 절감하신 아버지는 비록 노동일이지만 서울에 일자리를 구해 식구들을 올라오게 했다. 그래서 삼양동 빨래골 단칸방에 할아버지를 포함한 여덟 식구가 둥지를 틀고 말뿐인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우리는 빨래골을 떠나 뚝섬으로 이사했는데, 뚝섬에 마련한 우리 집은 구석기 시대에나 볼 수 있을 법한 움집이었다.

‘가출’로 시작한 인생: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나는 등록금 내라고 받은 돈을 챙겨 집을 떠났다. 돈 많이 벌어서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갖고 싶은 것 다 갖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부모님께 용돈도 넉넉히 드리고 싶은 어설픈 욕심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집을 떠나 보니 오라는 데는 없고 딱히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곳저곳을 하릴없이 배회하는 노숙자, 부랑아 처지가 되고 말았다. 공장에도 찾아가 보았지만, 학생복을 입고 가출한 어린애를 받아 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시 가지고 나온 돈 1만 원으로 밥 사 먹고 숙비 내고 나니 며칠 만에 빈털터리가 되었다. 결국 땡전 한 푼 없는 처지에 가출한 다른 또래들과 어울려 청량리 일대를 헤집고 다녔다.

오천 원을 훔치다: 나는 며칠 동안 밥을 굶은 상태에서 결국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다. 오직 빵 하나 사 먹을 돈이 필요했는데, 그 누구도 불쌍한 중생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집에 들어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터미널 대합실 의자에서 아무도 신경 안 쓰는 핸드백을 발견하고 무작정 그것을 들고 나왔다. 들고 나왔다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은 슬쩍 훔친 것이다. 핸드백 안에 든 오천 원으로 밥을 사먹고 빵도 실컷 먹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집을 나오지 말걸 그랬다는 후회도 밀려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갈 데도 마땅치 않아 다시 터미널 대합실을 찾았다가 이미 신고를 받고 범인 수색에 나선 파출소 순경한테 잡혔다. 현행범으로 체포되는 순간이었다.

파출소에서 심문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내가 내 죄를 부인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조서를 꾸미고, 파출소에서 경찰서로 넘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다만, 나는 인적사항은 철저히 숨기기로 마음먹고 모든 것을 거짓으로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학교에 알려질 것이고, 부모가 찾아올 것이고, 친구들에게 창피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천애고아가 되었고 곧바로 청량리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모든 것을 숨겼지만, 딱 한 가지 저지른 실수가 있었다. 본적에 내가 태어난 충북 보은을 있는 그대로 적은 것이다. 나중에 재판 과정에서 시골에 계신 증조부께 내용 증명이 배달되었고, 결국 내가 소년원에 있다는 것을 부모님도 아시게 되었다.

소년원으로: 경찰서 유치장에서 일주일을 더 있다가 서대문구치소 미결감방으로 이송되었다. 얼마 후 나는 미성년자라서 소년원 송치 결정이 났고 불광동 소년원으로 이감되었다. 그 후 재판 때까지 약 2개월간 참으로 고역인 생활을 했다. 위계질서가 엄격해 요장, 행정, 반장 등 높으신 분들(?)이 있었고, 온종일 허리를 똑바로 세운 채 양반다리로 앉아 있어야만 했다. 세상에서 아무리 힘든 일이 있다고 해도, 그곳에서 겪은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그래서인지 ‘까짓것 소년원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이것도 못 버티면 되겠나?’라는 쓸데없는 자신감이 여태 내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얼마 후 가정법원 재판이 진행되었다. 재판이라고 해야 이름과 주소를 물어보는 것이 끝이고, 1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1호 처분에서 5호 처분까지 결정된다. 1호 처분은 가정에 위탁하는 것으로 그대로 집에 돌아가지만, 5호 처분은 6개월에서 1년을 소년원에서 복역하게 된다. 부모가 있는 원생 대부분은 관대한 1호 처분을 받았지만, 나는 고아로 기록된 터라 별다른 심문 없이 5호 처분이 결정되었다. 당시 시골 종조부로부터 연락을 받은 부모님이 재판정에 오셨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나는 다시 불광동 소년원에서 미결이 아닌 기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춘천소년원의 생활 / 소년원에서의 깨달음: 5호 처분을 받은 후 기결감방으로 옮겨져 군대 생활과 비슷한 내무반 생활을 하게 되었다. 군기도 엄격하고 제식 훈련부터 학교 공부까지 모든 것이 힘든 생활이었다. 나이 많은 선배들의 괴롭힘과 구타도 보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인생의 모든 것을 소년원에서 배웠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조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꿈꾸고 준비해야 하는지를 그곳에서 터득할 수 있었다. 소년원은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법칙이 존재하는 계급 사회이며, 강한 군기 속에서 딴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보이지 않는 묵계가 지배했다. 나는 나이도 어린 데다 학교만 다녔지 조폭이나 똘마니로 크게 놀아본 경험도 없어서, 그 안에 있는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래서 놀림감이 되기도 하고 분풀이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누가 강하게 대들어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난 뒤 그 사람은 열외가 되는 것을 봤다. 어느 날인가 나도 더는 못 버티겠다는 벼랑 끝 심정으로 저돌적인 행동을 보였다. 내가 그들 위에 서는 기회를 자연스럽게 만든 것이다. 다름 아닌 ‘곡괭이 빳다 30대’ 사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전체 기합을 받는 과정에서 당시 권력 서열 1위인 최고참에게 왜 기합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대들었다. 최고참은 건방지다며 마루 밑에 숨겨 놓았던 곡괭이 자루를 꺼내 들었다. 나는 30대를 맞고 정신을 잃었다. 물론 내 입에서 잘못했다는 얘기가 나왔다면 몇 대로 끝났겠지만, 깡다구로 끝까지 버티는 바람에 매가 늘어났다. 그 후 한 달을 꼼짝 못하고 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악과 깡으로 매타작을 버티는 것을 본 같은 내무반 고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 후 나를 모든 기합에서 열외시켰다. 또한, 나는 2인자 자리까지 오르는 영광(?)을 차지했다.

나는 그런 환경을 겪으며 어느 조직에서나 대장이 되려면 배짱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고, 이 교훈은 소년원을 떠나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중학교 중퇴 학력으로 택시 운전을 하면서도 공인노무사 시험에 과감히 도전한 것도 그곳에서 배운 깡다구가 한몫을 했다. 소년원 철문을 나오면서 나는 꼭 사법 시험에 합격하여, 힘없고 빽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변호사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품었다. 나보다 더 큰 죄를 저지른 사람은 1호 처분을 받고 집으로 가는데, 나는 5호 처분으로 몇 개월 더 생고생을 한 것이 진짜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억울함에 대한 한풀이도 있었지만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나와 같이 무전유죄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바로 이 생각이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들었다. 더 삐뚤어지지 않고 올바른 인생을 살아오도록 만든 것도 따지고 보면 그곳에서 겪은 아픈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겠는가.

‘한 권의 꿈’을 찾다: 중학교를 그만두고 집을 나와 방황하던 시절, 나는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세상의 밑바닥 생활을 경험했다. 옷가게 점원, 노점상, 야채행상, 과일장수, 포장마차, 엿장수, 고물장수, 공사판 일일잡부, 농장 목부 등 세상에는 생각보다 고된 일이 너무 많았고, 그에 대한 보상은 너무도 보잘것없었다. 이러한 비루한 체험들은 내 인생의 소중한 경험이 되었고, 이렇게 평생을 살다 죽을 수는 없다는 깨달음을 온몸으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살이 인생을 살아가다가 청계천 헌책방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또 다른 꿈과 희망을 찾아낸 것이다. 고향 친구도 없었고, 학교 친구도 없었고, 그렇다고 변변한 직장도 다니지 못한 관계로 서로 터놓고 이야기할 상대가 없다 보니 시간을 때우기 위해 책을 가까이하게 된 것이다. 젊은 시절 나에게 큰 영향을 준 책은 벤자민 프랭클린의 『자서전』,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읽은 ‘86,400초’, 존 네이스비트의 『메가트렌드』 등을 꼽을 수 있다.

선명한 꿈을 꿔라: 소년원을 나서면서 스스로 다짐한 변호사의 꿈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변호사가 되려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공인노무사가 되었고, 현재는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노무사로 활동 중이다. 노무법인을 설립하고, 중앙노동위원회 공익위원, HR교육원 원장 등 다양한 사회 활동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멋진 인생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 공인노무사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가치 있는 일을 함께하면서 삶의 여유를 즐기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의사에 도전하여 봉사 활동하며 노후를 보낼 꿈을 가지고 있다.

많은 책을 읽는 동안 나도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냈으면 하는 또 ‘한 권의 꿈’을 꾸었다. 그 꿈이 현실이 되어 1996년 처음으로 노동법 전문 서적을 낸 이후, 매년 지속해서 책을 발간해 2012년 기준 24권의 노동법, 노사관계 서적을 출간한 저자가 되었다. 작지만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는 것이 ‘씨앗’이다. 사람은 모두 ‘생각’이라는 씨앗을 가지고 있다. 이 ‘생각의 씨앗’을 잘 심고 가꾸는 사람은 성공이라는 열매를 얻을 수 있지만, 씨앗 자체를 뿌리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돌아오는 게 없다. 선명한 꿈을 꾸고(씨앗) 그 꿈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면(과정), 그 꿈이 현실로 다가온다는 것(성공)을 나는 내 경험을 빌려 장담할 수 있다.



2nd Wheel - My Human Netwoking (인맥)

좋은 만남과 성공 / 어울림의 속성: 사람과의 만남이 모든 것을 좌우하고, 좋은 만남이 인생 항로에서 가장 좋은 동행자가 된다. 나도 공인노무사가 되고 나서 만난 좋은 사람들이 결국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한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중학교 중퇴 학력인 내가 쟁쟁한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에 있는 사람과 경쟁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게임이었다. 그러나 꾸준한 만남을 통해 나의 진심을 알게 된 노조간부, 인사담당자, 연구원, 기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나에게 관심을 두고, 사건과 자문회사를 소개해 주면서 공인노무사로서 내 위치를 구축할 수 있었다.

우선 노동 운동을 하는 선후배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매스컴과 조직에 얼굴을 알릴 기회를 제공했다. 덕분에 TV 뉴스나 교양 프로그램, 신문 등에서 인터뷰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고, 나만의 다큐멘터리와 대담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영광도 있었다. 그리고 한국노동연구원의 노사관계 고위 지도자 과정에서 만난 동문은 대기업 자문이 하나도 없던 나에게 처음으로 자문노무사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또 ‘중앙경제’와의 만남은 내가 크게 도약하는 발판을 만들었으며, 그 인연은 30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데, 1984년 내가 노동조합 총무부장을 할 당시 『노동법통람』을 구입한 것이 인연의 시작점이었다. 1995년부터는 월간 《노동법률》에 글을 싣기 시작해 현재까지 17년 동안 칼럼 등 원고를 연재했으며, 2005년부터 중앙경제 HR교육원 원장까지 맡으면서 학력보다는 실력과 글, 강의로써 인정받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인간관계는 공짜로 주어지는 전리품이 아니다.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관계를 맺고 성실하게 관리해야 한다. 만나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그들의 진심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관계만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그리고 인맥 관리는 자기 관리다. 나부터 먼저 매력과 능력을 갖춰야 하며, 남에게 존중받고 싶다면 먼저 자신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3rd Wheel - My Challenge (도전)

거듭된 실패, 계속되는 도전 / 한 번만 더, 한 걸음만 더, 한 시간만 더: 내가 살아온 인생을 돌이켜 보면 성공한 것보다 실패한 것이 훨씬 더 많다. 그렇게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덤비게 한 원동력은 무엇일까? 바로 소년원에서 겪은 밑바닥 인생과 지독한 가난일 것이다. 결코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일어서는 것, 거기에 삶의 가장 큰 영광이 존재한다는 넬슨 만델라의 말처럼 나도 넘어질 때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일어섰다. 경쟁에서 승리하거나 목표를 성취한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다른 사람과의 경쟁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한 걸음 더’ 정신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시도해 보는 도전 정신, 이것이야말로 포기하고 싶은 자신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내가 공인노무사 시험을 볼 때 1회 시험이 1986년에 있었는데, 2회 시험은 3년이나 지난 1989년에야 있었다. 대부분 사람은 시험이 없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미리 포기했지만, 나는 3년간 꼭 합격하겠다는 각오로 쉬지 않고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심지어 택시 운전을 하면서 시험공부를 계속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을 때조차도 끝까지 붙들고 늘어졌다. 이러한 ‘한 번만 더, 한 걸음만 더, 한 시간만 더’ 정신이 결국은 그 일에 대한 성공을 보장한다.



4th Wheel - My Talent (재능)

좋아하는 일에 목숨을 걸어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 가치 있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해야 한다. 단순히 돈벌이만을 위해 일한다면 성공은 비켜간다. 그리고 목숨을 걸 만큼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면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그 일의 최고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내 경우도 내가 잘하는 것을 할 때는 신나고 행복했지만, 돈을 벌기 위해 억지로 한 일은 대부분 실패로 끝난 경험이 있다. 내가 잘하는 것은 책 집필, 강의, 컨설팅과 자문이다. 반대로 내가 못하는 것은 돈을 버는 일이다. 그중에서도 장사에 관한 것은 거의 젬병에 가깝다. 단순히 돈만 벌기 위해 시작한 엿장수, 고물장사, 과일장사, 포장마차 등은 대부분 얼마 못 가서 그만두거나 밑천만 날리는 참담함을 겪었다.

글쓰기와 책 집필: 청소년기 한때, 소설가를 꿈꾸는 친구와 함께 소설에 심취하여 문고본이었지만 매일 소설책 1권을 읽어나간 기억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은 나의 천직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처음 글을 쓴 것은 노동법에 대한 실무적 해설서였고, 일간신문에 상담 사례를 연재하고 여러 권의 책을 내는 동안, 차츰 시와 수필에도 관심을 두었다. 아직 시, 소설 등 순수문학에는 근접하지 못했지만, 앞으로 시집과 수필집, 그리고 소설집, 기행문집도 내고 싶은 욕심이 있다.

강의와 강연: 잡지에 글을 꾸준히 연재하고 단행본을 출간하자, 강의 요청이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공인노무사 시험을 준비할 때부터 노무사가 되면 강의를 최고로 잘하는 전문가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드디어 나에게도 그 꿈을 펼칠 기회가 온 것이다. 전문 교육기관에서부터 대기업, 중소기업을 가리지 않고 시간만 맞으면 강의를 요청하는 곳 어디든 무조건 달려갔다. 처음에는 1시간 강의를 위해 10시간 이상 거울을 보며 연습에 연습을 반복했다. 그렇게 준비했음에도 막상 단상에 올라가면 가슴이 떨려서 제대로 말을 못한 것은 물론, 강의 시간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다행히 강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점점 구력이 붙어서인지 떨리는 일도 줄어들었고 시간도 잘 맞추게 되었다. 그 결과 다른 것은 하지 않고 강의만으로 먹고살 수 있는 경지까지 올라섰다.

컨설턴트 활동: 책을 집필하고 강의하는 틈틈이 상담과 자문, 코칭을 했다. 주로 대기업 노사관계와 노동법에 관한 내용이지만, 리더십과 라이프코칭에도 가끔 참여했다. 그리고 대기업의 큰 프로젝트에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총괄하기도 했고, 다른 프로젝트에 팀원으로 일부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는데, 기간이 정해진 프로젝트를 하다 보면 밤샘 작업도 해야 하지만, 일 자체가 재미있고 즐거웠다. 그리고 삶의 보람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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