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은 배신하지 않는다
최갑도 지음 | 물푸레
배움은 배신하지 않는다
최갑도 지음
물푸레 / 2013년 7월 / 260쪽 / 13,000
1장 생존 - 배움은 자신을 구하는 것이다
나를 살아있게 하라
돌아보면 누구에게나 인생이 바뀌는 때가 있다. 베이비부머 세대로서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되기 위해 쉼 없이 달려온 나는, 50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예상치 못한 변화, 그리고 절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진급 발표날이었다. 나는 서둘러 진급자 명단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내 이름이 없었다. 혹시 잘못 본 걸까? 나는 현실을 부정하며 다시 한 번 명단을 확인했다.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최고 인사 고과 점수가 무색하게 나는 진급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사원과 대리 시절에는 매번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받을 수 있는 특진은 다 받았었다. 전직자들 중에 과장 진급도 가장 빨리했다. 물론 전년도에 처음으로 차장 진급에서 떨어지고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그걸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해에는 곱절로 치열하게 일했다. 정부와 함께하는 대형 프로젝트도 맡았다. 하는 일마다 무난한 성공이었다. 그런데 왜? 더 이상 동료와 후배들 얼굴을 마주하기 힘들었다. 분노에 가까운 배신감마저 치밀었다. 하지만 그 감정에 뚜렷한 방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길로 회사를 나와 버렸다.
다음 날 진급 못한 사람들을 모아 위로하는 자리가 있었다. 나는 팀장에게 물었다. “진급이 안 된 이유가 뭡니까? 이유를 알아야 이해하지 않겠습니까?” “자네 업무 성과는 모두가 높게 사고 있네. 하지만 학력이 부족해서 진급이 되지 않았어.” 충격에 휩싸였다. 나이 오십이 다 되어서 학력의 벽과 다시 마주하다니……. 당혹스러웠다. 정년이 보장된 생산직에서 불안정한 사무직으로 전직할 때는 최소한 부장, 노력하면 이사까지 진급할 수 있다는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일했고 그 결과 가장 빨리 과장 자리까지 왔건만, 지금에 와서 학력을 이유로 진급이 안 된다니 이유치고는 너무 잔인했다.
‘아아, 앞으로 어떡하지?’ 하루하루가 무의미하고 무기력해졌다. 얼마 동안 잇몸이 붓고 이가 흔들리더니 결국 이빨 4개가 쑥 빠졌다. 아내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당신, 더 이상 여기 있으면 큰일 나겠어요. 그동안 충분히 고생했어요. 어차피 언제 나와도 나와야 하는 게 회사잖아요. 조금 미리 정리해도 괜찮아요.” 내 깊은 실망감을 헤아려 주는 아내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내 상처보다 가족들이 받을 상처가 걱정되었다. 아직은 살아 있어야 했다.
나는 부족한 학력에 대해 달리 생각해 보았다. 역발상이 필요했다. 높디높은 학력의 벽은 달리 보면 배움의 길이 아닐까? 직장을 다니며 대학 공부를 병행하기로 목표를 정했다. 나는 곧바로 방송통신대학에 원서를 넣었다. 51세에 또 다시 시작한 무모한 도전이었다. 열정은 변화의 에너지이자 혁신과 창조의 원천이다. 진급 탈락의 위기를 계기로 경영학과에 입학한 나는 그 이후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진학했다. 연이어 진급 누락한 다음에 결국 나는 차장으로 진급을 했다.
초기 조건을 극복하라
나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철도 공무원인 아버지는 우리 마을의 자랑거리였고,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모든 정성을 쏟는 분이었다. 그런데 내가 세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7년 후, 강원도 영월 철도역에서 근무하던 아버지마저 업무 중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이 일로 할머니와 증조할머니, 어린 나까지 네 식구의 가장인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면서 집안의 가세는 급속도로 기울었다. 결국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외갓집이 있는 대구로 이사를 했다. 또래보다 성실하게 공부에 매달린 덕에 성적은 언제나 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다행히 중학교에 들어갔지만, 가난한 집안형편은 한층 더 문제가 되었다. 학교 준비물을 마련하지 못해 벌 받고 혼나는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그렇게 한 학기를 마치고 방학을 맞이했다. 이런 상태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지 걱정이 엄습해 왔다. 고민 끝에 일을 찾기로 했다. 마침 동네 형이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무작정 시내에 있는 아이스케키 공장에 따라갔다. 공장 사장님에게 장사하는 법을 배운 다음, 케키 통을 메고 동네방네를 돌았다. 형을 일주일 내내 따라다니며 장사를 해 봤지만 돈이 벌리지 않아 그만두기로 했다. 하지만 이 일 이후 나는 결국 학업을 접었고 본격적인 일자리를 구했다. 내 나이 열네 살 되던 해였다.
눈물 대신 단련을 선택하라
“앞으로 뭐하고 살래?” 친척 아저씨의 질문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다. 어찌 되었든 살아야 하지 않겠나. 아버지는 요양차 병원에 계셔야 하니 너는 이제부터 분식집에서 일을 해라. 거기서 일하면 너 하나 먹고 자는 건 어찌어찌 해결될 거다.” 그렇게 해서 나는 대구 아세아 극장 옆 미미당 분식집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렵게 하루하루를 버텼다. 아버지의 회복이 자꾸 늦어졌지만 나쁜 소식이 들릴수록 내 안에는 어느새 ‘힘을 기르자’, ‘경제력을 가지자’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열네 살이라는 나이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은 꾀를 피우지 않고, 그저 우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것뿐이었다. 새벽 5시 반에 별과 함께 눈을 뜨고, 밤 11시에 별과 함께 눈을 감았다. 이 시기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여, 평생 동안 자발적으로 4시 이전에 기상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 덕분에 군대생활에서도, 사회생활에서도 하루 일과를 여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미미당 우동에 인생을 녹이다
힘들었던 분식집 생활도 차츰 적응이 되어갔다. 그중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매일 밥 때마다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까짓것 눈칫밥 좀 먹으면 어떤가. 세상에서 가장 참을 수 없는 고통은 배고픔이라는 걸 느껴본 사람만 알 것이다. 미국의 극작가 존 패트릭은 말했다. “고통은 사람을 생각하게 만들고, 생각은 사람을 지혜롭게 만들며, 지혜는 인생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든다.” 돌이켜 보니 고통이 나를 생각하게 만들었고, 고통이 커지자 지혜도 함께 자랐고, 그러자 인생이 훨씬 견딜 만한 것으로 여겨진 것이 아닌가 싶다.
요정에서 익힌 고객 만족
운명의 날은 매번 어떠한 기미도 없이 찾아온다. 분식집 점원으로 있을 때 내게도 운명이 날이 찾아왔다. 하루는 여느 때처럼 씩씩하게 주문을 받고 있는데, 손님으로부터 대뜸 이런 제안을 받았다. “나랑 우리 집에서 살지 않을래?” 미미당 단골손님으로 자주 오시는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 댁에 가면 제가 뭘 해야 하나요?” “딸이 한 명 있는데 학교에 왔다 갔다 할 때 오빠처럼 같이 데리고 다니면 돼. 그리고 시간이 있을 때 나한테 와서 심부름도 조금씩 해주면 충분하다. 월급도 줄 거란다.” “……얼마나 받나요?” “한 달에 3천 원씩이다. 괜찮니?” 미미당 월급보다 나았다.
“전 좋아요. 근데 우선 주인아저씨께 말씀을 드려야 해서요.” “걱정하지 마라. 내가 이미 부탁을 드렸거든.” 나는 망설임 없이 아주머니를 따라나섰다. 아주머니가 데려간 집은 평범한 가정집이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집은 고급 요정 가운데 하나였다. 가게에서 나이가 가장 어린 덕에 나는 안채에 기거하면서, 주인아주머니 딸아이 등하교 때 오누이처럼 함께 다니고 간단한 심부름도 했다. 그렇게 3년 정도를 지냈다. 귀여운 막내 누이 같던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는 어느새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 가정교사가 왔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 나는 열여덟 살이었다. 자연스레 요정 일을 배웠다. 하지만 나는 형들에 비해 키도 작고 힘도 약해서 무거운 물건은 아예 취급할 수가 없었다.
나를 친아들처럼 애틋하게 생각하시던 아주머니가 운동을 적극적으로 권했다. 유도관에 등록을 했다. 저녁에는 요정 일을 도와야 하니, 6시부터 시작하는 새벽반에 등록해 열심히 다녔다. 유도를 하면서부터 힘이 강해졌고, 형들이 하는 일도 거뜬히 해낼 수 있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나자 군에 갈 나이가 되었다. 주인아주머니가 앞으로의 진로를 생각해 기술을 배우라고 권했다. 군대에 아는 분이 있다며 기술병과 쪽을 추천해 주셨다. 한데 기술하사관으로 가려니 시험을 봐야 했다. 과목은 영어와 수학, 신체검사였다. 체력은 자신이 있었지만 학과 시험을 보기가 더럭 겁이 났다.
자기 삶과 화해하라
인생은 누구나에게 공평하게 좋은 조건을 마련해주지 않는다. 자기 기질과 처한 환경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러한 조건에도 포기하지 않고 콤플렉스를 넘어 부지런히 경험하고 익히고 단련하는 태도. 그것이 바로 배움의 정도이자 핵심이다. 다산 정약용은 이를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며, 부지런하면 풀린다.”라는 의미의 삼근계(三勤戒)라 불렀다. 나는 삼근계의 태도로 책과 펜을 다시 잡았다. 공부를 가르쳐줄 선생님도, 학원에 다닐 시간도 없으니 3개월간 책을 통째로 외웠다.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니 내 것이 되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부지런히 익히는 방법으로 기술병과 시험에 통과했다. 중장비 정비 주특기 기술하사관으로 입대했다.
2장 책임 - 배움은 스스로를 책임지는 것이다
배움에 엉뚱한 과목은 없다
군 입대 시험에 합격하면서 인생에 특별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토록 바라던 배움의 길이 열렸다. 국어, 영어, 수학 같은 일반 교과는 아니었지만, 군사학과 중장비 정비 교육을 받았다. 무엇이든 배울 수 있고,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는 군대가 좋았다. 훈련을 마치고 나는 후반기 공병학교로 가서 주특기 교육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다. 그리고 강원도 인제에 위치한 최전방 부대로 발령을 받아, 공병대대 중장비 정비 담당 보직으로 직업군인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성실하게 근무한 지 1년 반 만에 중사로 특진을 했다. 다시 진급교육을 받은 이후 장교 보직인 중장비 정비 과장으로 임명되었다. 제대 때까지 한자리에서만 5년을 근무했다.
자격이 없다면 자격증을 따라
이십대 청춘의 절반을 군대에서 보내면서 나는 한 가지 분명한 깨달음을 얻었다. 인생은 결코 핑크빛이 아니었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이자 갈등과 충격의 연속이었다. 어제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될 수 있는 인생이라는 각축장에서 나는 운명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연장보다 무기를 갖고 싶었다. 그 무기란 다름 아닌 자격증이었다. 세부적인 계획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자격증 공부에 돌입했다. 교재를 구입해 공부를 시작하고 6개월 만에 중장비 정비 3급부터 시험을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능사 시험이라 해도 기초 공부가 부족하니 이해가 잘 될 리 없었다.
하지만 책을 보고 또 보고 하다 보니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공자 말씀에 ‘모르는 책이라도 열 번을 읽으면 문리가 트인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았다. 모르는 것은 아랫사람에게 물어서라도 알아야 하고, 결코 부끄러운 행동이 아니며, 아는 것은 꾸준히 복습하라는 공자의 온고지신(溫故知新) 정신을 교훈삼아 차분히 공부를 해 나갔다. 3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다시 2급 자격증 시험에 도전해 자격증을 취득했다. 연이어 중장비 조종 면허, 불도저, 크레인 그레이더, 지게차, 레미콘 면허증을 취득하면서 여러 자격을 쌓을 수 있었다. 1급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면서 놀라운 정보도 접했다.
1급 자격증을 취득하면, 창원기능대학 시험을 볼 자격이 부여된다고 했다. 하지만 1급 자격증 공부는 계산 공식이 많이 나와 어려움이 많았다. 수학을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으니 계산 문제, 각종 역학 문제를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지만 실망도 포기도 없이 매일 공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필기시험에 합격했고, 이어서 실기시험까지 통과했다.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공부한 결과 1급 정비 자격증을 취득한 것이다. 대학 입시 자격을 손에 거머쥐자 더 이상 군대에서 인정받고 돈 버는 일에 만족할 수 없었다. 목표와 비전을 창원기능대학 진학에 두고, 나는 과감히 전역을 결정했다.
참을 수 없는 사표의 가벼움
나는 육군 중사로 전역한 뒤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해 창원기능대학 시험에 응시했다가 떨어지고 말았다. 늦었지만 공부를 체계적으로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중학교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며 공부했다. 검정고시 중학교 과정부터 시작해서 그해 4월 고입 과정, 8월 대입 과정을 패스하고 12월 창원기능대학 시험에 응시했다. 그리고 드디어 합격 발표날이 되었을 때 합격여부를 알기 위해 시외전화를 걸었다. “합격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결과였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꿈을 이루었다는 설렘 때문인지 수업 시간, 학교 기숙사 생활, 모든 것이 너무 놀랍고 재미있고 신기하기만 했다. 나날이 꿈꾸는 것 같은 세월이었다.
한편 자동차와의 본격적인 인연은 기능대학 졸업반 때 현대자동차 부산서비스 현장 실습을 나가면서 시작되었다. 현장 실습에서 기본적인 근무는 물론, 자동차 보닛 간극 단차 문제 및 연료 탱크 밴드 체결 방법 개선, 대형 엔진 분해용 지그 개선 등 창의적 사고를 발휘해 아이디어 제안을 하면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활동을 발판으로 기능대학 졸업과 동시에 현대자동차서비스에 취업해 대구사업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군대와 학교에서 배우고 익힌 실력을 발휘하면서 직장에서 인정받고 생활에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 나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 다시 공부를 하자. 내 도전을 여기서 접을 수는 없어! 다음 꿈은 법관이 되는 것이야.’ 법 공부를 결심한 나는 회사에 과감하게 사표를 내고 사법고시 패스를 위해 도서관에 다니기 시작했다. 7년의 편지 교제 끝에 아름다운 아내를 얻어 행복한 신혼생활을 시작한 무렵이었다. 하고 싶은 대로 무작정 공부를 시작하고 몇 개월이 흘렀다. 하루는 아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뱃속에 우리 아기가 생겼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기분이 묘하고 기뻤다. 곧 태어날 아기를 생각하며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상하게 공부에 집중이 되지를 않았다. ‘내 꿈을 위해 무작정 공부만 계속할 것인가.’ ‘곧 태어날 아이와 가족은 이제 어떡하나!’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고심하다 보니 공부가 잘 되지 않았다. 아이가 생기면서 전보다 책임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에 제출한 사표도 떠올랐다. 단호하고 명쾌한 결정이었지만, 참을 수 없이 찝찝한 뒤끝을 남겼다.
이 시기 선택과 책임이라는 두 단어가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책임이란 무엇인가. 영국의 성직자 윌리엄 바클레이는 말했다. “책임은 인생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빌려주었는지, 우리가 인생에 얼마나 많은 것을 빚졌는지 깨닫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나에게 책임이란 함께 가는 삶이었다. 주어진 상황과 시간을 받아들이고, 선택 앞에서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나가고자 하는 마음. ‘혼자 나아가는 이기적인 길을 결코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의식이 가정과 세상에 대한 책임의식이었다. 이 생각은 무모한 사표와 법학 공부, 그리고 아내의 임신을 통해 얻은 값진 교훈이었다.
궁핍 선생을 모셔라
빨리 안정된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백방으로 수소문해 알아보던 중에 대학 주임교수님께서 한 가지 정보를 알려주셨다. “갑도군! 기아자동차에서 사람을 뽑고 있으니 취직을 하는 게 어떤가. 모집분야가 연구소 부분이니 자네 적성과 잘 맞을 것 같은데…….” 일단 올라가 부딪쳐 보자는 심정으로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입사지원서를 내고 신체검사와 면접까지 마치고 합격했다. 입사 후 연구소 내 자동차 엔진 실험실에 배치되었다. 나는 기본 근무에 충실하면서 아침에 실시하는 사내 영어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외국어 소양을 키웠다. 또 기술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엔진 연구에 파고드는 동시에, 업무에 관한 각종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다양한 개선 작업을 추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