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마음
조신영 지음 | 비전과리더십
고요한 마음
조신영 지음
비전과리더십 / 2013년 6월 / 284쪽 / 13,000원
프롤로그_ 어울리지 않는 반지
고요한은 휠체어를 밀며 해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가 반짝였다. “선생님, 그 반지는 뭐예요?” “이 반지는 말이야. 평생 한순간도 멈출 줄 모르고… 우리 마음속에서 일렁이는 파도와 관계가 있단다.” “마음의 파도?” “그래. 바로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파도지. 이 반지에는 마음속 파도를 다스리는 비밀이 새겨져 있어.” “그 반지는 어디에서 구하신 거예요?” “아버지에게서 받은 유품이란다. 아버지가 이 반지 안에 비밀의 문장을 새겨 넣으셨지.” 요한이 아이에게 반지를 건넸다. “아! 안쪽에 뭔가 새겨져 있어요! 영어로 적혀 있군요. 음, This… Too… Shall… Pass Away,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맞아요, 선생님?” 이때 지난 늦여름, 지금으로부터 불과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그날 새벽의 일이 요한의 뇌리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1부 하얀 광야를 떠나다
레밍의 운명
요한은 교사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반지의 문장을 소재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오랜 시간과 노력 끝에 초고를 완성했다. 하지만 원고를 검토한 출판사들의 반응은 냉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요한은 색 바랜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카톡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누구지? 이 새벽에….’ 윤수다. <백작님> 백작은 학생들이 붙여 준 별명이다. 순간 위장 아래쪽을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몰려왔다. 요한은 배를 문지르고 문자를 보냈다. <안윤수. 새벽에 무슨 일이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오후 수업을 마친 요한은 교무실로 향했다. 그때였다. “선생님!” 안윤수였다. 윤수는 전교 1, 2등을 다투는 아이다. 교사들은 윤수를 보면 건방지다는 둥 비난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요한은 윤수가 껄끄럽지 않았다. 그런 녀석이 상담을 요구했다. “새벽에 보낸 카톡은 뭐야?” “그냥요. 며칠 전 선생님께서 영어 듣기 숙제로 내주셨던 다큐멘터리요. 그거 이상하게 끌리던 걸요.” “다큐멘터리? 〈하얀 광야〉 말이냐?” “레밍(나그네쥐) 한 마리가 먹이를 찾아 뛰기 시작하면 다른 레밍들도 따라 뛰지요. 셀 수도 없이 많은 레밍의 무리가 영문도 모른 채 미친 듯이 달리다가 결국 절벽 끝에서 줄줄이 바다로 떨어지는 장면이 충격적이었어요.” “선두에 선 레밍은 절벽을 만났을 때 분명 생각했겠지. ‘저 아래는 바다고 더 이상 달릴 수 없다. 먹이를 구하기는커녕 빠져 죽을 뿐이다.’ 그걸 알면서도 ‘에라 모르겠다’ 하고 냅다 뛰어든 거야.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는 습성이 결국 모두를 죽음으로 이끌었던 거다.”
“이렇게 미친 듯 돌아가는 세상에서 나까지 한 마리 레밍이 되어 달려가는 꼴이 우습잖아요.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요.”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 “저희 집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거예요. 아빠는 부사장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죠. 돈 잘 벌어요. 하지만 그자가 얼마나 불안에 떨고 있는지 저는 알아요. 집에만 오면 독한 술을 마시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허리띠로 엄마를 패요. 그러면 엄마는 늘 얼굴만은 때리지 말아 달라고 사정해요. TV에 출연해야 하니까. 엄마는 그자에게 그렇게 얻어맞으면서도 유명인이니까 이혼도 못 해요. 레밍처럼 무작정 달리고 있는 거예요. 선생님, 저는 레밍같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인생을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자신이 없어요.”
더 이상 달리고 싶지 않아
잠에 빠져 있던 요한이 눈부심에 놀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8시 30분. 이미 지각이다. 교감에게 몸이 아파서 조금 늦겠다는 문자 메시지를 넣었다. 아무런 답이 없다. 의외였다. 휴대전화 화면 상단에 카톡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신경이 쓰였지만 지금은 메시지에 일일이 대꾸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허둥지둥 가방을 챙겨 뛰쳐나갔다. 학교 1층 현관에 도달했을 때 경찰차가 요한의 눈에 들어왔다. 평소와 달리 교무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교감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마음 선생이 요한을 보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대체 무슨 일이래요?” 선생은 휴대전화를 꺼내 메시지를 써서 상황을 알려 주었다. <윤수 투신>
갑자기 요한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요한은 불현듯 휴대전화 상단에 표시되었던 노란색 카톡 알림 메시지가 생각나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럴 수가! 새벽 5시 35분 그리고 5시 48분. 윤수의 메시지가 두 차례나 들어와 있었다. 두 번째 메시지에는 <더 이상 달릴 힘이 없어요. 백작님, 이제 그만>이라고 적혀 있었다. 교감이 말했다. “현재 윤수 군은 강남 S병원에서 수술 중입니다. 수술 후 경과를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라고 하네요. 경찰에서 사태 파악을 위해 수사를 나왔으니 윤수의 담임선생님과 고요한 선생님은 잠시 교장실로 와 주세요.”
깨진 거울
요한은 수사관과 마주 앉았다. “어제 윤수와 상담을 하셨다는 게 사실인가요?” “그렇습니다.” “상담 중에 무슨 특이한 내용은 없었나요?” “아이가 무척 불안해 보였던 건 사실이에요. 부모님의 이중적인 모습에 절망감을 느꼈다고 호소했어요.” “그럴 것도 같군요. 조금 전 아이의 친구를 만나고 왔는데, 윤수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대요. 윤수의 수학 과외 선생인데, 윤수가 스토커 수준으로 달려들자 과외를 그만두고 2주 전에 다른 남자 친구와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고 합니다. 친구 녀석의 표현을 빌자면, 윤수는 2주 전부터 완전 패닉 상태였다고 하더군요.”
수사관이 윤수의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갑자기 요한의 귀에서 윙 하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수사관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수사관이 몇 차례 질문을 했지만 요한은 눈의 초점을 잃은 채 아무런 대답도 않고 눈동자만 좌우로 굴렸다. 불길한 예감이 든 수사관이 요한 쪽으로 다가왔다. “고요한 씨, 어디 불편합니까?” 그때였다. “쿵!” 마치 벗어 놓은 옷자락처럼 아무 힘없이 스르르 의자에서 굴러떨어진 요한이 책상 모서리에 머리를 찧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깜짝 놀라나 수사관이 외쳤다. “119, 119를 불러, 빨리!” 이삼 분쯤 지났을까? 구급차가 달려오고 구조대원들이 뛰어 들어왔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얼마나 깊이 잠들었던 것일까? 1시간? 10시간? 아니면 하루? 이틀? ‘여기가 어딜까?’ 요한은 용기를 내어 눈을 떴다. 어슴푸레한 빛이 스며들었다. 요한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생각을 정리했다. ‘경찰서에서 수사관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필름이 끊겼고….’ 팔뚝에는 링거가 꽂혀 있고 수액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은 네가 죽음을 맞이하는 때야.’ 누가 영혼의 맨 밑바닥 깊은 곳에서 외치는 것 같았다. 요한의 내면에서 어떤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네 아빠를 기억해 봐. 갑자기 쓰러지고 나서 췌장암. 그리고 3개월. 너도 바로 그 꼴이 된 거라고.’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담당의는 6개의 침대에 누운 환자들의 특성을 브리핑하고 있었다. 복부에 갑자기 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숨을 깊게 몰아쉬는 그의 등 뒤로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날아와 귀에 꽂혔다. “저 환자 말이야. 젊은 사람이 안됐어.” “아까 말씀하셨던 그 환자요?” “응. 팬크리아틱 캔서(췌장암)야. 너무 늦은 거지.” “얼마나?” “글쎄, 길어야 두 달? 더 빠를 수도 있고.” 요한의 귀에 다시 윙윙거리는 기계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고 거짓말 같은 현실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해지며 나락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얀 광야 vs 초록 광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병원에 남아 사망 선고를 듣고 구질구질한 소리를 들어야 하나? 그건 아니야. 서둘러서 여기를 빠져나가야 해. 아무도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서 삶을 마무리하고 싶어. 무조건 한국을 떠나자.’ 새벽 4시 20분. 스스로 링거의 바늘을 뽑고, 사물함에서 소지품을 대충 챙겨 넣고 낡은 배낭을 둘러멘 것이 새벽 2시 반이었다. 병상 위에 간호사들이 볼 수 있도록 병원비 정산을 위한 카드 번호와 유효 기간을 적어 두고 요한은 그대로 병원을 떠났다.
집에 도착한 후, 인천발 울란바토르행 항공편을 검색했다. 여행 다닐 때는 늘 왕복 항공권을 구입했지만, 왕복이냐 편도냐를 놓고 선택해야 하는 항목이 나타나자 당혹감을 느꼈다. 맨정신으로는 편도를 선택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여행사 항공권 구입 페이지를 꺼 버리고, 한국을 떠난 이후 지저분한 흔적이 남지 않도록 정리 작업을 시작했다. 신용카드의 소소한 채무들을 정산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사직서를 작성했다. 인터넷 팩스 서비스를 이용해 학교 행정실로 사직서를 넣었다. 이제 몽골에 있는 미래밝은 학교 권 교장에게 자신의 일정을 알리는 메일만 작성하면 된다. 미국 유학 시절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권문호 교장. 요한이 몽골에 간다고 하면 만사를 제치고 맨발로 달려 나올 친구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결국 편도 항공권 예약을 마친 후 메일함을 열어 보았다. 읽지 않은 메일 중에 이마음 선생의 편지가 두 통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음과 여러 차례 만나 음악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서로 잘 통한다는 것을 경험했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솔직한 감정을 비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마음의 메일 제목만 바라보던 요한은 결국 클릭하지 않고, <편지 쓰기> 버튼을 눌렀다. 문호에게 비행기 도착 시간을 알리고, 자기 소설의 무대가 되었던 몽골의 돈드고비까지 가는 교통편과 묵을 수 있는 방법을 준비해 주면 고맙겠다는 부탁을 간단히 쓴 메일을 전송했다.
2부 초록 광야에 서다
일이 그렇게 됐군요
권 교장은 공항에서 요한을 환한 웃음으로 맞이했다. 운전기사와 가무잡잡한 소년도 인사를 했다. “갑자기 둔드고비에는 무슨 바람이 분 거야?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야?” “이유는 무슨. 몽골의 초원이 언제나 보고 싶었지. 이제야 겨우 시간을 낼 수 있었네. 친구도 정말 보고 싶었고.” “아무튼 잘 왔어. 자네가 원하는 대로 편하게 묵을 수 있는 곳을 준비해 두었어. 그런데 급해? 울란바토르에 며칠 묵으며 밀린 이야기들 나눠야지?” “나중에. 내일 일찍 출발하고 싶은데, 미안해서 어쩌지?” “여기 둔드고비까지 먼 여행길에 자네의 친구가 될 귀한 친구를 모셔 왔다네.” “안녕하세요? 자르갈이에요.” 소년이 수줍게 손을 내밀며 눈을 반짝였다. 요한도 손을 내밀어 소년과 악수했다. 자르갈의 한국어 구사능력은 또래의 한국 아이들보다 나은 것 같았다.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다. 떠나기 전 요한은 오디오를 판 돈 1,800달러를 봉투에 넣어 <미래밝은 장학금>이라고 써 문호 몰래 식탁에 올려 두었다. 낡은 군용 지프를 개조한 차 안에는 휘발유 냄새가 진동했다. 울란바토르 시내를 벗어나자 나지막한 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1시간도 채 달리지 않아 지프가 덜컹거리며 크게 요동쳤다. 자르갈이 말했다. “이제 시작인걸요. 이런 험한 길을 앞으로 8시간은 더 달려야 해요.” “자르갈, 미래밝은 학교에 다닌 지는 얼마나 됐어?” “처음부터요.” “처음이라니? 그렇다면 학교가 세워질 때부터 다녔다는 거야?”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에 저희 교장 선생님이 오신 거예요. 이곳으로 와서 버림받은 고아들을 위해 학교를 시작하셨죠. 얼마나 헌신적으로 사람들을 섬겼던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선생님을 무척이나 존경했죠.” 잠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한번은 이런 사건이 있었어요. 마을에서 가게를 하는 부부에게 십대 후반의 딸이 있었는데, 딸의 배가 점점 불러오는 거예요. 부모는 아기 아빠가 누구인지 말하라고 다그쳤답니다. 딸은 부모의 분노가 격해지자 학교가 있는 쪽을 가리키며 ‘문호’라는 말을 더듬거렸대요. 그러자 부모는 학교로 뛰어가 난동을 부렸어요. 그런데 문호 선생님은 어땠는지 아세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그저 ‘일이 그렇게 됐군요.’라는 말만을 혼자 되풀이하고 이렇다 할 변명을 하지 않았대요. 마침내 딸이 아기를 낳았고, 가겟집 부부는 아이를 문호 선생에게 보냈어요. 이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퍼지게 되었고, 결국에는 한국과 미국의 후원자들에게까지 전해져 학교를 후원하던 손길들이 모두 끊어졌어요.”
요한은 뜻밖의 이야기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문호 선생님이 어땠는지 아세요? 마을 사람들의 조롱과 야유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이웃을 돌면서 젖동냥으로 아이를 키웠어요. 1년 후에야 가겟집 딸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아이의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부모에게 털어놓았어요. 시장에서 일하는 청년이었답니다.” “그래서?” “딸의 고백을 들은 가겟집 부부는 그길로 문호 선생님을 찾아와 백배사죄하며 용서를 구했어요. 그러나 문호 선생님은 그들에게 싫은 소리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다만 아이를 되돌려 주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대요. ‘일이 그렇게 됐군요.’”
만음(萬音)이 울리는 마음
“선생님, 그 노트는 뭐예요?” “소설이야.” “노트의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는 없어요?” “그래. 들려줄게.” 요한의 이야기가 몽골을 배경으로 한 것을 들은 자르갈은 환호성을 질렀다. “아무르는 칭기즈칸이 지명한 후계자였어. 훗날 몽골의 대제국을 다스리는 대 칸으로 즉위하게 된 인물이지. 아무르칸은 숙적 금과의 치열한 다툼에서 살아남을 뿐 아니라, 칭기즈칸의 영광을 계승하고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단다. 그러던 어느 날 신비로운 꿈을 두 번이나 연달아 꾸게 되었고 세 번째로 같은 꿈을 꾸던 날 새벽, 왕궁의 현자들을 소집했어.” 이야기를 시작한 후 한 시간을 더 달렸을까? 광야 한가운데 자그마한 호수가 나타났다. 기사가 자르갈에게 무어라 말했다.
요한은 이야기를 멈추고 자르갈의 표정을 살폈다. “저기 호숫가에서 잠시 점심을 먹고 가자고 하셔요. 이제 절반 정도 온 것 같아요.” 게르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북적였다. 초원 관광을 나온 서양인 노부부가 요한의 눈길을 끌었다. 요한과 자르갈은 점심을 먹었다. “선생님, 그래서요? 어떻게 되었어요?” “아까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칸의 명령으로 반지를 찾아 나선 현자들이 결국 사막의 수행자를 찾아내는 장면이요!” 자르갈은 마치 자신이 수행자라도 되는 것처럼 다음과 같이 흉내를 내었다. “칸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을 때,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 혼란으로 가득 차고 고통이 절정에 이르고 완전히 절망했을 때, 오직 그때만 이 반지를 빼어 비밀의 문장을 보아야 한다고 꼭 전하시오.” 요한은 이야기의 나머지 중요한 부분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현자들이 사막의 성자에게서 반지를 구해 칸에게 바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금나라의 왕이 연합군을 결성해 기습적으로 쳐들어왔어. 칸은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 싸웠지. 그러나 중과부적이었어. 칸은 대부분의 군사를 잃고, 최대한 먼 곳으로 도망쳐야만 했지. 어느 날 밤, 칸은 수십 킬로 밖에서 들려오는 적들의 말발굽 소리를 들을 수 있었어. 칸은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어. 그 와중에 칸을 호위하며 함께 달아나던 병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지. 그러다가 길을 잘못 든 칸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막다른 절벽과 마주치게 되었어. 그리고 적들이 이제는 불과 몇십 미터 전방에서 움직이고 있는 소리를 듣게 돼. 마침내 칸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생각에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야겠다고 결심해. 1퍼센트라도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거지. 그 순간 칸의 눈에 절벽 아래에서 포효하고 있는 사자의 무리가 들어왔어. 이제야말로 완전한 한계상황이라고 생각한 칸은 마침내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게 되었지. 그 안에는 몽골 고대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단다. ‘This too, shall pass away.’”
그때 게르 안쪽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나는 곳을 쳐다보았다. 노신사 부부의 테이블 쪽에 몽골인들 몇 사람이 종이컵을 집어던지며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할하족이에요.” 노신사는 상대를 진정시키기 위해 더듬거리며 설득하고 있었다. “자르갈, 우리가 도와주자.” 자르갈이 요한에게 한국어로, 요한은 노신사에게 영어로 할하족의 이야기를 건넸다. “저 친구가 몹시 화가 난 이유를 설명하네요. 당신의 부인이 자기를 모욕했다는 거예요. 할하족들은 여성이 남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을 최대의 모욕으로 간주해요. 그런데 당신 부인이 빤히 자신의 눈을 계속 노려보았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