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웃라이어들
김영상 지음 | 북오션
한국의 아웃라이어들
김영상 지음
북오션 / 2013년 3월 / 312쪽 / 14,000원
창조형 리더 길 터주는 신고졸시대
창조적 경영 능력은 학력에서 나오지 않는다: 대졸과 고졸을 편 가를 때, 뿌리박힌 선입견 하나가 있다. 바로 창조적 경영 능력을 발휘하는 일은 대졸, 기술과 엔지니어는 고졸의 몫이라는 이분법이다. 이는 이 땅의 수많은 고졸자들을 좌절케 한다. 입사 후 꽉 막힌 ‘업무 간 이동’ 한계를 절감하고 많은 고졸자들이 나중에 대학 진학을 원하고, 대학졸업 후 퇴사를 한다. 그러나 창조적 경영 능력은 학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고졸사원 중에도 가정 형편이나 여건상 고졸을 택했지만 ‘잠재적 경영인’ 능력을 지닌 이가 있을 수 있다. 능력이 검증된 고졸에겐 회계 및 재무 관리를 맡기는 것은 물론 경영현장으로 이동시켜 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탁월한 고졸에게 창조적 리더의 길을 터주는 것, 이것이 진정 ‘신고졸시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고졸 출신은 무조건 경영 능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은 왜곡된 시각이다. 이런 논리라면 고졸로 10년 이상 BMW코리아 사장을 역임하며 수입차시장에서 굳건한 아성을 지키고 있는 김효준 사장, 역시 고졸로서 오비맥주에 스카우트된 지 1년 7개월 만에 경쟁사의 상품 하이트의 15년 아성을 함락시키며 주류업계에 충격을 던져준 장인수 사장, 대학 가기 싫어 우연히 들른 용산전자상가에서 지금의 온라인 쇼핑몰 개념을 착안하며 한때 돈을 자루로 쓸어 담았다는 김유식 DC인사이드 사장의 성공 스토리를 무엇이라 설명하겠는가.
직관 역시 학력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창조 능력은 학력과 무관하다. 오랫동안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이해진 전 삼성BP화학 사장은 이를 철석같이 믿는다. 그는 창조형 리더에 해당하는 영웅적 사람의 공통점을 세 가지로 꼽는다. 천재는 아니더라도 천재적 감각(직관)이 있는 이,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한 초인적 헌신과 열정이 있는 이,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만한 일도(확고한 신념이 있다면)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이. 이 세 가지를 갖춘 사람이 위기 극복 시대에 창조형 리더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감각과 헌신,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돌파력은 많이 배웠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방끈’이 짧은 이들이 상식을 깨뜨리는 기발함과 카오스(chaos, 혼란)를 획기적으로 정리하는 힘이 더 강했던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고(故) 정주영(호 아산) 현대 창업주(명예회장)가 대표적이다. 아산은 서당교육 3년, 초등교육 3년을 받은 게 학력의 전부다. 그런 그가 오늘날 현대가의 성공 신화를 이뤘다. 학력의 잣대로 본다면, 그가 우리나라 최초로 현대건설공사를 수주하고 국내 기술로 자동차를 만들며 1980년대 한국 경제의 역사를 새로 쓴 통찰력 있는 기업인이라는 게 이상해 보인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아산 10주기를 앞두고 한 세미나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산은 복잡한 상황을 직관적으로 단순화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머릿속의 계산이나 책상의 기획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몸으로 부딪혀 경험을 얻었다. ‘너 해봤어? 하면 된다’며 경험을 쌓았다.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도전 정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속력으로 돌파했다. 그는 대성취를 위해 직관에 경험을 곱하고, 여기에 돌파력까지 곱했다.” 여기서 말하는 직관과 열정, 돌파력은 타고난 재능과 살아오면서의 경륜과 노력이 결합된 결과이다.
규범과 규칙을 거부한 혁신가들의 직관과 상상력: 21세기를 움직인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에게도 학력은 껍데기일 뿐이었다. 아마 스티브 잡스가 대학을 중퇴하지 않고, 울며 겨자 먹기로 대학을 졸업했다면 애플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잡스는 직관을 최고의 창조 덕목으로 여겼다. 잡스가 2005년도 스탠포드 대학에서 한 졸업식 축사는 직관의 위력을 정확히 표현한 명연설로 남아 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한 그의 축사는 명료했다. “다른 사람들의 잡다한 의견이 내는 소음에 내면의 목소리가 익사당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가슴과 직관이 하는 말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여러분이 진정 무엇이 되고자 하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 이외의 나머지는 모두 부차적인 것입니다.” 잡스는 그토록 애지중지한 ‘직관’을 앞세워 세계 IT업계의 대변혁을 주도할 수 있었다. 정주영의 경우처럼 학력과 무관하게 상상력의 나래를 펴는 일에 몰두하며, 상상력이 다가올 때 쉽게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돼 있는 이에게 직관은 자기 몫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입증했다.
학력 파괴를 선도하는 마이스터고의 고민: 얘기를 고졸 채용 쪽으로 돌려 보자. 최근 사회적으로 고졸 채용을 늘려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총아로 부상한 곳이 있다. 바로 마이스터고등학교다. 일(현장)과 학업을 병행하는 마이스터고는 한마디로 ‘기술 장인’을 육성하는 학교다. 신성장동력인 바이오, 반도체, 자동차, 전자, 기계, 로봇, 통신, 조선, 항만 등을 견인할 기술 인력을 키우는 곳이다. 굳이 대학을 가지 않아도 멋진 사회인, 나아가 장인이 되는 길을 열어 주려는 것이다. 적성에 맞는다면 마이스터고는 분명 매력적이다. 마이스터고 학생들은 3년간 기업에서 곧바로 쓸 기술을 어느 정도 익히게 되니 기업으로서도 탐낼 만한 재원들이다. 이 같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대기업은 최근 마이스터고 채용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래서 마이스터고는 학력 파괴 시대의 최전선요원으로 꼽힌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살펴볼 게 있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마이스터고의 취업 연계 시스템은 이상적일까.
최근 한 조사에서 마이스터고 취업자의 80퍼센트가 나중에 대학을 진학하거나 대학을 진학할 예정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장인을 꿈꾸며 취직은 했지만 뭔가 허전함을 느꼈다는 의미다. 독일 예나에 있는 프리드리히실러 대학교에서 유학한 조우호 덕성여대 교수(독어독문학과)는 자신의 전공과는 다르지만 독일이 낳은 ‘마이스터(Meister, 명장)’ 제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마이스터가 독일 경제의 힘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고 했다. 다만 창조적 지식인의 자유로운 이동이란 측면에선 완벽한 제도는 아니라는 의견이다. “흥미로운 것은 독일 마이스터의 배경에는 통치 논리가 작용했다는 점입니다. 무기를 만드는 산업엔 전문화된 기능 인력을 투입하고, 대학 졸업자 등 엘리트는 사회 리더층으로 육성함으로써 양분된 인재 양성을 실행한 것이지요. 처음엔 두 계층 모두 만족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 기능공의 사회 주도층 참여가 좌절되면서 많은 사회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기능인은 영원히 기능인이 돼야 하는 현실, 뭔가 불합리하다는 인식이 퍼졌지요.”
주관적 견해일 수도 있지만, 설득력은 충분해 보인다. 이는 오늘날 한국의 마이스터고, 크게는 실업계 고등학교 취업자의 근원적 고민과 무관치 않다. 우리 사회 역시 기능직과 관리직, 기획업무 간의 이동이 극히 제한돼 있다. 이러니 당장은 실업계고를 찾고, 일단의 취업에 만족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능직 테두리의 한계를 느끼고 뛰쳐나가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깡으로 살았다_ 기능공에서 금호아시아나그룹 임원 오른 윤생진
현실을 이겨내는 깡: 27세에 타이어 기능공으로 입사해 대기업 전무까지 오른 윤생진(62) 선진 D&C 사장. 강남구 역삼동의 한 빌딩 사무실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첫인상은 ‘격식을 싫어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와이셔츠 차림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들어선 그는 단박에 긴장했던 상대방을 무장 해제시켰다. 이런 사람과는 굳이 접대용(?) 인사와 체면치레로 몇 분을 흘려보내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투도 소탈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자신은 ‘깡의 인생’을 살아왔다고, 인생 후반의 열정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축구로 따지면 제 인생은 전반전이 끝났을 뿐입니다. 후반전도 있고 연장전도 있고, 승부차기도 남아 있죠.” 그는 왜 아직도 남아 있다는 ‘열정’을 처음부터 강조할까.
윤 사장은 전남 흑산도에서 태어나 목포공고를 졸업하고 1978년 금호타이어 곡성공장에 기능공으로 입사했다. 무려 일곱 차례나 특전을 거듭해 금호아시아나 그룹 전략경영본부 전무까지 지낸 사람이다.당시로선 불가능했던, 가능공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내로라하는 명문대 졸업 엘리트 사원을 제치고 그룹 전략경영본부 임원에 오른, 그래서 원조 고졸 신화로 평가받는 사람이다. “공돌이로 푸대접 받던 인생이 어느 날 쫙 핀 거죠. 하지만 그냥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전 인생을 ‘깡’으로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 그의 부친은 고기를 잡아 일본에 수출하는 무역상사 사장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시쳇말로 쫄딱 망했다. 상상할 수 없는 가난이 몰려왔다. 빚쟁이들이 들이닥쳤다. 신문팔이, 구두닦이, 공원심부름꾼 등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할 수밖에 없었다. 흑산도중학교는 그래서 2년 늦게 졸업했고, 진로도 목포 공고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군대를 다녀오고 흑산도에서 면사무소 공무원을 할 기회도 있었지만 포기해야 했다. ‘빚쟁이 아들이 무슨 공무원이냐’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졸자도 부장이 될 수 있음을 증명: 1978년 27세의 나이로 금호타이어 곡성공장에 입사했다. 타이어 기능공이었다. 창피하기도 했지만 그런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기능공 32명을 뽑았는데, 1등으로 입사했다. 신입사원 교육을 받을 때 학생장(신입 리더)이었는데, 교육 결과도 1등이었다. 교육이 끝나고 공정 배치를 위해 면담했던 일을 그는 평생 잊지 못한다. 면접관은 그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다. “네, 부장이 되는 겁니다.” 인사과장, 생산부장, 교육부장 등 면접관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윤생진 씨, 생산직은 부장은커녕 주임도 될 수 없어요.” 고졸 기능직이 최고로 오를 수 있는 직책은 반장이었고, 부장은 대졸사원에게만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조롱이 돌아오자 눈물이 핑 돌았다. 공장에는 금세 ‘이상한 신참’이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일은 윤 사장에게 평생 상처로 남아 있다. 물론 좌절은 아니다. 불가능에 도전하게 된 ‘영광의 상처’였다. 그는 이때 오기로 똘똘 뭉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하겠다. 부장이 꼭 되겠다.’ 하고 결의한 것이 이때였다. 집으로 돌아온 그날을 잊지 못한다. 곧바로 집에 있는 거울 밑에 종이를 붙이고 커다란 글씨로 ‘윤생진 부장’이라고 또렷하게 적었다. 성공을 향한 스스로의 절박한 최면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남들과 같아서는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눈에 불을 켜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래서 발견한 길이 ‘제안왕’이다. 당시 회사는 수시로 불량품을 제거하거나 공정률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거나 작업 과정의 군더더기를 없애기 위해 다양한 제안을 받았고, 성과가 우수하면 제안상을 주는 제도가 있었다. 이를 활용했다.
상식을 파괴한 아이디어는 대학 졸업과 무관: 윤생진 사장은 1986년 회사를 발칵 뒤집어 놓은 대형 사고(?)를 친 것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는 당시 6개월 동안 죽어라고 타이어 생산 기계를 연구하고 기계 동작을 분석했다. 결국 타이어 1개를 만드는 데 10초를 단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말이 10초지, 이를 단축함으로써 회사는 1년에 3만 개의 타이어를 더 생산할 수 있었다. “회사 경영층에선 한바탕 난리가 났어요. 윤생진이가 누구냐고.”
돈도 들이지 않고 공장 가동률을 5퍼센트 개선한 일도 있었다. 당시 타이어 완제품 기계에 들어가는 일종의 윤활유는, 거대한 통에 담겨 있는 액체 유약에 분말 혼합가루를 집어넣고 대형 막대기로 저으며 섞는 방식이었다. 미국도 유럽도 그런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 방식은 좀 문제가 있었다. 잘 섞이지 않는 데다 분말이 넘쳐 작업장에 흩날리기도 했다. 어느 날, 아내가 커피를 타주는데 커피와 크림을 넣은 후 끓는 물을 붓는 것이 보였다. 무릎을 탁 쳤다. ‘아, 이 방법이구나.’ 당장 회사로 달려가 유약통 위에 분말을 얹는 대신, 분말을 먼저 채운 후 유약을 넣고 저었다. 분말이 날리지도 않고 섞이는 속도도 크게 개선됐다. 간단한, 그러나 상식을 파괴한 아이디어 하나로 공정이 5퍼센트나 단축됐다.
그가 7차례나 특진해 임원이 된 것은 이 같은 열정에 대한 보상이었다. 훗날 생산직이되, 생산직답지 않은 그를 눈여겨본 고(故) 박성용 금호명예회장의 총애도 작용했다. 하지만 그것도 어찌 보면 눈물겨운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었다. 공장 생산 과정 개선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관리팀으로 발탁, 주임 자리에 올랐다. 고졸은 주임이 될 수 없다는 ‘불문율’을 깬 것이다. 대졸자가 주임이 되기까지 3년이 걸리지만, 윤 사장은 12년이나 걸렸다.
주임을 달긴 했지만 대졸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벽은 높았다. 새 방향을 정했다. 윤생진 사장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국제품질관리대회 진출을 목표로 삼았다. 밤낮 없이 연구에 매달려 진출권을 따내 국가 대표가 되었다. 금호그룹 최초의 일이었다. 일본 도쿄대에서 열린 발표장에서 윤 사장은 한복을 입고 꽹과리를 치며 시선을 끌었다. 언론이 이를 크게 보도하자 청와대에서도 관심을 가졌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 초청으로 윤 사장은 청와대에서 성공 사례를 발표하게 됐다. 대통령과 함께 헤드 테이블에 앉았다는 얘기가 당시 박성용 금호회장 귀에 들어갔는지 그를 불렀다. 일개 직원이 회장님을 만나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회장에게 대통령과 나눈 대화를 그대로 전했다. ‘저는 근로자이지만 내 능력을 인정받고 국가가 알아줄 것입니다. 세계 최고 타이어를 만들겠습니다.’
금호그룹 최초로 현장 주임에서 회장 부속실 발령: 1994년은 그에게는 영광스러운 한 해였다. 회장 부속실로 발령이 난 것이다. 불가능해 보였던 기능공 껍질을 완전히 벗은 것이다. 기쁨이 큰 만큼 겁도 났다. 주위에서 회장실 일은 고졸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일이라고 수군댔다. 시기와 질투도 잇따랐다. 하지만 그에겐 숱한 현장 경험이라는 최대 강점이 있었다. 현장을 모르는 대졸과 달리 현장의 흐름을 생생히 최고경영자에게 전할 수 있었고, 때론 직언도 서슴지 않았다.
금호타이어가 격하게 파업을 일으켰을 때는 노조위원장과의 담판을 통해 파업 흐름을 바꿔 놓기도 했다. “2007년 그룹의 전략경영본부 전무가 됐을 때, 눈물이 나더군요. ‘대졸이 모르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자’고 늘 다짐했는데, 그게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사이코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이디어를 찾느라 현장 곳곳을 뒤지던 일, 노조 간부였음에도 업무 제안을 그치지 않자 따돌림을 당하던 일, 다른 사원의 시기로 48번이나 투서를 받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코끝이 찡해졌다.
그가 전무가 됐을 때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원이 없겠다고. 고졸에서 전무까지 됐으니 더 이상 뭘 바라겠느냐는, 다소 비아냥거리는 소리였음을 그가 모를 리 없다. 그러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회장실 근무는 그에게 일종의 자부심이었다. “16년 일했어요. 아마 회장실에 15년 이상 근무한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저하고 삼성의 이학수 전 부회장뿐일 겁니다.”
그의 꿈은 계속된다. 금호는 나왔지만 선진 D&C를 이끌며 신재생에너지를 연구하고 있다. 말해줄 수는 없지만 놀랄 만한 연구라고 귀띔한다. 예전의 열정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초심은 더 강해졌다. “타이어 생산직 일을 할 때 저는 고졸사원이었지만 제가 하기에 따라 제 능력이 무궁무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이 뭔가에 미치면 정말 학력과 무관하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이는 지금 사는 제2의 인생의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대학 어디 나왔냐’를 묻지 않는 혁신 시대 도래한다: “주변에서 ‘미친놈’이란 소리를 들으며 죽어라 일했고, 그래서 전무도 됐습니다. 그런데 임원이 됐는데도 명문대 출신이 틀린 것을 말하면 모르는 것이 되는데, 제가 틀리면 무식한 것이 되더군요. 서러움 참 많았어요. 이 같은 뿌리 깊은 학력 중시 인식이 있는 한 아마 ‘개천에서 용이 나는’ 물길은 여전히 말라 있을 겁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지식의 혁명시대라는 엄청난 혁신 소용돌이에 놓일 것입니다. ‘너 고향 어디냐’, ‘너 대학 어디 나왔냐’를 묻지 않는 시대가 급속도로 올 것입니다. 앞으로는 ‘너 뭐 잘하냐’, ‘특기가 뭐냐’를 묻는 시대가 온다는 뜻입니다. 생각보다 엄청 빨리 올 수도 있죠.” 그렇기 때문에 학력의 잣대로 평가하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아파하고 좌절하면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열정의 파이를 틈틈이 키우라고 젊은 세대에게 조언한다.